최근 수정 시각 : 2023-06-01 08:08:06

김용창

파일:05_김용창-독립투사.pn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가네야마 다케토(金山武登)
본관 광산 김씨[1]
출생 1926년 8월 3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상두리
(현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상두리)[2]
사망 1945년 4월 3일 (향년 18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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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26년 8월 3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현 화성시 향남읍) 상두리에서 아버지 김언수(金彦洙, 1908. 1. 11 ~ 1945. 4. 13)와 어머니 순천 박씨 박종례(朴鍾禮, 1905. 1. 29 ~ 1985. 10. 3)[3]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고향의 강습소에서 2년 간 공부하다가 1933년 8월 21일 향남공립보통학교(현 향남초등학교)에 진학하여 1937년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그러나 가정형편이 전보다 더 어려워져 고학을 위해 상경하였다.

그는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창신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651-12번지에 거주하면서 1941년 10월부터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4] 사환, 조선총독부 체신국 경성보험관리소 임시직으로 근무하는 한편, 밤에는 덕수공립상업학교(현 덕수고등학교) 야간부에 재학하면서 고학을 했다.

그러던 중 1943년 6월부터 자신이 근무하는 직장에서의 직원 대우에 있어서,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별이 있음을 깨닫고는 이 때부터 한국역사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여 민족의식을 고양하였다.

그 후 1944년 4월 중순에 동대문구 창신정(현 종로구 창신동)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덕수상업학교 학우인 김익설(金益卨)[5]에게, "소기 총독조선과 일본은 같은 조상, 같은 뿌리라고 끊임없이 부르짖고 있는데, 실제로는 조선과 일본 간에 차별이 있다. 무엇이 같은 조상이고 같은 뿌리인가?"라고 말하며 조선 총독의 민족차별정책을 비난하였으며, 4월 말에는 경성부 중구 장곡천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도로 위에서 덕수상업학교 학우 마츠모토 시게루(松本茂)에게 "보험관리소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이 싸움을 하면 일본인 계장은 조선인이 흡연한다고 꾸짖지만, 일본인은 흡연해도 꾸짖지 않고 또 계장은 조선인의 편의는 조금도 봐주지 않는다. 나는 계장과 죽든 살든 싸움을 하고 싶지만, 지금은 어떻게도 할 수 없다. 우리들이 지금 아무리 민족운동에 노력해도 위대한 사람이 나와 지도해주지 않으면 성취할 수 없다. 그 안에서 어떻게든 해야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민족차별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또 5월 중순 같은 장소에서 학우 김익설과 마츠모토 시게루에게, "보험관리소에서는 항상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 싸움이 있는데, 조선인 쪽이 이기고, 또 조선인 쪽에서 싸움을 거는 것을 보면 역시 조선인에게는 여전히 혼이 있고 독립할 생각을 잊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하였고, 비슷한 시기 보험관리소 징수과 사무실에서 동료 키요시 마사키(正木淸)와 잡담 중에 그의 아버지가 조선인이고 어머니는 일본인이기에 그가 곧 어머니의 호적에 입적할 의향을 갖고 있음을 알고는,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아버지가 조선인이기 때문에 너는 조선인이다. 옛날 조선에서는 독립을 도모하려고 만세사건 등의 소동이 있었는데,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실패로 끝났다. 현재에는 지원병제도나 징병제가 실시되어 조선인은 다수가 군인이 되어 무기를 갖기 때문에 조선은 반드시 독립한다. 조선의 역사를 보아도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우수하고 또 현재 미국이나 러시아, 상하이 방면에서는 조선인이 왕성하게 조선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조선이 독립하면 나는 일본인을 쫓아낼 작정이다. 이번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해도 조선에는 하등의 관계가 없고 오히려 일본이 지는 편이 행복이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등 동료들의 민족정신 고취에 노력하였다.

한편, 그해 5월 초 보험관리소 1층 대변소의 판자 벽에 연필로 "반도 2천 6백만 동포여. 자 일어서라! 조선 독립의 때가 왔다. 지금 와서 지원병이니 징병이니 하고 있다. 아아! 가련하도다"라고 써 붙이는 등 민족정신 고취에 힘쓰다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었다.

1944년 12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뒤 1945년 3월 14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출옥했으나, 그해 4월 3일 옥고의 여독으로 순국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고향인 화성시 향납읍 상두리에 흉상이 세워져 있고 매년 6월에는 추모제도 열리고 있다.

[1] 양간공파-판군기감사공파 38세 용(容) 항렬.[2] 인근의 요리와 함께 광산 김씨 집성촌이다.[3] 박봉규(朴奉圭)의 딸이다.[4] 지금의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5] 창씨명 : 가네무라 에키세츠(金村益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