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10 16:25:29

홍사묵

파일:홍사묵.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오하라 시모쿠(大原思默)[1]
본관 남양 홍씨 토홍계[2]
출생 1924년 8월 20일[3]
경기도 수원군 (現 화성시) 팔탄면 하저리 872번지[4]
사망 1953년 9월 27일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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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24년 8월 20일 경기도 수원군 팔탄면(現 화성시 팔탄면) 하저리 872번지에서 아버지 홍래유(洪來裕, 1889. 8. 9 ~ 1945. 10. 29)[5]와 어머니 보성 오씨(寶城 吳氏, 1890. 5. 20 ~ 1953. 9. 11)[6] 사이의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930년 3월 고향 하저리의 한문서당에 입학해 6개월간 천자문을 배웠고, 1932년 4월 1일 팔탄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38년 3월 12회로 졸업했다. 졸업 직후 경성공립직업학교[7] 건축과에 진학해 1940년 3월 졸업하고, 1940년 4월 15일부터 경성부청 공영부(工營部) 영선과(營繕課)에서 임시직인 고원(雇員)으로 근무했다.

그는 평소 『이등공조난기(伊藤公遭難記)』를 읽은 뒤로부터 1909년 10월 26일 있었던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있었고, 현진건의 《무영탑(無影塔)》·김동인의 《젊은 그들》·방인근(方仁根)의 《새벽길》 등 한글 소설을 즐겨 읽으며 스스로 민족의식을 길러 나갔다. 특히 경성부청에서 근무하면서부터 일본인과 조선인 간의 봉급 차이를 실감하면서 일제의 민족 차별과 식민지 치하 정책에 심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이에 1943년 3월부터 1943년 7월 사이 경기도 경성부에서 동료 및 지인들에게 "조선은 식민지여서 일본에 비해 배급미를 적게 준다"고 말하는 등 일제의 조선인 차별에 대해 반감을 드러냈고, "일본인들은 야만인들이므로 죽이겠다", "조선총독[8]암살하고 싶다"고 하는 등 일제와 일본인들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또한 "징병제시기상조인데 (이 제도를 강행하게 되면) 징병된 조선인들이 군대 내에서 반항할 것"이라고 하는 등 조선인에 대한 징병제 실시 등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했으며 "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하면 미국영국은 조선을 독립시켜줄 것"이라며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하고 곧 조선이 독립할 것이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그 밖에도 1943년 3월 공포된 제4차 조선교육령으로 각급학교에서의 조선어 교육 폐지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위와 같은 자신의 생각을 일기에 적어 정리를 하기도 했는데, 1943년 3월 29일자 자신의 일기에 "일본놈들은 약자를 무시하고 강자에게는 그 의견조차 말하지 않는데, (이는) 놈들의 본성이다."라고 적었고, 1943년 5월 20일자 자신의 일기에 "어제 조선신궁에서 우리들 조선인 동포들에 대한 압박정치의 폭로인 징병제도 선서식을 거행하였다. 마음속 깊이 쌓인 조국 애착심을 如何히(이와 같이) 버리고 그들의 부하로 타락해가야 하나?"라고 적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얼마 뒤 총독 정치 및 태평양 전쟁에 대해 일본의 패전을 기대하는 불온한 언동을 하고, 군사에 관하여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943년 10월 30일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고, 결국 1943년 12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육군형법 위반, 해군형법 위반, 조선임시보안령 위반, 보안법 위반, 안녕질서에 대한 건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고, 6.25 전쟁 때 실종되어 1953년 9월 27일에 별세한 것으로 사망신고가 되었다.

200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1943년 경성지방법원 형사 제1심 소송기록[2]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26세 사(思) 항렬.[3] 남양홍씨(토홍계)세보 3권 121쪽에는 1922년 11월 20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4] 이 지번은 1980년 12월 2일 홍사묵의 큰형 홍사칠(洪思七, 1908. 7. 7 ~ 1946. 8. 27)의 차남 홍도선(洪道善, 1936. 1. 19 ~ )에 의해 소유권보존등기가 이뤄졌고, 2021년 12월 17일 홍도선의 장남 홍승인(洪承寅, 1962. 12. 17 ~ )에게로 소유권이 이전되어 현재에 이른다.[5] 창씨명 : 오하라 라이유(大原來裕).1943년 경성지방법원 형사 제1심 소송기록[6] 오석현(吳奭鉉)의 딸이다.[7] 현재의 서울과학기술대학교.[8] 당시 조선총독은 제8대 고이소 구니아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