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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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桂貞植
1904년 10월 26일[1] ~ 1974년 10월 3일

1. 소개2. 생애3. 친일반민족행위자 논란

1. 소개

한국바이올린 연주자·지휘자이자 작곡가. 본관은 수안(遂安)[2].

2. 생애

1904년 10월 26일 평안남도 평양부[3]에서 개신교 목사인 아버지 계택선(桂澤宣)과 어머니 송행선(宋行善)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숭실전문학교에서 처음 바이올린을 접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동양음악학교(東洋音樂學校)를 졸업했다. 다시 독일로 가서 뷔르츠부르크 음악대학을 졸업하고 스위스 바젤 대학교에서 「한국고전음악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교수직을 역임하고, 고려심포니 및 서울심포니 창립·지휘하였다.

1945년 광복 직후 우익 계열 음악인의 대표격인 현제명이 고려교향악단을 창설하자 참여하여 창립음악회의 지휘자를 맡았다. 고려교향악단은 군정장관 아서 러치가 명예회장을 맡았을 만큼 미군정과 가까운 관계였다. 1945년 이영세를 위원장으로 여러 계열이 연합해 조직한 조선음악가협회 이사를 지냈고, 1944년동성고등학교 교가를 작곡했다.

1946년에는 대한연주가협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고려교향악단에서는 1946년 탈퇴한 뒤 김생려 등 탈퇴파들과 함께 서울관현악단(서울교향악단의 전신)을 조직하여 미군부대를 근거로 활동을 했다.

1956년 7월 24일 한국음악단체연합회(韓國音樂團體聯合會) 창립 대연주회 때 출연하였다. 1957년 설립한 아카데미3중주단의 멤버였다. 1957년 5월 김종명(첼로)·김동성(피아노)과 함께 아카데미3중주단의 창단연주회를 개최했으며, 5월 17일 아카데미3중주단의 제3회 연주회 때 출연했고, 5월 18일 아카데미3중주단의 첫 연주회 때 출연하였다.

1961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살았으며, 1974년 10월 3일 뉴욕 주 앰허스트 시의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3. 친일반민족행위자 논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42년 조선총독부가 후원해 열린 조선음악경연대회에 양금부 심사위원으로 참가했고, 대화숙 안에 설치된 경성음악연구원에서 강의하는 등 친일 행적이 있다. 1941년 총독부가 지휘해 결성된 친일단체인 조선음악협회에도 이사로 참여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1] 음력 9월 18일.[2] 평양파 22세.[3]북한 평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