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아다치 치쥰(安達致準) |
자 | 문오(文五) |
본관 | 순흥 안씨[1] |
출생 | 1913년 12월 15일[2] |
경상북도 하양군 낙산면 봉동 (현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봉회리)[3] | |
사망 | 1973년 12월 23일[4] |
종교 | 기독교 (개신교) |
묘소 |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신상리 |
상훈 | 건국포장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안치대는 그의 6촌 재종제(再從弟)이다.
2. 생애
1918년 8월 7일 경상북도 하양군 낙산면 봉동(현 경산시 진량읍 봉회리)에서 아버지 안상호(安相鎬, 1890. 3. 18 ~ 1960. 3. 30)와 어머니 단양 우씨 우지산(禹旨山, 1893. 1. 15 ~ 1960. 10. 3)[5] 사이의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조선예수교장로회는 일제의 탄압에 끝내 굴복해 1938년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수용했고, 전국 각지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를 따라 신사참배를 해야 했다.
이에 안치준은 집사로 있으면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측의 결정을 거부하고 평사교회·상림교회·봉회교회 소속의 목사와 신도들과 일치 단결하여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라는 출애굽기 20장 3절의 성경 구절을 앞세우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이들 교회를 폐쇄시키기 위해 온갖 탄압을 자행하였다. 그럼에도 김선암 등을 비롯한 신도들이 굴복하지 않자, 일제는 급기야 교회 강대상 안에 '조천기도회 강령'이란 제목 하에 조선독립만세·일본타도·영미만세·비밀엄수 등의 글을 써놓은 뒤 이러한 문구가 이들 교회의 신도들이 쓴 것으로 몰아붙이는 간교한 계책을 동원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구실로 삼아 1943년 11월 17일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신도들을 체포했고, 안치준 또한 이때 체포되었다.
그는 가혹한 고문을 당하며 약 1년간 옥고를 치렀고, 1944년 11월 11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혐의없음으로 불기소처분을 선고받고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73년 12월 23일 별세했다.
199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