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0-02 14:22:30

최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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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甲錫
1929년 3월 10일~2016년 11월 8일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대한민국군인으로, 한국에선 진짜 손에 꼽을정도인 사병 출신 장성 중의 소장 진급자 중 하나이다.

군사정권 이래 육사 텃세에 왕따만 당하던 인물이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유능하면서 원칙과 소신에도 충실했던 참군인.

2. 생애

1929년 충남 부여 출생으로 1947년조선경비대이등병으로 입대했다. 사병으로 일등상사까지 진급한 뒤에 1950년현지임관으로 소위가 되었다. 중령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근무했고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다.그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이 포병대대장(소령)으로 근무하던 1955년에 임관한 육군사관학교 11기들이 그보다 먼저 1973년에 준장을 달았다고 한다. 그는 1974년에 준장으로 진급했고 1978년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제8보병사단장을 역임하고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1]을 마지막으로 83년 10월 31일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한국 전쟁 발발 당시 재무 담당관으로서 상사로 제6보병사단에서 복무하다가 소위로 현지임관하며 포병으로 전과 했다. 한국전쟁시 포병 관련 전문가로써 군 내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60년대 후반, 육군포병연대장으로써 야전에서 근무하던 도중 대간첩작전을 수행한 특이한 이력이 있다. 베트남전에서는 주월 한국군 사령부의 인사참모로 지내면서 파병 군인들의 복지와 파월 한국군의 군수와 인사 업무를 수행 했다. 중령,대령시절 육군본부에서 인사참모부의 중견 실무자로 근무하다가 당시 5.16 군부 세력의 진급 문제를 두고 대립하기도 했다. 아닌게 아니라 현지임관 출신으로서 실전경험과 근무실적까지 흠잡을데가 없는 이력을 갖고도, 군사정권이 비육사 출신을 차별했었고 또 유능하면서도 시대에 맞지 않게 사바사바 자체를 안해버리는 최갑석 장군의 개인 성향을 눈엣가시로 여겼는지 항상 진급에서 육사출신들에게 밀렸다고 한다.

육군 항공감[2]으로써 육군항공에 큰 기여를 했으며 포병과 같은 전투병과 뿐만 아니라 비전투병과인 인사, 경리, 감찰, 군수 등 여러 방면에 있어서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원칙과 소신을 지킨 군인이라 평가 받는다.[...] 군 복무 시절 최장기 근속 보유자, 최다 계급 진출자, 전 신분을 거친 최다 신분 경력자, 보병, 포병, 경리, 감찰, 항공 등 최다 병과 근무자, 28개 부대를 전속 복무한 최다 부대 전속자, 여순사건에서 베트남전 참전까지 최다 전역(戰域) 참가자, 최다 아이디어 창안연구 보고자 등 살아있는 한국 국군사이자 산 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서 '장군이 된 이등병'이 있으며 제12보병사단에는 그의 이름을 딴 '최갑석 대대'가 있다.

또한 여느 군인이나 공무원과는 달리 예전엔 관행화되어있던 군납비리까지 철저하게 멀리할 정도로 원칙과 소신을 준수한 인물이었다. 준장으로 진급하고 받은 2차보직이(1차보직은 육군본부 인사근무처장) 야전부대 지휘관이나 참모가 아니라 육군의 비전투 군납을 관리하는 장인 원호관리단장이었는데, 그러니까 적당히 해먹고 은퇴하던지 성질대로 하다 현지에서 미운털 박히고 물러나던지 하란 이야기. 그러나 최갑석 장군은 여느 군인들과 달리 주변 상인들의 뇌물공세를 단호하게 뿌리쳤으며, 어느 날 갑자기 PX를 점검[4]하고 군납품 생산지 현황을 점검하자[5] 아주 분노가 들끓었다고 한다. 최갑석 본인도 병사 출신 장성인지라 이걸 먹고 쓰는 병사들이 어떨지 생각하니 그렇다고.. 결국 물품 하나하나의 규격과 청결도를 본인이 직접 지정하고 확인할 정도였다고 한다.[6] 사단장 임기를 마친 후에는 보통 사실상 소장전역대기자가 지내는 한직인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을 지내고 예편하였다.[7]

예편 후에는 교통부 장관 차규헌 전 2군 사령관의 배려로 전국고속버스운송사업조합 상임 이사장으로 취임하여[8] 2~4대 이사장을 역임한다. 이사장 재임 당시 고속버스 예매 시스템의 전산화와 고속버스 터미널 시설의 개수 및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예편이후 2016년 11월 8일 그는 향년 8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3. 여담

육군12사단에는 그의 이름을 딴 최갑석 대대가 있다. 군에서의 최갑석 장군이 가지는 의미를 알 수 있는 부분.

군인이라는 딱딱한 이미지와는 달리 가무와 시짓기를 즐겼다.
하모니카를 잘 불었고 부인인 황정남 여사와 오카리나를 함께 부르기를 좋아했다고.
젊은 시절 근무를 마치고 귀가하면 자녀들과 함께 기타를 치고 노래하며 하모니카를 불렀다고 회상하는 등 음악을 좋아 하였다.

[1] 그의 회고록을 보면 2군 부사령관으로 취임했을 때 당시 차규헌(육사 8기. 하나회 후원자. 1929~2011) 2군 사령관이 깍듯하게 영접하였다 한다. "부사령관 각하, 우리 함께 서로 이해하면서 경험과 지식을 2군사에 모두 남기고 떠납시다"라는 인상적인 환영사도 했다 한다.[2] 당시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이 부탁해서 맡았다 한다.[...] 만 실상은 윗선에서 흠잡을데 없이 전투임무에 능하고 실전경험까지 풍부한 병 출신 비주류를 어떻게든 구실을 붙여 일찍 전역시키려고 해본 적이 없거나 못할 것 같은 여러 보직에 돌린 것에 가깝다. 근데도 그걸 모조리 잘 해내고 진급했으니 군인으로선 엄청난 먼치킨인거다.[4] PX 술이 담긴 통을 열었더니 헌 농구화 짝이 나오고, 살이 벗겨진 죽은 쥐가 나왔다 한다. 그리고 미군이 쓰다 버린 드럼통에 술을 운반하는 것을 알게 된 최 장군은 분노했다고 전해진다.[5]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더러운 변소 옆에서 풀빵을 굽고 있었다한다.[6] 원래 원호관리단장은 준장 끝물에서 상인들과 적당히 어울리면서 한 재산 해먹고 전역하는 한직인데 최갑석 장군은 이 원호관리 임무까지 완벽하게 수행하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운영상태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공로로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야전지휘관인 8사단장을 맡았다. 당시 이세호 육군참모총장이 그를 칭찬하였다.[7] 당시 2군사령관은 아래에 나오는 차규헌이다. 12.12의 그 차규헌 맞다. 거의 같은 시기에 예편했고, 2년 정도 같이 일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부사령관 각하, 우리 함께 서로 이해하면서 경험과 지식을 2군사에 모두 남기고 떠납시다”라고 인상적인 환영의 말을 했다고 한다.[8] 최갑석 장군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감찰을 담당하고 군 내부에서도 비리와 타협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던 자신을 예편 이후에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고. 당시 기업들과 공조직에서는 횡령, 배임, 뇌물수수가 관례로 여겨졌다는 점을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