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ruby(東, ruby=ひがし)][ruby(本, ruby=ほん)][ruby(願, ruby=がん)][ruby(寺, ruby=じ)] / Higashi Honganji / 동본원사일본 교토부 교토시 시모교구에 위치한 사찰이며, 일본 정토진종(浄土真宗) 진종오타니파(真宗大谷派)의 본산이다.
교토역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이다. 정식명칭은 진종본묘(真宗本廟, しんしゅうほんびょう)이다.
서쪽에 위치한 니시혼간지에 대항해 세워진 절로 혼간지 켄뇨의 두 아들 혼간지 쿄뇨와 혼간지 쥰뇨가 서로 불화하여 양분된 것이 이 절이 세워진 계기이다. 온건파였던 쥰뇨가 겐뇨의 뒤를 이어 혼간지 법주를 승계한 것에 맞서 쿄뇨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하였고, 젊은 시절 혼간지가 일으킨 잇코잇키로 고생을 했던 이에야스가 혼간지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히가시혼간지의 건설을 지원해주었다는 설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통설이다.
그러나 히가시혼간지 측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부터 쿄뇨파와 쥰뇨파는 실질적으로 갈라진 상태였고, 도쿠가와가 히가시혼간지 건설을 지원해준 것은 두 파벌의 분리를 정식으로 승인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일찌감치 분리되었기 때문에 양자간 불필요한 분쟁을 줄일 수 있었다고 혼간지 약체화설에 이견을 제시하는 의견도 있다.
1879년, 일본을 정탐하려는 목적으로 밀항한 이동인이 이듬해 히가시혼간지에서 일본 불교에 입문했다. 그러나 길게 머무르지는 않고 아사쿠사의 히가시혼간지 별원으로 옮겨갔고, 이후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했다. 이동인은 공식적으로 이 곳에서 정식 승적에 올랐고[1], 이후에 창씨개명[2]을 한 이중첩자로 추정된다.
2. 건축
교토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축물을 가지고 있는 곳으로, 큰 정문과 아미다도(阿彌陀堂) 그리고 거대한 고에이도(御影堂)가 유명하다. 그러나 니시혼간지보다는 나중에 세워져서 역사나 권위는 꽤 낮다. 니시혼간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반면, 히가시혼간지는 이에 들지 못했다.화재로 소실되고 1895년에 재건한 고에이도는 높이 38 m, 측면 58 m, 정면 76 m라는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면적은 도다이지의 다이부츠덴을 능가한다.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이쪽을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로 치기도 한다. 다만 외관의 거대함에 비해 내부는 단 1층으로, 넓다는 느낌만 있을 뿐이다. 아무튼 일본 최대의 전통 건축물이지만 건축학적인 평가는 그리 높지 않다. 메이지유신 이후 지어진 건물이라 근대건축에 속하기 때문. 오히려 이 건물의 정면에 있는 고에이도 문이 더 유명하다.
고에이도의 단면도와 지붕 내부 |
실내는 단층으로 구성되었으며, 나머지 부분은 순전히 지붕을 지탱하기 위한 구조가 들어가는 부분이기에 지붕 밑은 개판을 깔아서 외부로 노출되지 않는다.
지랫대 역할을 하며 처마를 잡아주는 하네기라고 불리는 엄청난 크기의 부재와 그것이 연결된 거대한 나무 부재들이 큰 받침대가 되고, 그 위로 작은 부재들을 짜서 만들어진 정글짐 형태의 구조가 지붕을 지탱한다고 보면 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지붕을 지탱하는 기둥의 크기와 수를 줄이고 자유로운 배치가 가능해져서 면적이 넓은 실내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3]
하지만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네기가 대량식 구조의 기둥 이상으로 굵어져야 하며, 그 거대한 지붕의 구조는 천장 안에서 노출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 때문에 높은 공간을 조성하기 어렵다는 것이 단점이다. 덕분에 상당히 높은 건물임에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단층으로 구성되었고, 지붕 안은 거대한 죽은 공간이 되었다.
3. 일본 건축의 지붕 구조법
비가 자주 내리는 편이라서[4] 야외 행사가 불편했던[5] 일본에서는 예불활동을 편하게 하려고 법당 앞에도 별도의 건물을 지었는데, 결국 두 건물은 하나로 합쳐졌다. 이렇게 별도의 건물이 합쳐진 탓에 지금도 일본의 불당은 내진과 외진으로 구조가 나뉜다. (아래 그림)그리고 ^^형태가 되어버린 지붕의 방수를 위해서 양 건물의 지붕 사이에 헛지붕을 올렸는데, 헛지붕 안에는 사람이 들어갈 필요가 없으므로 작은 목재를 촘촘하게 배치시켜 정글짐 형식을 만들어 지붕을 지탱하게 하고, 그만큼 무게를 줄이기 위해 기와 밑에 들어가는 흙을 뺐다. 얇은 목재들로 가볍게 지붕을 구축하는 수법은 아마도 호류지 금당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흙이 빠지고 헛지붕을 세워도 기울기가 낮다는 점 때문에 물이 새게 되었고, 결국 지붕 아래에다가 천장 하나를 더 까는 것이 필수적으로 변했고, 그 안에 얇은 기둥을 세워 지붕의 높이를 더 높여서 이러한 단점을 해결하게 된다. 일본식 건축에서 지붕의 기울기가 매우 급한 것은 이러한 점에 기원한다. 이러한 구조를 가지는 지붕을 노야네(野屋根)라고 한다.
이후 자연스럽게 공포(栱包 / 貢包)의 일종이었던 하앙(오다루키)[6]가 지붕과 천장 사이로도 들어오게 되었는데, 눈에 보이지 않기에 다듬을 필요가 없어져서 더 커다란 크기로 변하게 되었다. 이 커다랗게 변하고, 지붕 안으로 들어간 하앙은 하네기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당연히 더 커진 만큼 더 큰 하중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크고 단단한 나무는 휘거나 부러지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한옥의 들보 중에서도 기둥이 없는 마루에 있는 대들보는 훨씬 굵고 크다.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크고 무거웠던 하네기는 기둥 윗부분에만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13세기 송나라를 통해 누키라는 횡으로 설치되는 부재를 이용한 방식이 수입되었는데, 이는 기둥들이 넘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기 때문에 지진이 많은 일본에서는 곧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시켜 보강하는 부재가 도입되자, 기둥과 기둥 사이의 부재 자체가 좀 더 많은 무게를 버틸 수 있게 되었고, 하네기를 기둥 위에만 설치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이를 이용하여 하내기를 외벽 위에 최대한 많이 설치하여 지붕의 하중을 외벽 쪽으로 모아줄 수 있게 되어, 내측 기둥을 가늘게 하고 자유롭게 배치하였다.
무로마치 시대 이후로는 지붕 안쪽의 얇은 기둥에도 누키가 도입되어 지붕 자체가 자체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구조가 되어[7] 지붕을 지탱할 실내의 기둥이 더 얇아지게 되며, 기둥의 배치도 더 자유로워지며 완성이 되었다.
이런 방식은 외각의 기둥으로 힘을 분산시켜줄 수 있기 때문에, 실내의 기둥을 얇게 만들어 넓은 면적의 실내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하네기식의 구조는 지붕 밑은 대량식으로, 지붕 위는 하네기로 지탱하게 한 후 그 위를 천두식으로 구성시켜 각각의 장점을 잘 조압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량식에 비하면 높은 공간이나 채광을 포기하는 대신 넓은 실내공간을 얻을 수 있음이 장점이다.
15세기 무렵에 이러한 방식이 완성되었고, 16세기 이후 치온인 미에이도(知恩院 御影堂), 엔랴쿠지 콘폰츄도(延曆寺 根本中堂), 니조 성 어전(二條城 御殿)같은 거대 건축물 대다수가 이러한 방식으로 지어지게 된다.
4. 일본식 지붕 구조법의 특성
이러한 지붕 구조 방식은 일본의 자연적인 환경에 기반해서 발전된 것으로, 강수량이 많은 일본에서 물매가 급한 지붕을 사용하여 비가 새는 것을 줄임과 동시에 지붕의 하중을 하네기라는 부재로 인하여 그 아래의 공간을 넓게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위에서 언급했듯이 상층으로의 확장이 제한되므로 채광 면에서 불리한 어두침침한 공간이 될 수밖에 없는 단점은 있다.물론 대량식 건축으로도 거대 자재 공급만 원활하다면 히가시혼간지처럼 큰 건물도 지을 수는 있다. 그 증거로 일본의 산림이 매우 우거졌던 8세기에 지어진 초창기 도다이지 대불전은 면적 자체가 현 히가시혼간지 고에이도와 맞먹었으며, 높이는 50m에 달했다.[8] 문제는 어디까지나 거대 목재가 원활하게 공급되어야만 지을 수 있다는 비효율성이 발목을 잡는데, 아무리 삼림이 무성한 일본이라도 지름이 2m에 높이가 30~40 m에 달하는 나무가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고 환경파괴가 가속화된 센고쿠시대와 에도시대 때는 거목을 구하기가 어려워져 3차 중건된 대불전은 크기를 2/3으로 줄이고 기둥을 가드다란 자재를 철띠로 묶어 쓸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일본식 구조의 장점 중 하나는, 동일한 면적의 건축물을 지었을 때 대량식 구조보다 훨씬 작은 자재로 높이만 어느 정도 포기하면, 기둥 배치를 훨씬 자유럽게 하여 내부공간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이다.[9] 이 덕분에 일본의 절과 신사 건물들은 수백 명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내부공간이 여유롭다. 특히 정면 대 측면 비율도 높은 건물을 지을 때 빛을 발휘하는 것이, 대량식은 그 구조상 측면을 길게 할수록 안쪽의 대들보 및 기둥이 높아져야 물매가 유지되기 때문에 더 굵고 큰 목재가 필요해서 목재 수급에 어려움을 겪지만, 일본식 구조는 하네기가 바깥쪽으로 중량을 모아주기 때문에 중앙에 굵은 기둥이 필요가 없어 훨씬 수월하다.
더 중요한 것은 대형 건축물을 지을 때 대량식보다 일본 고유방식이 훨씬 더 안정성 있게 지을 수 있다는 점이다. 대량식은 구조상 별다른 구속재가 없기에 지붕에 어느 정도 무게가 있어야만 건물의 안정성이 유지될 수 있다. 그런데 무게는 부피의 제곱근에 비례한다는 물리적 사실 때문에 지붕이 커질수록 중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리하여 커지면 커질수록 중량이 필요한 무게를 초과하여 건물 안정성에 심각한 무리를 준다. 아닌 게 아니라 18세기 초반 3차 재건된 도다이지 대불전이 바로 이 문제로 대들보가 주저앉고 기둥이 휘어지는 문제로 골머리를 썩다가 메이지 시대 때 아예 지붕 내부 전체를 철제 트러스 구조로 교체한 후에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일본 방식은 지붕 자체에 구조적 내구성이 있기 때문에 지붕이 무거울 필요가 없다.
단, 일본이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 근세에 이르기까지 거대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던 이유엔 기후와 수종도 관여하였다. 일본은 강수량이 많고 온도가 높아 나무 자라기에 좋고 일본 고유의 수종인 삼나무(杉)가 빨리 굵고 높게 자라는 수종이니 상대적으로 대형 건축물 짓기에 유리하다는 점도 크게 기여하였다. 삼국시대 건축에 강한 영향을 받았던 호류지 등 고대부터 일본 건축은 히노끼로 된 평행모 서까래 방식을 사용하는 등 목재의 활용에 있어서 풍족함을 최대한 누리는 방식을 고수해왔다. 물론 일본의 삼림 환경도 계속되는 문명의 발전과 화재 등으로 피해를 입긴 했지만, 워낙 일본의 삼림 자원은 풍부했기 때문에 중세에도 토다이지와 호코지와 같은 커다란 건축물을 가진 절을 거듭 중건했고, 현대에도 히메지 성의 거대한 심주로 가공될 나무를 여럿 찾아낼 수 있었다. 이는 원래 삼림 자원의 질과 양에서 일본보다 열악한 한국이나, 워낙 인구가 많아 삼림자원이 고갈되기 쉽고 삼림 자원이 풍부한 기후대의 지역이 인구밀집지역과 굉장히 먼 중국의 입장과 비교하였을 때 일본의 목조건축이 큰 규모로 지어질 수 있었던 이유가 된다.
특히 한국에서는 온돌이 보급되어 삼림자원 황폐화가 가속화되었고,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 아까시나무를 통해 빠르게 삼림을 복구할 필요성이 재기되었을 정도다.[10] 삼림 자원의 고갈로 인해서 큰 건물을 만들기 어려웠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는 건물이 있는데, 바로 경복궁 경회루다. 동북아 목조 건축물에 있어서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거대 목재가 필요한 숙명이 바로 추녀인데, 처마 지붕의 모서리에 들어가는 목재는 받쳐줄 지점이 없기 때문에 나눠서 이어 붙이는 식의 편법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회루는 추녀의 기둥을 줄이기 위해서 비정상적으로 합각면[11]을 크게 잡았을 정도였으며, 근대의 조선이 경회루 추녀에 쓰일 만한 목재를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경복궁 근정전 역시 강성이 떨어지는 전나무[12]를 기둥으로 쓸 수밖에 없었던 것도 모자라 벼락 맞아 갈라진 목재를 대들보로 사용하는 등 목재 부족에 시달린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건물 네 모서리에서 근정전의 1층과 2층을 관통하여 지붕 무게를 견디는 가장 굵고 중요한 4개 귀고주 중 남서쪽 귀고주 하나에만 굵기를 만족하는 소나무를 찾을 수 있었고, 이를 제외한 나머지 3개 귀고주는 모두 전나무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이 3개 귀고주는 불과 100년 남짓한 시간동안 모두 파손되어버릴 정도였다.[13] 이런 문제는 현대에도 해결되지 않아 1990년대 대대적인 보수작업에 들어갔을 때 해외에서 목재를 수입해 대체해야 했다. 지배층도 이러하니 민간 쪽은 사정이 더 열악할 수밖에.[14]
물론 황룡사같은 누각을 쌓는 방식은 목재를 겹쳐서 쓰는 적층식 방식을 쓰면 비교적 작은 나무들을 다수 확보해서라도 큰 건축물을 지을 수 있지만,[15] 내부 공간이 줄어드는 단점이 있다.[16] 특히 중국과 한국의 건축에서는 목재의 크기와 질에도 위계질서가 있다. 그래서 명나라 영락제 무덤인 장릉의 정전이나 자금성 바로 옆 태묘를 격에 맞게 건설하기 위해 수천 km 떨어진 운남성까지 수십만 명을 투입해 녹나무 거목을 가져왔다.
또한 한국과 중국의 법규 또한 큰 건축물이 등장하는 것을 제한하는 요소였다. 유교적 왕도정치가 강조된 이후로는 이전 시대에 비해서 궁궐의 정전 크기를 작게 만들었고, 그보다 큰 건물을 짓지 못하게 제한했던 점도 크다. 특히 조선의 경우에는 민간 건물의 칸 수를 매우 엄하게 제한했다. 물론 그러한 법규가 없었더라도 삼림 자원이 한정되어 있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17] 또한 한국의 주요한 거대 건축물들은 종교 시설들이었는데, 조선이 건국되면서 숭유억불 정책을 펼쳐 승려 자체가 천민으로 전락하여 사찰을 유지 재건할 여력이 없어졌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내려온 거찰들이 명맥이 끊어진 것도 크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식 구조는 지붕 쪽이 이리저리 얽힌 나무 부재 이외의 공간은 모두 텅 비어 있다는 뜻으로, 이로 인해 지붕 쪽으로 단열이 거의 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다. 일본 건축은 초점을 여름에 맞추고 겨울은 낮은 실내 온도를 감수하나 한국의 건축은 겨울의 방한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므로 이러한 일본식 구조와 비슷한 지붕 구조를 채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5. 기타
위 사진은 니시혼간지의 고에이도의 사진이나 히가시혼간지의 고에이도와 형태나 분위기는 거의 같다. 히가시혼간지는 건물 내부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으나 니시혼간지는 가능하다. 물론 양쪽 다 웬만한 시기에는 외진만 볼 수 있을 뿐으로, 내진에 들어가는 것은 힘들다.
내부는 법당으로, 화려한 실내장식과 줄지어 매달린 등, 창호사이로 들어오는 빛의 조화가 아름답다.
니시혼간지에도 아미다도와 고에이도가 있으니 주의.
절을 건축하기 위한 큰 목재를 나르기 위해서 만들었던 여신도들이 머리카락을 잘라 만든 밧줄을 볼 수 있다.
입장료가 없다.
참고로 도쿄의 아사쿠사에도 히가시혼간지란 절이 있다. 이 절은 원래 교토 히가시혼간지의 도쿄 분사격인 위치의 절이었으나, 20세기 초반 신슈오타니파 내부에서 법주의 권력집중에 대해 보수파와 개혁파가 대립하는 과정에서 소수세력이었던 보수파가 신슈오타니파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설립한 '정토진종 히가시혼간지파(浄土真宗東本願寺派)'의 본산이 되어 현재는 교토 히가시혼간지와 별개의 사찰이 되었다. 이 도쿄의 히가시혼간지는 8~11차 조선 통신사의 숙소로 사용된 곳이기도 하다.
6. 외부 링크
- 히가시혼간지 홈페이지 (일본어)
[1] 한국 불교에서는 정식으로 법계를 받은 사실이 보이지 않는다.[2] 알려진 바로는 창씨개명 1호.[3] 하네기는 동북아시아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던 하앙이라는 방식의 지붕 무게를 공포로 전달해주는 부재가 발전한 것이다. 하네기나 하앙이나 모두 처마의 무게를 지렛대 원리로 벽 쪽으로 모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하앙이 거대화되어 하네기로 변한 것은 일본 건축의 고유한 구조 중 하나로, 중국 건축과 한국 건축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대량식 구조의 단점인 넓은 공간에 비례해서 부재도 커야 한다는 점이나 천두식의 단점인 많은 기둥의 수가 필요한 점을 극복하게 되었다.[4] 일본은 봄, 가을에도 한국보다 날씨가 꽤 변덕스럽다.[5] 반대로 한국과 중국에서는 장마철을 제외하곤 기본적으로 맑은 날씨가 흔했기 때문에 야외 행사를 하기가 매우 용이했다. 한국의 고사성어 중 야단법석이 바로 절 야외에서 벌이던 행사에서 유래했다.[6] 지랫대 원리로 처마와 지붕의 하중을 외벽쪽으로 모아주는 것이 가능해진다.[7] 정글짐 모양을 연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8] 이 당시 대불전은 지름이 2 m에 높이만 30 m에 달하는 거대 기둥을 80여 개나 써서 지어졌다.[9] 위의 하네기 사진을 보고 의아심을 품을수도 있겠지만, 사진 속 건물이 아미타당 크기가 정면이 76 m, 측면이 57 m에 달하는 거대건물인 것을 감안해야 한다. 목조건물은 크기가 커질수록 특성상 부재가 굵어질 수밖에 없다.[10] 이와 별도로 일본이 1913년 보길도를 비롯한 섬에서 숲을 밀어버리며 나무들을 엄청나게 일본으로 가져간 사례까지 있다.[11] 지붕 옆의 삼각형 벽[12] 소나무의 압축강도와 휨강도 430kg/㎠와 747kg/㎠, 전나무는 각각 371kg/㎠와 520kg/㎠[13] 출처> 2000-2003년 실시된 경복궁 근정전 수리 방향에 영향을 미친 요인과 수리 현상의 특성에 관한 연구, 최종덕 박소현 저[14] 민가들을 보면 굽은 나무를 기둥으로 사용한 건물이 많은데, 검약정신이나 자연미가 넘쳤다고도 할 수 있지만 조선 후기엔 목재란이 심각했기에 어쩔 수 없이 사용했을 가능성도 높다.[15] 이것도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필요가 없는 황룡사 9층 목탑에 해당하는 얘기로, 중금당 등 다른 건축물은 거목을 이용해 일반적인 대량식 구조로 지어졌다.[16] 규모가 큰 건축물은 법회, 강연 등의 행사가 많이 벌어지고 자연히 인원이 내부에 많이 몰릴 수밖에 없으므로, 기둥이 너무 많으면 곤란하다.[17] 다만 해결의 여지는 있었는데, 6~7세기부터 중국 화북지방에서 산림 자원이 고갈되기 시작하자 벽돌을 이용하는 전축 건축이 자리잡기 시작하여 명나라대에 일반화되었다. 청나라는대에 중국 본토 전역에서 널리 사용하는데, 이 시기 건축에서는 서까래가 짧아지고 공포가 장식화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한국의 연암 박지원도 열하일기 등에서 중국의 이러한 모습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다만 조선인들은 돌이 벽돌보다 위계가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도 벽돌은 안 쓴 것은 아니라서 법당이나 궁전에 장식벽돌인 문양전, 바닥벽돌을 생산해 건축 내외부를 장식하는 데에 썼으며 벽돌을 쌓아 만든 벽성(壁城)을 증축하는 등 의외로 활발히 사용한 전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