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권영목(權寧穆)·배량(裵梁)·왕자명(王子明) 옥동보(玉東甫)·왕동도(王東島) |
자 | 경견(敬絹) 또는 경집(敬緝) |
호 | 동도(東島)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884년 3월 18일 |
경상도 영천군 봉향면 영주동 두서 (현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뒤새마을) | |
사망 | 1935년 5월 30일 |
만주국 봉천성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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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권영목은 1884년 3월 18일 경상도 영천군 봉향면 영주동 두서(현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뒤새마을)에서 아버지 권성수(權成銖)[2]와 어머니 광산 김씨 김숙현(金肅鉉)의 딸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2년 3월 대구공립농림학교를 1기로 졸업하고 고향의 영주공립보통학교 교사에 채용되었다.그는 1915년 8월 영주시장에서 풍기공립보통학교 교사인 박제선과 더불어 대동상점(大同商店)이라는 간판을 단 잡화점을 경영했다. 그는 겉으로는 일반 상인처럼 행동했지만, 실제로는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고 일본관헌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독립운동의 연락거점으로도 이용하고자 하였다.
박제선은 감독, 권영목은 경영주임에 취임하고 유명수·정응봉 등을 포섭하여 상점을 경영하였다. 그러면서 기회를 보아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먼저 국제정세의 변화와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상황을 살피기 위해 박제준과 김노경이 만주를 다녀왔다. 그리고 이듬해 3월까지 만주로 전원 망명키로 결정하고 상점을 정리하여 폐쇄한 후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과 협의하였다.
그러나 1918년 '광복단 사건'이 발발하면서 그의 행적이 드러났고, 일제는 그해 5월 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열린 궐석재판에서 그에게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이후 그는 상하이, 베이징 등지를 다니며 활동했고, 1926년 말 북경에서 대독립당촉성회원(大獨立黨促成會員)으로 민족유일당운동을 추진하였다. 1935년 5월 봉천성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권영목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9년에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