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미야카와 류슈(宮川龍洙) |
본관 | 울산 오씨(蔚山 吳氏) |
출생 | 1922년 11월 18일 |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광평리 451번지 (現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광평리)[1] | |
사망 | 2003년 3월 2일 (향년 80세) |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053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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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기업인.2. 생애
1922년 11월 18일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광평리(現 영동군 황간면 광평리) 451번지에서 아버지 오종열(吳鍾烈)의 아들로 태어났다.'연구회(硏究會)'는 1941년 1월에 임굉·이태길·장세파·최낙철 등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민족의식 고취와 조국독립을 위한 실력배양을 목적으로 조직한 비밀결사였는데, 이들은 당시 국제정세를 살펴 일제가 곧 패망하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다가올 독립에 대비하여 각기 전문분야의 최고권위자가 될 것을 다짐하였다.
또한 연구회는 비밀엄수 및 매월 10일 연구발표, 하급생지도 및 동지포섭 등의 방침을 정하고 1941년 2월부터 그해 3월 17일까지 6회의 모임을 가졌는데, 오용수는 2월에 가입하여 정치경제부 책임을 맡았으며, 모임에는 3회부터 참가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회원이 졸업을 하게 되었으므로 연구회는 장기적인 사업계획을 구상하게 되었고, 졸업 후 각기 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되면 우수한 아동들에게 수재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현지의 활동상황 및 성과를 매월 1회 사무원에게 보고하도록 하고 이렇게 보고된 상황은 취합하여 다시 전회원에게 배부하기로 하였는데 이때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공문을 가장하여 발송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그는 1941년 3월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고향 영동군 황간면의 황간남성공립국민학교에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반일사상을 주입하였으며, 김영이(金榮二)·육상환(陸象煥)·박희이(朴喜二) 등 세 학생을 선정해 특별지도하는 등 연구회의 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1941년 7월, 대구사범학교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본 제국 경찰의 손아귀로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또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그후 미결수로 2년여 동안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2월 8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예심이 종결되었고 그해 11월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육·해군형법 위반 및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5년 옥중에서 8.15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상경하여 서울특별시 은평구 녹번동에 거주했으며, 중앙여객자동차주식회사에서 상무이사로 재직하기도 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을 수훈하였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훈하였다.
이후 2003년 3월 2일 밤 9시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유해는 2003년 3월 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