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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명 | 도쿠야마 헤이키(德山丙基) |
자 / 호 | 계원(季元) / 월해(月海) |
본관 | 단양 우씨[1] |
출생 | 1903년 11월 10일 |
경상북도 대구군 월배면 상인동 (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2] | |
사망 | 1944년 10월 26일[3] (향년 40세) |
대전형무소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7묘역-66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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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03년 11월 10일 경상북도 대구군 월배면(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서 아버지 우하충(禹夏忠)과 어머니 전의 이씨[4]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딸만 한 명 있던 작은아버지 우하모(禹夏謨)에 입양되었다.고향 마을에 있었던 사립 덕산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경 일본에 건너가 도쿄에서 양산제조업에 종사하였다.
1939년 11월 경부터 5명의 동지와 함께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조선문제시국연구회(朝鮮問題時局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1941년 8월까지 8회에 걸쳐 회합을 갖고 진천순모(鎭川淳模)·이광찬(李光讚)[5]·방산상봉(方山祥鳳)·박태을(朴台乙)[6]·결성시백(結城時伯)·전윤필(全允弼)[7] 등을 가입시키는 등 회원을 확충하여 중일전쟁 및 통제경제에 관한 시국담을 논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런데 이 일이 발각되면서 체포되었고, 일제 경찰은 이들에게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8]의 목적수행을 위해 협의를 일삼았다는 혐의까지 적용하였다. 결국 1942년 3월 5일 청진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아 청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44년 대전형무소에 이감되었으며, 1944년 3월 27일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열린 상고심에서 상고 기각되어 원심 판결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결국 1944년 10월 26일 대전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199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22년 10월 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7묘역에 이장되었다.
대구 지하철 2호선 월촌역 근처 월곡역사공원에 우병기 지사를 추모하는 '순국지사 월해 단양우공 휘병기 추모비'가 있다.#
[1] 판서공파-취백당(翠白堂)공 홍기(洪紀)파 28세 기(基) 항렬.[2] 단양 우씨 판서공파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우경동·우성동·우승기·우찬기·우하교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음력 9월 10일.[4] 이현호(李玄昊)의 딸이다.[5] 일본식 성명 : 太原勇.#[6] 일본식 성명 : 蜂谷台乙, 海山台乙.#[7] 주로 일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로, 1937년 4월 15일 조선신문 관계자로서 전일본노동조합협의회(약칭 전협)에 가입한 혐의 등으로 일본 경시청에 검거되어 송치되었다. 그해 11월 25일에는 기소되었으며, 1939년 2월 25일 도쿄 행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8] 세포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