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시식(是湜) |
본관 | 단양 우씨[2] |
출생 | 1876년 9월 21일 |
경상도 대구도호부 월배면 상인동 (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3] | |
사망 | 1960년 1월 23일[4] |
경상북도 대구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884호 |
상훈 |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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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우경동은 1876년 9월 21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월배면(현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서 아버지 우해익(禹海益)과 어머니 전주 이씨[5]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6]그는 1919년 3월 파리 강화 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기 위하여 김복한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 유림과 김창숙 등의 영남유림 137명이 대표가 되어 작성한 독립청원서에 영남유림의 한 사람으로서 같은 문중 사람인 우성동·우승기·우찬기·우하교·우하삼(禹夏三)과 함께 서명하였다. 이들은 '파리장서'를 통해 일제가 자행한 명성황후·고종황제의 시해와 한국 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면서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은 1919년 4월 12일 경상북도 성주군의 만세운동과 관련하여 당시 독립청원서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이 붙잡히는 바람에 발각되었다. 이 때문에 우경동도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다만, 일제는 이들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었으므로 민족적 감정이 더욱 번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크게 부각하지 않았다.
우경동은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예심에 회부되었으나, 그해 5월 16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을 선고받고 출옥했다.
이후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60년 1월 23일 경상북도 대구시에서 사망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8년 6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