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창씨명 | 쿠레모토 엔키치(吳本淵吉) |
이명 | 오연길(吳淵佶)·오종순 |
호 | 송재(松齋) |
본관 | 보성 오씨[1] |
출생 | 1901년 7월 3일 |
전라북도 김제군 마천면 관상리 (현 전라북도 김제시 청하면 관상리)[2] | |
사망 | 1969년 1월 8일[3] |
묘소 | 전라북도 김제시 청하면 월현리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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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오연길은 1901년 7월 3일 전라북도 김제군 마천면(현 김제시 청하면) 관상리에서 아버지 오태현(吳泰鉉, 1871. 3. 6 ~ 1945. 3. 25)과 어머니 밀양 박씨 박필환(朴弼煥)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만경공립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4월 4일, 만경공립보통학교 부훈도로 재직 중이던 임창무(林昌茂)는 그날 오전 12시 교정에 3, 4학년생 40여 명이 교정에 집합하자, "오늘은 다행히도 만경 장날이므로 우리 학교 학생들도 나와 있고, 경성부에서는 학생도 간여하여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우리 만경에서는 아직 어떠한 운동을 하지 않음은 면목이 없다. 너희들도 시장에 나가서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면 시장에 모인 다수의 사람들이 만세소리를 듣고 함께 따라 부를 것이 틀림없으니, 이에 점점 소리를 크게 하여 조선독립을 꾀하자"며 만세시위를 벌이자고 주창하였다.
이에 오연길·이형재(李衡宰)·이승필(李承弼)·서봉원(徐鳳元)·장태석(張太錫)·김태경(金泰京) 등을 비롯한 3, 4학년생 40여 명은 이에 응하여 오후 1시경 만경시장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치다가 일본 경찰의 제지를 받아 해산하였다.
이후 체포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언도받았다가 이에 공소하였으며, 같은 해 5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취소되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으며, 1969년 1월 8일 별세하였다.
201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