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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마드 모사데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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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9f40><colcolor=#fff> 이란 제30대 총리
모하마드 모사데크
مُحَمَد مُصَدِق‎‎; | Mohammad Mossadegh
파일:external/www.iranchamber.com/mosaddeq.jpg
출생 <colbgcolor=#ffffff,#191919>1882년 6월 16일
카자르 왕조 테헤란
사망 1967년 3월 5일 (향년 84세)
팔라비 왕조 테헤란
재임기간 이란 제국 제30대 총리
1952년 7월 21일 ~ 1953년 8월 19일
서명
파일:IMG_268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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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9f40><colcolor=#fff> 묘소 아마다바드-에 모사데크 성
부모 아버지 미르자 헤다야톨라
어머니 나짐 알살타나
배우자 자흐라 카눔 (1901년 결혼)
자녀 5명
학력 파리 정치대학 (중퇴)
뇌샤텔 대학교 (법학 / 박사)
직업 정치인
종교 이슬람교 (시아파)
정당 온건 사회주의당 (1914년 - 1918년)
재조직 반대 민주당 (1918년 – 1919년)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19년 - 1949년)
국민전선 (1949년 - 1967년)
경력 파르스 주 주지사
남 아제르바이잔 주 주지사
이란 제국 외교부장관
이란 제국 재무장관
이란 마즐리스의원(하원의원)
}}}}}}}}}
1. 개요2. 생애
2.1. 총리가 되기 이전2.2. 총리 시절2.3. 실각과 말년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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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란자유주의 성향 정치인.[1] 1951~1953년 사이, 2번에 걸쳐 수상으로 재임했다.

자국의 자주성을 추구해 자국의 가장 중요한 천연자원(석유) 채굴권을 국유화, 그 수익을 국민에 분배하는 정책을 펼쳤지만, 영국CIA의 명령을 받은 권위주의적 황제에 의해 실각당한 비운의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칠레살바도르 아옌데[2]그를 이은 권위주의 독재자와 비슷한 케이스.

2. 생애

2.1. 총리가 되기 이전

1882년 이란 테헤란에서, 고위공직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901년 카자르 왕조의 샤였던 나세르 알딘의 손녀인 자흐라 카눔과 결혼하였으며 1911년 스위스로 유학하였고, 이후 뇌샤텔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3]

모사데크의 정치인생은 1905년 이란 입헌혁명이후 시작되었다. 1906년 페르시아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당시 그의 법적연령30세에 이르지 않았기에 인정받지 못했다. 그 후 1919년 영국-페르시아협정대한 항의로 스위스로 이주하였다가 이듬해 이란의 신임 수상이였던 하산 피르니아의 초청을 받아 이란으로 돌아왔다. 이란으로 돌아온후 1920년 파르스 주 주지사, 1921년 재무장관, 1922년 남 아제르바이잔 주 주지사, 1923년 외무장관 등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했다. 1925년 이란의회에서 레자 칸의 지지자들은 카자르 왕조의 샤를 폐위하고 레자 칸을 새로운 샤로 임명 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모사데크는 그러한 행동이 1906년 이란 헌법 을 전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러한 움직임에 반대표를 던졌다. 그 후 1925년 팔라비 왕조가 새로히 수립되자 새 정권에 대한 의견 불일치로 인해 정치에서 은퇴했다.

강한 민족주의 성향으로 인해 투옥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1년에는 아프마다바드에서 억류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영국 군대가 이란에 진주하여 석방되었고 1944년 다시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민주주의를 확립하고 이란 정치에 외세의 개입을 종식시키기 위해 1949년 이란 민족 전선을 창설하고 이끌었다.

2.2. 총리 시절

파일:external/i.dailymail.co.uk/article-2397133-1B5E46CB000005DC-69_634x432.jpg
(자신을 지지하는 군중들과 함께)

1951년 의회의 투표를 통해 총리에 취임했다. 그가 총리에 취임한 당시 이란은 공식적으로는 식민지나 보호령이 아니었지만 카자르 샤가 제공한 양보를 시작으로 1933년 레자 샤가 서명한 석유 협정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외세의 강력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그는 앵글로-이란석유회사를 국유화하여 1993년에 만료될 예정이었던 석유 사업을 취소하고 자산을 몰수 했다. 모사데크는 앵글로-이란석유회사를 이란의 석유 대부분을 통제하는 영국 정부의 무기로 보고 영국이 이란에 건설한 것을 압수하도록 압박했다. 다음 달, 국유화를 시행하기 위해 5명의 마즐리스 의원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후지스탄으로 파견되었다. 1951년 6월 21일 연설에서는 이란이 이란에 있는 모든 석유의 "정당한 소유자"라고 주장하고 이란이 그 돈을 사용할 수 있다고 발언하였다. 이 당시의 석유국유화는 훗날 다른 중동 산유국들도 채택하는 '자원민족주의'의 시초로 평가받는다.

이외에도 광범위한 사회 개혁을 도입했다. 실업 수당을 도입하였으며 공장 소유주가 부상당한 근로자에게 수당을 지급하도록했고 농민을 지주의 사유지에서의 강제 노동에서 해방시켜주었다. 1952년에는 토지 개혁법을 통과시켜 지주가 수입의 20%를 개발 기금에 투입하도록 했는데. 이 개발 기금은 대중목욕탕, 농촌 주택, 해충 구제 등 다양한 사업에 사용되었다.

황제()의 전제적 권한을 제한하려 했는데, 그 과정에서 팔라비 황제와 마찰을 빚게 된다. 이는 모사데크의 석유 국유화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미국, 영국 등의 국가들과 팔라비 황제가 합심하여 모사데크를 타도하려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설상가상으로 모사데크가 야심차게 단행한 석유 국유화는 기대했던 만큼의 경제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국유화 과정에서 서방측 석유회사들의 숙련된 기술 인력들이 빠져나가 관련 시설들의 운영 능력이 크게 하락했고, 영국 등 서방 국가들이 해군력을 동원하여 이란의 해외 석유수출을 봉쇄, 저지하려 했던 것이다.

석유 국유화를 계기로 서방 국가들과 마찰을 빚자, 모사데크는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 이란의 외교적 고립을 타개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석유 국유화를 통해 '사회주의자'로 낙인찍혀 있던 모사데크에게, 이 조치는 도리어 자신의 정치적 몰락을 앞당기는 결과로 이어진다.

2.3. 실각과 말년

파일:external/www.campusghanta.com/Mossadegh.jpg
(쿠데타로 실각당한 후, 법정에 세워진 모습)

결국 1953년 8월 팔라비 황제미국 중앙정보국(CIA), 영국 비밀정보부의 도움으로 모사데크 타격대를 조직했고, 에이잭스 작전(Operation Ajax)에 따라 미국과 영국의 사주를 받은 파즐롤라 자헤디 장군의 친 팔라비 쿠데타로 실각하고 체포당하여 금고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56년 8월에 출소했지만, 이후 아마다바드에 있는 자택에서 11년간 가택연금 당하다가 향년 84세로 사망했다. 그가 정치적 폭력의 희생자들 옆에 공공 묘지에 묻히기를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신은 그의 거실에 묻혔다.

3. 평가

미국은 당시 커밋 루스벨트(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손자) 주도로 모사데크를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를 도우면서 팔레비 왕조의 철권통치를 지원한 것으로 두고두고 이란인들에게 원성을 샀고 훗날 1979년 혁명 이후의 단교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란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모사데크가 실각하지 않았더라면 중동 최초로 이란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도 있었다는 회한을 토로하기도 한다.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을 주도했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는 모사데크를 팔라비 왕조와 동급, 혹은 그 이상으로 싫어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메이니는 골수 시아파 이슬람 근본주의자여서 어떤 면에서는 팔레비 왕조보다도 세속주의와 연성 사회민주주의[4]를 추구했던 모사데크를 공산주의자라며 혐오했다. 특히 이슬람의 종교인들은 무력과 야합한 신정일체 체재를 오랫동안 지켜온 중동의 뿌리깊은 기득권세력이라, 사유재산의 침해를 극단적으로 혐오했는데 호메이니도 예외는 아니어서 "만일 그가 정권을 계속 잡았다면 그는 이슬람에 큰 타격을 주었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5][6] 다만 공적으로는 이란내에서 추앙받는 인물로써 이란 내 개혁파들도 모사데크를 모델로 내세운다.

2000년에는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과거에 모사데크 축출 쿠데타를 도운 것에 대해 후회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1] 외교적으로는 당시의 여러 비서방권 신생 독립국들처럼 자주, 비동맹 진영에 가까운 성향이었지만, 당시 신생 독립국의 지도자들 상당수가 사회주의에 경도되고 자유주의자들은 기존 서방권(미국, 서유럽 등)을 지지했던 점을 상기해보면, 모사데크는 분명 드문 사례였다.[2] 다만 아옌데와 다르게 모사데크는 강경한 민주사회주의자라고 보긴 어렵다. 사회자유주의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성향이다. 학계에서도 사회주의자보다는 세속적인 자유주의 개혁가로 보는 시각이 주류다. 팔라비 역시 권위적인 독재자였을지언정 피노체트처럼 대놓고 학살을 저지르지는 않았다.[3] 모사데크는 유럽의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은 최초의 이란인이였다.[4] 사회자유주의자에 더 가깝긴 했다.[5] 출처 : 유달승 저, <이슬람 혁명의 아버지 호메이니>.[6] 때문에 이란의 세속주의적 성향의 반체제 인사들도 모사데크 전 총리를 자신들의 정치적 구심점으로 삼지, 팔라비 왕조를 구심점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팔라비 왕조의 문서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이란의 현 신정체제가 무너지고 나면 포스트 이란 체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팔라비 구 황족들은 권력 참여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팔라비 왕조로의 복고를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