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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기에-북프랑스 국가판무관 쾰른-아헨 대관구지휘자 요제프 그로헤 Josef Grohé | ||
| <nopad> | ||
| <colbgcolor=#DD0000><colcolor=#FFF> 출생 | 1902년 11월 6일 | |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라인주 게뮌덴 | ||
| 사망 | 1987년 12월 27일 (향년 85세) | |
| 서독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쾰른 | ||
| 정당 | ||
| 최종 계급 | NSKK[1] 대장 (상급집단지도자) | |
| 주요 참전 | 루르 점령 | |
1. 개요
나치 독일의 정치인, 벨기에-북프랑스 국가판무관부의 국가판무관이다.2. 생애
1902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세가 되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전쟁 막바지인 1918년 16세가 되던해 수병으로 입대하려 했으나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후 1919년 경영대학원에 입학해 2년 후 졸업, 철물점 직원으로 일한다. 청소년기부터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 성향이 강했던 그는 1921년 반유대주의 단체 독일 민족방위연맹[2]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1년 후 다른 당원들을 따라 나치당에 가입한다. 나치당 입당 이후 그로헤는 나치당 쾰른 지부를 창설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그곳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1923년 프랑스가 벨기에와 함께 루르 점령을 감행하자 우익, 민족주의 단체들과 함께 격렬히 저항한다. 이때 국가방위군의 은밀한 제안을 받아 프랑스의 석탄열차를 폭파시키는 사보타주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후 맥주홀 폭동으로 나치당이 해산되자또 다른 민족주의 단체에 들어갔다가 1925년 나치당 재창단 후 흡수되어 다시 나치당에서 활동한다. 이 시기 그로헤는 독일노동전선의 수장인 로베르트 라이 밑에서 일하는 한편 1931년까지 나치당의 신문 푈키셔 베오바흐터의 독일 서부지부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신문은 극단적인 반유대주의 서술을 일삼았기에 1928년 봄에는 징역형을 선고 받기도 한다.| |
| 아돌프 히틀러, 요제프 그로헤, 빌헬름 프리크 |
이후 1929년 쾰른 시의회 의원이 되어 당시 쾰른 시장인 콘라트 아데나워를 해임하는데 기여하였고 1931년 쾰른 가우의 지도자[3]를 거쳐 1933년 11월 제국의회에 선출되어 국회의원이 되었다. 국회의원이 된 그로헤는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후 사실상 쾰른지역의 통치권을 맡았다. 이곳에서 유대인과 교회, 공산주의자를 비롯한 정치적 반대자들을 적극적으로 탄압했으며 특히 유대인의 투표권 박탈에 크게 기여한다. 1939년 그간의 공적을 인정받아 NSKK 대장으로 진급하였다.[4]
그로헤는 제2차 세계대전이 개전된 후에도 민방위와 쾰른-아헨 대관구의 관할을 맡다가 전쟁 말기인 1944년 7월 벨기에-북프랑스 국가판무관부가 신설되자 국가판무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9월 3일 연합군에게 브뤼셀을 내주며 사실상 통치권을 상실했고 얼마가지 않아 12월에 벨기에-북프랑스 국가판무관부가 공식적으로 폐지되며 약 5개월 간 국가판무관으로서의 짧은 임기를 마쳤다. 1945년 3월 독일군에게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우자 라인 강의 다리를 철거하고 국민돌격대에게 미군에게 저항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본인은 진격해오는 미군을 피해 모터보트를 타고 도주한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괴벨스는 본인의 일기에 그로헤를 허풍쟁이라며 가루가 되도록 깠다.
....예를 들어 이와 같은 폭로 중 하나가 그로헤가 한 짓이다. 그로헤는 거창한 선언을 했으나 자신의 대관구도 지키지 못했다. 그는 시민들이 끌려가기도 전에 대관구를 떠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위대한 영웅 행세를 하려한다.
1945년 4월 4일 괴벨스의 일기 中
1945년 4월 4일 괴벨스의 일기 中
모터보트를 타고 본인의 대관구에서 도주한 이후 아직 연합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지역을 전전하다 종전을 맞이한다. 전후 헤센에서 '오토 그로버'라는 가명과 함께 농부로 위장하여 생활하던 중 1946년 8월 정체가 발각되어 영국군에게 체포되었으며, 1947년 재판에서 징역 1년 10개월 형을 선고받고 벨기에에서 복역한다. 형기를 다 채워 석방된 후 1949년 서독으로 송환되어 1950년 징역 4년 6개월을 새롭게 선고받고 또 다시 복역할 위기에 처했으나 벨기에에서 이미 형기를 마친 것으로 간주되어 당시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의 주지사인 카를 아놀트가 사면 요청을 수락하며 복역하지는 않았다.[5] 사면 이후 쾰른에 위치한 장난감 공장에서 일하며 여생을 보내다 1987년 12월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