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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트 로젠베르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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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대외정책국장 및 국가지휘자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지적 및 이념교육국장 동방영토 장관 알프레트 에른스트 로젠베르크 Alfred Ernst Rosenberg | |
출생 | 1893년 1월 12일 |
러시아 제국 리보니아현 레발 (現 에스토니아 탈린) | |
사망 | 1946년 10월 16일 (향년 53세) |
연합군 점령하 독일 뉘른베르크 수용소 | |
재임기간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대외정책국장 |
1933년 4월 1일 ~ 1945년 5월 8일 | |
국가지휘자 | |
1933년 6월 2일 ~ 1945년 5월 8일 |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지적 및 이념교육부장 | |
1934년 1월 27일 ~ 1945년 5월 8일 | |
동방영토 장관 | |
1941년 7월 17일 ~ 1945년 5월 8일 | |
신체 | 185cm |
IQ | 127 (웩슬러 벨뷰 지능검사) |
종교 | 무종교(무신론)[1] |
정당 | |
국적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리가 기술대학교 (건축학 / 학사) 바우만 모스크바 국립공과대학교 (건축학 / 박사)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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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나치 독일의 정치인, 돌격대 대장, 나치당 대외정책국장, 교육국장, 나치 독일 동방영토 장관을 맡았으며, 로젠베르크 계획을 입안한 사람이다.그는 나치당의 주요 이론가로서 '20세기의 신화(The Myth of the Twentieth Century/Der Mythus des zwanzigsten Jahrhunderts)'라는 유명한 책을 썼고 시온 의정서 해설서를 썼으며 1920년대 초에 히틀러에게 이런 음모론을 전해준 사람이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 연합국에 의해 시행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전범으로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1946년 10월 16일에 교수형으로 처형됐다.
2. 생애
2.1. 생애 초기
그는 독일 본토인이 아니라 발트 독일인이다. 러시아 제국 레발[2]에서 구두 장인의 아들로 태어난 로젠베르크는 모스크바에서 건축학을 공부했지만 러시아 혁명 때문에 가족들과 함께 독일로 이주했다. 로젠베르크라는 성이 유대인 성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아니다.2.2. 나치 활동
1919년 1월에 나치당의 전신인 독일노동자당에 입당하였다. 로젠베르크는 히틀러보다 8달 앞서 입당한 독일노동자당의 초기 멤버였다. 로젠베르크는 툴레 협회의 회원이었다.나치당의 정신적 아버지라고 불리는 디트리히 에카르트의 친구였던 아돌프 히틀러의 측근이기도 했다. 에카르트는 히틀러에게 로젠베르크를 소개해주었고 로젠베르크는 히틀러에게 인종주의자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책과 시온 의정서 등 음모론을 전수해준다.
히틀러는 로젠베르크가 건축학과 역사를 잘 안다는 것을 알고 그를 발탁했다.
1921년에는 나치의 기관지인 일간지 <민중의 관찰자(Völkischer Beobachter)>의 편집책임자가 되었다.
1923년 11월 8일의 맥주홀 쿠데타에서 실패해 히틀러가 투옥되었을 때에는 당의 총재대리로 취임했고 1924년에 독일 민족자유당과의 선거에서 협력하여 5월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200만표 가까운 표를 모으는데 성공했지만, 그는 결단력이 부족했고 결국 당원들을 제어하지 못하여 민족자유당과의 합의도 이끌어 내지 못해서 나치당의 의석을 줄어들게 하고 말았다. 또 히틀러로부터 확실한 지지를 받지 못해서 로젠베르크는 총재대리를 사퇴하게 되었다.
1930년에는 나치의 월간지인 Nationalsozialistische Monatshaft의 주필이 된다.
나치 집권 후에 대외정책 전국지도자로 취임한 로젠베르크는 1934년부터 나치즘의 선전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동유럽, 발칸 반도의 파시스트와 연계했는데 외무장관 자리를 놓고서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경쟁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점령지의 미술품 등을 독일로 빼돌리는 작전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1939년 4월 로젠베르크는 '유대인 문제 연구소'를 설립하고 유럽 각지의 유대인들의 문헌을 모으는 일을 하였다.
2.3. 2차 세계 대전
오늘날 아돌프 히틀러 최고사령부 독일군이 벌이고 있는 전쟁은 엄청난 개혁의 전쟁이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 사상의 세계를 극복할 뿐만 아니라,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견제 없이 발전할 수 있었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의 유태인과 그들의 악당들의 인종 감염 세균을 모두 직접적으로 근절하는 것이다. 2000년 동안 유럽 국가들이 해결하지 못한 유대인 문제는 이제 독일과 전유럽을 위한 국가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해결될 것이다. (1941년 3월 28일 라디오 연설)#
1941년에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히틀러의 명령으로 새로운 점령지에 만들어진 동부점령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동부지역에서 힘러와 괴링의 권력투쟁에 의해 장관 자리는 껍데기에 불과하였다. 이후 유대인 학살을 맡게 되었으나 이미 아인자츠그루펜을 동원하여 학살하고 있던 하인리히 힘러 휘하의 무장친위대와 세력 다툼 끝에 밀려났다.[3]
로젠베르크는 1941년 7월 16일에 열린 총통관저 회의에서 점령지인 우크라이나 주민들에 대해 우호적인 정책을 펼쳐야한다고 이야기했지만 히틀러는 이를 거부했다. 로젠베르크가 구상한 이른바 로젠베르크 계획이라 불리는 일련의 계획은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를 설치[4]하고 소련의 집단농장을 해체하고 자작농을 인정해주는 일련의 토지개혁을 실행하려 하였다. 특히 일종의 선전전략으로서 소련으로부터의 해방자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 일련의 우호적인 정책을 주창하였으며, 본인 실제로도 슬라브계 인종이 아리아인과 그리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여 지나친 수탈보다는 완충지대를 수립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로젠베르크를 제외하면 당시 수뇌부는 인종적 문제로 인하여 군사력을 동원한 가혹한 탄압과 수탈을 중심으로하는 통치를 추구하였다. 로젠베르크가 구상한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의 판무관으로 에리히 코흐가 임명되었고 질서경찰, 게슈타포를 동원한 잔혹한 통치를 일삼았다. 로젠베르크는 이에 항의하였지만 히틀러는 묵살하였고 점차 로젠베르크는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러한 실상 속에서 로젠베르크가 구상한 소련에 맞선 선전전략은 거의 먹히지 않았고, 나치의 통치로 인해 점령민들이 파르티잔에 가담하거나 소련에 협조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도 아주 조금은 협력자들을 찾는 것에 성과를 보였으니 동방부대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거의 전황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고 그나마 코카서스 지방에서 정도만 먹혔었다.[5]
2.4. 최후
1945년 5월 9일에 영국군에 의해 체포된 로젠베르크는 점령지에서의 학살과 약탈, 전쟁범죄 행위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되어 기소된 모든 혐의에 대한 유죄 판결을 받고 1946년 10월 16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때 유언은 No(없다.)로 매우 간단했다. 상당히 장문의 유언을 남긴 다른 나치 전범들과는 좀 다른 최후. 유해는 다른 사형수들과 마찬가지로 다하우 강제 수용소의 화장터에서 화장되어 이자르 강의 한 곳에 익명으로 뿌려졌다.3. 가족
딸인 이레네는 1930년생으로, 전후 어머니와 함께 작은 아파트의 방 한칸에서 어렵게 산 적이 있으며, 비서 일을 하고 받는 봉급으로 생활을 꾸렸다. 이레네는 보관해 두었던 보석을 팔아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도 익힐 수 있었다. 어머니는 웬 쓸데없는 자존심, 그러니까 전 각료의 부인이라는 자존심 때문인지 취직을 하려고 하지 않아서 모녀가 엄청 싸운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레네는 "나는 나치라고 비난받아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한 적도 있으며, 그녀는 자신이, 유대인이 꾀한 세계적인 계획의 희생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에 아버지의 친구가 이레네에게 취직처를 마련해 주었으나 동료들과의 정치적 논쟁으로 인해 영 매끄럽지 않은 직장생활이었다고.출처4. 기타
<20세기의 신화>라는 유명한 책을 썼는데 이는 나치즘을 이론적 체계화한 것이며 나의 투쟁과 함께 나치즘의 주요 책이다. 신화 라는 말은 파시즘의 아버지 조르주 소렐이 사용한 용어인 신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현재 번역본은 없다.다만 <20세기의 신화>는 당대부터 그닥 좋은 평을 듣지 못했다. 나치즘의 주요 저서로서 많이 팔리긴 했지만, 히틀러조차도 앞에서는 좋은 책이라고 하고 정작 뒤에선 사고 안 보는 책이라고 했을 정도이니.. 사실 책을 뜯어보면 히틀러 숭배에 가까울 만큼 원시 종교적인 면모들에 다윈의 진화론이 가미된 등 여기저기서 짜집기해서 괴상하게 이어붙인 내용이라고 한다.
로젠베르크 본인부터가 상당히 설득력이 떨어지는 망상적 위인으로 유명했는데, 괴벨스는 그를 "엉터리 철학자"라고 비난했고 괴링도 이를 인정했다. 특히 그런 그의 인간성으로 인해 당 조직부장이던 로베르트 라이와는 사이가 끔찍했다.
공교롭게도 헤르만 괴링과 생년월일이 정확히 같은데, 둘 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기에 사망일조차 정확히 같을 예정이었지만 헤르만 괴링이 사형 집행 전날인 10월 15일 자살함으로서 로젠베르크가 미묘하게 하루 더 살게 되었다.
5.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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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artin Broszat, The Hitler State, p. 223[2] 현재의 탈린[3] 이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유대인 학살에 대해 몰랐다고 하였지만 차관이었던 알프레트 마이어, 동유럽 점령지구 국장 게오르크 라이프란트가 반제 회의에 참석했었다.[4] 모스크바 국가판무관부, 코카서스 국가판무관부는 계획에 있었으나 수립되지 않았다.[5] 일례로 표트르 크라스노프를 비롯한 카자크들을 동원하여 망명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였으나 표트르 크라스노프 자체도 그닥 동의하지 않았었고 카자크인들 전반적으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나마 뱌체슬라프 나우멘코# 정도만 종전 후 미국에서 코자크 망명정부의 존재를 알리는 운동을 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