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1-24 19:10:13

르 코르뷔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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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Corbus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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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샤를에두아르 잔레그리(Charles-Édouard Jeanneret-Gris)
국적프랑스 파일:프랑스 국기.png
출생1887년 10월 6일, 스위스
사망1965년 8월 27일 (향년 78년 324일)
직업건축가, 도시 계획가, 화가, 조각가, 가구 디자이너


1. 개요2. 탄생과 성장3. 건축을 바꿔놓다4. 도시를 바꿔놓다5. 다시 건축을 바꿔놓다6. 최후7. 평가8. 여담

1. 개요

Le Corbusier(실제발음은 '르 꼬흐뷔지'에 가깝다). 본명은 샤를에두아르 잔레그리(Charles-Édouard Jeanneret-Gris). 1887년 10월 6일 ~ 1965년 8월 27일.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에서 활동한 건축가.[1] 모더니즘 건축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인물로, 현대 건축의 기초를 다졌다고 평가된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가로 뽑힌다.

2. 탄생과 성장

1887년 10월 6일 스위스 뇌샤텔라쇼드퐁에서 태어났다.[2] 그래서인지 고향에도 은근히 현대식 건물이 많은 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그의 모친은 피아노 선생이었고, 그녀는 아들에게 "하고자 마음먹은 것은 끝까지 해 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리고 그는 훗날 진짜로 해 냈다. 카카?

13세 때 라쇼드퐁의 미술학교에 응시했는데, 과제작품에 3일의 시간이 주어졌지만 그는 첫날 저녁에 작품을 제출했다. 참 쉽죠?

미술학교에서 그의 스승은 화가가 되려는 그에게 건축을 하라고 권했다. 처음에 그는 건축가가 되려는 생각이 없었고,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 시계 장인이 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계를 대량생산하는 나라가 등장하고, 시계를 다루는 일로 안정적인 수입을 얻기 힘들다 판단하게 되면서 건축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무려 17세에 처음 주택 건설에 가담하는데, 그 주택은 스위스 전통 양식에 따른 전통 주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주택을 건축가로서 그의 첫 작품이라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데, 당시 건설 작업의 일부분만 담당했기 때문이다.

이후 19세까지 총 7개 정도의 설계를 했지만, 전부 고전 방식이었으며, 그다지 눈에 띄는 작품들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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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곧바로 프랑스 파리로 가서 철근 콘크리트의 선구자인 오귀스트 페레에게 최신 재료와 기술을 배우고, 피터 베렌스의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후에 현대 건축의 거장들로 불리는 사람들인 미스 반 데어 로에발터 그로피우스[3]를 만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게 될 경험을 하게되는데 , 동방 여행이 그것이다.

베를린에서 출발해 프라하, , 부다페스트, 콘스탄티노플, 아테네, 폼페이 등을 방문하는 이 여행길에서 그는 위대한 고(古) 건축들을 관찰하며 많은 것을 배운다. 소피아 대성당과 모스크에서는 단순한 기하학이 가진 강렬한 힘을 경험했고, 발칸 반도의 민중예술과 토속건축의 자연스러움에 감탄했다. 이런 것들로 인해 그는 유럽 장식예술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에서 그가 평생 추구할 투명한 빛 아래의 하얀 도시[4]의 이미지가 형성된다.

3. 건축을 바꿔놓다

돌아온 코르뷔지에는 스위스에 지내면서 현대적 기술을 사용한 이론적인 건축 연구를 했다. 그리고 향후 100년간의 현대 건축을 대표하는 구조를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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돔-이노(Dom-Inno') 시스템으로 불리는 이 아이디어는 최소한의 숫자의 얇은 철근 콘크리트 기둥들이 모서리에서 지지하는 단순한 구조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구조는 유럽의 건축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일단 벽이 필요 없다!![5]

이 시스템을 이용하면 벽은 물론이고 창문도 지붕도 바닥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즉, "건물의 주요기능들을 구획하는 벽체와 지붕은 구조체와 분리하여 모든 하중을 기둥이 지탱하되, 내부의 입면이나 평면은 자유롭게 구성하게 된다."가 도미노 구조이론의 핵심이다.

이를 '현대 건축의 5원칙'이라고 이름붙였으며. 이는 건축가마다 공법과 미의 기준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달라 통일되지 못하였던 과거의 건축에서 선진화되고 정형화된 건축으로 옮겨가는 과정에 있어 현대 건축의 핵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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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철근 콘크리트 기둥인 필로티(pilotis)로 무게를 지탱하고 건축 구조의 대부분을 땅에서 들어올려 지표면(1층)을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만든다.
2. 건축가가 원하는 대로 설계할 수 있도록 구조 기능을 갖지 않는 벽체로 "자유로운 입면"(façade)을 만든다.
3. 훨씬 채광효과가 좋은 길고 낮은 "띠 유리창"을 사용한다.
4. 지지벽이 필요 없이 바닥 공간이 방들로 자유롭게 배열된 "열린 평면"을 만든다.
5. 건물이 서기 전에 있던 녹지를 대체하기 위해 옥상 위에 "옥상 정원"을 만든다.

이렇게 이론만 세웠다면 그가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끝판왕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가 세계구가 된 것은 '에스프리누보'[6]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이러한 자신의 이론과 생각을 널리 알렸기 때문이다. 역시 언플이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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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잡지에서 그는 순수주의(Purism)를 주장하였다. 건축 프로젝트로는 시트로앙 주택이 있다. 이 이름은 프랑스 자동차 시트로엥의 말장난으로, 건축 또한 자동차를 만들듯이 현대 산업의 방식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공장 제작 부품을 이용하고 규격화하면 효율적으로 양질의 주택을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집 역시 자동차처럼 건축 또한 기능에 충실하고 사용하기 편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건축을 당시 첨단 기술로 탄생한 기계와 맞물려 생각했다. 이 생각은 그의 명언 "집은 살기 위한 기계다(A house is a machine for living in)"에 잘 나타난다. 그의 주택들은 새롭게 바뀐 생활 방식과 기술을 표현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사보아 주택에 이러한 원칙과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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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보아 저택

게다가 그는 치수 체계도 만들어냈다! 황금비와 인체 측정학, 피보나치 수 등을 이용하여 만든 모듈러(Modulor)라는 이 치수를 설계에 적용했는데, 이런 정교한 법칙을 통해 건축물이 중심이아닌 사람의 신체에 맞는 건축물과 가구 등의 치수를 정의했다.[7] 그래서 그의 건축은 210cm 등으로 떨어지지 않고 226cm, 86.3cm 등으로 만들어진다. 아무튼 이는 그의 후기 작품에서 나타나는 공간적 모호함, 복잡한 곡면, 리듬감 있는 파사드(façade)[8]에 잘 어울렸다. 목수 다 죽게 생겼다 이놈아 그리고 다른 건축가는 아무도 쓰지 않았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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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도시를 바꿔놓다

당시 유럽의 도시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좁아터지고 열악한 주거에 살며, 거리는 더럽고 혼잡했다. 산업혁명으로 도시화와 인구집중은 극심한데 건물들은 중세와 별반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르 코르뷔지에는 마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같은 해법을 제시하며,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그야말로 모든 걸 갈아엎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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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를 아래로 만든다는 것... 300만명의 주민을 위한 현대 도시 계획안. 이 계획안에서 건물이 지어지는 부분은 5%라고 한다. 나머지는 모두 녹지(...) 심지어 건물들 사이로 비행기가 착륙한다!! 물론 이것은 당시 비행기가 프로펠러기라서 가능했다. 제트기는 코르뷔지에의 중년인 1950년대 말에 상용화되었고[10], 만일 그때 설계했다면 당시의 고바이패스비 터보제트 소음 때문에 도시의 비행기 착륙같은건 상상도 안 했을 것이다. 참고로 이때의 비행기가 더 소음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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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코르뷔지에의 도시계획은 교통수단으로서의 자동차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동차가 인간을 거리의 제약에서 자유롭게 한다는 생각으로 교통체계를 높은 위계에 두고, 주거 지역과 사무 지역을 널찍하니 떨어뜨려 구분하여 최대한 쾌적한 생활을 하도록 꿈꾸었다.

당시 유럽의 도시는 이미 중세, 근대풍의 건물로 포화상태에 있었기에 당연히 이 도시계획은 현실화되지 않았다.[11] 그러나 넓은 땅을 가졌던 미국과 구시가지 등를 개발하게 될 개발도상국들은 이러한 제안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1970년대 이후 만든 한국의 계획도시, 신도시들은 이 개념을 받아들여 자동차를 중심으로, 업무지구와 주거지구를 나누며, 넓은 녹지를 두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기존 도시의 재개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역시 이러한 것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12] 사실상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부정하기 힘들다.

이러한 새로운 도시에 대한 비전은 현대 도시의 혁신적인 장점을 생겨나게 하였고, 수 많은 사람들을 주택부족에서 구원해주고 더 효율적이고 쾌적한 도시생활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많은 문제점들도 가지고 있었다. 인간보다 자동차가 우선시되고, 업무지구는 밤에 모두가 집에 가느라 도심 공동화가 일어나며 너무나 넓은 녹지는 도시를 절단한다.

르 코르뷔지에가 비판받는 가장 큰 부분이 이것이다. 지나치게 기능과 기술만을 찬미하고 '합리적'으로만 모든 것을 계획하려 해서 인간과 도시가 갖고 있는 다양성과 불확실성, 형이상학적 감성 등을 무시했다는 것. 사실 이것은 모더니즘 전체가 받는 비판이지만 건축 내에서는 르코르뷔지에가 모더니즘 그 자체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가 대부분의 욕 지분을 담당한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이라고 완벽한 대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와 대비되는 도시계획으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Broadacre city가 있다. 둘 다 모더니즘 건축가임에도 전혀 다른 도시계획을 지향했다.

5. 다시 건축을 바꿔놓다

그러나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은 다시 한 번 극적인 변화를 가진다. 30년대를 기점으로 전기 르코르뷔지에와 후기 르코르뷔지에는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건축을 선보인다. 후기의 대표작인 롱샹 성당[13]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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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샹성당[14]

그동안 만들어내던 표준적이고 규격화된 건축이 아닌, 대지의 특별한 조건 아래 형성된 특별한 모양의 건축인 것이다. 롱샹 성당은 준공되자마자 거의 모든 건축잡지가 기사로 써 냈고, 롱샹은 한순간에 혁신의 기수가 되었다. 기능성과 효율을 중시하던 철두철미한 건축가가 자신의 엄격한 법칙을 버리고 감성적이고 숭고한 느낌을 주는 성당을 만들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극적인 전환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르코르뷔지에는 롱샹 성당을 짓기 전 10년 동안 건축 작업을 전혀 할 수 없는 침묵기를 가졌다. 그동안 그는 프랑스 정치의 우파에 참여하여 정치 활동을 벌였고, 심지어 베니토 무솔리니의 초대를 받아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 긴 기간 동안 공동체를 위한 건축을 꿈꾸며 국제연맹궁, 국제연합본부 등을 연구하고 세계적 공동체의 실현을 기대했지만 10년 동안 실망을 거듭했다. 이러한 점에서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적 관심이 현실 삶의 개선이라는 명제에서 벗어나 현실을 초월한 감정적인 숭고함으로 변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전기와 후기가 궁극적으로는 같은 생각의 흐름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사실 르 코르뷔지에의 아이디어들은 상기했듯 동유럽의 민가들과 고대 그리스 건축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며, 근대 건축의 5원칙 또한 자유로움을 위한 원칙들이다.

어쨌건 그는 합리주의자들의 우상이었던 것처럼 롱샹 이후에는 비합리주의자들의 우상으로, 정반대인 사상 양측에서 추앙받게 되었다. 이후의 그의 건축은 점점 혁신적이고 심지어는 현대적으로도 볼 수 있는 다양한 시도를 보여준다.

6.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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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8월 27일, 코르뷔지에는 프랑스 남부 로크브륀카프마르탱(Roquebrune-Cap-Martin)에 마련한 별장 '카바농 드 바캉스'(Cabanon de vacances, 위 사진)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몸이 매우 노쇠한 상황에서 의사의 충고를 무시하고 수영을 하러 물에 들어가자 곧 심장마비가 찾아왔다. 얼마 후 근처에서 수영하던 다른 사람이 그의 시신을 발견했다.

코르뷔지에의 장례식은 루브르 궁 안마당에서 치러졌다. 전 세계적으로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조의를 표했고,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은 "그의 영향은 전 세계적이고 그의 작품들은 우리 역사상 매우 적은 예술가들만이 갖고 있는 영원한 특성들을 갖고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소련은 "현대 건축은 가장 위대한 거장을 잃었다."라고 덧붙였다. 냉전시기인데도 양측에서 동일한 찬사를 받았음을 생각하면 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7. 평가

우리가 살고 있는 기능적이고 위생적이며 편안한 생활공간은 그의 설계와 이론 덕분에 자리잡았다.

물론 그의 건축은 비판도 역시 받았다. 그가 죽은 뒤 한참 후에 기존 건축은 지루하다고 징징대던 로버트 벤투리에 의해 촉발된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모더니즘 건축 전체를 까기 시작한다. 모너니즘 시대의 대표 건축가인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대표적인 명언 "Less is More"를 비꼬는 그의 명언 "Less is Bore(간결한 것(단순한 것)은 (이제)지루하다."에 잘 나타나있다. 르 코르뷔지에 역시 도시계획 등 여러 사상과 이론 부분에서 기능만능주의로, 비인간적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비판받는다. 여기엔 당시 사회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좀 더 필요한데, 위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주거환경은 위생적, 기능적으로 매우 열악한 상태였고, 전쟁과 도시인구급증으로 인해 주택의 공급이 수요를 도저히 뒷받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기능적인 주거환경을 마련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고, 이러한 맥락에서 르 코르뷔지에는 집이 살기 위한 기계라 주장하며 기능이 중심이 된 건축을 지향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후기 그의 건축물들에서 잘 드러나듯이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의 거장으로서 심미적인 특징이 두드러진 건물 또한 뛰어나게 설계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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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도시가 포화 상태에 이른 시점에서도 많은 건축가들이 단순히 많은 건물들을 싸고 편하게 짓기 위해 그의 이론과 양식을 이용해서 건물을 지었고 결국 오늘날 현대 도시가 갖고 있는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이미지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비난받는 것이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나은 생활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한 르 코르뷔지에의 방법론 자체를 비난하는 사람은 적다. 이 모든 책임을 르 코르뷔지에에게 물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여튼 르 코르뷔지에는 이래저래 시대의 문제점을 해결함과 동시에 새로운 숙제를 남겨주었다. 아파트 공화국이 된 한국에도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건축가로써 유네스코에서도 가치를 인정받아서 국립서양미술관 등 르코르뷔지에 건축물 세계유산 등재하였다. 이는 대륙을 넘는 최초의 세계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

8. 여담

  • 그는 자동차광이었는데, vila savoye(사보아 저택)에서 보여지는 필로티를 이용한 차량을 고려한 설계라든지, 도시계획에서 강조된 도로 교통이라든지에서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실제로 그는 1920년대에 자신이 설계한 도시에서 굴러갈 것을 상정하고 소형 승용차를 디자인하기도 했으나, 설계 단계에서 끝나고 실차는 제작되지 않았다.
  • 그의 오피스에서 일했던 사람들 중에서는 상당한 유명인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현대음악계에서 유명한 이안니스 크세나키스. 그는 건축과 음악을 병행하던 시절 르 코르뷔지에의 오피스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다.


[1]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스위스의 10프랑 지폐 인물로 등장한다. 스위스와 프랑스가 서로 자기네 건축가라고 우긴다.[2] 이 도시는 프랑스어권이지만 코르뷔지에가 태어날 당시만 해도 제네바처럼 개신교의 비중이 높은 곳이었는데 이러한 종교적 환경 역시 그의 건축철학에 영향을 주었을수도 있다.[3] 바우하우스의 교장으로 유명하며, 훗날에는 하버드 건축대학의 학장[4] 이와 비슷한, 최소한 가장 근접한 분위기의 고전적 장식이 빠진 현대식 수직도시를 보고 싶다면 글래스 시를 예로 들 수 있다. 전작에서도 도시의 색감과 분위기는 유명했는데 이쪽은 현대 느낌이 강하게 나지만 후속작 카탈리스트는 미래지향적이며 SF 분위기가 강하다. 다만 르 코르뷔지에가 제안한 파리 개발 계획안에서처럼 낮은 건폐율의 도시는 아니다.[5] 벽체구조를 거부하고 이를 건축사조로 발전시킨 건 과거 기독교 내부에서 일어난 개혁운동인 이신론(理神論, deism, =자연주의)이 구조주의, 순결주의, 합리주의 등을 만났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엔 '기둥'이라는 구조의 합리성을 증명하기엔 과학의 발전이 너무나도 느렸다. 이후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도미노 구조만큼은 아니지만 기둥이 주가 된 건물도 더러 생겼다.[6] 한국어로 '새로운 정신'이라는 뜻. 르 코르뷔지에에 걸맞는 잡지명이다.[7] 이는 현제까지도 가구 제작이나 리모델링에 대한 척도로서 사용되고 있으며 그 나라에 맞는 치수로 변형하여 사용되고 있다(서양인과 동양인의 키와 비율이 다르듯이)[8] 방향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면 보통 건물의 정면을 말한다.[9] 다 쓰지 않은 것은 아니고 근 현대에 코르뷔제의 영향을 받은 건축가는 최소한 한 번 쯤은 썻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한국에선 김중업씨의 서강대학교 본관건물.[10] 드 하빌랜드 코멧이 1950년대 극초반에 나온 제트 여객기이긴 한데 공중분해 사고로 인해 인기가 떨어져 금방 사라졌다.[11] 다만 '방리외' 처럼 코르뷔지에의 구상을 일부나마 실현시킨 아파트 단지들이 급격하게 슬럼화되고, 흑인과 무슬림 등 이민자들의 차지가 된 점을 볼 때 서유럽인들의 취향과 맞지 않아서라고 보는 것이 더 신빙성 있다.[12] 단, 대한민국에서 필로티 구조가 보편화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건 기술의 문제보다는 벽체 구조가 더 저렴하다는 경제적 문제 때문. 오히려 구식 아파트에서 필로티 구조가 쓰인 경우가 종종 있다.[13] 정식 명칭은 노트르담 뒤 오 경당(Chapelle Notre-Dame-du-Haut de Ronchamp)이다. 코르뷔지에가 지은 새 건물이 들어서기 전에 있던 건물은 실제로도 규모가 작았기 때문.[14] 그런데 위키피디아에서는 현행 프랑스 법률상 촬영권의 자유(FOP)를 인정하지 않는데다 코르뷔지에 건축물에 저작권이 걸려있다는 이유로 위키미디어 공용자료실에서 사진들을 전부 내려버렸다. 현재 위키피디아 항목에는 어떻게 사진이 올라와 있는데, 저작권 표기가 좀 쩔어주게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