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7 14:49:56

조국해방전쟁 승리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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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해방전쟁 승리 기념일
祖國解放戰爭 勝利 記念日
파일:external/www.rfa.org/60years_war_305.jpg
1953년 7월 27일
2023년 제70주년

1. 개요2. 실상

[clearfix]

1. 개요

북한의 공휴일. 날짜는 6.25 전쟁의 휴전 협정 체결일인 7월 27일이다.

2. 실상

명칭을 보면 전쟁에서 이긴 날이라는 뜻으로, 북한에서는 6.25 전쟁을 자신들이 이긴 전쟁이라며 성대하게 기념행사를 연다.

그런데 6.25 전쟁 당시의 실상을 보면, 전쟁의 원인인 김일성이 한반도 적화통일을 노리며 전쟁을 벌였는데 한반도 적화통일에 실패하였으니 당최 뭘 이겼다는 건지 알 수 없다. 정확하게는 대한민국 국군유엔군의 반격에 북한을 아예 삼켜버리기 일보직전의 상황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 덕에 구사일생한 뒤 현 휴전선을 기준으로 치열한 공방을 벌이다 휴전이 성립된 덕에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으니 그들이 성대하게 기념행사를 할만하긴 하다. 하지만 이들이 굳이 승리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이유는 본인들이 조국통일을 명분으로 전쟁을 벌였다가 미군에게 밀릴뻔 한 위기를 넘긴 날로서 기념하면 부끄러우니까 자기들만의 힘으로 미제를 이겼다면서 이기지도 않은 승리를 강조하는 것이다.

남침 이후 기갑전력이 없던 한국군 + 애치슨 라인 설정 이후 미군의 주일미군기지로 향한 대대적인 철수 + 국군의 위로성 휴가 부여로 공백상태였던 상황을 이용해 기습침공으로 짧은 시일 내에 서울을 점령하고, 얕본 미국의 스미스 특수임무대까지 밀어버리며 낙동강 전선까지 밀어붙이는 등 전쟁 초반에는 분명 이기고 있었으나 한국군과 유엔군인천 상륙작전에 당한 뒤 보급로가 끓기면서 되려 포위작전에 휘말려 후퇴하느라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평양, 원산을 다 빼앗기면서 도망친 끝에 평안북도 강계까지 줄행랑을 쳐서 김일성이 강계 비밀 벙커에서 두려워하며 중국, 소련에게 지원을 거듭 요청하며 패배 직전까지 몰린 것을 생각하면, 도무지 뭘 이겼다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만약 중공군의 참전이 없었다면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층들은 중국이나 소련으로 도망쳐서 망명객 내지는 괴뢰정부 수반으로 일평생 살아야 했을 것이다. 남한도 유엔군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완전히 밀어버리지 못한건 마찬가지니 이쪽도 딱히 이겼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단 북한이 이긴 게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6.25 전쟁은 일단은 무승부이지만, 북한김일성의 정복욕에 의해 선제 공격을 한 전쟁이기 때문에 누가 이겼냐를 따지면 오히려 수성에 성공하면서 최종적으로 북한의 영토를 3300 km2[1]나 빼앗으면서 북진에 성공한 대한민국이 명백히 이겼다고 봐야 맞다. 임진왜란의 경우에도 조선의 피해가 일본의 피해보다 엄청나게 컸지만 조선이 방어에 성공했기 때문에 조선의 승리이다.

게다가 UN군은 중국이 기갑전력 없이 오로지 인해전술에 초반에는 당했으나 매튜 리지웨이 장군이 인해전술에 대한 카운터 전략을 짠 뒤 다시 북진을 하고 있었고 이 북진속도를 늦추기 위해 중국군과 북한은 땅굴을 파서 대응하며 격전을 벌였다. 결정적으로는 UN군은 전쟁을 더 할 여력이 있었으나 2차대전이 끝난지 단 5년만에 벌어진 전쟁에 피로감을 느껴 반발했던점 + 몰래 지원하던 소련군도 참전하면 세계 대전이 벌어진다는 두려움[2]이 더해지면서 북한은 구사일생한 셈이었다.

또한 북한이 6.25 전쟁에서 자기들이 패배했음을 스스로 시인하는 짓을 한 게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박헌영을 사형에 처한 것이다. 박헌영의 행보를 보자면 김일성과 같이 6.25 전쟁을 일으킨 주범이기 때문에 만약 북한이 6.25 전쟁에서 이겼으면 박헌영의 입지는 전쟁영웅 그 자체가 된다. 전쟁에서 승리했는데 어째서 자기네들을 승리로 이끌어준 전쟁영웅을 숙청할까?

일단 북한은 전략적으로 보아도 남한을 적화한다는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고, 되려 자기네들이 박살날 뻔 했다. 영유 면적으로만 봐도 삼팔선휴전선을 비교해보면 정작 남한 쪽이 영토는 더 많이 얻었다.[3] 특히 철원군 일대(강원도의 대표적인 곡창지대)를 탈환하면서 북한 농업에 타격을 줬고 전체적으로도 남한이 북진했다.

파괴된 피해 규모 역시 전국토가 남김없이 폭격당한 북한 쪽이 훨씬 더 컸다.[4] 더군다나 1940년대 북한에서 알아주는 공업도시였던 원산시가 장난이 아니었는데 미 공군이 원산 그 한곳만큼은 박살내고 박살내고 또 박살을 내버려서 아예 뿌리를 뽑아버렸다. 미 공군이 원산에 가한 폭격 총합은 거의 핵폭탄에 필적한 수준이다. 한마디로 원산이라는 도시 자체가 완전히 증발해버린 것이다. 그 결과 그나마 공업이 발달했던 북한은 그 '공업'마저 잃고 6.25 전쟁으로 인해 경제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

이처럼 내막을 들여다보면 도저히 이겼다고 할 수 없는 전쟁이라, 북한에서는 '아무튼 우리가 미제와 그 괴뢰정부를 상대로 이겼다'며 일방적으로 주장하고 사실 6.25 전쟁의 구체적인 실상을 알리기는 꺼린다. 그저 "모래로 쌀을 만들고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축지법으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다니는" 신묘한 병법으로 이겼다는 전래동화에나 나올 법한 허황된 소리만 늘어놓을 뿐이다.

또한 '남조선 인민들을 미제들로부터 해방한다'는 명분을 내걸며 타이틀을 건 조국해방전쟁이라는 표현 자체부터가 틀렸다. 한국전쟁은 명백히 김일성의 야욕에서 비롯한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이며 북한에서는 "미국이 먼저 괴뢰정부 남한을 부추겨 북침을 했으나 김일성의 훌륭한 지휘로 남측 괴뢰군을 단숨에 무찌른 뒤 자신들이 미국에게 항복을 받아냈다"고 주장한다.[5][6] 앞에서도 대구와 부산을 지켜냈으니 우리의 승리라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북한 지역의 라선 지역과 신의주 시 등 북한도 규모가 있는 도시를 점령 당하지 않았으며, 북한이나 한국이나 전 국토가 초토화됐음은 다름이 없다.

또한 "전 군이 다 쌈싸 먹혔다" 를 근거로 들어 북한이 이기지 못했다고 주장하나, 개전 초기 한국군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패주에 패주를 거듭하며 낙동강 이남으로 후퇴 한 것을 생각하면 "전군이 압도적인 화력으로 유린 당했다. 그러므로 북한군의 승리다" 라고 말할 수 있으므로 이것도 근거라 볼 수 없다.

다른 근거로 북한이 한반도 적화라는 전쟁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기에 북한의 승리가 아니다 라고 주장했지만, 대한민국의 전쟁 목표 역시 공산주의의 격멸이었지 공산군 저지는 목표가 아니었다. 즉 대한민국도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으므로 전쟁을 이겼다고 볼 수 없다.

애초에 유엔군이 북한군을 밀어버리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라 적어 놓은 머릿말도 틀렸다, 휴전은 엄연히 대치 중이었던 상황에서 했던 것이지 진정으로 밀어버리기 일보 직전이었다면 북한과 협상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결론은 양국이 총력을 다해 서로를 파괴하고자 했으나, 양국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휴전"이라는 기약 없는 평화를 받아들였다. 즉 이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승자 역시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1] 서울시 면적의 약 5.5배[2] 비밀문서에 의하면 스탈린은 어디까지나 북한 군사지원과 중국에게 전쟁비용 대준다고 꼬드겨서 중국을 이용해 먹는 등 참전의사는 없으며 어디까지나 공군지원만 조금 해줬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런 사실을 알 턱이 없는 미국과 UN군은 중국의 참전도 성가신데 소련의 참전까지 더해지면 3차대전이 벌어진다고 판단해 휴전에 합의했다.[3] 대신 개성(당시 광역시급), 장단군 일대를 내주면서 북한과 서울과의 거리가 약간 더 가까워졌다. 사실 38선 때는 연천군이 북한이였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고 임진강 등을 경계로 하여 북한의 침입을 막기에 더 유리하다. 대신 삼팔선과 휴전선을 비교하면 영토의 양으론 북한이 졌지만 질적으론 남한이 낫다. 물론 삼팔선이라도 개성과 옹진반도를 남한이 활용하기는 힘들다.[4] 물론 남한도 피해가 컸지만 인천 상륙 작전 직전 우리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을 때도 부산광역시대구광역시는 지켜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반도 전체에서 포격이 없었던 유일한 곳이 해운대 뿐이었다. 인천 상륙작전 직전에조차 미군은 한반도 대부분을 거의 폭격으로 도배하다시피 했다.[5] 그러나 정작 김일성은 퍼포먼스를 위해 8.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며 총공세를 지시했다가 공세종말점에 빨리 도달하게 만들었고,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미국을 포함한 UN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속절없이 밀려 평양까지 들이닥치자 평양을 수비하는 군대와 민간인들에게 평양을 피로 수호하라며 방송을 남긴 뒤 본인은 헐레벌떡 강계로 도망쳤다. 얼마나 급하게 도망쳤으면 본인이 타고다니던 고급차량을 국군이 노획할 정도였다. 강계 지하벙커에서도 중국이나 소련에게 지원요청을 하면서 벌벌 떨고 있었고 이후 중국군이 인해전술이 밀어붙이자 그제서야 지하 벙커서 나와 돌아다녔으며 이후 중국군에게 지휘권을 넘겼으나 사령관 펑더화이에게 빨리 공세를 진행하라며 재촉하다 싸대기를 맞는등의 추태를 보였다.[6] 다만 이들이 주장하는 북침설대로라면 북침이 실패한 것이 되니 자신들이 승리했다는 표현이 아주 엉터리까지는 아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