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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해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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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 전쟁 때의 중공군" 문단을 제외하고 '개요'를 포함한 문서 내에 중공군 관련 서술을 삭제한다.
  • 인해전술의 부작용에 대한 내용을 '2.1. 정확한 의미' 문단 내에 서술하며, 그 내용은 "사실 모든 전쟁과 전투에 다 해당되는 말이지만, 인해전술은 결국 다수의 인력이 투입되는 것이므로 더욱이 인명의 피해를 감수해야만 한다. 인해전술을 더 크게, 더 자주 쓴다면 사상자들로 인한 부담도 당연히 더 올라갈 수 밖에 없다. 사상자가 많다는 것은 승리했든 패배했든간에 큰 전쟁을 벌였다는 것이고, 그만큼 인구가 줄어들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국가의 3대 요소 중 국민들이 그만큼 없어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로 한다. 단, 부작용에 대한 위의 서술은 초안일뿐 고정이 아니며, 사용자들이 자유로이 편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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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장진호 전투에 투입된 중국 인민지원군[1]
1. 개요2. 수적 우위의 중요성
2.1. 정확한 의미
3. 역사상의 사례
3.1. 6.25 전쟁 때의 중공군
3.1.1. 전쟁 초기3.1.2. 유엔군의 대응3.1.3. 결론
3.2. 수나라3.3. 소련3.4. 오스만 제국3.5. 기타
4. 여담5. 매체에서의 인해전술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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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리가 가진 총알보다 그 새끼들 숫자가 더 많다는 거! 아세요?!
영화 <고지전>, 신일영 대위
인해전술()이란 전투원의 손실을 고려하지 않고 압도적인 인원을 한 곳에 쏟아부어 상대를 압도하는 전술을 말한다. 한자어에서 '인해'는 '인산인해'(, 수없이 모인 사람들의 무리가 마치 산처럼 크고 바다처럼 넓다)라는 말이 대변하듯 '많은 사람들' 그 자체, 즉 물질적 양을 표현한 말인 반면, 인해전술을 뜻하는 영어 '휴먼 웨이브 스트래터지'(human-wave strategy)는 뉘앙스가 약간 다르다.

'한류'를 '코리안 웨이브'(Korean Wave)라 하듯이 웨이브는 물결을 뜻하는 말로서 휴먼 웨이브는 많은 사람들이 '물결처럼 밀려드는' 행위 자체에 주목하여 표현한 말이다. 영어를 굳이 직역하자면 '인파전술'에 가까운데, 그렇다고 영어가 본류고 우리말은 영어를 번역해야만 그 존재성이 입증되는 말은 당연히 아니므로 그냥 서로 표현 포인트가 다르구나 하고 이해하면 된다. 막말로 고정된 '산'이 아니라 출렁이는 '해'라고 표현한 것 자체에 '물결'의 함의까지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그뿐.

비슷한 영어단어로 swarming이 있는데, 이쪽은 곤충과 같은 무언가가 셀 수 없이 많은 숫자로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을 묘사하는 데서 유래한 단어다.

2. 수적 우위의 중요성

양은 양만의 질이 있다.[2]
이오시프 스탈린
인해전술을 단순히 물량만 믿고 돌격해버리는 골빈 행위로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물론 이런 발상으로 전쟁했던 골빈 지휘관도 많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인해전술이란 어디까지나 작전지역에서 적보다 수적 우위를 확보하는 것에서 출발하며, 이것은 고대의 전쟁부터 나폴레옹의 용병술에 이르기까지 보병 전투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전술인 적보다 우월한 숫자로 협소한 적을 공략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것이야말로 승리를 위한 최단의 방법이자 최고의 방법인 것은 자명하다.

다만 이는 일반적인 '인해전술'의 설명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다. 위에서 말하는 것은 지형이나 보급, 기동력 등 다른 요소를 활용하여 실제 전투행위에 임하고 있는 적의 병력을 아군의 병력 이하로 제한하여 전체 병력 수가 적음에도 부분적, 일시적으로 병력상의 우세를 만드는 것이다. 반면 인해전술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사람이 바다처럼 보일 만큼 압도적인 병력을 이용해 힘으로 밀어붙여버리는 것을 말한다.

정확한 의미의 인해전술은 우세한 인력을 특정지역에 집중적으로 투입해서 전투원의 희생을 고려하지 않고 계속 공격함으로써, 방어부대를 수적으로 압도하여 돌파구를 형성하고 방어지역을 분단·고립시키는 것을 말한다. 막대한 인명피해를 수반하게 되는 전근대적인 전술이지만, 방어부대에게 심리적인 압박과 공포감을 주어 일시적인 승리를 거둘 경우도 있다.

란체스터 법칙에 따라 원거리에서 조건이 동일한 경우 두 편이 붙었을 때 단위 시간당 피해자의 수는 현 병력비의 제곱의 반비례라고 알려져 있다. 좀 더 쉬운 말로 예를 들자면 A국과 B국의 병력이 100대 50이라고 했을 경우, 병력비는 2:1이므로 피해자의 비는 2:1의 제곱의 반비례인 1/4:1이 된다. 즉 단위시간동안 B국의 피해자 수가 40명이라면, A국은 10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B국의 50여명의 병력이 전멸할 동안 A국은 10여명의 피해밖에 보지 않는다! 이 법칙은 대부분의 도상연습이나 시뮬레이션의 바탕이 된다.

결국 적에 비해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하는 것이 아군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 수학적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인해전술은 인명경시가 아니라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전술이라는 역설적 명제도 성립한다.
나폴레옹이 병력을 어떻게 운용했는가 보여주는 단적인 예시. 전체 전선에서는 병력이 적군보다 적지만 선택과 집중으로 한개 전투에선 적보다 숫적 우위를 확보했고 이후 각개 격파를 이어간다.

나폴레옹은 전체적 전역에서는 연합군보다 숫자가 적었음에도 항상 접전 지역에서는 수적 우위를 확보했고, 그것은 오랫동안 그가 승리를 이어나가는 원인이 되었다. 부하가 나폴레옹을 칭송하며 "폐하께서는 항상 소수로 다수를 이겼습니다"라고 말하자, 나폴레옹은 이를 반박하며 "그렇지 않다. 나는 늘 다수로 소수를 이겼다"라고 발언했다는 야사도 있다. 또한 나폴레옹은 "대군(大軍)에게 병법은 필요 없다"라고 말하였다. 적에 비해 압도적인 물량을 확보한다면 병법이 필요 없을 정도로 물량의 중요성이 크다는 뜻이다.

테베의 신성부대의 활약으로도 유명한 레욱트라 전투 또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테베군은 스파르타군보다 전체 병력이 작았지만 진형의 좌익에만 병력을 집중, 좌익의 접전 지역에서 일시적이지만 압도적인 숫적 우위를 확보했고 기세를 몰아 테베군의 좌익과 마주보던 스파르타군의 주력인 우익을 분쇄하고 전투를 성공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었다. 어차피 전 진형에서 숫적으로 불리한 바, 다른 진은 버틸수 있을 정도의 병력만 배치하고 필요한 부분만 전력을 집중해 마주하는 적보다 숫적 우위를 노린것이고 성공한것이다.

보어 전쟁 당시에 인구 50만에 병력 7만의 보어를 정복하기 위해 영국이 45만 대군을 투입한 것도 대표적인 인해전술 가운데 하나이다.

전쟁사를 살펴보더라도 많은 병력과 인프라, 자원을 균형 있게 가진 쪽이 승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역사가와 호사가의 입에 오르내리는 영웅의 '활약'은 대단한 승리가 부각되어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지, 소위 '대첩'이라 할 만한 것은 전사에서 그리 흔치가 않다. 많은 적을 상대한 영웅이 전례에 없던 뛰어난 영웅이라든가, 적보다 더 우수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든가, 적장이 바보라든가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숫자가 많은 쪽이 적보다 유리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당연한 이야기다. 이에 관해 중국의 이름난 병법가인 손자손자병법에서 "당연히 이길 수 있는 싸움에서 이기는 자는 별다른 칭찬을 받지 못한다"고 서술하였다.

전쟁을 이기는데 정말 필요한 것은 언제 나올지 모르는 영웅이 아니라 싸우기 전 이길 상황을 만드는 전략이다. 영웅이 나오는 것이 나쁠 건 없으며 '영웅'이라고 부를 만큼 활약이나 업적을 남긴 건 분명히 잘한 일이지만, 그런 영웅부터가 흔치 않으니 당연히 영웅 없이도, 즉 상대 병력과 비슷한 수준의 훈련을 받았을 병사들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 즉 인해전술 또한 단순히 병력만 투입하는 무식하고 전근대적인 방법이 아니라 엄연한 전술이라는 범위 안에 속한다.

물론 무작정 병력만 갖다 박으면 이긴다고 생각하면 큰일이다. 행여나 양쪽 다 그런 생각만 한다면 단순한 소모전에 불과해진다. 열세인 상대편이 전략으로 이길 상황을 만들어버린다면 이 때는 장렬한 자폭을 한 셈이 된다. 이렇게 생각없이 병력을 꼴아박는 짓을 파상적(波狀的) 공세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치장하기도 한다. 전투 시 돌격참호 개척을 반복하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수많은 사상자를 내는 무모한 돌격을 파상적 공세라고 부르면서 생각 없이 돌격한 게 아니라 전술적 행동이었다고 곧잘 포장했고, 이 때문에 군사 관련 역사적 인물에 대한 사학자들의 잘못된 미화 및 재평가가 남발되었다. 즉, 생각 없이 머릿수만 믿고 병력을 꼴아박는 실책을 저질러 패전을 부른 인물인데도 파상적 공세를 펼치며 분투했지만 졌다는 식으로 미화해버리는 것이다. 물론 불과 30여년 뒤에 이 용어는 수적 우위를 가지고도 졸전을 펼친 수많은 사례들을 정중하게 까는 데에나 사용된다.

애초에 대병력은 아무나 굴릴 수 있는 게 아니며 충분한 지휘력이 받쳐줘야 한다. 80만 대군을 출동하였다가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서 혼란을 겪고 자멸해버린 비수대전반면교사. 게다가 숫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식량을 비롯한 보급 물자 소모도 많아진다는것을 뜻한다. 보급선의 관리와 충분한 보급 물자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장기전으로 돌입할 경우 자멸의 길을 걷게 된다.

2.1. 정확한 의미

윗 단락에서 강조하듯 분명 인해전술은 '병력의 수적 우세의 이점'을 노리는 전략 중 하나이다. 하지만 단순히 병력을 많이 동원하는 것만으로는 인해전술이라고 부를 수 없다. 인해전술의 정확한 의미는 '아군 병력의 질적 수준과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아군 피해를 고려하지 않고 최단 시간 내에 적에게 돌격하여 난전을 유도, 적을 붕괴시키는 것'이다. 적을 압도하는 병력과 화력은 모든 지휘관이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질적 우세[3]의 확보에는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질적으로 우세하지 못한 상황에서 지형적 이점 등의 다른 요소도 없이 전투를 벌여야 할 때 수적으로는 우세하다면 지휘관은 인해전술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해전술은 단순히 병력을 적의 우세한 화력에 꼴아박는 것만은 아니다. 지휘관이 휘하 병력들에게 적의 우세한 화력에 두들겨 맞아가면서 돌격을 하라고 지시하려면 그만큼 병사들에게 동기부여가 되고 지휘관이 병사들을 통제하고 있어야 한다. 이 와중에도 최대한 손해를 줄일 방법을 동원해야 적의 화력을 최대한 낭비시킬 수 있다.

사실 모든 전쟁과 전투에 다 해당되는 말이지만, 인해전술은 결국 다수의 인력이 투입되는 것이므로 더욱이 인명의 피해를 감수해야만 한다. 인해전술을 더 크게, 더 자주 쓴다면 사상자들로 인한 부담도 당연히 더 올라갈 수 밖에 없다. 사상자가 많다는 것은 승리했든 패배했든간에 큰 전쟁을 벌였다는 것이고, 그만큼 인구가 줄어들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국가의 3대 요소 중 국민들이 그만큼 없어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3. 역사상의 사례

3.1. 6.25 전쟁 때의 중공군

3.1.1. 전쟁 초기

계속 밀고 가서 압록강 두만강 라인까지 우리가 올라갔습니다.
완전히 우리가 통일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중국공산당이라고, 그래서 중공군이라고 불렀는데,
중국 입장에서는 코앞까지 UN군이 밀고 들어왔으니까,
위기감을 느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전투병력을 파견하는데,
원래 중국 하면 삼국지! "지략이 뛰어나다"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것 다 필요없어요. 그냥 전술 하나, '인해전술'입니다.
얼마나 군인 숫자가 많았느냐면, 속설이지만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기 숫자보다 군인 숫자가 더 많았다" 그래서 3명 중 1명에게만 소총을 주고,
나머지 두 명에게는 피리와 꽹과리를 주었다는 게 아닙니까?
설민석의 영화 국제시장 1부. 6.25전쟁과 흥남철수[4]
북진작전 시 유엔군의 병력은 약 33만명이었고, 이 중 북한까지 진격한 전방 부대의 규모는 약 13만명 정도이다. 반면 유엔군의 북진을 막기 위해 한반도에 개입한 초기에 중국인민지원군은 1제대, 13병단 예하 18개 사단 규모의 18만 명, 2제대, 9병단 예하의 12개 사단 규모의 12만 명 정도로 합쳐서 30만명 규모였다. 이렇게 초기에는 규모 차이가 크지 않았으나, 중공군의 숫자는 계속 늘어서 70~80만 정도에 이르는 숫자가 한반도에 주둔하게 되고, 51년 춘계대공세 때는 70만의 대군이 동원되었으며, 중국측 자료에 의하면, 누적인원 총 298만명이 한국전쟁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압록강 너머 도주했던 재편된 북한군 30만까지 가세해 춘계대공세때는 100만에 육박하게 되어 확실히 유엔군/국군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 이렇듯 중공군,북한군의 병력수가 아군보다 우세했던 것 자체는 당연한 사실이고, 다만 이것을 '아무 생각없이 무식하게 들이붓기만 했다'라는 인식에 대해서는 한국전쟁사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재평가가 되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구대전법, 그러니까 큰 자루전법이란 전술을 사용했는데, 보병을 우회기동시켜 적 후방에 깊숙히 찔러넣어 퇴각로를 차단하고, 뱀이 아가리를 벌린 듯한 형상으로 포위한 뒤 적을 각개격파하는 것이다. 이러한 중공군의 전략은 소련군 식의 기동전을 전차나 트럭 같은 기계화 부대가 아니라 보병의 발, 특히 국공내전에서 단련된 산악행군 능력으로 실행한 것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최초 돌파구를 만들기 위해 병력을 집중할 때나 깊숙히 우회기동한 부대가 포위섬멸에 나설 때 당하는 입장에선 말 그대로 중공군의 파도에 묻혀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5] 인해전술로 인식됐다.[6]

하지만 엄연히 일종의 포위섬멸전으로 그냥 별 생각 없이 전면에서 수로 밀어붙이는 것과는 다르다. 실제로 당시 중공군은 일제, 미제 무기 등을 다수 가지고 있었고 소련제 기갑장비를 다량 보유하고 있었으며 중일전쟁국공내전을 거치며 단련된 베테랑들이었는데다가[7] 한국에서의 인식처럼 단순한 인해전술만 보여준 게 아니라 심리전, 게릴라전, 기동전, 포위작전 등 다양한 전술을 활용했다. 중공군은 미군의 공중 정찰을 피해 낮에는 갱도나 비트에 숨어있다가 시야가 제한된 야간에 능선을 타고 기동하는[8] 주도면밀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기동 속도는 산을 타면서도 하루에 20여km 수준[9]이었으니 국군과 미군은 중공군을 상대하면서 그들의 진격 속도를 예상하지 못하고 포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10]

게다가 중국군 참전 초기에는 유엔군이 중국군의 규모를 최대 6~7만 명 규모로 오판해서 중국군이 싸움을 피한다고 보고 중국군의 유인에 말려든 탓에 우회포위에 걸려들어 각개격파되면서 중국군은 당초 예상보다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애초에 지휘관인 펑더화이가 수 많은 전쟁에서 그 기량을 여실없이 증명한 명장이었고, 펑더화이도 미군이 진격과 승리로 방심하고 있을테고, 미군은 도보 행군을 기피하고 야간 전투에 취약하고 공중 지원에 과도하게 의존한다고 정확히 예측했으니 지는건 필연이었다.

다만 이 전술을 실행할 때 우선 소규모의 선봉대[11]길잡이나 미끼 역으로 먼저 보내고 본대는 적의 방어선을 더듬어가며 우회해 포위 후 꽹과리와 나팔 소리를 신호로 수많은 인원들이 한꺼번에 몰려오고[12] 가까스로 이들을 격퇴해도 얼마안가 그 숫자의 인원들을 어디선가 또 보충해 어택땅을 재차 반복하니 이들을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탄약과 인원을 질릴 정도로 계속 소모하는 소모전이라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선봉대와 싸우는 와중에 우회기동한 본대 병력에 의해 포위당해 끝장나는 것이다.

이 사례 중 하나인 임진강 전투를 다룬 '한국인만 몰랐던 파란 아리랑'이란 자서전[13]에서도 서서히 소모전 양상으로 치닫자 대대장까지 "머잖아 우리가 소총수 역할을 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꺼낼 정도로 인해전술은 보급 문제나 심리적 문제도 적잖이 일으킨다.

사실 중국이 왜 이런 전술을 채택했는지에 대해선 장비나 화력 면에선 유엔군에 비해 엄청 부실하지만 실전경험 있는 병력만은 많다는 점에 기인한다. 더 정확히는 기계화가 부족한 상황에서 어떻게 소련식 기동 포위섬멸전을 펼칠 것인가 고민하다 산악행군 능력이 뛰어난 베테랑 병사와 그러한 작전의 지휘경험이 많다는 점에 착안해 기계화를 보병의 발로 대신하고[14], 이것이 산이 널려있는 한국의 지형과 잘 맞아떨어져 시너지 효과까지 일으킨 것이다. 아무튼 화력과 기계화,보급이 모두 열세힌 이런 상황에서 이기려면 가진 장점인 보병들을 대량으로 보내 열세를 극복하는 수밖에 없고 실제로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은 미군의 화력 앞에 큰 출혈을 강요당하면서도 특유의 고속행군과 물량빨로 미군의 방어선을 포위하는데 성공했고, 퇴로까지 차단시켰기에 미 해병대는 위기에 몰려 직사 포격으로 중공군을 상대해야 할 지경이 되었기에 고군분투 끝에 흥남 철수로 탈출할 수 있었다.[15]

이때문에, 펑더화이는 정말 어쩔수 없이 공세적으로 나가야 할 수 밖에 없는 이상(eg: 장진호 전투) 확실하게 승리 가능한 상대를 먼저 공략하기 위해 몰아칠때 인해전술로 강력한 제파공격을 폏쳤으며, 화력이 강한 미군과 유엔군보다는 아직까지 전투경험도 무장상태도 빈약한 국군을 주로 노리고 섬멸전을 벌일때 인해전술을 사용했다. 이시기 국군이 대패한 전투 대부분은 처음부터 합동작전이 아닌 미군 주력과 떨어진채 소수의 유엔군 정도가 지원 나와있는 틈을 노린 인해전술에 당한 것이다.

3.1.2. 유엔군의 대응

그러나 이런 숫자에만 의존한 보병전술은 상대가 자리잡고 화력을 언제든 무한에 가깝게 퍼부을 수 있으면 그냥 수많은 병력을 내다버리는 행위로 전락한다. 실제로 미군은 처음에는 국공내전을 통해 기동전에 능한 중국군의 신출귀몰한 병력 운용에 초반 대응에 실패했지만, 중국군의 전략에 대응하여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탄약 보급률을 5배로 늘림으로서 미군이 화해(火海)전술로 거세게 대응하자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역으로 패하는 경우가 많아져서 점점 미군과의 정면승부를 꺼리고 야간에만 공세를 펼치게 되었다. 반대로 한국군 및 다른 UN 연합군들은 중국군에게 모든면에서 열세이다보니 중국군은 이들을 처음부터 일부러 집중공략해 쏠쏠한 재미를 보았고, 점점 미군보단 사정이 열약한 타 UN군까지 우선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매튜 B. 리지웨이는 베테랑 야전군인답게 현장에서 전투를 치른지 몇달만에 중국군의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했고, 1951년 여름부터 수적 주력이 된 한국군이 후방으로 물러난 부대들에게 사단, 군단급 훈련을 시켜 전투와 작전 능력을 일신하고[16] 또한 이 시기 벌어진 현리 전투, 사창리 전투를 반면교사 삼아 결사의지를 다지며, 미군의 화력지원으로 미군과 동등한 수준이 되자 중국군은 용문산 전투를 시작으로 한국군을 상대로도 점점 고전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인해전술의 치명적인 약점인 장기전 때 발생하는 보급 문제와 김일성, 마오쩌둥의 과욕이 덮쳐오면서 중국군은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이미 연합군을 38도선 남쪽으로 밀어낸 시점에서 중국의 목적은 달성되었지만,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욕심을 부려 남침을 강행했고, 펑더화이는 지나치게 길어진 보급선과 원시적인 보급 수준을 노린 폭격에 보급이 차단되어 병력들이 굶주리는 문제가 심각하니 몇번이고 남진을 중단하고 보급 좀 신경써달라고 했지만 무시됐다. 이런 상황에 이미 지평리 전투에서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중공군은 UN군에 반격에 다시 서울을 뺏기고, 이후 철원 평야를 두고 벌어진 백마고지 전투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도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다. 1951년 말에는 맹조의 발톱 작전으로 금강산 일대까지 북진을 구상했을 정도였다.

이런 연합군의 북진을 저지한 것은 전쟁의 장기화와 확전을 원하지 않던 미국측의 휴전 의지였고, 상대적으로 고지대를 점유한 공산군은 지형의 이점과 전면전이 제한된 환경을 십분 활용해 교착상황에서 경험이 풍부한 산악기동전 위주로 약한 고리를 공략해 인해전술의 신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3.1.3. 결론

어쨌든, 실제 역사와는 반대긴 하지만 '한국전쟁 당시의 중공군'에 대한 대중이 가진 일반적인 이미지는 나팔과 꽹과리를 치며 개미떼처럼 몰려오는 무시무시한 놈들이다. 게다가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의 중공군 노획물 중 아편이 나오자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아편을 탄 독주를 거하게 먹인 다음 맨몸에 꽹과리만 들려서 돌격시겼다는 풍문까지 생기게 되었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중공의 선전매체에서 "적이 십만 발의 총탄을 가지고 있다면 우린 십만 한 명의 병사를 보내 이긴다!"라고 홍보하기도 했다. 이는 1979년의 중월전쟁 때에도 마찬가지라 "적이 여러발을 쏘는 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여러명이 한발씩 정확히 쏘면 된다"는 논리를 폈다.[17] 물론 나팔과 꽹과리를 친 것도 맞고, 개미떼처럼 몰려온 것도 맞긴 하지만 별다른 세부작전계획 없이 그냥 아무튼 쪽수로 갖다 박으면 이긴다는 무식한 생각은 아니었다.

마오쩌둥이 한 말인 "목표를 위해서는 희생을 두려워하지 말라"를 6.25 때 승리를 위해 인명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라는 의미에서 사용됐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사실은 "인간은 죽기 마련인데, 그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거나 또는 깃털보다 가볍다(人固有一死-惑重于泰山, 惑輕于鴻毛)."는 사마천의 말을 재인용한 것으로 이 뒤에는 为人民利益而死,就比泰山还重(인민을 위해 죽는다면, 이는 태산보다도 무거운 죽음이다.)라는 말이 붙는다. 이 말 자체는 항일전에 나선 전사들의 살신성인을 강조하기 위해 사마천의 말을 인용했지, 인명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라고 한 말이 아니고, 6.25와는 관련이 없다.

아무튼 앞서 언급했다시피, 6.25에 출병한 중공군은 한국에서 알려진 바와는 달리 수십년간 계속된 내전중일전쟁을 치르며 상당한 실전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휘관들도 명장들이 즐비했다.[18] 중공군이 치밀한 작전 없이 무모하게 머릿수만 믿고 싸웠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병력만 믿고 싸운 것이 아니라 믿을 것이 병력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작전을 썼고 상당한 실전경험과 철저한 은밀기동, 포위전술이 있었기에 초반에 작전이 먹혀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구대전법은 몇년 후 중공군이 중인전쟁에서 인도군에게 써먹어서 대승을 거두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보급기지가 인도보다 몇배나 멀리 떨어진 히말라야에서[19] 모든 보급을 등짐이나 야크에 의존해서 그런 승리를 거뒀다는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당시 중국인민지원군이 인해전술을 어느 정도 차용한 것은 맞으나 인해전술이 주력 전술이었던 것처럼 인식되어 있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당시 중국군들은 상술 되었듯이 국공내전을 겪으며 숱하게 전투를 치렀던 베테랑 군들이었고, 그걸 지휘하는 최고 지휘관부터가 우수한 최고급 인재였으며, 장비의 질도 우수했으며[20] 오직 머릿수 하나만 믿고 단순무식하게 밀어붙이는 일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각종 전술들을 사용하여 연합군을 궁지에 몰아넣어 미군만 해도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머릿수로 밀어붙인다면 미군의 화력하에 병력이 갈려나가게 되고, 물론 연합군을 후퇴시키기는 했겠지만 다시 서울 아래로 밀어내기까지는 못 했을 것이다.

가끔 1920년대만 해도 총병력이 만 단위였던 중국공산당이 어떻게 수백만의 실전 경험 있는 대군을 중국을 통일한지 2년만에 확보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중공군은 이름만 중공군이지 대다수의 병력은 전향한 국민혁명군 출신으로 이 중에는 참전 경력이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부터 중공군이었던 병력도 무척 거대했다. 옌안 시절인 중일전쟁 종료 직후에도 전쟁 기간 동안에는 국부군 계열 유격대와 비정규군을 흡수했고 일본군과 공산군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화북 주민들이 대거 중공군에 입대해 정규군만 130만명에 달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여하간 이때 보여준 활약은 많은 사람들에게 강하게 각인되었고, 그래서 대부분 인해전술하면 가장 먼저 중공군을 떠올리게 된다. 이 때의 충격 덕분에 미군은 중국을 그 후에도 경계했으며 베트남 전쟁 때도 북진하면 자기들도 개입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진격을 금지했을 정도며 한국은 이후 엄청나게 많은 고화력 무기들을 비축하며 전 세계 최상위권의 화포를 보유한 유례없는 포방부로 거듭나게 된다.

요약하자면 6.25 당시 중공군은 엄청난 병력을 동원한 것 자체는 맞되, 그저 아무 생각없이 들이부은 건 아니고 부족한 차량화를 보병의 뛰어난 행군능력으로 대체하고 철저하게 은폐하여 유엔군을 완벽하게 기습하고 서울을 다시 빼았는데까지 성공했다. 그러나 화력과 보급의 열세, 필연적으로 많을 수 밖에 없는 병력소모라는 약점이 있었고 이것을 간파한 유엔군에게 다시 서울을 내주고 밀려나게 된다.

3.2. 수나라

여수전쟁에서 수나라가 113만의 대병력을 동원해서 고구려를 침공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수나라 군대는 요동 방어선을 돌파하지는 못했는데도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직접 타격하였다. 간간히 고구려 유격부대의 저항을 받았지만 살수대첩 이전까지는 병력을 온전히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요동 방어선을 뚫지 못했으면서도 평양을 공격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인해전술 때문이었다. 전방 방어선의 고구려군이 우회하는 적을 그저 두고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도 포위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방어선이라는 것이 말처럼 주욱 이어진 선이 아니다. 아군이 지키는 주요 거점들을 임의로 이은 개념에 불과하다. 그러니 압도적인 숫자의 적이 와서 인근의 아군 거점을 모조리 포위하고 일부가 아군의 후위로 들어간다면 방어하는 쪽에서 손쓸 도리가 없다. 당시 수양제의 113만 병력은 실제로 이것이 가능한 규모였다. 고구려는 무섭게도 이 모든 위협을 물리쳤지만 수도가 수나라군의 직접 공격을 받을 정도로 굉장히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즉 수나라의 전략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인해전술의 요소는,
  • 적을 각각 포위함으로써 적의 결집을 막고 분산, 고립시킨다.
  • 아군의 분산으로 적의 관심도 분산시킬 수 있다.
  • 아군의 주공을 감출 수 있다.
  • 적이 분산되므로 아군은 항상 수적 우세를 점한다.
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수나라도 고구려와의 교전에서 큰 피해를 보고 병력 손실이 많았다. 그래서 수나라가 망한 뒤의 당나라는 직접적으로 방어선을 돌파하기보다 지속적인 공격으로 방어선을 무력화시키고 우회기동하는 전략을 많이 취했다. 이때문에 고구려는 견디지 못하다가 끝내 멸망했고 신라도 나당전쟁에서 당나라 군의 이 전략에 크게 당하여 수도까지 위협을 받을 정도로 위기에 처하였다.

3.3. 소련

러시아인 특유의 인명 경시 풍조와 인력 동원 능력이 특히 부각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소련=전적으로 인해전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판이다. 냉전 시절 서방 전문가들에 의해 소련은 '숫자'라는 식으로 폄훼되어 왔고, 학계나 밀덕들 사이에서는 2010년대에 들어 그 오명이 벗겨지는 듯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서는 소련하면 무식한 인해전술이란 단어가 지워지지 않고 있다.

사실 소련군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 발전된 종심돌파이론을 채택했었다. 긴밀한 제병합동 구조 속에 막대한 포병지원과 항공력을 바탕으로 적을 포위시키고 여기에 대규모 전력을 투입하여 1파, 정예 2파, 증원 3파 식으로 돌파구를 확보하면서 적을 분쇄시키는 교리이다. 당시 서구 각국이 편협한 방어전에 얽매였던 것보다 기동전의 본질에 충실하였다. 흔히 인간으로 전차에 육장갑을 둘렀다고 비난받는 탱크 데산트도 아무 생각 없이 나온 전술이 아니라 적진 돌파 시에 순간적인 화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나왔다.

그럼에도 독소전쟁 초기에는 소련군이 물량에만 의존하는 무력한 모습을 보인다.[21] 독일의 기습으로 '실전'을 치르게 된 때에, 여전히 병력수에 비해 사관 육성 기관들의 전문 장교 공급력이 부족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 데다가[22] 스탈린대숙청으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고 가장 중요한 통신과 기동력, 화력 집중의 미비로 고등적인 전술을 구사할 수 없게 되었다. 군대 체계가 완전히 맛이 갔는데 옛날에 짠 좋은 전술 따위를 쓸 여력이 있을 리가 없다. 거기다 정치장교 등을 동원해서 유능한 편이었던 장교들의 재량권도 (의도적이진 않았지만) 구속하였다.

때문에 독소전쟁 초기 소련과 독일의 병력 손실비는 무려 20대 1에 달했다. 반동과 스파이들로 이루어진 이른바 형벌 부대를 대규모로 징발하여 대량으로 소모시키기도 하였다. 전쟁 중후반기에 소련군이 질적으로 성장하면서 독일과 소련의 손실비 격차는 1:1.3~1.5 정도로 좁혀지기 시작한다.

물론 당시 소련군들이 어느 정도 인해전술을 차용한 것은 맞으나 나름 전술전략은 상술되었듯이 탁월한 편이었고 우라돌격과 같은 비합리적이고 효율적이지 못 한 전술은 잘 사용하지 않았다. 애초에 나치독일 역시 전술과 전략, 화력과 장비, 병력수 등 모든 면에서 매우 강력하고 뛰어난 군대였기 때문에[23] 만일 소련군이 그러한 방식으로 맞섰다면 대숙청으로 군대가 허술해진 와중에 엄청난 인명피해만 내고 결과적으로 승리하지 못 했을 것이며 설사 한다고 해도 독일군을 폴란드 부근까지 밀어내지는 못 했을 것이다.

3.4. 오스만 제국

15세기와 16세기에 걸쳐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오스만 제국도 인해전술이라고 할 수 있는 전술을 사용했는데, '바시으보죽(Başıbozuk)'[24]이라고 부르던 비정규군을 대규모로 모집하여 전투가 벌어지면 선봉에 내세워 돌격을 시켰다. 이 바시으보죽들 중 약 65%는 전쟁터에서의 약탈을 노리고 자원한 유럽인 기독교도들이었으며[25], 이들은 비정규군이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의 정규군들과는 달리 제대로 된 군사 훈련을 받지 않았고 몸을 보호하는 갑옷이나 투구 같은 보호 장비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시으보죽들의 전투력은 매우 낮았고, 사실 그 때문에 오스만 군대의 장군들도 이들 바시으보죽들한테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시으보죽들이 아주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방어와 훈련 상태가 부실했으나[26], 대신 수가 무척이나 많았기 때문에 오스만 군대와 맞서 싸우는 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군대와 싸워 그들을 지치게 만드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당시 오스만 군대와 싸운 유럽 기독교 국가들에서 남긴 기록들을 보면, 이들 바시으보죽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죽여도 죽여도 계속 몰려와 마치 끝없이 물결이 치는 바다의 파도와 같았다고 한다.

게다가 바시으보죽들 중 상당수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유럽인 기독교도들이었기 때문에 오스만 군대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아무리 많이 죽어도 다시 모집을 하면 되기 때문에 손해를 볼 일이 없었다.

일단 이렇게 바시으보죽들이 돌격을 하여 이기든 지든 간에 적군과 싸워 그들을 지치게 만들면, 후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예니체리시파히 같은 오스만 제국의 정규군 부대들이 나서서 적군와 싸우는 것이 오스만 군대의 전술이었다. 이 전술은 매우 뛰어난 효과가 있었는데, 지치고 피로한 적들을 상대로 체력이 왕성한 부대가 새로 나타나서 싸운다면 당연히 유리하기 때문이다.

3.5. 기타

호주군과 토끼 사이 전쟁에서 토끼들은 어마어마한 토()해전술로 호주의 멘탈을 털어먹었다.

인간끼리의 전술은 아니지만 개미 등 사회성 강한 곤충들이 사용하기도 한다. 예로 꿀벌들은 장수말벌 상대로 여러 마리가 달라붙은 뒤 체온을 올려 죽이는 방식으로 대응하며, 개미들은 사마귀나 지네처럼 단독으론 사냥이 불가능한 큰 사냥감을 상대로 달려들어 물어뜯고 개미산을 내뿜는 방식으로 사냥한다.

이란-이라크 전쟁 때에도 전쟁 초기에 이란은 이슬람 혁명 이후 군부에 대한 대규모 숙청과 기존 군부를 대체한 혁명 수비대의 실전 경험 부족, 미국의 경제 제제 등으로 팔레비 시절 중동 최강이었던 군사력이 약화되어 있어, 미국과 아랍 석유 부국들의 물심양면 지원을 받아 질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던 이라크군을 상대로 이라크보다 3배 많은 인구빨을 바탕으로 한 인해전술을 벌였다.

북미, 호주에서는 바이크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도적집단이나 바이커 갱들이 특히 사막의 시골마을 같이 공권력이 약한 동네들을 상대로 인해전술로 공권력마저 박살낸 다음 해당 동네들을 생지옥으로 만드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곤 한다.

4. 여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인해전술하면 무식하게 병력만 꼴아박는 전술로 알고 있다. 이는 지난 수천년간 한반도에서 전쟁을 한 외세가 중국, 일본 등 당시 인구 대국이었기 때문이며, 사실 인구 구성면에서 한반도 역시 이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시아는 이전부터 영토, 농지 대비 인구밀도가 높으며 전체 인구가 많아 그 인구 자체가 생산력이자 국가 경쟁력인 경우가 많다. 이때문에 모든 일을 사람을 밀어넣어 해결했고, 한반도는 이들에 비해 부족한 인구와 경제력 때문에 외세와의 전쟁 때 반강제로 수성전과 화력전을 벌였고. 그로 인해 인해전술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인터넷 신조어로 사용되기도 한 웨이브(wave)라는 단어[27]는 여기서 유래했고, 그냥 머릿수가 엄청 많아서 개떼처럼 달려드는 것에 널리 쓰인다. 히드라웨이브가 대표적인 예시다.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전차의 부조종수를[28] 없애면서 차체 기관총을 제거하기 시작했는데, 미국은 이러한 대규모 대보병전을 우려해서 M48 패튼 A1부터 M2 기관총을 장착한 M1 전차장 큐폴라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 큐폴라는 이후 T71 경전차, T92 경전차, T95, T110, M60 전차, 장갑차에까지 장착했으며, 중동전과 베트남전에서 그 효율성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폐기되었다.

혁명도 어떤 의미에서는 인해전술이다. 상대가 무슨 무기를 들고 얼마나 훈련했는지는 의미가 없고, 어차피 국민들의 숫자와 군경의 숫적 차이는 보통 1:100이 넘어가니 일단 대다수 국민들이 호응만 해주면 이긴다는 논리. 또한 이 군경들이 국민들을 마구 죽일 가능성도 낮으니[29] 전쟁에서의 1:100 이상의 차이를 만들 수 있다. 혁명인지는 논쟁이 엇갈리지만 비슷한 성격의 6월 항쟁 또한 이렇게 성공했다.[30]

반대되는 개념이자 카운터로 화해전술이 있다. 여기서 '화'는 불 화(火), 즉 화력을 의미한다. 적이 많으면 그만큼 무기와 탄약도 늘려서 일대를 화해(불바다)로 만들어서라도 죽이면 된다는 간단한 논리. 밀집될수록 자동화기와 폭발에는 치명적이고, 과녁은 많을수록 맞추기 쉽다. 이게 모든 전투에서 절대적으로 적용된 결과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참호전이다. 이 화해전술의 끝판왕은 당연히 원자폭탄수소폭탄.[31] 문제는 상대의 접근을 허용하면 화력 우세의 의미가 반감되고, 결정적으로 그만큼의 화력과 그것을 뒷받침할 보급이 없으면 자칫 자멸할 수 있다. 하지만 비대칭전력이 있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

장기에서 병(兵)과 졸(卒)의 존재이유가 바로 인해전술이다. 초(楚)와 한(漢)만 1개씩이며 나머지 기물들이 전부 2개씩인데에 비해 병과 졸만 5개씩 존재해 다른 기물의 2배 이상의 숫자를 보유하고 있다. 이 때문에 병과 졸이 주력이 될 경우 기본적으로 여러개씩 뭉쳐다니며 3개 이상 뭉칠 경우에는 양사 포진의 궁조차 털어버리는 위력을 발휘한다. 혼자서는 별 거 아닌 기물들이지만 3개 이상 붙어있으면 인해전술을 발휘하는 것이 장기에서의 병과 졸이다.

체스는 이게 더 심하다. 폰(Pawn)이 8개나 되기 때문이다.

5. 매체에서의 인해전술

인간을 포함, 번식이나 생산 능력 혹은 인구 수에서 월등한 종족이 인해전술을 쓰는 것으로 묘사되며 특히 SF물에서는 곤충을 베이스로 한 종족이 이런 경향이 강하다. 특히 잡몹야라레메카가 이런 인해전술을 쓰는 경우가 많으며 엄청난 수의 인해전술을 쓰면 주연급 캐릭터도 물리칠 수 있다. 여기에 나열된 매체 속 인해전술은 거의 무식하게 병력만 꼴아박는 행위이다.
압도적으로 위험한 세력을 묘사할 때는 잡몹이 아닌 상위급 개체들이 무지막지하게 몰려나오는 연출도 등장한다. 이런 경우 주인공들도 크게 고전하고 도망치거나 죽기 직전까지 몰리는 경우가 많다.
* 림월드 - 부족민

6. 관련 문서


[1] 큰 나무와 그 그림자를 제외한 자잘한 것들이 전부 사람이다.[2] 본래 변증법적 유물론의 양질전화 개념이다.[3] 강력한 기갑 부대, 공군과 포병의 충분한 화력 지원, 잘 훈련된 정예 병력, 충분한 보급.[4] 중국인민지원군 인해전술 신화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예시다.[5] 실제로도 숫자가 더 많기도 했고[6] 포위섬멸을 할 때면 중공군은 가진 무기의 사정거리에 따라 전투배치를 했는데, 제1선은 수류탄을 투척하고 제2선은 기관단총을 이용한 돌격, 그리고 제3선은 소총이나 기관총 등 소총탄을 사용하는 사정거리가 긴 무기로 화력지원을 돕는 식이었다. 물론 최종돌격 단계에서야 다들 달려들었고 열악한 중공군의 보급 상황상 항상 그런 배치만을 할 수는 없었지만, 꽤 효율적인 배치인 건 사실이다.[7] 전투력이 대단하다는 의미보다는 대규모 병력의 이동 및 행동을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는 명령 및 조직체계와 훈련량이 갖춰져 있다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통신시스템이 열악했던 당시 중공군이 오로지 인력에 의지해 적에게 탐지되지 않는 넓은 포위망을 행군만으로 고속으로 형성하고 일거에 기습공격을 감행하는 것은 상당한 숙련도가 필요했으며 이는 중일전쟁,국공내전을 통해 단련될 수 있었다. 다만 그에 비해 무기,공중지원,보급은 빈약했다.[8] 참고로 후술하듯 이는 밴플리트 장군이 포탄 보급을 5배로 늘려 무제한 사격이 가능해지고부터 더욱 심화되었다.[9] 개중 중공군 1차공세 때 서부전선에 배치되었던 제38군 113사단은 청천강에서 14시간 동안 걸어 72.5km를 주파하여 평양까지 도달한 뒤 유엔군을 포위하였다. 황성철, <한국전쟁시 중공군의 제1·2차 공세 전역에 관한 재조명>, <<군사연구>제122호, 130쪽 링크[10]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한 번은 어느 미군 병사가 밤중에 담배를 피려고 라이터를 켰는데, 라이터 불빛으로 드러난 자신의 바로 발 앞에 엎드린 중공군 병사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란 일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라이터 불빛에 드러나기 전까지 그 중공군 병사가 미군 병사의 발 앞에까지 오는데 전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중공군 병사들은 밤중에 아무런 소리도 안 내고 산을 타는데 매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한국전쟁 내내 미군 병사들이 가장 치를 떨었던 점이 바로 이런 중공군 병사들의 야습 능력이었다.[11] 국민당군 패잔병들로 재교육 과정을 거친 자들, 즉, 사실상의 형벌부대를 총알받이 겸 미끼로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히 증명할 자료는 없다.[12] 영화 고지전에서 이 모습이 잘 묘사되어있는데,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잠깐 스쳐가는 번개의 빛으로 언덕이 보인다. 그 직후 징소리 비슷한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다시 빛이 스쳐가는데 언덕이 사람으로 가득 채워져있는 연출을 통해 거의 좀비떼가 연상될 정도로 공포스럽게 그려졌다.[13] 영국 육군 대장 안소니 파라-호커리(1924~2006) 경의 전쟁 회고록.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병사로, 한국전쟁 당시 장교로 참전한 베테랑이다. 당시 그는 대위 계급으로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 부관으로 종군하였는데, 적의 인해전술로 대대가 와해된 후 2년 4개월 동안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했다 잡히기를 7회 반복한 끝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제16공수여단장, 북대서양 조약 기구 북부 유럽 주둔군 총사령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군사 보좌관 등을 지냈다.[14] 사실 21세기 현재도 보병보다 산악돌파 능력이 뛰어난 차량은 없다.[15] 이후 전사에 남을 주요 격전지를 함명으로 붙이는 미 해군의 관례에 따라 타이콘데로가급 순양함에 '장진호'의 일본식 이름인 초신(Chosin, 長津) 함이 현역으로 운용되고 있다. 참고로 왜 일본식 이름이냐면, 당시 미군이 일제가 남긴 지도를 가지고 작전을 짰기 때문.[16] 한국전쟁 발발 당시까지 한국군의 훈련수준은 대대급이 고작이었다.[17] 그러나 이때는 한국전쟁과 중인전쟁 때보다 화력체계가 훨씬 발달했고 국공내전을 거치며 얻은 전술기동에 능한 대규모 병력도 없어진데다 중국군 수뇌부도 인해전술이 뛰어나다는 타성에 젖어 전장의 바뀐 형태에 적응 못하고 질질 끌다가 베트남에게 판정승을 내주게 된다.[18] 특히 국공내전 같은 경우는 중공군 병력이 3배 이상 열세였는데도 승리했다.[19] 델리에서는 히말라야까지 수백km였지만, 베이징에서 거리는 수천km였다.[20] 물론 어디까지나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럭저럭 우수한 수준이다. 과도한 남침으로 보급선이 길어지고 전쟁이 늘어지면서 보급이 끊어지자 장비질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21] 다만 소련을 거의 멸망시킬 뻔한 초기 바르바로사 작전 때에는 추축국의 병력이 남부집단군 80만 대 소련군 남부전선군-남서부전선군 120만, 그리고 북부 및 중부집단군 150만 대 소련군 북서부전선군-북부전선군 100만으로 추축국이 병력이 약간 더 많았고, 모스크바 전투 때에는 추축국 군대의의 병력이 60만 명이 더 많았다. 더군다나 독일에게는 그 모든 병력이 모든 전선에서 일제 공세를 가할 만큼의 많은 물자도 있었다. 1941년 한해 동안에는 천하의 소련군이 수적 열세에 있는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이다.[22] 500만 명의 병력을 지휘해야 하는데 30명당 소위 하나씩 임관한다고 쳐도 약 17만 명이 필요하나, 장교 공급력은 1만 명이 채 되지 못했다. 그런고로 초졸 장교, 무학 장교 같은 사례가 무더기로 등장한다.[23] 당장 당시 독일 못지 않은 군사강국에 육군이 중요했던 당시 육군력은 오히려 더 강했던 프랑스가 1차 대전 때와는 달리 독일에 패전해 점령되었고 사실상 전 유럽에서 영국과 소련과 스위스, 스웨덴, 스페인 등 몇몇 협력 국가 외에는 전부 다 독일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만 봐도 독일의 전쟁 시행 능력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독일군에는 뛰어난 명장들도 포진해있었고 전쟁 준비도 많이 되어있었다.[24] 튀르키예어로 '머리가 망가진, 정신나간 사람들'이라는 뜻이다.[25] 나머지는 중동에서 온 무슬림이나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오스만 제국 인구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인종들이 약탈을 노리고 몰려와 자원한 부대였다.[26] 개중에 자비로 무기와 말까지 구입한 전문 약탈꾼이나 타타르, 카작, 체르케스인 같은 전투종족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빈민들이었다.[27] 인해전술의 영어명칭이 'Human wave attack'이다.[28] 반면 영국과 소련은 2차 대전 후반에 개발된 차량에서 이미 부조종수를 없앴다. 미국의 경우 M47 패튼까지는 M26 퍼싱의 연장으로 볼 수 있어서 부조종수가 유지됐다.[29] 진짜로 마구 살해한 경우 어떤 방식으로든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30] 문서 맨 위의 "상대의 숫자가 우리 총알보다 많다"가 진짜로 일어난 케이스인데, 시위 진압에 큰 도움이 되던 최루탄이 다 떨어져간게 전두환 군부에게 결정타였다.[31] 적이 얼마가 오건 간에 차르 봄바 하나면 한 국가를 그대로 잿더미로 만들 수 있다.[32] '모든' 좀비물은 아니다. 좀비가 그냥 몰려다니는 게 아니라 날고 뛰면서 고급 액션을 구사하는 황당무계한 영화도 있다.[33] 중국이 좀비를 상대로 인해전술을 구사했으나 물어서 자기편으로 만든다는 좀비의 특성 때문에 오히려 쳐발릴 뻔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이 물량에서 발릴 뻔한 것이다.[34] 이제까지 사망한 전우주의 모든 등장인물들을 블랙 랜턴으로 만들어 등장시켰으며, 작중에서도 지속적으로 여러 히어로, 빌런들을 해치면서 그 수를 늘려 나갔다. 나중에 네크론이 부활하고 나서는 평행우주의 죽은 자들마저 블랙 랜터화시켰으며, 심지어는 사망하였다가 부활한 인물들도 블랙 랜턴화 되었다. 좀비 계열 캐릭터 중에서는 최강의 존재들로 생명의 힘을 제외한 그 어떤 방법으로도 타격을 입지 않으며, 거짓된 자아를 이용해 등장인물들에게 정신공격을 가하고, 능력을 사용하는 것에도 제한따윈 없는 최강의 언데드 군단이다.[35] 경찰이 학생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지만 시위대가 그냥 돌격하는 연출이 있다.[36] 타이거 일레븐이 대마왕을 공격하는 동안 인간족, 신족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다섯 마장군들(가니메데스는 그전까지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고 출신도 불명이다)의 발목을 잡으며 시간을 벌었다. 세계관상 인구비율이 인간 50%, 신족 30%, 마족 20%라 4대1의 물량 차가 있어서 마장군들은 대마왕을 도우러 갈수가 없었다. 인간족, 신족들도 엄청나게 죽었지만 마왕군도 깅가밍가의 군대가 줄어든 비율을 볼 때 60%가 사망한듯.[37] 다중 환영분신술로 인해전술을 쓴다.[38] 본부가 있는 데이카 시에 모여있는 인원만 해도 무려 10만명이 넘는다.[39] 챔피언들이 미니언을 먹지 않고 놔두면 20분쯤 지나면 잔뜩 쌓여있다.[40] 프로그램인지라 스스로를 Ctrl CV할 수 있으며, 2부부터 인해전술을 쓴다.[41] 인류연합군과의 전쟁에서 물량으로 쭉쭉 밀어버린다. 특히 하베스트라는 병기는 지평선을 꽉 채울정도. 이후 600~700년 정도가 지난 매트릭스 본편 시간대에서도 그 물량은 어디 안가서 어마어마한 수의 센티널을 보내 시온을 쓸어버린다.[42] 곤충형 군체물량종족의 원조.[43] 은하 경제권의 7할을 쥐고 있던 연합이 클론 전쟁 내내 이 배틀 드로이드를 문자 그대로 단위로 찍어냈다.[44] 기습이기도 했지만 오더66때 제다이를 학살했다.[45] 특히 스카리프 전투에서 은하제국의 인해전술을 볼 수 있다.[46] 셋 다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보충되는 1티어 유닛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플레이가 주력이다. 협동전 레이너의 별명이 중공군일 정도다.[47] 바이도의 특성상 모든 것을 침식하므로 방금까지만 해도 임무 수행을 잘만 하던 동료가 순식간에 적군으로 변하는 건 예삿일이고, 심지어는 아무것도 없던 장소에서 갑자기 적이 튀어나오거나, 물 그 자체가 괴물의 모양으로 뭉쳐져 적으로 변해 사람을 습격하는 일까지 일어난다.[48] 신약 6권 이후. 다크매터를 통하여 병력을 무한히 생성 가능하다. 다만 신약 6권에서 장수풍뎅이 5호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이후로는 디른 인격이 자신처럼 주도권을 빼앗으려고 할지도 모르기에 무작정 생성하기에는 리스크가 생겼다.[49] 보병양성소 유닛의 인구수를 1에서 0.5로 감소시킨다.[50] 몽둥이병/도끼병, 검병(단검병/광검병/장검병/군단병), 투석병.[51] 검병 계열 유닛 HP +15(단검병), +20(광검병), +60(장검병), +80(군단병).[52] 몽둥이병과 도끼병 체력 각각 +5.[53] 검병 계열 유닛의 공격 속도 +33%.[54] 무금 유닛은 서양의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시리즈 커뮤니티에서는 Trash Units(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시리즈에서의 Trash Units의 의미는 성능이 나쁜 유닛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금과 돌이 소모되지 않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거리낌 없이 소모시킬 수 있는 유닛이라는 의미다.)으로 불리며 생산시 금이 소모되지 않는데다 식량과 목재 2가지만 요구되는 군사 유닛을 의미한다.[55] 말레이의 특수 유닛 카람빗 전사는 1기 생산 시 다른 유닛과 달리 인구수의 절반만 요구되며 비용은 식량 25, 금 15이 요구된다. 시민군 계열의 경우 양손 검병까지 승급이 지원되지만 강제 징집 연구를 통해 금 비용을 식량 비용으로 전환시켜 무금유닛으로 활용할 수 있다.[56] 에티오피아 문명의 특수 유닛 쇼텔 전사는 인해전술을 염두에 두고 추가된 유닛으로 특수 기술인 왕실 근위대 연구를 적용하면 즉시 양성된다.[57] 궁사 계열은 석궁병까지 승급이 지원되지만 결정판 이후에 끓는 기름 대신 추가된 특수 기술 카만다란 연구를 통해 금 비용을 목재 비용으로 전환시켜 생산시 필요한 자원은 목재 비용 60으로 만들 수 있다.[58] 특수 유닛인 마자르 후사르는 특수기술 코르비니아 군대 연구로 금 비용이 삭제되어 무금유닛으로 운용할 수 있으며 문명 보너스로 정찰기병 계열의 생산비용이 15% 절감된다.[59] 문명 특성과 보너스가 보병 생산비용 감소와 보병양성소 작업속도 20% 증가고 특수기술 보급은 보병양성소에서 유닛을 즉시 생산하도록 만드는 기술이다. 문제는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1의 병참과 같은 보병양성소 유닛 인구수를 절반으로 줄이는 연구가 없다는 점이다.[60] 창병 계열, 척후병 계열, 낙타 기병 계열의 생산 비용이 25% 절감되며 낙타 계열을 제외하면 무금 유닛이다. 추가로 비잔티움은 혈통이 지원되지 않지만 낙타 기병을 생산할 수 있는 문명 중에서 가장 싼 값에 낙타 기병을 생산 할 수 있다.[61] 인구수 최대치 220까지 지원.[62] 다른 원주민 국가와 달리 빅버튼 대부분이 병력 수송에 치중되어 있어서, 미리 생산 및 홈시티 병력으로 인구수를 꽉 채운 후 빅버튼 병력을 모두 받으면 300이 넘는 인구수를 쉽게 볼 수 있다.[63] 물론 이쪽의 선구자 중 하나인 중국 역시 기본 유닛인 홍위병을 한번에 두명씩 뽑아제낄 수 있지만 고급 테크 유닛들이 난무하는 후반까지 쓰는건 효율이 썩 좋지 않다.[64] 핵전쟁 이후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폴아웃 2 시점으로 인구수가 70만을 넘긴다. 다른 황무지 세력 인구수가 5자리를 못넘은걸 생각하면 중국의 재림이라 봐도 무방한데다 황무지 레이더마냥 조잡한 무장이 아니라 제대로 된 장비를 지급받고 원한다면 한번에 다수를 꼴아박을 수 있는 지휘력도 가지고 있다. 오퍼레이션 선버스트 때는 BoS와의 전투에서 BoS 팔라딘과 NCR 보병과의 병력차가 8배 이상 차이가 났고 뉴 베가스 시점에도 만명에 가까운 병력을 전선에 동원해 밀어붙이고 있다.[65] 이쪽 역시 인구수가 만만치 않기 때문에 뉴 캘리포니아 공화국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다. 부머의 지원없이 카이사르의 군단 엔딩을 볼 경우 부머의 포격을 인해전술로 뚫고 흡수해버린다는 나레이션이 출력된다.[66] 수 자체는 많지 않으나, 커먼웰스 사람들에게 유일하게 지지를 받는 세력인지라 인력충원이 쉽다.[67] 이들은 인간으로 하는 건 아니고 신스라고 불리는 로봇을 보낸다. 그 중에는 코서라는 엘리트 개체도 있는 편.[68] 여타 판타지물과는 다르게 주인공이면서 인해전술을 사용한다. 어떤 전투에서도 꼭 수적 우위를 최대한 확보하고 싸운다. 그래서인지 위에서 언급한대로 무식하게 병사들을 꼴아박지 않고 제대로된 인해전술을 보여준다.[69] 그러면 보유한 병력 덕에 이기는 거지, 주인공의 능력이 아니지 않은가 할 수 있지만 작가의 필력 덕에 주인공의 능력이 잘 묘사된다. 대표적으로 그 대군을 통솔하는 지휘력. 작중 제3차 엔거 전투가 야밤에 벌어졌는데도 엘시는 본인이 고안한 연락 체계를 이용해서 백만 대군을 지휘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오히려 능숙한 지휘로 자기 군대의 반인 50만을 지휘하는 베로시 토프탈 군대의 지휘 체계를 박살내 버렸다.[70] 이쪽도 오늘 죽은 동료가 내일 적이 되어 나타난다는 점에선 바이도와 유사하다.[71] 정확히는 병력이 아니지만 언다인의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기에 비슷한 걸로 칠 수 있다. 그리고 이 언다인의 물량공세를 이길 상대는 보통은 없는데 심지어 베티&아쿠무도 Rhabdophobia를 써도 막지 못할 정도니 이정도면 물량전의 종결자라 해도 무방하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물량공세를 펼쳐도 언다인이 지치지 않으니 맘만 먹으면 언다인은 그보다 더 더욱 많은 창을 소환할수 있다.[72] 대규모 돌격교리를 찍어서 전장넓이를 줄이는 순간 25개의 보병대대로 이루어진 사단 수백개가 달려오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73] 인간이 썩어 넘치는 세상이기 때문에 수십만 수백만명씩은 그냥 꼬라박으면서 강대한 외계인들에 맞선다.[74] 컬티스트를 물량으로 밀어붙이고 총알받이로 내세운다. 인류제국의 가드맨 포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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