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8 01:06:54

성곽


1. 개요2. 상세3. 관련 문서

1. 개요

성곽() 혹은 성벽()이라고 불리는 이 건축물인간들이 자신들의 주요 거점이나 거주시설들을 지키기 위해 만들었던 건축 구조물의 일종으로, 석재목재로 특정 시설물들을 둘러쌓는 벽을 뜻한다.

2. 상세

인간이 건물을 짓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이다. 구석기시대가 끝난 이후 인간들은 동굴에서 나와 강변에 움집을 짓고 농경목축을 하면서 문명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농업의 등장과 발전은 잉여생산물을 만들었고, 잉여생산물의 증가는 인구를 늘리고 사유재산을 창출했으며, 나아가 영토와 국가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인간들이 떠돌지 않고 정착을 하고 자신들의 정착지를 개발하기 시작하자, 자신들의 정착지를 지키기 위한 시설이 필요했는데, 그렇게 등장한 것이 성벽해자다. 해자는 주변에 수원지가 있거나 아니면 비가 자주 내려서 인위적으로 호수를 만들만한 강수량이 보장되어야 하는 반면에 성벽은 아무곳에나 도구와 노동력만 있으면 만들 수 있는 고로 산업시대에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으로 대포가 고도화되기 전까지 성벽은 유효한 방어시설로 적극적으로 지어졌다.

방어시설의 일종인 성곽은 크게 3종류의 지역에 지어졌는데, 첫번째는 도시를 방어하기 위하여 도시를 둘러싸고 짓는 도시성벽으로 지어는 것이 있고, 두번째는 군주귀족들이 사는 을 방어하기 위하여 지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서양의 경우 이를 기반으로 장원이 형성되기도 했다. 세번째는 주요 거점에 짓는 경우인데, 한반도에서 많이 지었던 산성이 이런 경우고 이 경우에 성벽은 요새의 역할을 했다.

일반적으로 동아시아를 바롯한 비서구권에서는 도시나 마을이 먼저 형성되고 그 도시나 마을을 지키기위하여 성벽을 두르는 경우가 많았지만[1], 서구권이나 일본의 경우에는 영주나 다이묘가 살 성을 먼저 짓고, 그 성을 방어하기 위하여 성벽을 나중에 두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영주가 사는 성/성벽을 주변으로 사람들이 살기 위하여 몰려들었고, 인구가 늘어나 도시를 형성한 후에야 도시의 시민들까지 보호하기 위하여 성벽을 건설했다.

성벽을 쌓을 때는 궁성이나 저택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곽을 네모꼴로 쌓은 내성을 먼저 짓고 그 바깥에 도시나 마을을 지키기 위하여 네모꼴로 쌓은 외성/곽(郭)을 지음으로써 구성되는 이중의 벽으로 구성된다.[2] 방어를 위해 돌출한 성벽은 (치성)라고 하였으며, 벽 위에는 성가퀴(여장)를 설치하여 유사시 방어에 용이하도록 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삼중인 경우에는 맨 안쪽을 내성, 다음을 중성(中城), 바깥을 외성이라고 하며, 만약 도성(都城)이면 왕성(王城)·궁성(宮城)·황성(皇城)이라 부르고, 그 바깥쪽의 것은 나성(羅城)이라 부른다. 한양으로 치면 경복궁, 창덕궁 등이 내성에, 사대문과 사소문으로 둘러싸던 성벽이 외성에 대응된다.

이름에서도 볼 수 있듯, 내성은 주로 성의 주인(왕족 또는 귀족)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외성은 귀족보다는 계급면에서 낮은 상층민(규모가 크면 평민까지)을 수용하는 데에 이용되었다. 그래서 보통은 외성까지를 성내의 기준으로 삼는다. 또한 성내에 형성된 마을은 캐슬 타운(Castle Town)으로 불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성 안 마을', 줄여서 '성안말'이라는 뜻에서 성내동(城內洞)으로 부른다. '성 아랫마을'이라는 의미로 성하동/리/촌(城下洞/里/村) 또는 성저동(城底洞)으로 불리기도 하며, 일본에서도 비슷하게 조카마치(城下町)로 불린다.

프랑스에서는 bourg로 불렸는데, 이것이 부르주아의 어원이 되었다.

외성은 시간이 지나 전쟁이 공성전에서 공중전 위주로 진화하고 전쟁의 위협이 줄면서 쓸모없는 애물단지로 전락했고, 근대를 거치며 허물어지는 신세를 맞이하게 된다. 서울 한양도성과 베이징 성[3]이 대표적. 그런데 현대에 와서 문화재 의식이 성장하며 허물었던 성벽을 복원하고 있다.

반대로 내부를 지키기 위해 벽을 쌓는 대신 구덩이를 파는 방어시설도 있는데 해자라고 한다. 성벽과 해자는 각자 장단점이 있었다. 그리고 방어측이 여유가 있다면 해자와 성벽 둘 다 설치하기도 한다. 그러면 성벽을 오르려면 해자 구덩이 높이부터 시작해야 하므로 성벽이 더 높아지는 효과가 있었다.

3. 관련 문서



[1] 물론 계획도시는 예외다.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계획도시를 짓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경우에는 성벽이 도시보다 먼저 건설되었다. 대표적으로 한성이 이랬다. 단 한양 도성이 세워지기 전에도 서울지역에 도시나 마을이 없던 것은 아니다.[2] 안쪽의 것을 성, 또는 내성(內城)이라 하고, 바깥쪽의 것을 곽(郭) 혹은 외성(外城)이라고 한다.[3] 이 쪽은 한양도성과 스케일이 달라서 당초 모두 허무는데 83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런데, 베이징 시민들을 총동원한 결과 6년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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