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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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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임체는 문루 및 성곽이 대부분이 소실되어 터만 남은 읍성, 볼드체는 대부분이 보존, 복원된 읍성
행정구역은 현재 대한민국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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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구조
3.1. 성문(城門)
3.1.1. 주조문(朱鳥門) ・ 무우루(無憂樓)3.1.2. 지희루(志喜樓)3.1.3. 심성루(心成樓)3.1.4. 인생문(人生門)3.1.5. 은일루(隱一樓)3.1.6. 북문(北門)
3.2. 장대(將臺)
3.2.1. 서장대(西將臺)3.2.2. 동장대(東將臺)3.2.3. 북장대(北將臺)
3.3. 해자(垓子)
4. 여담5. 관련 문서

1. 개요

東萊邑城

조선 시대에 현재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산동과 수안동 일대에 존재했던 읍성.

2. 역사

조선 시대에 동래읍성은 일본과의 외교 창구였기 때문에 관아의 규모도 크고 격식이 높았다.[1]

임진왜란 때는 1592년 4월 14일 그 유명한 동래성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해당 문서 참조.

일본군은 동래성을 함락하고 나서 동래성 동쪽에 위치한 망월산에 동래왜성을 축조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완전히 황폐화된 동래읍성을 보수할 여력이 없어 약 140년간 방치되어 있었던 것을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6배에 달하는 규모로 다시 축성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경제개발기를 거치면서 복산동, 수안동, 명륜동 일대는 도심화가 진행되었고 동래읍성의 서남부는 완전히 유실되었으며 산등성이를 따라 흔적만 남아 있었는데 이렇게 방치되어 오던 동래읍성의 흔적들을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에서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기 시작했고 1979년부터 1993년 사이에 여러 차례 복원과 보수를 하여 현재에 이른다.

2005년 5월에 부산 도시철도 4호선 공사를 진행하다가 현 수안역 자리에서 조선 전기의 해자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이곳에서 동래성 전투 당시 학살당한 주민들의 유골과 각종 무기류가 출토되었다. 3.3.문단 참조.

3. 구조

조선 전기에 현재의 동래구 복산동과 수안동 일대에 원형의 읍성을 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파일:external/pds21.egloos.com/a0105007_4fffa78175d6b.jpg

발굴조사 결과 조선 전기에 쌓았던 읍성은 현재 남아 있는 읍성의 크기의 17%가 채 되지 않는 작은 규모였으며 성벽에 치(雉)가 아주 조밀하게 돌출되어 있었고 작지만 해자도 둘러져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가 벌어졌고 동래부사 송상현이 지키다 장렬히 전사했다. 사진 정면에 성벽 일부가 산자락에 걸친 부분이 보이는데 이 동쪽 체성을 왜군이 뚫고 들어왔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성곽 유적과 사진 속 성곽 및 임진왜란은 상관이 없다.

임진왜란 때 1군에 종군한 요시노 진고자에몬(吉野甚五左衛門)의 비망록에 따르면 "어제 성보다는 닷 배는 큰 성"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조선의 모든 성채보다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해 보이는 성채"라는 표현이 있으나 걸러 들을 필요가 있다.

파일:external/ncache.ilbe.com/8c5d3839be2a38b8593712a0fe507d61.jpg

현재 남아 있는 성곽 유적은 1731년 정언섭(鄭彦燮)이 개축한 것을 기초로 한다.

5개의 문과 1개의 암문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3개의 장대를 갖추었다. 모든 문에 옹성이 둘러져 있었다.

3.1. 성문(城門)

3.1.1. 주조문(朱鳥門) ・ 무우루(無憂樓)

파일:동래읍성 남문.jpg
파일:동래읍성 남문터.jpg

부산광역시 동래구 수안동 236-4

동래읍성의 남문이며 규모가 가장 컸다. 이층 문루를 올렸으며 바깥쪽에는 주조문(朱鳥門)[2], 안쪽에는 무우루(無憂樓)[3][4]라는 현판을 달았다. 방형 중앙문식(中央門式)[5] 옹성을 갖추었는데, 옹성에 난 문은 세병문(洗兵門)[6]이라는 이름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 이 앞에 세병교(洗兵橋)[7]가 있어 초량왜관과 부산진성으로 통했다고 한다.

3.1.2. 지희루(志喜樓)

파일:동래읍성 동문터.jpg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산동 289-3

동래읍성의 동문이다. 지희루(志喜樓)[8]라는 현판을 달았다.

3.1.3. 심성루(心成樓)

파일:동래읍성 서문터.jpg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403-1

동래읍성의 서문이다. 심성루(心成樓)[9]라는 현판을 달았다.

3.1.4. 인생문(人生門)

파일:동래읍성 인생문.jpg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장동 600-19

동래읍성의 소문(小門)이다. 임진왜란 때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한 문이라 하여 인생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도시전설이 있으나 완벽한 헛소리다. 상술했듯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은 조선 후기 읍성의 1/6 규모에 지나지 않았으며 현재 인생문 고개라 불리는 곳은 성곽이 지나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2005년 인생문을 동래구에서 복원한답시고 조잡한 모형을 만들었다가 부실공사로 붕괴해 버린 전적이 있다. 동래읍성 인생문 성벽 붕괴사고 문서 참조.

3.1.5. 은일루(隱一樓)

파일:동래읍성 암문터.jpg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402

동래읍성의 암문(暗門)이다. 야문(夜門)이라고도 불리는 이 문은 은일루(隱一樓)[10]라는 현판을 달았다. 암문에 현판을 단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것으로, 나머지 다섯 문이 닫힌 밤중에 긴요한 일이 있으면 사용하게 한 문이다.

3.1.6. 북문(北門)

파일:동래읍성 북문.jpg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538-1

동래읍성의 북문이다. 당호(堂號)가 따로 없는 이 문은 현판도 전해지는 것이 없다. 옹성의 형태가 굉장히 특이한데 보통 180도를 두르는 다른 옹성들에 비해 이곳은 90도 가량밖에 둘러져 있지 않다.

3.2. 장대(將臺)

3.2.1. 서장대(西將臺)

파일:동래읍성 서장대.jpg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산1-2

동래읍성의 서쪽 장대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로, 모습은 꼭 수원 화성의 서장대를 닮았다. 1734년 동래부사 최명상(崔命相)이 세운 15개 보루 중 하나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에는 1870년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이 세웠다고 전한다. 1937년 동래읍성과 함께 철거되고 방치되다가 1979년 첫 복원사업 당시 북문, 동장대, 북장대와 함께 복원되었다.

3.2.2. 동장대(東將臺)

파일:동래읍성 동장대.jpg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 1-9

동래읍성의 동쪽 장대다. 내부에 망월대(望月臺)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충렬사의 권역 내부에 속하며 군관청(軍官廳)과 더불어 동절기 출입금지구역이다. 충렬사에서는 화재 및 사고 방지를 위하여 매년 11월 1일부터 5월 31일까지 6개월간 망월산의 입산을 통제[11]하는데 통제구역인 철조망 내부에 동장대가 속한다. 정말 산불 때문이라면 왜 철조망 바로 바깥 등산로는 통제하지 않는지 의문이다.

이곳은 본래 임진왜란 때까지만 해도 동래읍성의 권역이 아니었다. 동래성 전투 이후 이곳에 주둔한 제7군 소속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가 망월산에 동래왜성을 축성한다. 동장대 자리가 왜성의 중심부인 혼마루(本丸) 자리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동장대 바로 남쪽의 체성이 부자연스럽게 꺾여 있는 것도 왜성을 쌓았던 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분석도 나온다.

동장대를 중심으로 동북쪽 절벽에 해자 2곳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이곳은 증산(甑山)[12]이라 불렸다.

3.2.3. 북장대(北將臺)

파일:동래읍성 북장대.jpg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천동 산2-5

동래읍성의 북쪽 장대다. 마안산(馬鞍山)의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으며 따라서 동래읍성에서 가장 높은 고지를 점하고 있는 장대다. 북문에서부터 인생문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통해 오를 수 있다.

새해에는 여기서 해맞이 행사도 열린다.

3.3. 해자(垓子)

KBS 역사추적 9회 – 조선판 킬링필드, 동래성에 무슨 일이 있었나(2009.1.31.방송)

2005년 5월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부지에서 동래성 외곽 해자 유적이 대규모로 발굴되었다. 1452년에 설치된 동래성 해자는 기초다짐층, 조선전기층, 조선후기층[13]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중 임진왜란기에 해당하는 조선전기층에서 폭 30m x 길이 30m 좁은 공간에서 환도, , 찰갑, 투구, , 화살촉 등등 당시 동래성 전투에 사용된 다양한 조선군의 무기들이 임진왜란 당시 무기사를 새로 써야할 만큼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참고게시물: 400여 년 전 부산의 비극

파일:1561436353590.jpg
파일:1561436377896.jpg
파일:1561436538292.jpg

한편 이 유적에서는 약 80여 구의 유골이 함께 발견되어 당시의 참상을 전해 주기도 하였다. 남성은 물론 저항할 수 없는 여자와 아이의 유골에서도 활과 조총, 철퇴에 맞거나 창검으로 찔리고 베인 자국이 발견되었으며 화살 또는 총알이 뚫고 나간 어린아이의 두개골도 발굴되었다. 한 여성 유골은 일본도로 추정되는 칼로 몇 차례나 목을 베인 흔적이 있었으며 몇몇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은 턱뼈가 깔끔하게 잘려나간 것도 있었다. 따라서 이 유적은 전투가 끝난 후 일본군이 자신들이 학살한 시신과 쓸모없게 된 조선군 무기들을 해자에 함께 던져 넣고 메워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파일:1561436573412.jpg
파일:1561436649441.jpg

이때 발굴에 참여했던 정의도 당시 경남문화재연구원 학예실장은 고고학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이만한 유적을 발굴하고도 "기쁘기는커녕 오히려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술회했다. 본격적인 발굴에 앞서 위령제부터 지냈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참상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유골들을 통해서 당시 조선인들의 평균 체격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는데 동래읍성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골들은 모두 조선인의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 유골들을 측정한 결과 당시 동래성 주민들 중 남자들의 평균 신장은 163.6cm 정도로 밝혀졌다.[14] 동래성 주민 중 여자들의 평균 신장은 153.4cm로 밝혀졌다. 에도 막부 시절에 일본인 남성들 평균 신장이 155.1~156.5cm였다고 하고 여성들 평균 신장은 143~144.7cm였다고 하니 조선인 남성은 일본인 남성보다 7~8cm 정도 더 컸고 조선인 여성도 일본인 여성보다 9~10cm 정도 더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영양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치아를 확인할 수 있는 두개골과 하악골 32개체 가운데 법랑질 형성부전증(Enamel hypoplasia)이 26개체에서 확인되었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영양실조에 의해 나타나는 선이라고 한다.#참고기사

출토된 환도들의 길이가 주로 55cm 전후, 혹은 65cm 전후의 칼날 길이를 가지고 있는 등 규격이 동일하지 않아 1452년 문종 때의 규격을 그대로 유지되지 않음을 실증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여기서 발굴된 다양한 유물들과 인골들은 위의 참고게시물 링크와 이 참고기사에서 더 볼 수 있으며 수안역 내부의 동래읍성임진왜란역사관에서는 실물을 볼 수 있으니 인근을 지나게 된다면 들러 보도록 하자.

4. 여담

동래구 초등학교들에서 현장체험학습을 오기도 한다.[15]

조선시대에도 성을 증축 및 보수를 하다가 유골이 발굴되어 위령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5. 관련 문서



[1] 시기별로 다르지만 주로 조선 통신사에도(도쿄)까지 산 넘고 물 건너서 간 경우가 많았지만 일본 측의 사자는 임란 이후 사신의 통행로가 침략로로 사용될까 염려하여 조선측에서 동래성까지만 입국시켰다.[2] 주조는 주작(朱雀)을 뜻한다. 주작이 남쪽을 관장하는 신수임을 생각하면 말 그대로 남문이라는 뜻이다.[3] 파일:동래읍성 남문 무우루 현판.jpg
근심이 없을 것을 기원하는 뜻. 동래부가 일본과 접경하는 남쪽 최전방임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이름이다.
[4] 파일:무우루 현판.jpg
현재 무우루를 비롯한 성문의 현판들은 모두 동래부 동헌에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5] 수원 화성의 팔달문이 중앙문식이다.[6] 파일:동래읍성 세병문.jpg
만하세병(挽河洗兵)이라는 구절에서 따 온 이름으로, 직역하면 은하수를 당겨 피로 얼룩진 병기를 씻는다는 뜻이다. 전쟁보다는 평화를 누리자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7] 파일:세병교.jpg
본래 나무로 만든 목교(木橋)였으나 일제강점기에 돌다리로 바꾸었다고 한다.
[8] 파일:지희루 현판.jpg[9] 파일:심성루 현판.jpg[10] 파일:은일루 현판.jpg[11] 우천 시에도 출입금지된다. 사실 이 규정 때문에 1년에 군관청과 동장대를 볼 수 있는 날은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12] 왜성이 있었던 곳의 지명에는 떡시루 증(甑)이 들어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일본식 성의 모습이 마치 켜켜이 쌓여 있는 떡시루와 같은 것에서 유래한다.[13] 임진왜란 이후 수백년간 쌓여 조성된 부분이므로 전쟁과 관련없는 백자나 옹기 파편, 기와 파편, 동물뼈 등이 출토되었다.[14] 유럽의 당시 남유럽인들 평균 신장과 비슷한 수치다. 지금도 한국인과 남유럽인의 평균 신장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한국인: 173~4cm, 남유럽인: 175~176cm. 19세기 말에 조선을 방문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당시 조선인 남성의 평균 신장을 163.4cm라고 적었는데 이로 볼 때 조선인 남성들은 300년 동안 계속해서 163~164cm 정도의 평균 신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15] 물론 자연체험이라서 재미없어하는 학생이 과반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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