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5 11:34:55

이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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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추존 국왕
이안사|李安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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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릉 전경
출생 1180년~1200년 추정
장소 미상
사망 1274년 3월 10일
장소 미상
능묘 덕릉(德陵)
재임기간 요동천호소 천호 | 다루가치
1252년 ~ 12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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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안사(安社)
부모 부친 선조고
모후 선조비
형제자매 4남 중 장남
배우자 효공왕후
자녀 6남
묘호 목조(穆祖)
시호 목왕(穆王) → 인문성목대왕(仁文聖穆大王) }}}}}}}}}

1. 개요2. 내력3. 생애4. 가계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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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왕조의 추존 국왕으로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

조선 개국 직후에는 시호 '목왕'(穆王)만 올렸다가 5대손인 태종이 1411년에 묘호 목조(穆祖)를 올리고 시호를 '인문성목대왕'(仁文聖穆大王)으로 바꿨다.#

2. 내력

전주 이씨 시조 견성(甄城) 이한의 17세손으로 고려 중~후기 사람이다. 이한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46대 문성왕 시대에 사공을 지냈고, 그와 태종 무열왕의 10세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 부인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이자연은 시중, 손자 이천상은 좌복야를 지냈다. 이천상은 아간을 지낸 이광희를 낳았고, 이광희는 사도 삼중대광 이입전을 낳았으며, 이입전 이후로 이긍휴, 이염순, 이승삭, 이충경, 이경영, 이충민, 이화, 이진유, 이궁진, 대장군 이용부를 거쳐 고려시대 내시집주 이린에 이르렀다. 이린은 무신정변의 제1대 집권자였던 이의방의 동생이었다. 이린은 대장군 이양무를 낳았고, 이양무는 상장군 이강제의 딸 이씨와의 사이에서 이안사를 낳았다.
시조 이한(翰) → 1세손 이자연(自延) → 2세손 이천상(天祥) → 3세손 이광희(光禧) → 4세손 이입전(立全) → 5세손 이긍휴(兢休) → 6세손 이염순(廉順) → 7세손 이승삭(承朔) → 8세손 이충경(充慶) → 9세손 이경영(景英) → 10세손 이충민(忠敏) → 11세손 이화(華) → 12세손 이진유(珍有) → 13세손 이궁진(宮進) → 14세손 이용부(勇夫) → 15세손 이린(隣) → 16세손 이양무(陽茂) → 17세손 이안사(安社)

3. 생애

穆祖聞之, 遂徙居江陵道 三陟縣, 民願從而徙者, 百七十餘家
(中略), 適前日山城別監, 新除按廉使, 又將至。
穆祖恐禍及, 挈家浮海, 至東北面宜州 止焉。
民一百七十餘戶亦從之, 東北之民, 多歸心焉。
於是, 高麗以穆祖爲宜州兵馬使, 鎭高原以禦元兵。
時雙城以北, 屬于開元路。
元 散吉大王來屯雙城, 謀取鐵嶺以北, 再遣人請穆祖降元, 穆祖不得已率金甫奴等一千餘戶降。
散吉聞于元帝, 元爲立斡東千戶所, 給降金牌, 爲南京等處五千戶所, 首千戶、兼達魯花赤。_太祖實錄, 1 總書
①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가 이 소식을 듣고는, 드디어 강릉도(江陵道)의 삼척현(三陟縣)으로 옮겨 가서 거주하니, 백성들이 자원하여 따라서 이사한 사람이 170여 가(家)나 되었다.
전일의 산성별감(山城別監)이 새로 안렴사(按廉使)에 임명되어 또 장차 이르려고 하니, 목조는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바다로 배를 타고 동북면(東北面)의 의주(宜州, 곧 덕원(德源)[1]에 이르러 살았는데, 백성 170여 호가 따라갔고, 동북의 백성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좇는 사람이 많았다.
이에, 고려에서는 목조(穆祖)를 의주병마사로 삼아, 고원을 지켜 원나라 군사를 방어하게 하였다.
이때 쌍성(쌍성은 곧 영흥이다) 이북 지방이 개원로에 소속되었고, 원나라 산지 대왕이 와서, 쌍성에 둔 치고 있으면서, 철령 이북 지방을 취하려고 하여 사람을 두 번이나 보내어 목조에게 원나라에게 항복하기를 권하니, 목조는 마지못하여 김보노 등 1,000여 호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② 산지가 이 사실을 원나라 황제에게 알리니, 원나라에서 목조를 위해 오동천호소를 세우고 금패를 내려 주어 남경 등처 오천호소의 수천호로 삼고, 다루가치를 겸하게 하였다. _《태조실록》, 권 1 <총서>

《태조실록》에 따르면 원래 이안사는 20대 초반까지 본관인 전라북도 전주에서 살았다. 이 지역의 한 기생을 좋아했는데 하루는 그 고을 별감이 그 기생을 취했다. 그래서 화가 난 이안사는 별감에게 따졌고 싸움까지 일어났는데[2] 문제는 이 별감이 고을 현감까지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현감은 이 문제를 도지사급이었던 안렴사에게 알리는 바람에 이안사는 투옥될 위기에 처했다. 당시는 몽골과의 혹독한 전란기라 호족들은 스스로 집안과 재산, 인명을 지키기 위해 가병을 거느리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안렴사는 이 가병 때문에 직접 체포하지 못하고 조정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이를 알게 된 이안사는 조정에서 미적거리는 사이에 집을 정리하고 가솔과 가병, 재산과 자기를 따르는 백성 170여 호를 이끌고 강원도 삼척으로 떠났다. 백성 170호가 기꺼이 그를 따라나섰다는 것이 상당한데,[3] 1호가 몇 명인지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 조선 초기의 법적 '호'는 표준적으로는 세금과 군역이 가능한 성인 남성인 '정'(丁) 3명을 뜻했고,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정' 2~5명 정도를 1호로 셌다. 그 이전에는 자연 호라 하여 한 가족을 통째로 1호로 세는 경우도 많았고, 이럴 경우 수십 명짜리 대가족도 1호로 셌다. 16세 이하의 아이와 여자, 노인[4]은 세지 않은 것이기에 170여호는 '정' 평균 3명으로 세어도 건장한 남자 500여 명+부양인구까지 1,000명은 넘고, 1호를 '정' 5명 이상의 자연 호로 간주할 시 수천 명이 넘는다. 아무리 명문 가문의 가주라지만 관직도 없는 일개 호족이 이렇게 많은 백성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먼 지역으로 멋대로 이주를 할 정도로, 무신정권여몽전쟁을 거치면서 고려 중앙정부가 통제력을 잃고 있었다는 증거 중 하나이다. 조선 조정은 이를 이안사의 덕망 덕분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삼척에 정착한 지 1년만에 아버지 이양무가 죽고 묏자리를 써야할 때 지나가던 한 도승이
"소 100마리를 제사지내고 황금으로 관을 쓰면 5대에 제왕이 날 자리네."
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100마리 소를 잡을 길이 막막했던 이안사는 '백'(百)마리 소 대신 '흰'(白) 소를, 황금 대신에 금빛 귀리 짚으로 관을 써서 장사지냈다고 한다.[5]

여기까지 끝났으면 좋으련만, 전에 싸웠던 그 별감이 여기 안렴사로 임명되어 온다는 소식에 이안사는 그를 따른 170여 호를 데리고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셔ᄫᅳᆳ 使者(사자)ᄅᆞᆯ ᄭᅥ리샤 바ᄅᆞᄅᆞᆯ 건너시ᇙ제 二百戶(이백호)ᄅᆞᆯ 어느 뉘 청ᄒᆞ니
(현대어) 서울 사자를 꺼리시어 바다를 건너실 때에, 2백 호의 사람을 어느 누가 청하였던가.
(해석) 목조께서 서울에서 오는 사자를 피해 바다를 건너던 날, 목조를 따랐던 백성이 2백 호였습니다. 언제 누가 그들더러 '제발 같이 가 달라'고 해서 목조를 따라 갔겠습니까?
용비어천가 제18장

이번에 정착한 곳은 지금의 함경남도 원산에 해당되는 동북면 의주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원래부터 어느 정도 상당한 기반이 있었던 이안사를 의주 병마사에 임명하고, 몽골 군대와 싸우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이안사는 몽골에 투항했다. 다만 몇년 후 고려도 태자가 원나라에 항복했다. 의주에서 가까이 있는 화주[6]에 몽골 대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던 몽골 옷치긴 왕가의 산지 대왕(散吉大王)이 두 번에 걸쳐 회유했고, 이에 이안사는 백성 1,000여 호를 이끌고 몽골에 투항했다.[7] 이때가 고려 제23대 고종 41년, 1252년이었다.[8] 이안사의 몽골 항복에 대해서는 1281년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가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여원 연합군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수도 개경을 방문하여 충렬왕(제25대)을 알현하고, 몽골에 항복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훗날 1355년 이안사의 증손자인 이자춘이 입조하여 공민왕(제31대)을 알현하자, 공민왕
"그대의 조부(이행리)와 부친은 몸은 비록 원나라에 있었으나, 그 본심은 고려에 있었다는 것을 내 조부(충렬왕)와 부친도 알고 계셨으니 총애하고 칭찬하셨다"
고 한 배경에는 1281년에 있었던 이행리와 충렬왕의 만남이 있었다.

이렇게 이안사는 두만강변의 개원로 남경 오동[9]으로 이주했고, 그렇게 두만강 유역인 오동(斡東) 지역에 자리잡은 뒤인 1255년 5,000호 천호장(千戶長: 밍간)과 다루가치[10]의 지위를 몽골 제4대 헌종 몽케 칸으로부터 하사받았다. 윤은숙 강원대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천호장은 몽골족이 아닌 사람이 임명되는 일이 매우 드문 고위 관리직으로, 이는 사실상 옷치긴 울루스로부터 승인받은 군벌 세력이 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11]

다만 윤은숙 강원대 교수가 다루가치의 직위를 상당히 높게 평가한데 비하여, 청나라의 학자 조익(趙翼)의 저서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12]에 따르면 다루가치는 '사무를 처리하는 관청의 장'을 총칭하는 자리로 문관, 무관을 가리지 않고, 관직의 높고 낮음을 따지는 자리는 아니며, 지방 행정을 보는 관청에는 모든 행정단위에 다루가치 관직이 있었다고 한다. 다루가치가 특정한 지위가 아닌 사무를 관리하는 장의 총칭으로 갈수록 그 직명도 세분화되었으며, 다루가치가 '총독, 지사'의 의미로도 널리 쓰였기 때문에 쌍성 총관도 번역하면 다루가치로 볼 수 있었다. 천호장(千戶長: 밍간)은 이안사가 유일한 고려인은 아니었고, 함경도 정주(定州) 출신 탁청도 천호장 지위를 부여받았다. 윤은숙 강원대 교수가 몽골로 유학가 몽골 역사연구소에서 석사 학위를 받으며, 몽골인 학자와 함께 논문을 쓰는 등 몽골 역사학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몽골 입장에서는 조선을 세운 국조가 자신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바람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오동 일대를 다스리는 관직인 오동천호 겸 다루가치에 임명된 이안사는 22년 동안 그 지위를 누리다 제24대 원종 15년인 1274년에 죽었다. 나중에 현손 이성계가 국왕이 된 후, 그를 '목왕(穆王)'으로 추존했는데 이안사의 무덤은 경흥부에 마련되었다. 하지만 조선 태종 10년인 1410년에 함흥부 북서쪽에 있는 달단동 가평사로 이장되었고, 능호는 '덕릉(德陵)'으로 정해졌다. 조선시대 지도와 구한말 흑백사진에 담긴 《덕릉》 모습 1년 뒤에 '목조(穆祖)'로 재추존한다.

4. 가계

  • 부 : 이양무(李陽茂)
  • 모 : 삼척 이씨(三陟 李氏) - 상장군 이강제(李康濟)의 딸
    • 제 : 영필(英弼)
    • 제 : 영밀(英謐)
    • 제 : 영습(英襲) - 주부공파

5. 대중매체에서

  • 2021년 SBS 드라마 <조선구마사>에서는 '기생 때문에 야반도주한 인물'로 언급된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개국 편에서 등장한다. 전주 수령을 피해 170여 가구의 사람들이 이안사를 따라 동북면 끝 쪽으로 간다. 이후 원나라에서 항복하라는 상소가 오자 이안사는 항복을 해 이후 원나라 관리가 된 것을 마지막으로 등장종료.


[1] 오늘날 함경남도(북한 기준으로 강원도) 원산시, 문천시이다.[2] 근데 사실 그 기생은 '관기', 즉 관아의 노비였다. 이안사가 건드린 것이 문제였다.[3] 물론 완전히 자발적이라는 건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한 자들의 미화일 수도 있다.[4] 성인 남성은 60세가 넘으면 군역과 세금에서 면제 처리를 해주기 위해 '정'(丁)이 아니라 '노'(老)로 분류를 바꾸어 주었지만, 여자와 아이는 아예 집계하지 않았다.[5] 이안사가 죽고 139년이나 지나서 조선 왕조가 세워졌을 때 왕실에서는 그때 이안사가 썼던 이양무의 무덤을 찾으려 애를 썼고, 구구한 지역들이 거론되는 가운데 1899년 7월 11일에야 대한제국 황제 고종은 삼척의 '이양무묘'로 전하던(제4대 세종 때 처음 발견했다고 전하는 곳.) 무덤을 공식적으로 이양무의 무덤으로 선언하고, 무덤에 준경묘(濬慶墓)라는 존칭을 붙였다.# 물론 조선 왕조가 그동안 공식적으로 그 곳이 이안사의 묘라고 선언하지 않은 건 본인들도 증거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인데, 500년이나 지나서 그 정체가 더 확실해질 이유는 없다. 고종이 황제를 선포하는 시기에 맞춘 정통성 강화를 위한 작업일 뿐이었다.[6] 훗날 쌍성총관부의 처소가 되는 쌍성이 바로 화주이다. 조선시대에는 영흥군이었다가 지금은 북한에 의해 금야군요덕군으로 갈라졌다.[7]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권1 <총서>[8] 참고로 이 일대는 고려 정부에 대한 여론이 원래부터 안 좋았는지 곧이어 1258년에 조휘탁청의 반란에 의해 쌍성총관부가 설치되었다.[9] 斡東, 알동이라고도 읽는다.[10] 원나라의 지방관리[11] 이렇게 부여받은 천호장과 다루가치의 직위는 이후 1290년 제5대 세조 쿠빌라이 칸의 치세 때 옷치긴 울루스의 내분으로 이안사의 아들 이행리(李行里·익조)가 오동의 기반을 상실하고, 함흥부 평야로 이주한 이후에도 이어졌으며, 이행리의 증손자 이성계 때까지 5대에 걸쳐 계속 세습되었다. 이러한 천호장과 다루가치라는 높은 직위는 이후 이성계의 전주 이씨 가문이 주변 지역들을 자신들의 영향력내로 흡수하고, 계속 군벌로서 성장하는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12]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한제 교수가 제자들과 함께 11년에 걸쳐서 번역할 만큼 중국 고증사학의 명저로 꼽힌다.[13] 목조부터 환조까지 추존 왕들의 자식들의 봉호는 나중에 1872년 12월에 조선고종이 추증했다.[14] 이 사람의 후손으로 사상의학의 창시자 이제마, 소설가 이효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