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神 | 宮 |
1. 개요
신라 서라벌에 설립된 종교 시설이자 밀양박씨 계통의 박혁거세 자손들만 거주할수 있었던 거대한 궁전.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나정 자리라고 추정한다.2. 기록
삼국사기에 따르면 본래 신라에는 2대 왕 남해 차차웅 3년(서기 6)에 나정에 시조묘(始祖廟)라는 시설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시조묘 관련 기록은 계속 등장하다가, 신라 21대 소지 마립간 7년(485)까지 기록에서 수백 년간 사라져버린다.그리고 바로 직후인 487년 소지 마립간이 시조가 처음 태어난 장소인 나을(奈乙)에 신궁을 설치했다고 한다. 정황상 신라 초기 '시조묘'의 기능을 '신궁'이 대체, 흡수했다고 추정한다.
같은 <삼국사기>내에서도 제사지에서는 다음 왕인 22대 지증왕이 창립했다고 기록되었다. 보통 소지왕 때 갈문왕이었던 지증왕이 설립한 것으로 본다. 이 경우 소지왕 시기 만들어졌다는 것도, 지증왕이 만들었다는 것도 모두 참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점을 감안해본다면 지증왕의 즉위에는 박씨 가문이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박씨 가문이 복호계의 수장인 지증왕과 손을 잡았다는 것이 된다.
801년 애장왕 때부터 시조묘가 다시 기록에 등장하는데 그 시차가 너무 커서 상대의 시조묘와 801년부터 다시 등장하는 시조묘가 같은 대상을 말하는지도 애매하다.
3. 발굴
현대에 나정 터를 발굴조사해보니 신궁 건물 이전에도 좀 더 작은 원형의 건물이 더 과거에 그 자리에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었으므로 초기 시조묘가 아닌가 추정한다. 발굴 결과 건물 터 두 곳이 겹쳐 나왔는데, 기존에 원형 건물이 있었고 어느 순간에 그 원형 건물을 허물고 팔각형 건물을 새로 만든 듯하다.여기에서 의봉 4년(679)이라 쓰인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삼국사기에서 문무왕 19년(679)에 삼국통일전쟁을 이제 막 끝마친 뒤 '궁궐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팔각형 건물을 지었다고 추정하는데, 위 기록으로 미뤄보아 신라시대 당시 일종의 별궁처럼 궁궐 건축물의 하나로 간주됐을 가능성이 있다.
초창기 원형건물 시절은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팔각형 건물은 명백히 '천원지방'을 표현하는 것으로, 훗날 조선의 원구단이나 중국의 천단과도 용도에서 통하는 면이 있다.
4. 제사
신라 역대 왕들이 즉위하면 즉위 초기에 신궁에서 거의 반드시 제사를 지냈다. 이 관례는 2대 남해 차차웅이 시조묘를 건립한 후 천 년 동안 거의 대부분의 임금이 지킬 만큼 중요한 행사로, 사실상 대관식처럼 즉위 초기에 당연히 해야 했던 제도화된 즉위 의식으로 여겨지고 있다.방식은 전임 임금이 승하하면 일단 후임자가 즉시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하고, 그 다음 해 봄인 음력 1월 ~ 2월경에 경주 서남쪽에 있는 시조묘(초기) 혹은 신궁(지증왕 이후)에서 즉위 의례를 거행하였다. 다만 대부분의 왕이 지키긴 했어도 정확한 시기가 고정된 건 아니었는데, 신궁에 방문하는 시기는 융통성이 있었던 듯 하다. 1월에 할지 2월에 할지는 제각각 다르고, 특이케이스로 예를 들어 경덕왕은 즉위 3년차에 신궁 제사를 지냈고 진덕여왕은 가을인 10월에 신궁 제사를 지냈다. 고구려나 당나라가 쳐들어오는데 시즌 됐다고 한가롭게 제사 준비나 하고 있을 순 없으니...
시조에 대한 제사공간으로 후대 고려와 조선의 종묘와 비슷한 역할을 하던 시설이지만 중국식 유교적 종묘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교식 종묘는 이후 통일신라시대인 687년 신문왕 때 따로 김씨 왕들만의 태조, 진지왕, 문흥대왕, 태종무열왕, 문무왕의 5위를 모셨다는 기록과 혜공왕(765~780)때 이르러서 5묘와 불천위를 정했다는 기록이 따로 나오므로, 신라에서는 전통적인 신궁과 중국적 종묘시설 둘 다 따로 존재했다고 봐야 한다.
4.1. 주신
신궁에서 제사 지낸 주신의 정체를 두고 이설이 많으며 그 설들은 다음과 같다.- 박혁거세설: 신궁을 설치한 곳(나을)이 신라의 시조 탄생지라는 삼국사기 기록에 착안한 설. 대다수의 왕들이 신궁 설치 후 신궁제사만을 올리는 기록에 근거해 시조묘가 신궁으로 변한 것을 근거로 든다. 더욱이 2003년 경주 나정 유적이 출토되고, 여기서 신궁으로 보이는 건축물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어 고고학적 뒷받침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미 시조묘가 있는데 구태여 신궁이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으며, 신라 후기인 애장왕, 헌덕왕, 흥덕왕대에 기록에 신궁제사와 시조묘제사 양쪽에 제사한 기록이 있어 시조묘와 신궁의 주신을 동일시할 수 없다는 반론이 있다.
- 김씨 시조설: 신궁에 모신 주신은 신라 왕실이 김씨세습이 고착화되면서, 김씨 왕족의 시조신을 모신 것이라는 주장. 그러나 따로 선대의 김씨 출신 왕들을 제사지내는 조묘의 기록이 나오는데다, 혜공왕때 유교적인 종묘제례 예법인 5묘를 세웠다는 기록이 나오면서, 동시에 혜공왕이 신궁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오고, 박씨 왕족인 경애왕도 신궁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다는 반론이 있다.
- 천지신설: 신궁에는 특정 왕족의 시조가 아니라, 재래의 천신(天神)과 지신(地神)을 모셨다는 주장. 왕이 시조묘에 제사할 때에는 친사시조묘, 알시조묘, 친알시조묘라는 표현을 쓰면서 왕이 신궁에 제사할 때는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왕친사신궁, 친사신궁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에 기초한 설. 여기에 혜공왕때에 유교식 종묘(오묘 기록에 근거)를 세운 것을 시조묘가 종묘로 변했다고 보고, 시조묘가 종묘로 변한 것처럼 선덕왕대 사직단 건립 기록과 신궁을 연결시켜 시조묘->종묘, 신궁->사직단으로 보아 주신의 위격이 관련성이 있다고 보는 주장.(사직단은 산천신에게 제사지내는 곳이다.) 고로 산천신을 모시는 사직단과 관련있는 신궁의 주신은 자연히 천지신이라는 것. 그러나 고고학적인 증명이 약하다는 단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