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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 |
<colbgcolor=#a60c0c,#360505><colcolor=#fff> 군호 | 양녕대군 |
신분 | 조선국 왕세자 (25회 ~ 31회) → 양녕대군(31회 ~ 32회) |
가족 | 수성부부인 (배우자) 태종 (부친) 원경왕후 (모친) 효령대군 (둘째 동생) 세종 (셋째 동생) → (주군) 성녕대군 (막내 동생) 태조 (조부) 신의왕후 (조모) 민제 (외조부) 민무구 (외숙부) 민무질 (외숙부) 민무휼 (외숙부) 민무회 (외숙부) |
등장회차 | 13회 ~ 32회 |
배우 | |
이태리 (아역 : 김인우[1], 김준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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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장남[3]이자 태종의 첫째 왕세자이다. 이방원이 이제를 부르는 애칭은 큰놈이.[4] 태종 이방원에게는 소중한 큰아들이자 아픈 손가락, 그리고 아버지로서 이길 수 없는 자식이며, 그의 인생에서 가장 넘기 힘든 산이자 결국 넘지 못한 산이다.[5]2. 극중 행적
2.1. 유년기 (13화 ~ 26화 중반)
2.1.1. 존재 자체가 위로인 장자
이도의 탄생 이후 이보와 함께 등장했다. 출생 이후 외할머니의 말대로 줄곧 외가인 여흥 민씨 집안에서 자랐는지, 두 외삼촌을 상대로 목검을 들고 칼싸움을 하며 놀고 있었다.외조모 삼한국대부인에게 외숙부들이 어디로 갔는지 묻지만 현재 본인을 귀한 자리에 앉히기 위해 일하고 있으며, 나중에 귀한 사람이 되어서도 외조모의 보살핌과 외조부의 가르침, 외숙부들과 같이 놀았던 기억을 잊지 말라는 답변을 듣는다.[6]
외할머니 송씨를 따라 오랜만에 집에 와 이방원과 만나는데, 괴물로 행동하느라 피폐해진 이방원의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되어 준다. 이미 정신적으로 몰릴대로 몰린 이방원은 아들을 보고는 껴안고 울부짖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인지라 아버지가 왜 우는지 이해못한 채 그를 달랜다. 이후 정사공신들과의 만남도 미루고 온종일 데리고 다닐 정도로 귀여움 받는다. 어머니가 잠시 이름 문제를 거론하기는 하였으나 아직까지 아명인 큰놈이로 불리고 있다.
2.1.2. 싹수 노란 세자
여기서부터 아역이 다른 배우로 변경되었다. 아버지가 즉위하면서 동생들과 다시 한 집에서 살게 되었으며 아버지가 이름을 생각해야겠다는 말을 꺼낸다. 더 큰 집으로 이사하게 되어 동생들과 아주 신난 모습을 보인다. 지금 아빠, 엄마가 뭘 벌이고 있는지 모른채 그 나이대다운 태평한 모습을 보인다. 밤중에 동생들과 베개 싸움을 하다 두 누나들이 밤인데 얼른 안 자고 시끄럽게 군다고 삼형제를 타박하고, 셋째 누나가 자신을 포함한 동생들에게 꿀밤을 때리자 누나에게 지금 누구한테 손을 대냐면서 자신이 장차 원자가 되고, 세자가 되고 나중에는 이 나라의 국왕이 될 몸인데 이런 식으로 대우하면 안 된다고 대들지만, 오히려 셋째 누나에게 넌 아직 세자는 커녕 원자도 아니기에 아무것도 아니며, 말도 안 듣고 글공부도 안 하는 내 아우일 뿐이라는 핀잔을 듣고 꿀밤만 한 대 더 맞는 굴욕을 받았다.남동생들과 같이 누워서는 장차 왕이 되면 셋째 누나에게 큰 벌을 내리겠다며 씩씩거리지만 그래도 누나가 우리랑 놀아주지 않냐는 동생들의 변호에 나중에 하는 거 봐서 다시 생각하겠다며 화를 거둔다. 그러던 중 장자가 왕이 된다면 동생인 우린 뭐가 되냐며 효령이 돌연 질문하자, 너흰 아무 것도 아니라고 답하는데, 충녕은 아버지의 예시를 들며 장자가 왕위에 꼭 오르라는 보장이 없다는 반론을 내놓는다. 이에 꿈 깨라면서 그건 외숙부님들이 도와주셔서 아버지가 왕위에 올랐던거라며 자신이 장자니까 다음 왕위는 내꺼라는 식으로 말을 한다.
동생, 누나들과 같이 아버지께 문안 인사를 드리면서 어머니께는 드리지 말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후 셋째 동생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선 왜 우냐고 묻고 둘째 동생이 어머니를 못만나서 우는거라고 말해주자, 자신이 앞장서서 동생들을 데리고 중궁전으로 가 어머니와 오랜만에 재회한다. 동생 충녕이 어머니를 아예 찾아뵙지 말라는 아버지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자, 이에 조석으로 드리는 문후를 가지 말라 하셨지 중궁전에 아예 가지 말라 하신 게 아니지 않느냐고 주장한다.
이내 자신이 앞장 서면 누가 막겠느냐며 어린 동생보다 총명하지 못하면서, 지위만 내세우는 성격이라는 게 드러난다.[7] 그러나 그가 무식함을 앞세워 동생들을 이끌고 원경왕후를 찾아가 그녀에게 자식들과 생이별하는 고통을 인지시키는 바람에, 태종에게 저항하며 버티고 있던 원경왕후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며 마침 정종의 설득[8]으로 흔들리던 태종도 그녀가 우는 것을 보고 잠시 화해한다.
본의는 아니지만 태종 부부의 갈등이 극적 악화에서 봉합으로 이르는 계기를 제공한 셈.
조사의의 난으로 인한 친정을 나가기 전이었던 부왕이 제(禔)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동생들과 달리 군호는 받지 못해 이유를 묻자, 왕이 될 원자에게는 군호가 필요 없다는 답을 듣고 효령과 충녕을 바라보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9] 나중에 어머니 앞에 두 누나들과 동생들하고 모였는데, 원자가 되어 형제들중 유일하게 곤룡포와 익선관을 착용하고 있다.[10] 자신이 원자라서 군호가 없다고 자랑하고, 셋째 누나가 큰놈이 아주 신났다고 하자 기분이 나빠져 이제 날 그렇게 부르면 안 되니 예를 갖추라고 한다. 이에 셋째 누나가 원자 애기씨라고 부르며 받들어 모시겠다고 장난스럽게 말하자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원자가 된 뒤, 글공부가 싫다는 이유로 멀리하며 새를 잡기 위한 덫을 설치하며 새가 잡히길 기다리는 놀기 좋아하는 모습이나 보였다가 아버지한테 들키고선 꾸중을 받게 된다. 이제까지 정말 오냐오냐하며 자란 것인지, 아버지의 이런 모습에 별로 익숙지 않아 주눅이 든다. 그래도 아버지가 혼을 내기보다는 '왕이 되면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한다'며 좋은 조언도 해주며 다독여주었다. 한편 이 모습을 동생인 충녕군 도가 몰래 지켜봤다. 이후 이방원으로부터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후 맹자를 외우는데 성공하면서 스승으로부터 휴식시간이 주어지는데, 동생들에게 놀러 가려고 하다가 몇 걸음 못 가서 아버지와 마주친다. 앞서 세자가 공부를 빼먹은 사실을 목격한 태종은 또 공부를 빼먹는게 아닌가 불신하고 도로 서탁 앞으로 데려가서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했길래 놀러 나가려고 했는지 보겠다면서 직접 세자에게 맹자를 외우도록 시키는데, 세자는 긴장했는지 외운 것을 다 잊어 버린다. 이에 태종은 크게 분노하여 세자가 보는 앞에서 휴식을 준 사부를 간신이라 칭하며 황희를 시켜서 파직시켜 내쫓고 동행한 내관은 책임을 물어 태형 30대를 맞도록 한다. 아버지가 이리 나오자 세자는 세자궁에서 아버지가 무섭다면서 운다. 이후 이방원이 양위 파동을 일으키며 황희를 시켜서 국새를 보내자, 당황하여 손을 뻗다가 내관이 고개를 가로젓는 걸 보고는 도로 손을 뒤로 뺀 다음에 "아바마마가 또 절 혼내려고 그러는것이 아니옵니까"라고 한뒤 안 받겠다고 하고 달아난다.[11]
양위 파동이 며칠 이어지자, 어머니의 설득[12][13]으로 직접 국새를 이방원에게 가져가고 글공부를 열심히 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태종은 양위 의사를 거두는 명을 내리고 조용히 세자를 포용하는데, 세자는 아버지가 두려운 듯 굳은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다 기뻐할 때 유이하게 기뻐하지 않았던 외숙부들이 이 일로 유배를 가게 되자,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외숙부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어머니의 품에 안겨 울고, 어머니로부터 자라서 힘이 생기면 외숙부들을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2.2. 성년기(26회 후반 ~)
2.2.1. 망나니로 자라다
송내관이 기상을 올리자 시끄럽다는 말과 함께 문을 박차고 나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익선관을 머리 위에 쓰는데, 술에 취한 채로 방탕하게 지내는 모습으로 나온다. 잘 주무셨냐는 효령의 물음엔 눈이나 겨우 붙였다고 딱딱하게 대답하고, 이에 충녕이 또 술을 마셨냐고 하자 너나 잘 하라고 말하며 무시한다.[14]
동생들과 부왕의 문후를 드리러 간 대전 앞에서 글을 외웠냐는 이방원의 말에 외우진 않았지만 가슴에는 새겼다고 대답하고[15], 이 말에 이방원이 화를 내며 자신도 충녕도 그렇게는 공부 안 한다고 꾸짖자, 동생과 비교당하는 것에 화가 나서 자신만의 길이 있는데 왜 자꾸 전하와 충녕처럼 되라는거냐고 말한다. 이에 이방원이 지금 내 말을 거역하는 것이냐고 묻자 자신을 인정해달라고 떳떳하게 요구한다. 어찌 보면 내내 이방원과 비교당하는 현실에 분통을 터뜨리던 숙부 이방간이 생각나는 대목이다.[16]
이후 충녕과 함께 태종의 앞으로 불려가 그동안 했던 글공부에 대한 질문을 받았으나, 제대로 답하지 못하여 크게 문책을 당한다.[17] 이에 잘못했으니 그만 하라고 아버지에게 대들고, 태종은 황희에게 지시하여 스승들을 모조리 파직한후 내관들에게도 태형 20대를 가한 후 궐 밖으로 내쫓도록 지시하고, 세자에게도 이를 지켜보게 하였다. 황희의 감독 하에 태형이 집행되던 중 세자는 끝까지 보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는데, 황희가 전하의 지시라며 남으시라고 하자 "내가 왕이 되면 당신부터 내치겠다."라고 말하며 결국 떠난다.[18][19]
그리고 행실이 고쳐지기는 커녕, 점점 더 막나가게 되며, 몰래 빠져나가 밤새 술까지 먹고 아침에 입궐하던 중 태종에게 발각된다. 이에 여느 날처럼 문책을 당하던 중, 반항심에 외숙부들의 일을 거론하다가 또 한번 죄인들을 입에 담았다간 용서치 않겠다는 위협을 받고, 처소 주변에 숙위병이 배치된다.
밤에 동궁전에 찾아온 원경왕후에게 숙위병들을 치워달라 하지만, 원하는 것이 있거든 스스로 싸우라고 하면서 아버지는 자식과의 싸움에서 불리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태종이 태조를 이긴 것 아니냐는 조언을 듣고, 이후부터 식음을 전폐하며 단식 투쟁을 하는데, 태종이 직접 찾아와서 "지금 나를 겁박하는 것이냐"고 하자 그저 입맛이 없을뿐이며 글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으니 걱정 하지 마시라고 둘러댄다. 태종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서 수저를 들어서 밥을 먹으라고 화를 내며 윽박지름에도 불구하고 시선을 회피하며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고, 이에 제대로 분노가 폭발한 태종이 앞에 있는 밥상을 그 자리에서 통째로 뒤집어 엎어 버리자 차라리 벌을 내려라, 대신 매를 맞을 내관들도 모두 나갔으니 자신에게 직접 형벌을 가하라고 일갈한다. 결국 태종은 숙위병들을 모두 거두고, 쫓아냈던 내관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부정을 이용해 자신을 꺾은 세자의 모습에서 과거 태조에게 이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스케일로 불효했던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는, 술에 취하여 태상왕이 된 태조를 찾아가 용서를 빈다. 다음날 세자는 돌아온 내관들을 보며 입맛이 돈다고 말하며 아버지를 꺾어 넘긴 것에 후련한 모습을 보인다.
태종의 생일날, 태조가 직접 찾아와 축하를 하고, 태종과 태조가 부자관계를 회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태조가 숨을 거두자, 함께 슬퍼하며 상을 치른다.[20]
이후 충녕군과 효령군의 조언에 따라 태종을 찾아가고, 태종은 처음에는 왜 왔냐며 꾸짖다가 멱살을 잡고 윽박질렀지만[21], 곧 세자를 끌어안으며 생전 부왕인 태조에 대한 효를 다하지 못한것에 대해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어느 날 태종과 함께 상왕 정종의 부름을 받아 산책을 나가게 되고, 언덕위에 올라서서 태종에게 이제 그만 괴로워 해도 된다는 위로를 건넨다. 이에 조금은 마음의 짐을 덜게 된 태종은 언덕 밑에 있는 산들과 마을들을 보여주며 저것이 바로 이후 국왕이 다스려야 할 나라인것을 보여준다.
다시 궁궐로 돌아가는 길에 엎드린 백성들과 그 사이를 당당히 지나가는 부왕의 뒷모습에 감명받고, "누가 조선의 왕이고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지 알았다."라면서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다시 글공부에 매진하기로 한다.[22]
곧바로 외조부인 민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급히 외가로 찾아가지만 이미 민제는 숨을 거둔 후였다. 원경왕후와 함께 민제의 상을 치르던 중, 어머니에게서 이제부터 유배된 외숙부들인 민무구와 민무질을 죽이라는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고, 그것이 곧 "전하의 뜻"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는, 편전에 나아가 외숙부들의 구원을 청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마침내 날이 밝자 원경왕후와 함께 편전으로 간다. 안으로 들어간 뒤 태종의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겠다고 한 뒤, 원경왕후의 부탁과는 반대로 죄인들의 죄가 무거우니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밝히며 결국 "전하의 뜻"에 영합하기 위해[23][24] 어머니의 뒤통수를 치고 만다.[25]
민무구와 민무질을 사사하라는 어명이 내려진 후, 아버지 태종에게 외숙부들을 죽이라는 뜻이 진심이라면 밖에서 울부짖고 있는 어머니 원경왕후의 소리를 견뎌내라는 말을 듣는다.[26] 그리고 몸져 누운 어머니를 찾아가서는, "제가 반대했어도 어차피 아버지가 외숙들을 죽였을 겁니다."[27]라고 하며 자신이 왕명을 받드는 모습을 보여야 훗날을 기약할 수 있었다고 변명하지만, 원경왕후로부터 "너의 훗날을 위해 외숙들을 제물로 삼았다는 말이냐?"는 꾸중과 물러가라는 말만 듣는다.
이후 효령과 충녕이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상을 차려 들어오는 것을 보는데, 충녕이 자신이 어머니의 응어리를 풀어드려야 한다고 말하자 따로 독대를 한다. 충녕으로부터 외숙부들의 사사는 한 번 태종을 꺾었던 저하가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일이었다고 하자, 아버지는 어차피 외숙들을 죽일 생각이었다며 반박하지만, 그건 자신이 믿음을 주지 못해 외가에게 흔들릴 것을 염려해서 그런 것이라고 몰아세우자, "그럼 다 내 탓이란 말이냐?"고 항변하는데, 충녕이 냉정하게 "그럼 누구 탓이옵니까?"라고 받아고 세자의 자질에 대해 몰아세우자 홧김에 멱살을 잡으면서 네가 외숙부들과 얼마나 친했다고 그러느냐고 비난하지만, 충녕은 눈물고인 눈으로 양녕이 죽인 민씨 형제는 자신에게도 엄연히 소중한 숙부이자 가족이고 어머니의 아우들이었다고 일갈하면서 사실상 "형님이 못해서 외숙부들이 죽었고 어머니가 피눈물을 흘리게 된 거 아닙니까?"는 식으로 비난을 했고 숙부들의 죽음으로 절망의 눈물을 흘리며 원망하는 충녕에게 그 이상의 반박이나 역정을 내지 못하고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만다.
또 한 번의 양위 파동 이후 아버지와 군사 훈련을 참관하며 고려 무신정변 이후 처음으로 사병이 아닌 국가의 군대가 세워진 의의를 듣는다. 그러나 이렇게 아버지가 국사에 대해 가르침을 주는 것을 신임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긴장이 풀려 대비 상중에 기생들과 함께 술과 향락에 빠져 지내고 궁에 기생을 들이려고까지 한다. 그리고 이를 본 충녕군이 자신의 비행을 전부 아버지에게 말씀 드렸다고 하자 화가 나서 왼손으로 그의 멱살을 잡으며 대립한다. 이후 충녕군이 대놓고 "세자 저하는 절대로 왕이 되면 안 됩니다!"라고 하자 더욱 분노하여 반대쪽 손으로도 멱살을 잡는데, 충녕군이 멱살을 혼자 힘으로 풀고 살펴 가라는 말을 남기고 가 버리자 제대로 폭발하여 충녕군을 부른다.
그리고 다음날, 편전에서 이방원에게 꾸중을 들으며, "내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이 아비에겐 당장 군왕이 되어도 손색 없는 아들이 한 명 더 있다."라는 경고를 받고 충격을 받았는지, 편전을 나가는 이방원을 다급히 부르다가 충녕군을 부르며 매우 분노한다.
2.2.2. 동생에게 위기 의식을 느끼다
이방원이 이 자리에 효령과 충녕을 같이 부르는데, 세자는 충녕의 이름을 듣고 매우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인다. 세자는 병풍에 적힌 글귀를 해석하여[29] 이방원을 기쁘게 했지만 충녕은 거기서 한발 더 나가 그 출처가 남북조시대에 쓰여진 《속제해기》임까지 짚어내며 학식을 뽐내고, 세자는 이를 불편하게 바라본다.[30]
이날 밤에 "오늘 내가 너에게 배운게 있으니 나도 너에게 가르침을 주겠다. 그렇게 책만 읽다가 살찐 짐승이 되는걸 형으로써 두고 볼수가 없다"라는 명목[31]으로 충녕과 목봉으로 무예를 겨루는데, 충녕을 작정하고 온 힘으로 여러 번 목봉으로 후려쳐서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충녕을 때려눕힌 채로 "내가 너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 서로 잘하는 분야가 다른 것이다", "넌 효행록을 아무리 많이 읽어봤자 형제 간의 우애를 해치는 일을 가장 앞장서서 하는 놈이다"면서 자신을 불편하게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오히려 충녕은 지지 않고 그게 그렇게 기분 나쁘면 형님도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자신을 따라잡으라며, 자신이 세자였다면 주색 잡기에 빠져 글공부를 멀리하지 않았을 것이고 형님에게는 충분한 기회가 있었다고 받아친뒤 가 버린다.[32]
한편 겉으로만 공부에 관심을 가진 척할 뿐, 주색잡기를 좋아하는 성정은 여전했다. 아예 자신의 패거리들을 동원해 중추원 부사 곽선(郭璇)의 첩 어리를 납치하듯이 세자궁으로 데려온다.[33]
한편 효순궁주의 고변으로 인해 이방원이 중전 민씨의 남은 동생들이자 외척인 민무회와 민무휼마저 숙청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는 충녕 앞에 나타나 외숙부들이 자신에게 불순한 언행을 했고 충녕은 서책에 빠져 살아 세상 물정 모르고 국왕의 고뇌를 모른다고 깎아내리면서 예전에 민무회에게 들었던 말을 고변한다. 이로 인해 중전 민씨의 눈물과 충녕의 설득에 망설이던 이방원이 민무회와 민무휼까지 숙청하기로 결심하도록 만든다. 분노한 충녕이 왜 이렇게까지 하냐며 힐난하자 너 때문이라고 쏘아붙인다.
자신도 여러모로 심란했는지 그날 밤 집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간청하는 어리에게 "나는 군왕이니까 원하는 건 뭐든지 가질 수 있다!"고 술을 마시면서 허세를 부리지만, 잠시 후 민무회와 민무휼의 소식을 듣고 분기탱천한 중전 민씨가 세자궁에 들이닥치자 허둥거리며 어리를 뒷방에 숨기는 찌질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분노한 어머니에게서 뺨을 맞고 "네가 사람이더냐, 네가 정녕 이 어미의 뱃속에서 열 달을 채우고 나온 그 아이가 맞느냐?"라고 1차 팩폭을 듣는다. 이에 "저도 살려고 그랬습니다!"[34][35]라고 둘러대지만, 어머니로부터 닥치라는 말과 함께 "네놈이 못난 것을 가리기 위해 외숙부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도 모자라 동생을 모함하느냐?"라고 2차 팩폭까지 당한다. 여기에 "네놈이야말로 악귀다. 물귀신처럼 아무나 잡아당겨 죽음으로 내몬다", "널 낳은 것이 이렇게 피 맺힌 후회가 될 줄 몰랐다. 널 낳고 흘린 기쁨의 눈물이 후회의 피눈물이 될 줄 몰랐다"는 등, 갖은 폭언을 듣고 어머니와도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다.
거기에 유정현의 보고로 어리와 초궁장[36]의 일을 들켜 이방원의 분노를 사고, 결국 궁에서 추방되어 사가에서 근신하는 신세가 된다. 이때 국왕의 명령을 전한 유정현에게 경의 노고를 잊게 않겠다고 협박한뒤 병사들에게 두 팔을 잡혀 끌려나가고, 쫓겨나는 모습을 보고 놀란 충녕에게 거의 달려들다피 화를 내며 "또 네놈이 한 짓이냐? 내가 보위에 오르면 네놈부터 처단할 것이다"면서 적반하장으로 열불내는 추태를 보인다. 심지어 세자에게 깊이 실망한 태종이 충녕의 야심을 눈치채고 능력을 발휘할 기회[37]를 주면서 세자 자리에서도 밀려날 위기에 처했다.
궁궐에서 쫓겨난 후 처가집인 김한로의 집에서 머무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자신의 스승들인 시강원 관료들에게 궁궐로 돌아갈 방법을 묻는다. 난감해하던 스승들이 내준 계책으로 스승들과 함께 종묘에 가서 조상들의 신주에 대고 다시는 비행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맹세를 한다. 유교국가인 조선왕조에서 종묘에 맹세를 한다는 건 정말 진심이라는 걸 어필하는 행위였고 이 소식을 들은 태종도 못 이긴 척 세자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인다.
궁으로 돌아와 신나게 지나가다가 대신들을 만나서는 자신을 마중나왔느냐며 김칫국을 마시지만 대신들은 충녕대군의 초청을 받아 충녕대군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일단 다시 아버지를 만나 자신이 이번엔 달라졌다고 말하지만, 태종은 그런 소리는 수도 없이 들었다며 행동으로 보여달라고 무덤덤하게 말하며 별로 기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당황한 세자는 충녕대군이 대신들과 만나 주연을 베푸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 않느냐며 묻지만, 태종은 종친의 집에 분경을 금지한 것은 벼슬청탁을 막기 위함이었는데, 충녕은 그럴 사람이 아니라 허락했다고 대답한다. 초조해진 세자는 태종에게 청해 자신도 대신들과 정사를 논할 수 있는 자리를 달라 부탁하고는, 나오는 길에 만난 충녕의 뺨을 기분 나쁘게 톡톡 치면서 자신이 보위에 오르면 너는 살아남기 힘들거라 겁박하나 충녕은 역으로 자신이 보위에 오르면 편히 살게 해드리겠다며 손을 쳐낸다. 이에 나는 참으로 자비로운 동생을 뒀다고 비꼬아서 말한다.[38]
태종이 청을 승낙하여 대신들을 모아놓고 세자와 같이 정사를 논하는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첫번째 안건이 '사관을 편전에 들이는 건' 이었는데 대신들이 들여야한다 말아야 한다 할 때마다 줏대가없이 이랬다 저랬다 하다가 '특별한 경우에만 들이자'는 안을 내놓는데 특별한 경우가 언제냐는 물음에 답을 못한다. [39][40] 결국 답답해진 유정현이 이는 단순히 사관을 들이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고 임금이 온전히 공적인 존재인가 사적영역도 보장해야하는가의 문제라며 일단 세자 스스로 생각하는 국왕이 어떤 존재인지 먼저 밝혀줘야 논쟁을 이어갈 수 있다고 맥을 짚어줘도 끝내 결론을 못 내린다.[41] 태종은 수고했다며 이래서 학문이 필요한것이라 위로해주지만,[42] 그날 밤 또다시 어리를 끼고 술판을 벌이다가 어머니 원경왕후에게 그 광경을 들키고 말았다.
2.2.3. 왕위를 빼앗기고 쫓겨나다
다음 날 태종이 유정현과 황희 앞에서 폐세자를 거론하며 세자 자리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태종이 세자의 폐위를 논한 그 날 밤중 내관을 시켜 태종에게 서찰을 전해주고 태종이 세자를 찾아가자 밤에 활을 쏘는일로 태종과 말싸움을 벌인다. 태종이 궁궐에서는 활을 쏴서는 안되는 것도 모르냐며 꾸짖자, 전하가 계신 곳을 향해 쏜게 아니며, 자신을 과녁이라 생각하면서 쏜 것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태종이 자신을 세자라고 부르자 "세자라고 부르지 마시옵소서. 전 이제 그 이름이 싫사옵니다. 제가 시켜 달라 조른 것도 아니고 태어나 보니 장자였고, 철들어보니 세자였사옵니다. 그런데도 궁궐의 모든 사람이 너는 왜 그 모양이냐고 날마다 손가락질만 하더군요. 이젠 그 지긋지긋한 올가미에서 벗어나고 싶사옵니다"라고 그 동안 쌓인 울분을 털어놓는다.[47] 그리고는 마지막 자존심을 챙기고자 내일 자신이 편전에 나가 대신들 앞에서 스스로 명예롭게 세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힌다.하지만, 태종은 이를 거부하고 세자에게 네 마음대로 세자가 된게 아니듯 그 자리에서 마음대로 내려갈수 있는 것도 아니라면서 폐세자는 환란을 몰고 오는 화근이 되니까 죽일 수 밖에 없겠다면서도, 자식을 죽일 수 있는 부모는 없으니
다음날 편전에서 회의를 통해 전날 세자가 태종에게 준 서찰을 모든 신료들에게 공개했다.[49][50] 알아서 물러나준 형식에 그래도 호의적이던 신료들의 반응은 이 서찰로 완전히 뒤집힌다. 추후 그에 대한 동정론이 나올 구석은 완전히 차단되어 정치적인 수명이 끊어진 것. 그리고 세자의 인격이 개차반이라 조력자도 없을 테고 정치적으로도 죽은 거나 다름 없으니 유배를 보내도 경기도에 거주하게 해 중전은 자주 볼 수 있도록 하자고 해 폐세자가 되어 경기도 광주로 쫓겨나게 된다.
그렇게 부인인 수성부부인과 아들, 딸을 데리고 궁궐을 떠나다가 세자에 오른 동생 내외 및 조카들과 마주치는데, 아내가 아이들에게 "세자 저하께 인사 여쭙거라"라고 말하자, 큰딸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세자는 아버님이 아니시옵니까?"라 묻고, 이에 다시 한번 현실을 직시한 양녕은 세자가 된 충녕에게 "잘해보십시오, 아주 기대가 큽니다", "보다시피 잘난 아우 덕분에 이리 쫒겨가는 중입니다"라며 마지막까지 추한 모습이나 보이면서 이제는 세자가 아닌 평범한 왕자 양녕대군이 되어 궁궐을 떠난다.[52] 단, "궁궐이란 데는 별일이 다 일어나는 곳"이라는 말을 하는데, 친동생이야 그렇다 쳐도 제수씨의 끔찍한 미래를 볼 때 마냥 틀린 말은 아니었다.
원경왕후가 죽은 그날 밤 동생 효령대군에게 죽은 어머니는 어디로 가겠냐고 물어보며 한탄한다. 어머니는 극락왕생하실 것이란 효령의 위로에 극락이 있다면, 지옥도 있을 것이며 자신은 지옥에 갈 놈이니 해 본 소리라고 자조한다. 그런 양녕의 태도에 효령이 양녕은 처음부터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고 나름대로 위로해보지만, 처음부터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은 정해지지 않았으며 나쁜 짓을 했다면 그저 나쁜 사람일 뿐이라고 씁쓸하게 말한다.
그 순간, 원경왕후의 침소에서 세종이 나오자 이전과는 달리 덤덤히 인사하며 국왕으로서의 일은 잘 되어가냐고 묻는다. 그러나 세종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태평성대는 언제 옵니까?", "제 자리를 빼앗았으면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습니까?"라며 여전히 동생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한 말을 한다.
효령이 당황해 말리려 하나, 양녕은 "지금의 이 말은 비꼬는 말이 아닌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전하가 왕으로서 잘 해나가길 바라는 말입니다."라며 자리를 뜨는 세종을 배웅한다. 떠나는 세종의 뒷모습을 씁쓸함과 착잡함이 섞인 눈으로 바라보는데, 폐세자가 된 후 시간이 지나서인지 완전히 앙금이 풀리진 않았으나 동생인 국왕의 앞날을 격려해주며 형제 간의 앙금이 조금이나마 나아진 모습을 보여줬다. [53]
이후 태종의 장례식까지 본인의 부인은 물론 동생 내외와 함께 마지막으로 지켜본다.
3. 극중 묘사
작중 양녕대군은 <용의 눈물>을 필두로 그간 다수의 사극 작품들에서 차용해왔던 소위 '왕재가 충분히 있었지만, 권력을 스스로 버린 호탕한 인물'로서의 미화, 왜곡된 면모는 물론 '가족사에 대한 환멸'로 인한 의욕 상실 같은 것이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무능한 주제에 권력욕에 매몰된 모습을 보여주며, 피로 얼룩진 가족사에 대해서는 별달리 의식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 외에 사료에 기록된 여러 부정적인 모습들[54] 역시 드라마 상에서 빠짐없이 등장한다. 다만 양녕이 최후반부의 주역이다 보니, 실제 기록된 막장 행각들이 압축되면서 본의 아니게 순화되긴 했다.[55][56][57]어릴 적에는 이방원&원경왕후 부부가 앞서 세 아들을 여의고 겨우 얻은 아들인 만큼 부모가 양녕을 몹시 애지중지했지만, 본인은 입궁 전에는 외갓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직접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충녕과 비교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원망, 동생에 대한 열등감이 겹쳐진 끝에 양녕은 아버지와 어머니 속을 시커멓게 태우고 있다. 부왕은 양녕이 왕실의 후계자가 되길 원하는데, 양녕은 끝까지 이방원과 민씨의 아들로 남아 어리광만 부린다. 양녕은 가문(家)을 넘어 국가(國)로라는 드라마의 중심 사상과 반대되는 행보를 걷고 있는 것이다.
작중 양녕은 외가에서 너무 오냐오냐하며 기른 탓에, 굉장히 이기적이면서도 줏대가 없다. 왕실의 장자로 반드시 가져야 하는 책임감, 하기 싫은 일도 꿋꿋하게 해나가는 끈기, 듣기 싫은 말도 귀담아 들을 줄 아는 도량이 모자라며 다른 사람은 어찌 되든 자기 편한 길만 찾으려고 한다. 때문에 애민군주는 커녕 자기 주변 사람조차 제대로 아껴주지도 못한다. 오히려 제대로 된 직언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왕이 되면 널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아첨을 일삼는 사람에게만 "내가 왕이 되면 널 잊지 않겠다"라고만 한다. 그에겐 왕이란 그저 편하게 놀고 먹기위한 수단일 뿐인 것이다. 장차 왕이 될 자가 이래도 되냐는 어리의 항변에 왕은 나랏일을 하기에 앞서, 편안해야 하므로 모든 것이 허락된다는 마인드를 드러낸다. 심지어 호색한 기질도 심해서 유부녀까지[58] 마음대로 겁탈하는 등, 그야말로 충혜왕의 후배이자 연산군의 대선배뻘.[59]
자신이 공부를 게을리한 죄로 내관이 장 30대를 맞고 쓰러졌을 때, 양녕은 내관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내관들이 얻어 맞는 걸 불편해 했으나, 문제는 그 다음 도피를 한다는 것. 내관들이 얻어 맞는걸 끝까지 보지 못하고 자리를 피하는데, 걱정을 안 하는 것도 이의 일환일 수도 있다. 이외에도 양녕은 수많은 도피행위를 저지르는데 자신이 마음에 상처를 남긴 어머니 원경왕후의 곁에 계속 있어주며 위로해주어야 한다는 충녕의 조언도 어머니와 사이가 거북하다는 이유로 무시하였고[60], 이후 술집에 가는 두 번의 장면 역시 양녕이 각각 충녕과 비교당한 후와 대비의 상중이라 처신을 조용히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이후라는 걸 보면[61] 스트레스 받는 상황을 도피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태종에게 대들며 식음을 전폐할 때 그가 내건 조건, 그리고 태종이 들어 준 건 오로지 숙위병 해제 뿐이었다. 나머지는 양녕이 부탁하지도 않았는데도 태종이 해 준 것 뿐. 그러니까 이 양녕에게 인간관계 이상으로 우선시 되는 건 술집 가는 것, 즉 도피행위인 것이다. 그걸 못하게 되니까 꼭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듯, 두려워하는 자기 아버지에게 대든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대들자 아버지가 다 들어준 걸 경험했는데도, 이후에 아버지의 의사를 거부해서 목적을 이룰 생각은 전혀 가지지 않는다. 그때 아버지에게 대든 건, 궁지에 몰려 이판사판으로 벌인 요행이었던 것이다.[62] 그 궁지가 고작 술집 못 가는 것이라는 건 여러모로 한숨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요소다.
자신이 겁탈한 어리에게 '너와 같이 있으면 생각할 필요가 없어 좋다'라고 발언하면서 그녀도 도피의 대상이었음이 드러난다. 하지만 문제는 하필 세자 자리와 왕위계승을 두고 충녕과 대립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상황에 한 번 돌려 보냈던 어리를 다시 데려 왔다는 점이다. 이 행위는 결국 그에게는 야심, 생명보다도 도피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가 된다. 야심은 어차피 범인의 그릇이라 소인배라고 쳐도 왕위계승의 패자에겐 죽음 밖에 없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안다고, 큰 소리를 쳐놓고도 저러는 건 나라 운영은 커녕 자기 앞가림조차 할 수 없다고 광고하는 꼴이다.
줏대가 없다는 평가를 이야기 하자면, 양녕은 어머니 편을 드는가 싶더니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 줄 사람은 아버지라는걸 깨닫자 마자 바로 외할아버지와 어머니를 배신한다.[63] 묘사를 보면 산위에서 내려다 본 넓은 강산과 왕가의 행렬 좌우로 엎드려 절하는 백성들을 보고 그 권세의 쾌감에 취한 모습이다. 태종이 강조한 백성과 강산에 대한 책임감이 아닌 "나중에 아버지가 죽어서 내가 이 나라의 국왕이 되면, 저 넓은 강산들이 다 내 것이 되고 나는 왕으로서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라는 생각에 아버지 편으로 돌아선 것.
하다못해 진짜 부왕 눈에 들기 위해 열심히 하기라도 한다면 모르겠는데 의지박약이라 갑질이나 할 줄 알고, 아첨꾼들이나 선호하고, 황희처럼 옆에서 붙잡아 주는 사람들 말은 들으려고 하질 않는다.
공부를 게을리하는 자신을 책망하는 부왕에게 글공부는 외우지 않고 가슴에 새기는 거라고 뻗대었지만 막상 시험해보니 충녕은 누구의 도움없이 스스로 경전 구절[64]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한 반면, 양녕은 표면적인 뜻을 외우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나마 약간이라도 심화과정으로 넘어가면[65] 겉으로 외우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정안왕후의 상중에 기생집을 가 술을 마신 것은 양녕의 인물됨을 극명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정종은 태종과 양녕 부자를 중재해 서로 화해하도록 일부러 자리를 마련해줬고, 덕분에 한동안 부자 사이는 괜찮아졌다. 그런 큰아버지가 상처했으며 민간이라도 가서 위로라도 해드리거나 최소한 갖던 술자리도 자중하는 게 유교 사회 조선에서 사람된 도리다. 게다가 왕실이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매우 개방적인 현대 유럽 왕실이라도 마찬가지인데 이들도 왕실어른을 비롯한 구성원이 상중일때는 왕위 후계자든 왕실 구성원이든 양녕처럼 클럽 같은 곳에 가서 파티나 술잔치를 벌이면 매우 큰 실례이다.
이런 도리적인 부분이 아니라 실리로 계산해도 아내를 잃고 슬픔에 빠진 정종을 맏조카이자, 세자인 양녕이 위로한다면 정종의 인품상 진심으로 고마워할 것이다. 그리고 상왕 정종은 금상 태종이 조선에서 유일하게 한 수 접어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양녕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면 소소한 비행 정도는 큰 벌 받지 않게 도와줄 수 있는 든든한 우군이 될 수 있다. 하다 못해 가만 있다가 초상이 끝나고 술을 마시러 나가기만 했어도 답답해서 그랬다라고 핑계댈 수나 있다. 하지만 그걸 못 참고 기어코 큰어머니의 상중에 기생집에 출입한 것도 모자라서 궁에 기생을 데려오기까지 했으니, 태종은 물론이고 호탕한 성품을 자랑하지만 한번 폭발하면 성미가 불같은 정종의 눈밖에도 날 것이다.[66]
결국 양녕은 자신을 도와준 큰아버지에 대한 도리를 지킬 인격도, 욕망을 참을 자제력도 부족하며 처세를 할만한 잔머리 조차 없다는 것이다. 급기야 29화에서 정종을 모시며 사실상 그의 첩이였던 기생 초궁장과 관계를 맺으면서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절대 용납되지 않을 패륜을 저지르고, 이걸로도 모자라 비록 첩이라지만 엄연한 유부녀였던 어리를 세자라는 권위를 내세워 강제로 납치하여 겁탈까지 하는 등, 넘어선 안 될 선을 넘어버린다.
이런 개막장인 모습을 계속해서 보여준 탓에 가족을 중요시 여기는 충녕대군 역시 "세자 저하는 절대로 왕이 되어선 안 됩니다!"라며, 대놓고 양녕을 제치고 세자 자리를 얻겠다며 본격적으로 적대하는 계기까지 마련한다.[67] 양녕이 지닌 세자라는 직위에 대한 열등감이 있어도 그의 비행을 지적하되 꾹 참고 큰형에 대한 예의를 지키던 충녕마저 당시 시대상, 세자에 대한 강상죄로 처벌받을 수도 있다는 걸 뻔히 아는데도 이런 직설적인 폭언을 내던질 정도니 양녕에 대한 충녕의 분노와 실망, 경멸감이 얼마나 커졌는지를 알 수 있다.[68]
27회, 28회에서 양녕이 무언가 결정할 때는 세트의 배경이 불그스름하다. 꼭 불길함을 강조하듯이.
또 하나 문제는 주변 환경이 이 인간을 더욱 몰아 세운다는 것. 이방원은 세자를 차기 왕재로 만들기 위해 엄격한 교육을 시켰으며, 양녕에게 아버지로서 인간미를 보일 때마다 뭔가 일이 하나씩 터져서 상황을 악화시킨다. 충녕대군의 총명함은 수도 없이 비교 대상이 되어 그의 열등감을 자극하고, 이제는 자신의 소유물이 될 것이라 여겼던 당연한 걸 그 총명한 충녕이 대놓고 노리기 시작한다. 걸핏하면 도피나 일삼는 양녕의 작은 그릇으로는 이 상황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유지하려 하니, 양녕 자체가 앞뒤 가리지 않는 폭탄이 되어 주변에 피해를 주는 것이다. 환경이 양녕의 인간됨을 망가뜨린 결정적 요소임을 25회, 26회의 어린 양녕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때도 세자란 중책에 적응못하는 면모를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내용물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아이나 다름없었다. 억압받는 어머니를 공감해주고, 외삼촌들을 위해 싫은 짓도 불사한다. 결국 궁은 양녕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고, 맞지 않은 자리에 계속 머문 결과 기본적인 인간됨까지 망가져 버린 것이다. 때문인지 32회에서 평범한 왕자가 된 양녕은 정말 차분하며, 문제를 일으킨 스스로를 자책하고 동생을 인정해주는 인간미를 되찾은 면모를 보인다.[69]
그나마 여기까지도 이방석에 대한 트라우마가 강하게 남아 있는 조선왕실의 상황을 감안하면 어떻게든 버텨 볼 소지가 있었다. 문제는 이런 수많은 비행과 그로 인해 닥쳐오는 위기마다 양녕이 전가의 보도마냥 꺼내드는 카드가 "내가 보위에 오르면"이라는 협박이라는 것이다. 이게 내관이나 곽선의 아들 같이 힘 없는 이들에게는 당장이라도 먹히는데, 류정현 같은 대신급이나 충녕대군 같은 왕위계승권자에게까지 남발해대니 안 그래도 남아날 리가 없는 세자의 편은 손 쓸 도리가 없이 충녕 쪽으로 이탈하고 만다. 대신들 입장에서는 왕명만 전달, 집행하는데도 보위에 오르면 두고보자는 식으로 나오니 생존을 위해서라도 쟁국본에 가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70] 태종이 충녕에게 제시한 조건이 '조정에 피바람이나 분란을 만들지 말고' 세자 자리를 쟁취하는 것이었고, 이는 대신들을 중립적 방관자 포지션으로만 묶어두면 사실상 달성이 불가능했음에도 스스로 세자 자리를 갖다 바친 꼴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자신을 변명할때 "자신은 태어나보니 장자였고, 철들으니 세자라는걸 인식했다" 라고 주장하는데 그 역시도 그저 변명을 위한 변명일 뿐이다. 어렸을때부터 자신이 장자라는 걸 유난히 드러내기를 좋아한 모습이 많이 묘사되었고, 대놓고 충녕에게 함부로 자신의 자리를 넘보지 말라는 것을 여러번 암시했다. 그런데 책임을 질 시기가 다가오자 그 책임은 지기를 원하지 않고 남 탓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양녕이다. 정 자신이 세자 자리에 관심이 없었다면 자신의 백부인 진안군이 그랬던 것처럼 정치에서 사라지거나, 자신의 동생처럼 전혀 관심이 없는 모습을 보여준것도 아닌 권력과 지위는 원하면서 책임을 지기는 싫어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폐세자되기 직전 본인은 세자 자리를 원치 않으니 세자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겠다란 대사를 함으로서, 이 사극에서의 양녕대군 역시 양녕대군 미화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그동안 비행을 저지르면서도 세자 자리를 지키려고 외삼촌들까지 팔아먹으면서까지 동생 충녕을 누르고 세자 자리를 공고히 하려는 양녕은 어디 가고, 세자 자리가 싫어졌으니 스스로 물러나려는 야사 속 양녕대군 캐릭터가 막판에 다시 등장한 것이다. 결국 태종 이방원 역시 야사에 기반한 양녕대군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71] 하지만 그동안 양녕의 비행과 무책임함을 여과없이 보여준 점을 보면 이를 단순히 기존 야사 캐릭터의 답습이라기보다는 자기 자리를 지킬 의지조차 없는 무책임한 도망자라는 야사의 재해석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일단 조선왕조의 공식 입장은 어디까지나 이제가 세자 자리를 양보했다(讓寧)는 것이기에, 이런 군호가 내려진 경과를 어느정도 설득력 있게 보여줄 필요도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이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양녕은 행적이나 개인적 능력은 물론 성품마저도 그야말로 소인배요, 현대로 치면 전형적인 오만방자한 망나니 재벌 3세다.[72] 아버지가 자신의 자격을 증명하고 피비린내나는 정쟁으로 쟁취한 왕위에 대해 어떠한 성찰도 없이 '당연히 아버지의 맏이인 자기 것'이라고 여길 뿐이고, 마치 '무엇이든 해도 되는' 자신만의 특권처럼 생각한다.[73] '내가 이만큼 열심히 하는데 이 정도는 누려도 되는 것 아니냐'[74]라는 변명으로 자신의 패악질을 정당화하는 자기위주의 유아적 인간상.[75][76]
4. 인간 관계
4.1. 이방원
자신의 아버지. 이방원에게 있어 세 아들을 연달아 떠나보낸 뒤 겨우 얻은 장남인지라, 양녕을 지극히 아끼며 여느 부자와 다르지않은 친근한 관계였다. 하지만 방원이 즉위하고 양녕도 원자를 거쳐 세자가 되어 왕실의 후계자가 되면서, 갈수록 자신을 엄하게 지도하며 냉혈해지는 아버지를 두려워하게 된다. 이방원은 자신이 힘들게 기틀을 세운 조선이라는 나라를 잘 이끌어 나갈 적장자이자 차기 후계자를 원했지만, 왕위에 대한 욕심은 크지만 정작 능력이 따라주질 않아 열등감과 부담감에 점점 엇나가는 양녕과는 언젠가는 충돌할 관계였다. 급기야 이방원의 형이자 자신에게 큰아버지인 이방과를 모시던 기생 초궁장에게 손을 대고, 곽선의 첩으로 엄연한 유부녀인 어리를 겁탈하는 등, 비행을 연달아 저지른다. 이 미친 짓에 완전히 폭발한 이방원의 명에 의해 사가로 쫒겨나 근신처분을 받는다. 그럼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다시 어리를 끌고왔다가 들켜 원경왕후에게 한 소리 듣고 있는 모습을 이방원에게 보이면서 부모와 동생 모두에게 신뢰를 잃어버리고 결국 폐세자로 몰락하는 결말을 맞는다.4.2. 원경왕후 민씨
자신의 어머니. 이방원과 마찬가지로 세 아들을 연달아 잃은 뒤, 겨우 낳은 장남이기에 가장 아끼던 자식이였다. 양녕도 어릴 때에는 아버지와의 대립으로 고립된 어머니에게 동생들을 이끌고 달려가는 효자였지만, 커서는 비행만을 일삼고 국왕인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4명의 외숙부를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모자 관계가 거의 파탄에 이른다. 양녕은 이렇게 어머니와 외가를 단단히 배신해놓고서 어리 일로 곤란해지자 어머니에게 매달리지만 원경왕후는 양녕을 비호해주는걸 포기해버린다.[77][78] 그래도 천륜을 끊을 수는 없었는지, 양녕이 폐세자되어 인사를 올리고 떠날때 안타까운 듯이 눈물을 흘렸다.4.3. 효령대군
바로 아랫 동생으로 충녕과 달리 세자 또는 보위에 대한 야심이 없다보니 견제를 하지 않으며 형제로서 그럭저럭 지낸다.4.4. 세종
어릴 때는 자기보다 어린 동생이다 보니 귀엽게 여기면서 잘 대해줬지만, 성장한 뒤에는 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막내동생인 충녕대군과 비교당하는 일이 많다 보니 열등감을 갖고 있다. 게다가 사사건건 자신에게 간섭4.5. 여흥 민씨 가문
자신의 외가. 어렸을 적 자신을 길러주었던 외갓집인만큼 호의를 가지고 있었지만, 본인의 야욕과 입지를 위해 손바닥 뒤집듯 배신해버린다. 본인은 이를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있지만 어머니도 그렇고, 민씨 가문의 일원들도 양녕을 좋게 보지는 않는다. 특히 원경왕후의 막내 남동생인 민무회는 대놓고 양녕에게 불만을 드러낼 정도. 그러나 소인배인 양녕은 그런 막내 외숙부의 모습을 보고 차갑게 대꾸하면서 추후에 있을 또 다른 배신을 예고하더니, 결국 태종에게 민무회의 실언을 고자질하면서 남은 외숙부들마저 죽음으로 몰고간다.4.6. 어리
양녕의 애첩이자 안식처. 양녕은 그녀를 총애한 나머지 부왕과 모후 몰래 궁궐에 불렀고 그녀와 밤을 보내기까지했다. 결국 원경왕후에게 자신의 스캔들이 발각되면서 폐세자가 되자 어리 역시 실록대로 비참한 결말을 맞게된다.5. 어록
- 26회, 글공부를 외우지 못한 것을 책망하는 부왕에게 항의하며 |
그리 사람을 믿지 못하시는데, 이 나라는 어찌 이끌어 가시옵시까?! 그리 사람을 못 믿으시니 늘 신하들을 경계하시고, 죄 없는 자들까지 누명을 씌워 귀양을 보내시는 것이옵니다. - 27회, 밤늦게 술을 마시고 궁에 돌아온후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부왕에게 반발하며 |
내가 보위에 오르면... 경부터 내칠 것이오! - 세자궁의 내관들이 쫓겨나기 전에 장을 맞는걸 끝까지 지켜 보아야야 한다는 어명을 전한 황희에게 |
그저 입맛이 없을 뿐이옵니다. 글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사옵니다. 하니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 27회, 자신을 가르치는 서연관들을 파직시키고 내관들을 내쫓은 부왕 앞에서 단식 투쟁을 하며 |
죄인들의 죄가 무거우니, 신하들의 의견에 따라... 극형에 처하시옵소서! - 27회, 편전에서 부왕에게 귀양을 간 외숙부들인 민무구와 민무질을 죽일 것을 요청하며 |
상관 말고 집에 가거라. 가서 비파나 타고 시나 짓거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너는 가서 할 일 없는 왕자 노릇이나 하란 말이다! - 28회, 자신의 비행을 비난하는 충녕에게 |
이제 알겠느냐? 네놈이 잘 하는게 있고, 내가 잘 하는게 있다. 네놈이 잘났고 내가 못난게 아니라 본래 다를뿐이란 말이다! - 29회, 자신과의 무술 대련에서 패배한 충녕에게 |
그건 충녕이 몰라서 하는 말이옵니다. 국문을 받아 마땅한 죄인들이옵니다. 일전에도 저를 찾아와 불충한 언사를 행한 적이 있사옵니다. 전하께서 자결을 명하신 두 외숙부가, 사실은 죄 없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말했사옵니다. 그러면서 전하를 원망하는 눈빛이었사옵니다. - 29회, 민무휼과 민무회를 구명해 줄 것을 간하는 충녕과 부왕 앞에서 |
세자라고 부르지 마시옵소서. 저는 이제 그 이름이 싫사옵니다. 제가 시켜달라 조른 것도 아니고, 태어나보니 장자였고, 철 들어보니 세자였사옵니다. 그런데도 궁궐의 모든 사람이, 너는 왜 그 모양이냐고 날마다 손가락질을 하더군요. 이젠 그 지긋지긋한 올가미에서 벗어나고 싶사옵니다. - 31회, 궁 안에서 화살을 쏜 걸 나무라는 부왕에게 |
궁궐을 떠나라는 명을 받았사옵니다. 새 군호도 내려 주셨사옵니다. 양녕이라 지어 주셨사옵니다. 왕위를 사양했다고 하여 그리 지어 주셨습니다. 어디 가서도 쫓겨났다는 소리를 못 하게 하신 거지요. 일단은 경기 광주로 가라 하십니다. 강녕하시옵소서. - 31회, 폐세자가 되어 양녕이라는 군호를 받고 궁궐을 떠나기 전 모후에게 사죄하며 |
역시 우리 세자 저하가 참 자애로우시군요. 잘해 보십시오. 아주 기대가 큽니다. 곧 태평성대가 열리겠군요. 예, 보다시피 잘난 아우 덕분에 이 꼴로 쫓겨가는 중입니다. - 31회, 새로운 세자가 되어 입궐하는 충녕에게 궁궐을 떠나면서 |
잘 되가시옵니까? 태평성대는 언제 오는 겁니까? 남의 자리를 빼앗았으면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효령대군: 형님...) 비꼬는 거 아닙니다. 잘 하시라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잘 하십시오. - 32회(최종회), 모후의 국상 중에 세종에게 진심으로 전한 충고 |
[1] 13회부터 18회까지 연기했다.[2] 21회부터 26회 중반까지 연기했다. 이전에〈대군 - 사랑을 그리다〉에서는 승평군 이명 역을 맡았다.[3] 정확히는 4남이다. 본인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찍 죽은 세 명의 형들이 있었기 때문이다.[4] 자기가 왕이 되면 이름을 붙여 주겠다며 자식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는 걸 미루고 있었는데 이 때 임의로 부르던 명칭이 애칭으로 굳어진 것이다.[5] 이방원은 자신을 한 번의 기회는 주는 사람이라고 했었지만 양녕에 경우에는 몇 번의 기회를 더 주며 자신의 방식을 깨기도 했었다. 그러나 양녕은 오히려 더 기어올라서는 제 맘대로 설쳐댔고, 결국 양녕을 죽여야할 상황이 되어버렸었는데 결국 차마 아들을 죽일 수는 없었던 이방원이 목숨을 앗아가지 않고 정치적 생명을 끊는 선에서 폐세자로 만들어서 내보내며 끝냈다.[6] 하지만 성인이 된후 아버지 태종에게 외숙부들의 죄를 일러바치며 외숙부들이 숙청당하는데 일조한다. 즉, 아무리 부탁해도 들어지지 않을 소원이었던 셈. 오히려 여흥 민씨 가문의 야심이 외척 숙청의 이유로만 작용할 게 자명하다.[7] 다만 궁인들에게 들키자마자 동생들을 데리고 중궁전으로 튄다. 즉, 말은 그리 했지만 철없는 어린아이의 허세라는 것. 사실 충녕이 태종의 의중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설명할 때도 허세를 앞세워 반박하긴 했지만, 그와중에 말을 더듬으며 스스로도 동생의 말에 납득은 하고 있음을 드러냈다.[8] 태종에게 계모 때문에 우리 형제가 고생했던 걸 재각인시키고, 그걸 네 자식들에게 물려줄 생각이냐며 설득했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본의아니게 삼 형제가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9] 실제로 왕위를 계승할 원자에게는 당연히 군호가 지어지지 않는다. 대군의 군호는 왕세자를 제외한 왕의 다른 적자에게 내리는 작위이기 때문. 양녕대군이라는 군호는 엄연히 폐세자된 뒤 봉해진 것이다.[10] 다만 조선 초기에 세자들은 곤룡포를 입지 않았는데, 아직 옷감이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11] 이 사실을 들은 태종은 한숨을 쉬었다. 비록 연극이긴 해도 세자가 국새를 받거나 반대로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될 세자답게 그 자리에서 당당히 거절하는 패기를 보였으면 한 것인지.[12] 자신이 갖다놓기 싫으니 어머니 원경왕후에게 대신 가져다 달라 부탁했다. 그러나 원경왕후는 이제를 안아주며 "자세하게 말해줄 수 없으나 네가 나서지 않으면 외숙부들이 다친다. 외숙부들이 다치는 걸 보고싶으냐?"라고 설득했고, 결국 결단을 내린다.[13] 결국 부부가 첫째 아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만 것이다. 21회에서 자식들을 정치에 끌어들이지 않으려 부부가 노력한 걸 고려하면 씁쓸한 부분.[14] 양위 파동 전후로 이방원에게 공부 안 한다고 꾸지람 듣고 있을 무렵부터 민무질을 탄핵하기 위한 목적이지만, 충녕군의 총명함이 소문났다고 이미 조정에 언급된 상태였다. 뒤에 이어지는 장면으로 볼 때 아버지로부터 충녕과 자주 비교당하면서 악감정이 생긴 듯 하다. 더불어 충녕도 세자와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 한다. 이러니 사이가 안 좋아질 수밖에 없다.[15] 어린 시절, 태종이 글공부를 안하고 아우들과 놀러 가려는 세자를 맹자를 외우게 하려고 도로 서탁 앞으로 데려갈때 세자는 뒤에서 부왕을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본뒤 마지못해 따라갔다. 그리고 태종이 맹자를 외우지 못한걸 가지고 꾸짖자 스승이 뜻을 알면 힘들게 글을 외울 필요가 없다고 했다며 슬그머니 아버지에게 소극적으로 반발한 적이 있다. 즉, 어린 시절부터 간직한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그대로 사고방식으로 굳어져 버린 것이다.[16] 다만 방간은 적어도 아버지에게 인정해달라고 적극 나서거나 반항하진 않았다. 오히려 이 조건에 맞는 인물은 부친 이방원이다. 어찌 보면 두 사람의 부정적인 면을 합쳤다고 봐도 무방할 수 있다.[17] 그 자리에서 동생과 대비되는 것만으로도 굴욕인데, 심지어 "충녕이 7살에 깨우친 것만도 못하다."라는 질책까지 들었으니 깊은 열등감을 느낄만 하다. 본인이 부족한 게 크지만, 동생이 너무 넘사벽이다.[18] 마지막까지 세자를 포기하지 않던 신료가 황희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장면이다.[19] 넷상의 왜곡 유머짤에서는 황희의 유명한 사직 유머를 활용하여 양녕대군의 협박에 황희가 오히려 양녕대군이 왕이 되면 은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이에 양녕대군 폐세자를 반대했다는 식으로 왜곡됐다. #[20] 이 때 세자는 "할바마마"라고 하는데, 충녕군은 "태상왕 전하"라고 한다. 家와 國 중에 어떤 가치를 우선시하는지 대비되는 연출이다.[21] 대뜸 야단친 게 아니라 아버지의 죽음으로 심란해있던 차에 자기와 닮은 장남을 보자 태종 자신이 아버지에게 한 모습 이 투영되어 스스로를 비난하는 모습이다.[22] 공부한다고 책을 펴는 걸 본 송내관은 "또 꾸지람 들으셨습니까?"라고 묻고는 아니라고 하자 "그럼 왜?"란 반응을 보여 평소 세자가 공부와 철저히 담쌓고 살았음을 보여 준다.[23] 그러나 이방원이 정말 처남들을 죽일 생각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오히려 죽일 생각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작중 이방원은 앞서 자신이 '한 번의 기회는 주는 사람'이라는 점을 수도 없이 강조한 전적이 있는데, 처남들은 귀양이 이번이 첫 번째다. 그리고 간관들의 죽이라는 상소를 받을 때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이미 귀양을 보냈는데 뭘 더하라는 말이냐는 말도 했었다. 그 때문에 이방원도 진심으로 정색하면서 이게 사람이 할 소린가 싶을 정도로 양녕에게 그게 니 진심이냐고 따진 점만 봐도 알 수 있다.[24] 참고로 실제 실록에도 대신들이 두 형제를 죽여야 한다고 계속 주청을 드렸고 양녕대군이 이에 찬성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후 태종도 자결을 명령. 실제 태종의 생각이 드라마와 같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양녕이 민씨 형제의 죽음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25] 사실 27회 예고편에서 원경왕후에게 하루빨리 유배지에 계시는 외숙부님들을 무죄방면하여 어마마마의 얼굴에 웃음을 찾아드리고 싶사옵니다라고 말하고, 원경왕후는 그런 아들을 안아주는 장면이 나왔지만, 정작 본편에서는 저 대사나 장면은 나오지 않았고 아버지의 뜻에 영합해 어머니의 뒤통수를 치는 내용이 나온다. 제작진들의 예고편 낚시였던 것으로 보인다.[26] 해당 장면에서 세자 양녕은 상당히 당혹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이 두 외숙부들의 극형을 주청해도 부왕 방원이 다른 신하들의 상소와 동급으로 치부하여 거절하고, 자신은 단지 부왕의 신임을 더 얻는 선에서 처리될 줄로 기대했는데, 자신의 말이 결정타가 되어 정말 외숙부들이 죽임을 당하는 사태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방원도 이 부분을 명확히 지적하며 이것이 정치이고 네 정치질이 만든 대가를 네 스스로 짊어지라고 냉정하게 양녕의 불효와 패륜에 보복한 것이다. 하지만 그걸 견뎌야 용상에 앉을 수 있다는 일갈 부분만 새겨듣고서 용상을 바라보며 왕에 대한 탐욕을 포기 못해 왕이 되기만 하면 어머니에게 저지른 불효를 속죄할 방법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 태도로 나왔지만 이미 이 시점에서 원경왕후의 마음은 양녕에게서 너무나도 멀어진 상태가 되었다.[27] 작중 묘사는 정반대이다. 이미 세상을 뜬 장인 민제는 차치하더라도 장모인 송씨를 생각해서라도 살려줄 수도 있었는데 세자가 죽여야한다고 쐐기를 박았기에 태종은 민무구와 민무질을 죽인 것이다. 만약 태종이 세자의 의견을 묵살하고 민씨 형제를 살려줬다면 세자의 위신이 크게 흔들릴 수 있어서 살려주고 싶어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세자의 말은 그저 변명에 불과하다.[28] 양녕은 실제로 대학연의 독파에 6년이 걸렸다. #[29] 병풍에는 고려 시대 학자인 이제현이 지은 《효행록》에 실린 이야기 중 4개의 이야기가 적혀 있으며, 극중에서 세자가 해석한 부분은 병풍 오른쪽에서 2번째 글이다.[30] 이 에피소드는 크게 3가지 기록을 섞어서 만든 것이다. 세자의 대학연의 책거리, 충녕대군의 병풍 해석, 세자가 충녕을 용맹하지 못하다고 디스[31] 실제로 실록에 태종이 세종에 대해 몸이 비중하다고 평가하는 기록이 있고 각종 질병에 시달렸던 기록도 있는 만큼, 세종이 비만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32] 이 부분은 과거 20화에서 이방과와 이방원이 몸싸움을 벌인 장면이 오버랩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무력과 당장의 정치적 위치는 이방과/양녕이 우세했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머쥔 것은 그 무력과 지위에서 처참하게 밀린 이방원/충녕이라는 점이 아이러니.[33] 즉, 유부녀를 강제로 빼앗아 취한 것. 오죽하면 어리를 데려가는 과정에서 곽선의 아들마저 반대하지만, 역으로 "내가 왕이 되면 너희 집안을 가만히 두지 않을텐데 괜찮겠냐?"라며 협박한다.[34] 충녕이 계속 야심을 드러내고 아버지가 이를 방관하고 있기에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랬다고 설명을 한다. 또한 폐세자가 되면 의안군(=이방석)처럼 살아남을 수 없을거라 이야기한다.[35] 여기서 이방석을 의안군이라고 지칭하는 건 오류다. 이 시점에서는 소도군(昭悼君)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 게다가 이방석의 조카임에도 아버지의 뜻이었는지 숙부라고 부르지도 않는다.[36] 상왕(이방과)이 한때 총애했던 기생으로, 세자도 그녀를 가까이 하다가 서연관에게 제지를 당했다고 한다. 공중파 사극의 수위상 에둘러 "가까이 했다."고 순화해서 표현한 것이지, 실제로는 조카가 큰아버지의 첩이나 다름없는 여인을 취한 것이다.태종이 괜히 빡돈게 아니다 이미 세자는 큰어머니인 정안왕후의 상중에 기생들과 술판을 벌이며 노는 만행을 저질렀고, 연이어 큰아버지에게 패륜을 저질렀으니 태종이 이성을 잃고 발광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특히나 이방원은 왕의 동생인 세제가 아닌 정종의 '적장자' 자격으로 세자가 되어 즉위했기 때문에 세자의 이같은 행동은 태종의 위신에도 큰 손상을 끼친다.[37] 세자와 충녕의 그릇 차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태종이 이런 기회를 줬다는 건 이미 세자를 폐하고 충녕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하기로 마음먹은 상태라고 할 수 있다.[38] 바로 이전 화에서 세자를 폐할 마음을 먹은 것처럼 보이는 태종의 모습을 생각하면 사실상 폐세자가 되지 않기 위한 발악인 셈이다.[39] 조선 초기까진 사관의 영역에 대한 명확한 선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태종은 민인생이라는 사관과 많은 갈등을 겪다가 그를 귀양보내기도 한다. 태종이 사냥나갔다가 낙마한 사실을 사초에 기록한 일로 다투기도 했고 편전에 들어오면 안된다는 태종의 명을 어기고 편전에 숨어들어서 사초를 기록하다가 결국 귀양을 갔다. 아무 고민없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세자를 지켜보던 태종이 답답했을 것은 당연한 일.[40] 반면 세종은 훗날 왕과 대신들이 올바르게 행동한다면 기록을 두려워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니 편전에 사관을 들이겠다는 한 마디로 가볍게 이 문제를 종결지었다.[41] 조선의 대신들은 기본적으로 현대의 사법고시보다 훨씬 어렵다는 과거를 치른 사람들이다. 왕과 대면할 수 있는 3품 당상관 이상의 고위 대신들은 그 중에서도 뛰어난 사람들만 모인 엘리트 그룹이다. 공부와 담을 쌓은 세자는 당연히 버틸 수가 없다! 조선의 수많은 임금들이 경연을 피하고 심지어 폐하기까지 한 것은 단순히 공부에 대한 부담감도 있지만 이게 그저 공부로 끝나는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정책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게 되는데 아무리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한들 국가 최고 엘리트 수명이 한데 모여서 꽂아대는 딜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이 사실은 29회에서 충녕과 심씨의 대화 중에 언급된 적이 있으며 때문에 충녕은 그들과 정치를 논하려면 학문에 정진해야 한다는 언급을 하였다. 이미 복선은 있었던 셈이다.[42] 실제로 태종, 세종, 성종, 영조, 정조 등의 호문 군주들은 신료들과 정사를 논할때 책의 문구나 역사의 사례를 인용해서 논박하는 경우가 많았다.[43] 실제 역사에서 그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꾸중하면서 이와 가까운 말을 한 것은 태종으로, 태종은 원경왕후가 낳은 왕자들 중 막내인 성녕대군이 병약하여 어린 나이로 죽었을 때조차 양녕이 활쏘기를 하며 놀고 있었던 일을 꺼내며 "이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느냐" 라고 쏘아붙였다. 이조차도 실록의 특성과 이방원의 성격상 순화된 말일 가능성이 있다. 오늘날로 따지면 네가 그러고도 사람 새끼냐?정도.[44] 앞서 태종이 세자에게 보인 말투마냥 화낼 의욕도 없다는듯 무덤덤한 목소리이다.[45] 공교롭게도 동궁전에 도착하기 전 태종은 충녕대군과 대화를 나누면서 "네 형이 편전에서 많이 힘들었다. 술이라도 한 잔 따라주고 싶어서 가는 길이다."라고 하고, 자신이 가면 세자가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충녕에 말에 "그럴수록 더 마주해야 한다."라며 형제 관계에 대한 충고를 해주며 오는 등 나름 아들을 챙겨주려고 하고 아끼는 모습을 보였다. 당연히 분노에 가득찰 일.[46] 세자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꾸짖고 벌을 주었던 태종이 이때 처음으로 아무런 반응없이 그대로 양녕으로부터 등을 돌림으로써 용상 또한 그의 손을 완전히 떠났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보여주었다.[47]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장남이므로 왕이 될 것이라고 믿으며 형제자매들에게 온갖 유세는 다 떨고 커서는 바른말 하는 사람에게 보위에 오르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말로 협박하고, 아첨하는 자는 보위에 오르면 잘 봐주겠다며 거만떨고 다녔던걸 생각하면 설득력이 전혀 없다. 결국 태종 이방원 역시 양녕대군 미화를 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48] 이는 다르게 봐야하는 게 태종은 자신의 자식에게만큼은 유달리 유약한 면모를 보일 정도로 자식 사랑을 하지만 영조는 사무적으로 일을 잘 해서 명군 취급을 받는 거지 인간으로서도 가장의 아버지로서도 실격 수준의 사이코패스라 불려도 모자를 정도로 잔학무도한 인면수심의 인간인지라 발생한 점이다. 특히 정조도 세자시절 영조에게 언제 살해당하거나 축출당할지 모르는 현실이 무서워 영조에게 숙이는 일이 많은 편이기도 했다.[49]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이와 같다.
"소자가 그깟 첩 하나(어리)를 들인 것이 그리도 잘못한 것입니까? 첩은 아바마마가 훨씬 더 많이 들이시지 않았습니까? 조정 대신 중 누가 그것을 빌미로 군왕의 자격이 없다고 하면 내려오실겁니까? 저만 갖고 그러는거 못 참겠으니 그냥 제가 그만두겠습니다. 간신들이랑 잘 먹고 잘 사십시오."
약간의 각색은 들어갔지만, 실록에도 기록된 사실이다. 고증대로면 양녕이 세자 자리를 자진해서 물러나는게 아니라 끝까지 세자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용쓰다 열받아서 올린 상소문, 세자 자리에서 내려올 생각이 전혀 없는 심산으로 올린 상소문이라 훨씬 불경한 내용이었다. 대놓고 '효도 받기 싫냐'는 말이 들어가 있었다.[50] 이게 참 어처구니 없는 변명인 게 태종이 첩을 많이들인 건 사실이지만, 유부녀를 강제로 빼앗았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애초 궁녀들은 임금의 여자들로 여겨지고, 임금이 씨를 많이 낳는 것은 왕권강화의 목적이 있었기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51] 사양할 양, 강녕할 녕이다. 폐세자로 궁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세자 자리를 양보했다는 의미로 지어줬다고 한다. 수차례 아버지를 실망시킴에도 무수히 많은 기회를 줬음에도 그동안 저지른 행패를 생각해보면 쫓겨나도 마땅했으나, 그래도 일국의 세자가 궁에서 대놓고 쫓겨났다는 사실을 백성들이 알면 왕실의 위신이 서지 않을 뿐더러 태종이 그래도 자식바보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사실상 왕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마지막 배려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52] 당연히 세자가 된 동생을 보고 비꼰 말이다. 정말로 태평성대가 열리긴 했지만.[53] 그러나 드라마와 달리 실제 역사에서의 양녕대군은 세종의 치세에서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성추문이나 일으키고 자기 자식에게조차 패륜을 저지른 왕실의 트러블메이커였다. 목이 잘리거나 폐서인당하지 않은게 행운일 정도. 이런 인물이 왕위에 앉았으면 이 꼴이 안 났을거란 보장이 없으며, 설사 즉위했다고 하더라도 세종을 옹립하는 반정이 일어나 폐위되었을 가능성도 높다.[54] 자신을 키워 준 외가에 대한 배신, 동생에 대한 질투, 무단 외출, 상중에 연회, 호색한 등[55] 역사상의 기록으로 태종이 양녕대군에게 가장 크게 분노해서 쌍욕에 가까운 거친 언사를 쏟아낸 것은 바로 동복동생인 성녕대군의 일이다. 병약했던 성녕대군이 12살의 어린 나이에 사경을 헤매자 충녕대군은 어떻게든 어린 동생을 살려보겠다고 어의들과 머리를 맞대며, 필사적으로 의서를 뒤지고 있었는데 양녕대군은 성녕대군이 사경을 헤매고 끝내 병으로 죽을 때조차 궁중에서 활쏘기를 하며 놀고 있었다. 훗날 태종이 어리의 일로 양녕대군을 꾸중할 때 "성녕이 죽었을 때에 궁중에서 활쏘는 놀이를 하였다니 동복동생의 죽음을 당하여 부모가 애통하는 때에 하는 짓이 이와 같다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했는데, 아버지인 태종마저 양녕대군의 만행에 분노가 폭발하다 못해 친아들의 면전에다 대놓고 "동생이 죽었을 때 싸돌아다니며 놀기나 하고 네놈이 그러고도 사람이냐"라고 쏘아붙인 것이다. 하지만 본 드라마에서는 성녕대군 자체가 등장하지도, 언급도 되지 않기에 양녕대군의 이런 패륜적인 행각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56] 성녕대군의 일은 생략됐지만, 그 때 했던 욕과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29화에서 네 명의 아우를 모두 잃은 원경왕후 민씨가 양녕대군을 찾아가 악귀, 물귀신이라고 비난했으며, 30화에서는 궁에서 내보냈던 어리를 다시 데리고 와서 주색잡기를 부리던 모습을 보고 네가 사람이기를 포기했으니, 이제는 널 뭐라 불러야할지 모르겠다.며 쏘아붙였다.[57] 실제 역사상에서도 대단한 아들 바보였던 태종은 성녕대군이 요절하자, 얼마동안 수라도 들지 않고 조회마저 정지할 정도로 두고두고 슬퍼했다. 오죽하면 훗날 태종이 성녕대군이 살던 집 앞을 지나게 되자, 신하들에게 "나는 진실로 그대들이 날 비웃을 줄 알지만, 도저히 아들 생각이 나 울 것 같아서 안 되겠다"라며 그 앞을 지나가지도 못하고 빙 돌아서 갔다. 이 묘사는 용의 눈물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그 대쪽같던 태종이 원경왕후가 "당신때문에 성녕이 죽었소" 라고 하는데도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는 식으로 묘사된다.[58] 본처 외에는 혼인관계를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본처 외 소생은 사생아 취급받는 서양과는 다르게, 조선의 일부일처다첩제의 첩은 본처보다 격이 낮지만 정식 혼인관계이다. 서자도 적자보다 서열이 낮고 여러 차별이 있기는 해도 아버지의 자식으로 인정받는다. 곽선의 아들이 어리를 강제로 데려가려는 양녕과 그 패거리들을 양녕이 세자의 권위를 내세우며 협박할 때까지, 필사적으로 말린 이유도 비록 신분은 낮을지언정 엄연히 자기 아버지의 부인을 데려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대사로만 언급된 초궁장도 상왕이자 백부인 정종의 첩이나 다름없는 기생이었다.[59] 실록에 기록된 내용만 봐도 양녕이 왕위에 올랐으면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60] 민씨 가문의 대대적인 숙청으로 원경왕후는 태종을 대놓고 저주하는 상태까지 왔는데도, 아들에 대한 원망은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정도로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사람이였다. 비록 아들이 친가의 숙청에 한몫 했어도, 어머니에게는 여전히 아들이 최고였던 것. 충녕의 말대로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61] 더불어 구종수와의 대담을 통해 모범생인 척하며, 얻은 스트레스도 원인임을 알 수 있다.[62] 반면 충녕은 어머니에 대해(외삼촌 이야기는 자제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요소임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이다.) 너무 가혹한 처지라고 조리 있게 대들어서 태종의 눈에 든다.[63] 외삼촌들의 죽음이 결정난 후의 반응을 보면 그리 깊이 생각한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니 편전에 든 후 잠시 침묵했던 걸 보면 어쩌면 아버지 앞에 선 그 순간 충동적으로 결정내린 것일 수도 있다. 자기가 한 말이 두 사람의 생사를 결정한다는 걸 이해나 하고 있었던 건지도 의문.[64] 학이시습지 불역열호[65] 군자화이부동 소이동이불화[66] 정작 정종은 가문(家)을 넘어 국가(國)로라는 드라마의 중심 사상과 반대되는 행보를 긍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본의 아니게 떠맡은 왕위에도 나름 책임감 있게 해보려고 했고, 용상을 정안군에게 물려준 다음에도 정치 문제는 일절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가족 관련 문제는 태종을 타이르고 태조와 태종의 화해도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67] 게다가 작중에서 나오듯 양녕대군에게 "형이 세자 역할을 좀 똑바로 했으면 내가 이러지도 않는다."라고 면박을 날렸는데, 그 말대로 양녕대군이 세자로서의 무능함만을 보여준 탓에 줄곧 인내했던 충녕이 세자 자리에 대한 야망을 드러내며 양녕의 적이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68] 실록에서도 세종은 자신을 추켜세우며 왕이 되보는 게 어떻냐는 신하의 태도에 헛기침으로 주의를 주되 부정하지 않으며 내심 왕위에 대한 욕심이 없지 않음을 보여줬지만, 가족을 소중히 여겨 양녕대군을 숙청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보호했지만 결국 정적 관계가 되기도 했고 누구보다 양녕대군의 일탈을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이다.[69] 물론 이는 드라마상의 창작으로 실제로 양녕대군은 폐세자된 이후에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사고를 쳐대는 왕실의 골칫 덩어리였다.[70] 반대로 충녕은 "자신이 끝까지 형을 보호할 것"이라고 공언함으로써 쟁국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 골육상쟁에 대한 우려를 적극적으로 차단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적장자승계가 이뤄지면 피바람이 불고, 국본이 교체되면 오히려 왕실이 안정될 기가 막힌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71] 사실 극중에서 그가 세자 자리에 있으면서 세자로서의 책무를 귀찮아했던 것을 감안하면, 그저 본인은 세자로서의 책무 등에 시달리느라 세자 자리가 싫어졌다 운운하는 대사에서 그쳤어도 이런 양녕대군 미화 논란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구태여 '세자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겠다'란 대사를 덧붙임으로써 이런 미화 논란을 자초한 것.[72] 전술했듯 막판에 세자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날 뜻을 밝혀 살짝 미화되긴 했다.[73] 다른 사람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 들 때 항상 '내가 보위에 오르면'이라는 말을 하며 압박한다. 결국 충녕대군에게 그 말 그대로 돌려받는다.[74] 사실 노력한 건 별로 없는 반면 누리는 향락은 정도 이상으로 방종하다.[75] 본 작에서 양녕의 언행들은 극의 각색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긴 하나 상당수가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외숙부들의 죽음에 적극 동조한 것이나, 어리를 겁탈하여 아버지에게 책망을 받은 후 아버지에게 '아버지도 첩이 있는데 왜 나한테만 그러느냐'라고 반항하는 것이나, 충녕에게 '네가 아버지에게 고한 거냐'라고 따지며 양보는커녕 세자 자리를 놓지 않으려고 기싸움을 한 것들은 모두 조선왕조실록에 실제로 기록되어 있는 것들이다.[76] 위에서도 잠깐 세자위 포기라는 행적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뭐 하나 자기 힘으로 이룬 거 없이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그 자리를 손에 쥐었다보니 가능성이 보일 땐 외숙부들을 제물로 바쳐가면서까지 자리에 연연하지만, 정작 그런 무책임한 행동들의 끝에 충녕과의 쟁국본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낮아졌음을 인지하자마자 달리 돌파구를 찾을 의지도 없이 곧바로 세자 자리를 내팽개쳐버리는 의지박약의 인간상으로 볼 수 있다.[77] 29화에서는 어머니에게 뺨을 맞고, "네 놈은 악귀다.", "널 낳고 흘린 눈물이 피눈물이 될 줄 몰랐다."는 폭언을 듣는다. 30화에서 기어이 또 사고를 치는데, 그 모습을 보고는 네가 사람이기를 포기했으니, 이제는 널 뭐라고 불러야할지도 모르겠다. 이말은 실제로 성녕대군이 죽었을 때 놀아재끼는 양녕을 보고 태종이 한 말이다, 넌 세자가 될 자격도, 내 아들이 될 자격도 없는 놈이라며 다시 폭언을 퍼붓는다.[78] 이런 원경왕후와 양녕의 관계는 용의 눈물에서부터 시작된 애틋한 모자관계 묘사의 종결이라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용의 눈물에서 양녕에 대한 원경왕후의 지극정성은 이 아줌마한테는 양녕 말고는 아들이 없나? 싶을 정도였고(그나마도 원작에 비하면 많이 순화되었지만), 대왕 세종에서는 이 정도는 아니지만 서자 경녕군의 왕위 도전이라는 요소가 개입되면서 여전히 끝까지 양녕을 비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본작에서의 원경왕후는 자식 간의 골육상쟁을 보고 싶지 않다는 차원에서 양녕의 세자위를 지지하긴 했지만, 끝내 양녕의 계속되는 비행과 패륜 앞에 스스로 포기를 선언할 정도로 격앙된 반응을 보인다.[79] 하지만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양녕이 훗날 세종 사후에 그의 둘째 아들이 계유정난을 일으키는 것에 협조했다는 것으로 복수했다는 식의 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복수라고 보기는 어렵다. 세조건 단종이건 모두 세종의 핏줄이기 때문이다. 양녕은 세종 치세에도 사고를 치고 다니긴 했어도 세종과의 관계는 원만했다. 양녕은 세조에게 수양대군 시절부터 호감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걸 보면 단순하게 자신의 마음에 든 조카가 왕위에 오르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해서 계유정난을 지지했다고 볼 수 있다. 단종의 정통성을 고려하면 계유정난은 말이 안 되지만 그 정통성을 부수고 왕이 된 게 본인 아버지와 동생인지라 그런걸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세조가 종친의 권위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정변을 일으켰으니 대비가 없는 상황에 왕실의 큰 어른이라는 입장에서는 세조를 지지할 이유가 충분하다. 강한 왕권을 보여준 태종/세종 부자를 보았고 심지어 둘 다 적장자라는 정통성보다는 사실상 택현으로 즉위했다고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단종보다는 세조가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태종은 적장자 계승 원칙 때문에라도 정종의 아들로 들어가 적장자 자격으로 즉위했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상이었고 사실살 정종이 저런 친아우를 아들로 삼아준 것 자체가 촌극 이었던지라 때문에 세자가 보기엔 적장자가 아닌데도 즉위한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소자가 그깟 첩 하나(어리)를 들인 것이 그리도 잘못한 것입니까? 첩은 아바마마가 훨씬 더 많이 들이시지 않았습니까? 조정 대신 중 누가 그것을 빌미로 군왕의 자격이 없다고 하면 내려오실겁니까? 저만 갖고 그러는거 못 참겠으니 그냥 제가 그만두겠습니다. 간신들이랑 잘 먹고 잘 사십시오."
약간의 각색은 들어갔지만, 실록에도 기록된 사실이다. 고증대로면 양녕이 세자 자리를 자진해서 물러나는게 아니라 끝까지 세자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용쓰다 열받아서 올린 상소문, 세자 자리에서 내려올 생각이 전혀 없는 심산으로 올린 상소문이라 훨씬 불경한 내용이었다. 대놓고 '효도 받기 싫냐'는 말이 들어가 있었다.[50] 이게 참 어처구니 없는 변명인 게 태종이 첩을 많이들인 건 사실이지만, 유부녀를 강제로 빼앗았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애초 궁녀들은 임금의 여자들로 여겨지고, 임금이 씨를 많이 낳는 것은 왕권강화의 목적이 있었기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51] 사양할 양, 강녕할 녕이다. 폐세자로 궁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세자 자리를 양보했다는 의미로 지어줬다고 한다. 수차례 아버지를 실망시킴에도 무수히 많은 기회를 줬음에도 그동안 저지른 행패를 생각해보면 쫓겨나도 마땅했으나, 그래도 일국의 세자가 궁에서 대놓고 쫓겨났다는 사실을 백성들이 알면 왕실의 위신이 서지 않을 뿐더러 태종이 그래도 자식바보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사실상 왕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마지막 배려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52] 당연히 세자가 된 동생을 보고 비꼰 말이다. 정말로 태평성대가 열리긴 했지만.[53] 그러나 드라마와 달리 실제 역사에서의 양녕대군은 세종의 치세에서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성추문이나 일으키고 자기 자식에게조차 패륜을 저지른 왕실의 트러블메이커였다. 목이 잘리거나 폐서인당하지 않은게 행운일 정도. 이런 인물이 왕위에 앉았으면 이 꼴이 안 났을거란 보장이 없으며, 설사 즉위했다고 하더라도 세종을 옹립하는 반정이 일어나 폐위되었을 가능성도 높다.[54] 자신을 키워 준 외가에 대한 배신, 동생에 대한 질투, 무단 외출, 상중에 연회, 호색한 등[55] 역사상의 기록으로 태종이 양녕대군에게 가장 크게 분노해서 쌍욕에 가까운 거친 언사를 쏟아낸 것은 바로 동복동생인 성녕대군의 일이다. 병약했던 성녕대군이 12살의 어린 나이에 사경을 헤매자 충녕대군은 어떻게든 어린 동생을 살려보겠다고 어의들과 머리를 맞대며, 필사적으로 의서를 뒤지고 있었는데 양녕대군은 성녕대군이 사경을 헤매고 끝내 병으로 죽을 때조차 궁중에서 활쏘기를 하며 놀고 있었다. 훗날 태종이 어리의 일로 양녕대군을 꾸중할 때 "성녕이 죽었을 때에 궁중에서 활쏘는 놀이를 하였다니 동복동생의 죽음을 당하여 부모가 애통하는 때에 하는 짓이 이와 같다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했는데, 아버지인 태종마저 양녕대군의 만행에 분노가 폭발하다 못해 친아들의 면전에다 대놓고 "동생이 죽었을 때 싸돌아다니며 놀기나 하고 네놈이 그러고도 사람이냐"라고 쏘아붙인 것이다. 하지만 본 드라마에서는 성녕대군 자체가 등장하지도, 언급도 되지 않기에 양녕대군의 이런 패륜적인 행각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56] 성녕대군의 일은 생략됐지만, 그 때 했던 욕과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29화에서 네 명의 아우를 모두 잃은 원경왕후 민씨가 양녕대군을 찾아가 악귀, 물귀신이라고 비난했으며, 30화에서는 궁에서 내보냈던 어리를 다시 데리고 와서 주색잡기를 부리던 모습을 보고 네가 사람이기를 포기했으니, 이제는 널 뭐라 불러야할지 모르겠다.며 쏘아붙였다.[57] 실제 역사상에서도 대단한 아들 바보였던 태종은 성녕대군이 요절하자, 얼마동안 수라도 들지 않고 조회마저 정지할 정도로 두고두고 슬퍼했다. 오죽하면 훗날 태종이 성녕대군이 살던 집 앞을 지나게 되자, 신하들에게 "나는 진실로 그대들이 날 비웃을 줄 알지만, 도저히 아들 생각이 나 울 것 같아서 안 되겠다"라며 그 앞을 지나가지도 못하고 빙 돌아서 갔다. 이 묘사는 용의 눈물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그 대쪽같던 태종이 원경왕후가 "당신때문에 성녕이 죽었소" 라고 하는데도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는 식으로 묘사된다.[58] 본처 외에는 혼인관계를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본처 외 소생은 사생아 취급받는 서양과는 다르게, 조선의 일부일처다첩제의 첩은 본처보다 격이 낮지만 정식 혼인관계이다. 서자도 적자보다 서열이 낮고 여러 차별이 있기는 해도 아버지의 자식으로 인정받는다. 곽선의 아들이 어리를 강제로 데려가려는 양녕과 그 패거리들을 양녕이 세자의 권위를 내세우며 협박할 때까지, 필사적으로 말린 이유도 비록 신분은 낮을지언정 엄연히 자기 아버지의 부인을 데려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대사로만 언급된 초궁장도 상왕이자 백부인 정종의 첩이나 다름없는 기생이었다.[59] 실록에 기록된 내용만 봐도 양녕이 왕위에 올랐으면 실제로 그렇게 되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60] 민씨 가문의 대대적인 숙청으로 원경왕후는 태종을 대놓고 저주하는 상태까지 왔는데도, 아들에 대한 원망은 한 마디도 하지 않을 정도로 아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사람이였다. 비록 아들이 친가의 숙청에 한몫 했어도, 어머니에게는 여전히 아들이 최고였던 것. 충녕의 말대로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61] 더불어 구종수와의 대담을 통해 모범생인 척하며, 얻은 스트레스도 원인임을 알 수 있다.[62] 반면 충녕은 어머니에 대해(외삼촌 이야기는 자제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요소임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이다.) 너무 가혹한 처지라고 조리 있게 대들어서 태종의 눈에 든다.[63] 외삼촌들의 죽음이 결정난 후의 반응을 보면 그리 깊이 생각한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니 편전에 든 후 잠시 침묵했던 걸 보면 어쩌면 아버지 앞에 선 그 순간 충동적으로 결정내린 것일 수도 있다. 자기가 한 말이 두 사람의 생사를 결정한다는 걸 이해나 하고 있었던 건지도 의문.[64] 학이시습지 불역열호[65] 군자화이부동 소이동이불화[66] 정작 정종은 가문(家)을 넘어 국가(國)로라는 드라마의 중심 사상과 반대되는 행보를 긍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본의 아니게 떠맡은 왕위에도 나름 책임감 있게 해보려고 했고, 용상을 정안군에게 물려준 다음에도 정치 문제는 일절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가족 관련 문제는 태종을 타이르고 태조와 태종의 화해도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67] 게다가 작중에서 나오듯 양녕대군에게 "형이 세자 역할을 좀 똑바로 했으면 내가 이러지도 않는다."라고 면박을 날렸는데, 그 말대로 양녕대군이 세자로서의 무능함만을 보여준 탓에 줄곧 인내했던 충녕이 세자 자리에 대한 야망을 드러내며 양녕의 적이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68] 실록에서도 세종은 자신을 추켜세우며 왕이 되보는 게 어떻냐는 신하의 태도에 헛기침으로 주의를 주되 부정하지 않으며 내심 왕위에 대한 욕심이 없지 않음을 보여줬지만, 가족을 소중히 여겨 양녕대군을 숙청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보호했지만 결국 정적 관계가 되기도 했고 누구보다 양녕대군의 일탈을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이다.[69] 물론 이는 드라마상의 창작으로 실제로 양녕대군은 폐세자된 이후에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사고를 쳐대는 왕실의 골칫 덩어리였다.[70] 반대로 충녕은 "자신이 끝까지 형을 보호할 것"이라고 공언함으로써 쟁국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 골육상쟁에 대한 우려를 적극적으로 차단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적장자승계가 이뤄지면 피바람이 불고, 국본이 교체되면 오히려 왕실이 안정될 기가 막힌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71] 사실 극중에서 그가 세자 자리에 있으면서 세자로서의 책무를 귀찮아했던 것을 감안하면, 그저 본인은 세자로서의 책무 등에 시달리느라 세자 자리가 싫어졌다 운운하는 대사에서 그쳤어도 이런 양녕대군 미화 논란이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구태여 '세자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겠다'란 대사를 덧붙임으로써 이런 미화 논란을 자초한 것.[72] 전술했듯 막판에 세자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날 뜻을 밝혀 살짝 미화되긴 했다.[73] 다른 사람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려 들 때 항상 '내가 보위에 오르면'이라는 말을 하며 압박한다. 결국 충녕대군에게 그 말 그대로 돌려받는다.[74] 사실 노력한 건 별로 없는 반면 누리는 향락은 정도 이상으로 방종하다.[75] 본 작에서 양녕의 언행들은 극의 각색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긴 하나 상당수가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외숙부들의 죽음에 적극 동조한 것이나, 어리를 겁탈하여 아버지에게 책망을 받은 후 아버지에게 '아버지도 첩이 있는데 왜 나한테만 그러느냐'라고 반항하는 것이나, 충녕에게 '네가 아버지에게 고한 거냐'라고 따지며 양보는커녕 세자 자리를 놓지 않으려고 기싸움을 한 것들은 모두 조선왕조실록에 실제로 기록되어 있는 것들이다.[76] 위에서도 잠깐 세자위 포기라는 행적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뭐 하나 자기 힘으로 이룬 거 없이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그 자리를 손에 쥐었다보니 가능성이 보일 땐 외숙부들을 제물로 바쳐가면서까지 자리에 연연하지만, 정작 그런 무책임한 행동들의 끝에 충녕과의 쟁국본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낮아졌음을 인지하자마자 달리 돌파구를 찾을 의지도 없이 곧바로 세자 자리를 내팽개쳐버리는 의지박약의 인간상으로 볼 수 있다.[77] 29화에서는 어머니에게 뺨을 맞고, "네 놈은 악귀다.", "널 낳고 흘린 눈물이 피눈물이 될 줄 몰랐다."는 폭언을 듣는다. 30화에서 기어이 또 사고를 치는데, 그 모습을 보고는 네가 사람이기를 포기했으니, 이제는 널 뭐라고 불러야할지도 모르겠다. 이말은 실제로 성녕대군이 죽었을 때 놀아재끼는 양녕을 보고 태종이 한 말이다, 넌 세자가 될 자격도, 내 아들이 될 자격도 없는 놈이라며 다시 폭언을 퍼붓는다.[78] 이런 원경왕후와 양녕의 관계는 용의 눈물에서부터 시작된 애틋한 모자관계 묘사의 종결이라는 점에서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용의 눈물에서 양녕에 대한 원경왕후의 지극정성은 이 아줌마한테는 양녕 말고는 아들이 없나? 싶을 정도였고(그나마도 원작에 비하면 많이 순화되었지만), 대왕 세종에서는 이 정도는 아니지만 서자 경녕군의 왕위 도전이라는 요소가 개입되면서 여전히 끝까지 양녕을 비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본작에서의 원경왕후는 자식 간의 골육상쟁을 보고 싶지 않다는 차원에서 양녕의 세자위를 지지하긴 했지만, 끝내 양녕의 계속되는 비행과 패륜 앞에 스스로 포기를 선언할 정도로 격앙된 반응을 보인다.[79] 하지만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양녕이 훗날 세종 사후에 그의 둘째 아들이 계유정난을 일으키는 것에 협조했다는 것으로 복수했다는 식의 이야기도 있으나 이는 복수라고 보기는 어렵다. 세조건 단종이건 모두 세종의 핏줄이기 때문이다. 양녕은 세종 치세에도 사고를 치고 다니긴 했어도 세종과의 관계는 원만했다. 양녕은 세조에게 수양대군 시절부터 호감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걸 보면 단순하게 자신의 마음에 든 조카가 왕위에 오르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해서 계유정난을 지지했다고 볼 수 있다. 단종의 정통성을 고려하면 계유정난은 말이 안 되지만 그 정통성을 부수고 왕이 된 게 본인 아버지와 동생인지라 그런걸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세조가 종친의 권위를 세운다는 명분으로 정변을 일으켰으니 대비가 없는 상황에 왕실의 큰 어른이라는 입장에서는 세조를 지지할 이유가 충분하다. 강한 왕권을 보여준 태종/세종 부자를 보았고 심지어 둘 다 적장자라는 정통성보다는 사실상 택현으로 즉위했다고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단종보다는 세조가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태종은 적장자 계승 원칙 때문에라도 정종의 아들로 들어가 적장자 자격으로 즉위했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상이었고 사실살 정종이 저런 친아우를 아들로 삼아준 것 자체가 촌극 이었던지라 때문에 세자가 보기엔 적장자가 아닌데도 즉위한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