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23:39:21

원경왕후(태종 이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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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 비
원경왕후 민씨
元敬王后 閔氏
파일:태종 이방원_민씨.jpg
캐릭터
<colbgcolor=#A60C0C,#360505><colcolor=white> 시호 <colbgcolor=#ffffff,#111111>원경왕후 (元敬王后)
신분 정녕옹주 (11회 ~ 20회)
조선국파일:조선 어기.svg 왕세자빈파일:왕비 오조룡보.png (20회 ~ 22회)
조선국파일:조선 어기.svg 왕비파일:왕비 오조룡보.png (22회~ 31회)
조선국파일:조선 어기.svg 왕대비파일:왕비 오조룡보.png(31회~ 3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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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선공주 (시누이)
이방번 (시동생)
이방석 (시동생)
경순공주 (시누이)
등장회차 1회 ~ 32회
배우
박진희[1]

1. 개요2. 배우3. 극중 행적
3.1. 숙의와 총혜를 지닌 뜨거운 여걸3.2. 절치부심과 어진 내조로 남편을 용상에 올리다3.3. 함께 이루었으나, 함께 누리지 못하는 권력3.4. 남편에 의해 가문이 풍비박산나다3.5. 권력에 환멸을 느끼고 떠나다3.6. 차가운 조선의 법도에 갇혀 생을 마치다
4. 인간 관계5. 인물 묘사6. 기타
6.1. 정적?
7.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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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공식 홈페이지 인물 소개 ]

용암처럼 뜨거운 고려의 여걸! 차가운 조선의 법도에 갇혀 죽어가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등장인물로 태종 이방원의 정비. 배우 박진희가 맡았다.

2. 배우

배우 박진희는 태종 역의 주상욱과는 11년 전 SBS 드라마 〈자이언트〉에서 황정연 역과 조민우 역으로 처음 호흡을 맞췄는데, 〈자이언트〉에서는 서로 적대하는 관계로 나왔다.[2] 반면 이 드라마 초반부에선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며 매우 금슬좋은 부부로 나오지만, 중후반부로 넘어갈수록 애증의 관계로 바뀐다.[3]

3. 극중 행적

3.1. 숙의와 총혜를 지닌 뜨거운 여걸

프롤로그인 1418년 시점에서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이방원의 독백으로 언급된다. 이방원에 대한 분노와 원통함을 이기지 못해[4] 밤마다 울부짖으며,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궁궐 바닥을 기어다니면서 피를 토했다고.[5][6]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388년, 이성계가 칼을 거꾸로 잡을거란 소문 때문에 매일 악몽에 시달리는 남편 이방원을 진정시키며 등장하면서 영 불안해 하는 이방원을 달래준다. 다음 날 소문에 겁을 먹은 노비들이 전부 달아나 텅 빈 집안을 본 이방원에게 친정에 가 있으라는 권유를 받자 못내 받아들이면서 이방원도 혹시 모르니 말을 타고 입궐하라며 말을 내어주고 자신은 두 딸과 함께 친정으로 들어간다.

위화도 회군이 시작되고 나서 이방원을 수색하던 군사들이 민제의 집까지 뒤지자 '정 그러면 나라도 데려가라.'고 하면서, '이성계의 며느리도 전주 이씨 집안 사람 아니냐.'고 부모와 동생들 앞에서 당당하게 말한다. 물론 여흥 민씨도 만만한 집안이 아니라서[7] 군관은 그냥 떠났다.

민제와 송씨, 동생인 무구, 무질이 함께한 자리에서 최영이 개경에 돌아와 군사와 물자를 징발할 때를 대비해 곳간을 비우고 병장기를 모두 숨겨놓을 것을 주장한다. 최영이 해코지할 수도 있지 않겠냐는 아버지의 우려에 우리가 시아버님을 치는데 힘을 보태서는 안 되고, 자신이 이방원과 혼인한 순간부터 전주 이씨와 여흥 민씨는 공동 운명체일 수 밖에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해 관철시킨다. 송씨와 둘만 남은 자리에서 남편이 걱정되지 않냐는 질문을 받자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이방원을 잡지 못했으니 이쪽에 와서 찾는 것이라고 태연하게 답해 어머니를 되려 감탄하게 만든다. 개경 전투가 임박해 올 때는 아예 동생들과 함께 거리에 나가 최영의 준비 태세를 살피고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된다.[8]

공요군이 개경으로 밀고와 시가전이 벌어지는 요란함 속에서도 친정에서 차분히 옷감을 손질한다. 자르고 있는 옷감은 붉은색 천으로 공요군이 두른 띠와 같은 색이다. 그리고 이성계가 궁궐까지 들어가 최영을 완전히 제압하는 장면 뒤에, 붉은 천이 완전히 잘려 바닥에 떨어지는 것으로, 시대가 변했음을 알린다.

이후 아버지가 자신을 회군의 뒷수습에 참여케 하지 않아 불안해하는 이방원을 기다리면 기회가 온다며 달래준다. 앞서 두 아들을 잃은 사실이 언급되며 임신 중인 이번 아이는 꼭 잘 키울거라는 다짐을 한다. 우왕이 이성계의 자택을 습격했을 때 내전에서 시어머니 한씨의 잠자리를 봐주고 있었다가 습격을 알게 되자 한씨와 강씨를 안에 머물게 한 다음 대청에 있던 칼을 뽑아들고 안채를 지켰다. 이때 침착하면서도 강단있는 눈빛이 인상 깊다.

조민수가 이색과 연계해 창왕을 세워 정쟁이 시작되자 정도전과 정몽주 두 사람에게만 맡겨 놓을 수 없다며 곡산 강씨의 인맥을 끌어모으는 작은 시어머니 강씨와 함께 자신의 친정인 여흥 민씨의 세를 동원해 빈객을 모은다.

등장하는 장면 내내 임신 중인데 위화도 회군이 1388년이고 셋째 딸인 경안공주는 1393년생이라 1394년생인 양녕대군보다 먼저 요절한 세 아들 중 한 명이다. 2회 말미에 셋째 아들을 출산한 모습이 나오는데, 상술했듯이 이 아이 역시 얼마 안 가 요절할 운명이다.[9]

갓난 아들을 두고 서방님을 똑 닮았다고 하자 이방원이 장난스레 "내가 이렇게 못생겼냐?"라고 장난치자 그래서 "나중에 효도 받기 틀렸다."고 받아치는 등 세상 다정한 부부애를 보여준다. 그러다 "씨도둑질은 못한다."는 말에 창왕 처리 여부로 고심하던 이방원이 폐가입진의 아이디어를 얻는 계기를 준다.

그러다가 잇단 실수로 집에서 근신하는 남편에게 '근신하는 동안 학문에 정진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하며 아버지 민제를 모셔와 이방원에게 공부를 가르치게 한다. 그 동안 어머니 송씨와 동생들과 같이 있는 자리에서 "(적장자인) 큰아주버님은 새 국가와 멀어졌으니 누구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판이 깔렸고, 후에 후계자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이방원의 학문적 소양을 미리 끌어올리기 위함"이라는 속내를 밝힌다.

시부의 심복인 정도전이 유배를 당하자 동생인 민무구, 민무질을 시켜서 정도전 유배의 배후에 정몽주가 있음을 남편에게 알려준다. 한편 이화상이 자신도 할 일을 달라고 조르자, 저잣거리에 나가서 민심을 파악해달라는 의뢰를 준다.

1392년(공양왕 4년), 조영규한테 이성계의 낙마 소식을 듣고 직접 말을 타고[10] 벽란도 객주까지 간다. 이성계의 낙마와 정몽주의 반격으로 가문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자신도 모르게 3년상 중인 남편 이방원을 불러들인 강씨에게 반발하였으나 역으로 강씨가 "내가 너에게 허락이라도 맡아야 하냐?"라고 추궁하자 미리 상의라도 해주시길 바랐다고 대답한다.

결국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한 후, 집에서 쫓겨나게 되자 이방원을 위로한다. 이후 이방원의 형들도 이성계에게 말대꾸를 하다 같이 쫓겨나게 되고, 며칠 후 이방원과 아주버님들과 함께 이성계를 찾아뵙지만 문전박대 당한다. 그리고 강씨가 진짜로 이성계를 설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바로 눈치채고 이방원에게 말하지만 아직까지는 강씨에 대한 악감정이 없던 이방원에게 막힌다.

며칠째 쫓겨난 채로 한씨 소생 자식들과 함께 이성계의 저택 앞에서 이성계를 기다리다가 신하들이 국새를 들고 오는 것을 보고 놀라고, 이화상으로부터 이성계가 국새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다. 그리고 다음날 저녁, 이성계가 이방원을 비롯한 형제들을 용서하는 줄 알고 기뻐하며 잔칫상을 차리다가 옆에서 얼쩡대던 이화상이 닭다리를 뜯어 먹으려 하자 "작은 서방님!"이라고 소리치며 화를 내는 개그씬을 찍는다.

3.2. 절치부심과 어진 내조로 남편을 용상에 올리다

이방원이 이성계에게 용서받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방원 옆에서 울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이성계를 원망하고 이럴 때 시모인 강씨는 뭐하고 있냐고 한탄에 빠지는데 그 시각 강씨는 침소에서 이성계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면서 이방원과 민씨와 척을 치기 시작했다.

한편 궁궐에서는 막내 이방석이 세자에 오른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집안에서는 셋째 아들이 중병에 걸린다. 그리고 이방원의 형들은 모두 술을 마시며 울분을 삭히고, 답답함을 참지 못한 이방원이 이성계의 집으로 쳐들어가 신덕왕후를 찾아가 따지다 결국 서로 감정이 극한까지 치솟아 일촉즉발 상황이 벌어질 때 마침 도착한 민씨는 얼른 이방원을 말린 후 신덕왕후에게 울면서 빈 덕분에 겨우 남편과 함께 돌아온다. 돌아오면서 이걸 절대 잊지 말자며 훗날을 기약하듯이 말했지만,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딸들과 유모 친정 식구들이 모두 마당에 나와있는 걸 보게 되고 큰딸한테 셋째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놀라 들어가 통곡을 한다.[11]

신덕왕후와 이방석의 책봉식이 열리고 태조와 신료들이 웃으면서 마중나오는 한편, 이방원 부부는 굳은 표정으로 산으로 올라갔다. 아들을 땅에 묻히려 가는 길에도 울음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이방원이 땅을 파려는 동안 아들의 관을 넋 놓은 듯 본다. 아들을 묻히고 나서 묘를 안기며 절규한 듯 오열한다.

아들을 눈물로 떠나 보낸 뒤 밤에 기진맥진한 상태로 이방원 등에 업혀 돌아갈 때도 자신을 원망하면서 울먹거렸고 며칠 후, 아들의 옷을 정리하던 중에 선심이라도 쓰는지 신덕왕후가 직접 선물까지 들고 찾아오자 일단은 비위를 맞춰주며 맞이한다. 집으로 찾아온 강씨의 비위를 맞춰준 뒤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이방원과 말싸움을 하지만,[12] 그래도 부부 사이의 정이 어디 안 가는지 금방 화해한다.[13]

이후 돌아간 강씨가 폐인이 된 이방우의 소식을 이방원에게 흘리면서 자신에게 다시 쳐들어올 것을 유도하고, 그걸 구실삼아 확실히 죽일 생각으로 병사들을 준비하고 정도전까지 끌어들이려 하자, 자신이 단신으로 찾아가 약과를 선물하며 이방원이 태조에게 하사받은 가별초까지 무안군 이방번에게 넘기겠다고 전달하는 등 물을 먹여버리는 모습이 나온다.

그러다가 이방원이 명에 갈 사신으로 결정되고, 방원을 배웅하고 난 뒤 그가 떠난 포구에서 계속 바다를 바라본다. 동생들인 민무구와 민무질이 이제 모두 갔으니 그만 가자고 하지만, 민씨는 지금 떠나면 이방원의 모습을 전부 잊을 것 같다며 발길이 떨어지지가 않는다고, 버림받은 자식이니 다녀오면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만 듣고 다시 버려질 거라는 생각에 서럽다고 말하며 자리를 뜨지 않는다. 매형은 무사히 돌아올 것이며 이방원이 잘 다녀오면 이방원을 대하는 전하의 태도도 바뀔 것이라는 동생들의 위로를 듣는다. 이방원이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는 말에는 자신도 그렇게 믿는다고 동의를 표했으나, 이성계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이미 이방원은 이성계의 눈밖에 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밤에 이방원의 빈자리와 베개를 쓰다듬으며 이방원을 그리워 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최소 수일 안에 이방원이 명 황제를 알현하게 될 거라는 아버지의 말에 불안해 한다.

이후 반년이 지나고 이방원이 귀국할 때가 되자 매일 포구에 나와 이방원을 기다린다. 그리고 마침내 이방원이 도착하자 민씨를 보고는 웃으며 한 손을 들어 인사를 하는데[14] 민씨가 이방원을 보고 달려가 안을 때 가체가 이방원의 얼굴에 정통으로 부딪치는 개그씬이 나온다. 이방원은 자신이 언제 올지 모르는데 어떻게 알고 나왔냐고 물었고, 이화상이 민씨가 보름 전부터 매일 나와서 기다렸다고 대신 대답해 준다. 그리고 함께 포구 정자에 앉아 다정하게 명나라 얘기를 주고받는다.

얼마 후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민무구로부터 현비 강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이방원과 함께 전해 듣고 재차 확인한다. 강씨를 만나고 온 방원에게 강씨가 어떻느냐고 묻고, 떠났다는 대답을 하고 먼저 걸어가는 방원의 뒤를 따라간다. 다음 날, 어머니가 지어준 아기 옷을 만지며 잃은 만큼 더 낳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액운 타지 않게 첫째는 민제와 송씨가, 둘째는 작은 고모가, 셋째는 방원과 민씨가 맡아 키우자는 말을 듣는다. 이후 이성계에게 상투가 잘려서 온 방원을 부여잡고 방원이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러시는 거냐고 눈물을 흘린다.

그 일이 벌어지고 난 후, 아버지 민제에게 당장 전라도의 군사들을 상경시키고 인장과 패기를 꺼내서 맞서야 한다고, 우리에겐 아버지께서 키운 제자들과 우리 쪽 조정 대신들, 혼인으로 맺어진 가문들이 있지 않느냐며 전주 이씨 가문도 해냈는데 여흥 민씨라고 못할 게 뭐가 있냐고 강경하게 주장한다.[15] 그러나 아버지에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상대는 한번도 진 적이 없고 고려라는 큰 적까지 무너뜨린 이성계라며 겨우 그 정도로 될 것 같으냐고, 멸문지화를 당해봐야 정신을 차릴 거냐고 꾸짖음을 듣는다. 그리고 대신 방원을 잘 설득해서 결심을 세워 보라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방에서 나온 뒤 동생들에게 방원의 결심을 세워야겠다는 말을 하자 매형을 위해 모였는데 정작 매형을 만날 수도 없어 사람들이 떠난다는 불평을 듣자 그럼 자신이 만나겠다며 당장 만나야 할 사람부터 부르라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박은을 만나는데, 박은이 자신은 방원을 만나고 싶다며 불만을 내비치자 민씨는 자신과 방원은 일심동체라며 술 한 잔 하자고 술병을 내미나, 박은이 받지 않자 미소를 거두고 술병을 탁 내려놓는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대로 가도 좋으나, 대신 가는 길에 육조거리를 지나쳐 가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능력 있는 사람들이라도 거사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은 인정받지 못하고 일등공신들에게 고개나 숙이면서 산다며 그러고 싶다면 가도 좋다고 설득한다. 그러고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박은은 일어나서 민씨에게 술을 따라주고 민씨는 그 술을 받아 마신다. 뱃속에 애는 어쩌고?[16]

이후 방간의 예측대로 인장과 패기를 꺼내서 보는데, 방원에게 그 모습을 들키고 집어넣으라는 말에 다시금 방원을 설득해 보지만 손님이 왔다는 보고에 대화는 어영부영 끝난다. 그리고 방원과 조준에게 줄 차를 내오다가 마침 돌아가는 조준과 문 앞에서 마주치고,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시라고 말하지만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다는 대답과 손수 차를 내왔는데 그냥 돌아가서 미안하다는 뉘앙스의 말을 듣고 아니라고 말해준 뒤 찻상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고 방원을 다시 설득하고, 방원에게 많은 사람들이 죽을 것이 두려워서 망설이고 있는 거라는 말을 듣고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부탁을 들어준다.
파일:(13) 세 아들을 되찾은 방원 부부.png
시간은 1397년으로 바뀌고, 민씨는 셋째 아이를 출산한다. 그리고 방원에게 자신은 세 아이를 잃었지만 세 아이를 더 낳음으로써 잃은 것을 모두 되찾았다고 말하고, 방원은 언제 잃은 것을 되찾을 생각이냐고 물어 방원의 결심을 완전히 세워준다. 더불어 이방원이 뺏긴 채로 지내면 우리 자식들도 뺏긴 채로 살아가야 한다며, 그런 건 도저히 두고 볼 수 없기에,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어미로서 무슨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각오를 내비친다. 남편이 그 논리에 따라 자기 가족들을 도륙내 버린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친정에 가서 방원이 결심했다는 얘기도 전하고 친정에서 키우고 있는 첫째와도 재회하고 첫째가 행복하게 잘 지내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이후 결심한 방원이 부른 사병들에게 직접 밥을 퍼준다.

결심을 한 이방원이 지지자들과 만나는 사이 밖에서 어머니와 얘기를 하는데, 어머니는 우리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민씨를 왕비로 만들고 민씨가 낳은 아들을 다음 왕으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말해 훗날의 암시를 한다. 이방원의 지지자들과의 회합이 마친 후, 다음엔 회합에 자신도 참여하겠다고 남편에게 말하는데, 이방원은 자신은 "역적 모의"를 하는 중이며 부인은 안전한데 두고 싶다고 거절하는데, 그래도 민씨는 어차피 실패하면 함께 죽는 것이라며 단념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그래도 남편 말을 들어 안전한 데 있겠다며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방원이 사병들을 훈련하러 데리고 나간 동안 검은 옷을 입고 이화상과 함께 대련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어려서 동생들이 익히는 동안 함께 배웠다며 이화상을 이기는 건 덤.[17] 이 때 이화상이 "그래서 정안군 형님이 첩 하나 안 들이고 형수님만 받들고 사시는 거구만요"라면서 웃자, 정색하더니 봉을 들이밀어 결국 이화상의 안면을 때려버린다. 그런데 사병들이 예정된 시간보다 빨리 돌아오고, 방원이 순군옥에 갇혔다는 소식에 근심한다.

방원이 석방된 뒤, 조영무에게 자신의 할 일을 다 밝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전하의 가장 충직한 무장"이라며 우리가 아니라 전하를 선택하면 어떻게 하냐며 근심을 표한다.

하륜이 정변의 구체적인 동선을 세운 것을 함께 확인한 뒤, 남편이 침소에서 아들을 보고 흐뭇해하는 것을 보고는, 만약 계획대로 되었는데 전하가 세자를 바꾸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고 남편에게 칼을 들고 다가오면 어쩔 것이냐고 묻는다. 아버지께 칼을 들 수 있겠나면서. 이에 아버지에게 칼을 들 수 있는지는 확신 못하나, 우리가 실패하면 자식들이 죽을 것이니, 그걸 막기 위해선 무엇이든지 할 것이라는 대답을 듣는다.

평소처럼 사병에게 밥을 해주던 사이 어명으로 인해 사병이 혁파되고 마는데, 이방원이 사병들을 빼앗기는 사이 민씨는 급히 달려가다 삶은 닭을 먹고 싶어 죽겠다는 눈으로 들춰보고 있는 이화상을 딱 마주치지만 어지간히 급했으면 뭐라고 안 하고 무기 옮기는 것 좀 도와 달라고 부탁해서 같이 무기를 어딘가로 옮겨둔다. 이후 몰래 빼돌린 무기들을 이방원에게 보여준다.

이성계의 병을 이유로 변란을 우려한 정도전이 한씨 소생 왕자들을 모두 가두자, 그를 빼내기 위해 거짓으로 병을 고하여 방원이 나와서 거병을 위한 마지막 조치를 할 수 있게 해준다.

이방원이 거사를 일으킬 때, 본인도 갑주를 입고[18] 이화상과 함께 한 때 방원의 사병이었던 군대들을 찾아가 그들이 정안군을 위해 싸우겠다고 맹세했던 것을 상기시키며 간신 정도전이 정안군을 살해하려 했으니 정안군의 편에 서서 싸우라고 독려한다. 이화상의 보호를 받으며 본인도 군사 행동에 들어선 것으로 보이나 직접적인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살해하고 궁궐로 진격할때, 성문을 열고 투항한 조영무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이방원이 이성계를 굴복시키고 도당을 장악한 동안, 사냥에서 돌아온 이지란의 집을 찾아가 지난밤 자신들 부부가 거사를 일으켰다고 말하며 도와달라고 설득한다.[19] 이지란은 분노해 동북면의 군사를 끌고 오겠다 하지만, 이화상도 거사에 가담했다는 걸 알고 결국 마음을 바꾼다.

정사를 완료시키고 피곤한 몸으로 말을 타고 돌아가는 이방원에게 역적, 패륜이 말은 쉽지, 방원의 마음 속은 지옥일 것이라고 위로하면서, 그럼에도 자식들을 위해서는 마음 약해져선 안 된다고 다잡아준다. 거사를 마치고 지친 이방원과 함께 사병들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방원에게 오랜만에 밥상을 차리는 중에 큰놈이(훗날 양녕)이 문을 열고 이방원을 찾아가고 이방원이 큰놈이를 본 순간 감정이 북받쳐서 울면서 안아주자 밥상을 들고 문앞까지 온 민씨도 눈물을 흘렸다.

민제를 중심으로 하륜, 이숙번, 박포, 박은, 민무구, 민무질과 함께 술자리를 가졌는데 이방원이 장차 세자가 되면 민씨는 세자빈이 되는건가라고 동생들이 벌써 김칫국마시는 발언을 하자 그 이야기는 아직 이르다고 했다. 그 때 이방원은 술자리에 끼지않고 잠든 큰놈이를 업고 마당을 산책하고있었다. 민씨는 맏이는 친정집, 둘째는 고모댁[20], 막내만 이방원 부부가 직접 기르고있기에 셋이 따로 떨어져있어도 쑥쑥 자라고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여겼다. 이방원에게 이제 자식들 이름을 지어줘야할때라고 하지만 이방원은 궁궐이 자신의 집이 되었을때 왕의 아들로 알맞는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미루었다.[21]

그 후 이방과가 이성계에게 선양을 받자 이방원은 처음에 대수롭지않은 일이라 여겼으나 이방과가 서자를 궁궐로 불러들였다고 하자 불쾌감을 드러냈다.

1400년(정종 2년), 동생인 민무질, 민무구로부터 회안군(이방간)이 의안군(이방의)과 서로 짜고 정안군(이방원)을 해치려하자, 바로 정안군에게 이를 알렸다. 동복 형들마저 자신을 해치려 하는 이방원이 괴로워하며 그녀에게 자신이 자신의 친형들까지 죽여야 왕상에 오를 수 있다고 하소연한다. 이를 들은 그녀 역시 안타까워한다.

전투에 나선 이방원을 기다리며 유사시를 대비해 옷을 갈아입고 대기중이다. 이방원의 말이 집에 도착해서 창을 들고 싸우겠다고 나섰다는 기록은 1차 왕자의 난에서 무장했던 묘사를 한 탓인지 굳이 표현을 안 한듯 하다.

드디어 남편이 회안공의 반란을 제압하고 정종으로부터 양위를 받게 된 가운데, 세자빈으로 책봉된 이후 가문 구성원들과 함께 본인들에게 찾아올 권세를 생각하며 들뜬 기색을 보인다.

3.3. 함께 이루었으나, 함께 누리지 못하는 권력

파일:(20) 이방원 vs 민씨.png
한편, 세자로서의 이방원이 급선무인 정책으로 사병 혁파를 내세우고, 자신의 동생들이 이에 반대하며 이방원과 의견 충돌이 벌어지자 다음에 이야기하다보면 합의점이 나올 것이라고 중재하고, 그 날 밤 남편과 독대를 하면서, 이방원이 혼자의 의견으로 사병 혁파를 강행할 것으로 보이자, 그럼 우리 가문의 의견을 묵살할 셈이냐며 점차 정색을 하였다.

이에 방원이 "왕은 나" 라고 반응했지만, 그 왕을 만든 것이 자신과 민씨 집안임을 상기시키며 "조선의 반은 내것"조선 공동명의 이라고 선언하며[22] 이방원으로부터 신뢰를 잃게 되고 갈등이 시작된다. 민씨는 진짜로 영토의 반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나누겠다는 것이라며 달래듯이 이방원을 설득하지만, 방원은 결국 부인이 권력을 잡고 싶어서 지금까지 날 도운 것이냐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이에 민씨 역시 갑작스럽게 선을 긋는 방원의 태도에 충격을 먹는다. 다음날 부모한테 이방원과의 대화 내용을 알려주었고, 이에 너무 성급했다는 평가를 듣게 된다. 그러면서 송씨가 돌아가신 중전마마의 정치력을 본받아야 한다는 취지로 조언을 해주자, 자신은 그런 교태로 권력을 훔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방원이 왕이 된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기뻐했지만 이방원과 틀어진 감정을 쉽게 회복하지 못했다. 그나마 자고있는 아들을 같이 보면서 행복한 표정을 잠시나마 짓게 된다. 그러다 이방원이 즉위하기 전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부탁을 하면서 신하가 되어달라고 하자, 차라리 역적이 되겠다며 끝끝내 거절을 한다.
파일:(21) 정빈 민씨.png
결국 이방원은 자신을 자택에다 남겨둔 채 혼자서만 즉위식을 치르게 되고, 쓸쓸히 차를 마시면서 생각에 잠긴다. 남편이 왕위에 올랐지만 아직 궐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택에 남아있는 동안, 입에 맞게 음식을 잘 할 거라며 젊은 여자 노비를 데리고 집에 찾아온 친정어머니에게 걱정을 듣고, 뭔가 결심을 한다.

이후 남편에게 허락도 받지 않고 자식들까지 데리고 궐에 들어가서 용상 바로 가까이에 다가가 용상을 바라보는 행동을 보이다가 뒤늦게 들어온 이방원과 마주친다. 자신의 뜻을 굽힐 생각이 없음을 밝히면서 만약 '전하의 바램을 들어드릴 수 있는 길이 하나 있다면, 제가 싸늘한 주검이 되는 길이지요'라며 전하의 손에 제 운명을 맡기겠다고 말한다.[23]

여기서 이방원은 민씨에게 "우리 싸움에 애들을 개입시키지 말라"라면서 민씨가 자식들을 데리고 대궐에 들어온 이유가 "다음 왕은 내 아들이다. 훗날을 생각하면 어서 나를 왕비로 책봉하고 내 자리를 확보해주는 게 좋을 거다"라고 자신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하려는 의도 아니냐면서 화를 내고 따지는데, 이방원이 찾아올 때까지만 해도 웃으면서 남편을 반기던 민씨의 얼굴이 그 폭언을 들으면서 딱딱하게 굳고, 자신도 폭언으로 응수한다. 민씨 본인은 그저 가족이 함께 지내고, 대화의 물꼬를 틀 생각으로 아이들을 데려온 것인데 그것이 정치적인 협박으로 오해를 받자 폭발한 것으로 보인다.[24]

정식 책봉을 받지 못해 당분간 세자빈으로서 동궁에서 지내지만, 어서 왕비를 책봉하라는 신하들의 상소 폭탄을 받은 끝에 이방원이 민씨를 정비(靜妃)로 책봉하면서 비로소 정식으로 중궁전에 입성하게 된다.[25]
파일:(22) 원경왕후 책봉.png

왕비로 책봉된 후에도 부부 사이는 회복되지 않는다. 중전이 된 민씨는 당연히 이방원이 중궁전에 합궁하러 오리라고 생각하고 기쁨에 젖지만, 사가에 있을 때도 첩 하나 두지 않았고[26] 즉위한 뒤에도 궁녀 한 명 손대지 않던[27] 이방원은 바로 그날부터 매일 시침을 드는 궁녀를 바꿔 가며 민씨에게 모욕을 가한다. 이로 인해 부부 간에는 점점 감정의 골이 벌어지게 되고, 심지어 자기 집안의 가비였던 궁녀[28]까지 침소에 들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게 된다. 이에 침소 앞까지 박차고 들어갔지만 차마 침소 문을 열지는 못하고 결국 돌아간다. 다음날, 그 궁녀가 자신에게 사죄를 하자 네 잘못이 아니니 괜찮다고는 했지만,[29][30] 이후 상궁이 궁녀에게 "일은 시키지 않겠지만 이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거라"고 벌을 내리는데[31] 이 궁녀가 밤새 비를 맞으며 밖에 방치된 끝에 지쳐 쓰러져서 죽을 뻔한 사실이 이방원에게 보고된다. 그리고 이에 크게 노한 이방원은 중궁전 궁녀들을 모두 내보내고, 민씨가 모든 일을 직접 하도록 명한다.

이방원의 왕명 때문에 궁녀들을 내보내고 자신이 직접 잠자리를 준비하고 손수 쌀을 씻고 밥을 지어 먹는데, 그 상차림이 겨우 조영무가 유배지에서 먹던 것[32]보단 조금 나은 수준[33]이라 일국의 왕비의 식사라기엔 너무나 초라하기 짝이 없다.[34] 이런 노골적인 홀대와 아버지 민제가 사헌부로 압송되는 상황 속에서도 강한 자존심으로 계속 버텨간다.

그러던 중 갑자기 양녕이 방원의 명을 무시하고 두 동생들을 데리고 중궁전에 방문하자, 오랜만에 세 아들과 재회하게 되면서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감격한다. 그러나 곧이어 들어온 궁인들이 주상 전하의 명이라며 아들들을 강제로 끌고 나가고, 지금까지 이방원의 박대를 잘 버텨왔음에도 자식들과 생이별하는 고통마저 겪게 되자 결국 무너진다. 정종의 설득에 마음을 움직인 방원이 중궁전에 찾아왔을 때, 난을 그리며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마침 방원도 정종이 신덕왕후 때문에 신의왕후 소생들이 고통받은 걸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냐는 요지의 설득에 흔들리고 있었고, 슬퍼하는 원경왕후의 모습에 마음이 움직여 싸움을 멈추기로 하면서 새로운 왕비를 들이는 일은 없던 것으로 된다.[35]

출궁했던 중궁전 궁녀들이 돌아오고, 문후도 허락되어 찾아온 자녀들을 맞이한다. 자신과 남편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잘 몰라, 의문을 품는 아이들에게 부부싸움을 알리기 싫은지 얼버무린다. 그러나 중궁전에 찾아왔다가 내관들에게 안겨 돌아갔던 세 아들들이 직접 자신의 처지를 보고 난 후라 결국 자식들도 대강 사정을 눈치채고 만다. 이에 첫째 아들과 셋째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 중 누가 책임이 있는지를 두고 다툼을 벌이자, 어느 쪽도 잘못한 거 없다며 둘을 달래고 단지 부부가 사가와 궁궐의 법도의 차이에 익숙치 않아 그런 것뿐이라고 애써 변명한다. 간략히 말하자면 "엄마 아빠 안 싸웠어."

그런데 아이들에게서 부왕에게 한동안 문안인사 오지 말라는 명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당황하며 궁인을 보내 알아보니 조정이 시끄러웠다. 이후 동서인 정안왕후에게 조사의의 난에 태상왕이 연루되어 있는 게 사실이냐고 질문하여 상왕 전하는 그렇게 직감하시는 것 같다는 대답을 직접 듣고 나서야 겨우 동북면에서 반란이 일어났음을 알게 되며 그 난이 시아버지인 이성계의 짓임을 확실히 알게 된다.[36]

이방원이 친정을 결심하기 전 아들들에게 이름을 주며, 이를 받은 아들들이 신나서 어머니에게 자랑하러 오자 뿌듯함을 느낀다. 그러나 곧 급히 찾아온 친정 아버지에게서 지아비가 친정을 나가기로 결심했다는 말을 듣고 다급히 궁문으로 나가 보지만 이방원은 이미 떠난 뒤였다.[37]

조사의의 반군이 남하를 개시하자 동생들과 친정을 결심한 남편을 돕기 위한 방법을 논의한다. 그런데 동생들은 "병력을 많이 데려가지 않은 주상이 전장에서 변고를 당하면 남도에서 올라온 대군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원자가 보위에 올라 민씨 가문이 정국을 주도하면 된다."며 정신나간(!) 소리를 내뱉는다. 이에 한 손으로 탁자를 내리치면서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라고 대노하며 "주상마저 죽으면 구심점을 잃은 군사들은 태상왕 앞에 무너질 것이고 그럼 우리 가문도 끝"이라고 꾸짖는다. 그리고 "배 안에서 다툼이 있었다고 배를 침몰시킬 순 없다."며, 미우나 고우나 이방원과 자신들은 한 배를 탔다는 걸 상기시킨다.

이후 지나간 두 번의 왕자의 난에서 그랬듯 이방원이 비운 자리를 순식간에 휘어잡고 보좌한다. 이후, 난을 진압하고 돌아온 방원과 독대하게 된다. "무엇으로 이 죄를 씻어야할지 모르겠다" 며 괴로워하는 그를 위로해주며 그간 쌓인 앙금을 씻어내는 시간을 가지며 오랜만에 예전의 그 시절 못지 않은 단란함을 보여준다. 이후 오랜만에 부부가 합궁을 하는데, 시간상 넷째를 가지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얄궂게도 단명하는 성녕대군이 이 잠시동안의 화목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는 것.

3.4. 남편에 의해 가문이 풍비박산나다

그러나 후일 경녕군이 될 아이를 임신한 김씨의 존재를 알아챈 친정에서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려는 음모를 꾸며 김씨를 학대하고, 황희를 통해 저자의 소문을 접함으로써 이를 알게 된 이방원이 "민씨 가문을 이대로 두면 안되겠다" 는 결심을 하게 되면서 상황이 난감해졌다.[38]

후궁이 된 효빈 김씨를 불러 처가에서 당한 핍박은 잊어달라는 부탁을 한다. 태종이 양위 파동을 일으키자 태종의 본심을 바로 알아채고 아버지인 민제를 속히 동생들에게 보내 자중하고 양위를 막으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자신도 태종에게 아직 세자가 나이가 어리고 부족하니 양위를 거둬달라고 청하지만, 태종은 직접 부딪혀보면서 배우는 게 좋을 수도 있다, 내가 상왕으로서 뒷바라지 해주면 된다고 뜻을 꺾지 않는다. 그리고 나오는 길에 효빈 김씨가 태종의 부름을 받아 태종의 처소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지나간다.

태종에게 양위를 거둬달라는 말이 통하지 않자 세자를 찾아가서 아버지가 무섭다는 세자에게 양위를 직접 거둬달라고 세자가 청해야먄 외숙들을 지킬 수 있다며 아들을 설득하여 세자가 직접 양위 파동을 멈추게 한다.[39] 그러나 동생들은 결국 태종의 덫에 걸려 유배를 당하게 되었고, 이후 태종과 독대에서 그래야만 하는 일이니 잘했다고 말은 하지만 표정은 심히 굳어 있다.[40]

자신 때문에 외숙들이 유배를 당한 것에 괴로워하는 세자를 달래면서 나중에 장성해서 힘이 세지면 외숙들을 구해달라고 세자에게 부탁하고, 세자가 그리 하겠다는 약속에 고맙다면서 내일 아침에 다시 문후를 드리러 가라면서 격려한다.

자녀들이 장성한 1408편(태종 8년)[41] 이방원의 문책에 대들면서 민무구, 민무질의 일을 꺼냈다가 처소 주변에 숙위병까지 두게 된 세자의 처소에 들어와 왜 이렇게 책잡힐 짓만 하느냐면서 꾸짖고 인내의 시간이니 버티라면서 아들을 다잡는다. 숙위병을 치워달라고 부탁하자 원하는 것이 있거든 스스로 싸우라고 조언한다. 이 자리에서 이성계가 이방원을 끝내 이기지 못한 일이 부모자식 관계이기 때문이라고 언급한다.[42]

시아버지였던 태상왕 이성계가 숨을 거두자 중전의 자격으로 그 장례식에 자리했고 뒤이어 친정아버지 여흥부원군 민제까지 숨을 거두자 통곡한다. 이후 세자의 손을 잡고 네가 민무구와 민무질을 극형에 처하라는 대간들의 반발을 눌러달라고 부탁한다.[43] 세자가 어린 시절에 네가 장성하면 힘이 세질 것이라 믿었고 이제 그 때가 왔음을 느꼈다.

같이 입궁하면서 세자가 민무구와 민무질을 살려달라고 이방원에게 부탁할 것이라 믿었지만, 오히려 외숙부들의 죄가 무거우니 극형에 처해 달라는 세자의 말을 듣고서는 경악하며 울부짖고 이방원의 명에 따라 궁녀들에 의해 편전에서 강제로 끌려 나간다.[44]
파일:(28) 절규하는 민씨.png
세자의 주청을 받아들인 방원이 두 동생들에게 자결을 명하자, 절망감에 "네가 지금 누굴 죽이려 하는지 아느냐?"라고 소리친다. 이내 편전 밖에서 엎드려 연신 이방원을 부르며 절규하고 밤이 되자 머리를 풀어헤치고, 이방원의 왕좌를 위해 싸운 동생들이 무슨 죄가 있어 죽이냐며 "전하가 사람이오?", "역적의 눈에는 모두가 다 역적으로 보이는 거요?", "가증스런 위선을 내려놓고 솔직히 말해 보시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소?"라며 처절하게 절규한다. 결국 지쳐서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자신의 아우들을 살려달라고 되뇌이다가, 손톱에서 피가 흐를 정도로 바닥을 긁고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다가 뒤로 쓰러져 의식을 잃는다.[45][46]

앓아누운 자신을 찾아온 세자가 부왕의 기대에 부응하여 왕위를 물려받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자, 그에게 "너의 미래를 위해 외숙부들을 제물로 바쳤다는 말이냐?"라고 일갈하며 진심으로 실망한 듯 당장 나가라고 명한다.

쓰러져 병상에 드러누운 가운데 자신을 간호하던 충녕군에게 덕담을 하면서 "네가 태어났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47]라는 자조섞인 말을 흘린다. 이방원의 잠저 시절 아들들만 줄줄이 요절하자 액운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 삼한국대부인 송씨 뜻에 따라 세 아들들을 각각 나눠 살게 하였는데,[48] 충녕만은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직접 키웠기 때문에 좀 더 감회가 깊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자신의 남은 두 동생들인 민무휼민무회가 관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자 불길한 기류를 느낀 듯 두 동생들에게 관직을 사양하라고 당부했으나 이들도 처음엔 몇번이고 사양했는데 태종의 협박에 가까운 강요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는 말을 듣는다.

동생 둘이 죽은 뒤로 시름시름 앓고 지내는 와중에, 효순궁주가 자신을 찾아와 수발 드는 사람의 수가 적어 위신이 서지 않으니 궁녀를 더 늘려달라고 요청하자, 태종의 숙청으로 친정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어 정치적 입지가 예전같지 않은지라 자신은 이제 아무 힘이 없는 중전이라고 하면서 거절한다. 하지만 효순궁주가 그 정도도 못해주냐면서 본인이 경녕군을 임신했을 당시 민씨 가문에게 당한 일을 들먹이며 자신에게 흥정을 하자[49], 그 자리에서 손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표정과 말투를 차갑게 바꾸고 네가 감히 나를 겁박하고 조종하는 거냐며 효순궁주가 사가에 있던 시절 정을 통한 종놈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니라고 역으로 협박하여[50] 입을 다물게 해 버린뒤 당장 나가서 다시는 찾아 오지 말라고 일갈하는 중전의 위엄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협박으로 앙심을 품은 효순궁주가 태종에게 경녕군을 임신했을 당시 당했던 일을 모두 고해버리고, 이로 인해 남은 두 동생이 혹독한 국문을 받게 되자 형장에 직접 찾아가 국문[51]을 중단하게 한 뒤 만신창이가 된 동생들을 껴안으며 오열한다. 남은 동생들마저 숙청당하게 생기자 태종에게 직접 찾아가 울면서 효순궁주에게 한 짓은 전부 자신의 지시였다며 거짓으로 고하고, 이전에 같이 용상에 앉으려고 한 것과 조선의 절반이 자신의 것이라 한 것 등을 모두 잘못했다고 빌며 자신을 벌해달라고 애원한다.[52] 자신이 폐서인이 되어 중전이 아니면 민씨 집안을 짓밟을 이유가 없어지니 자신을 폐서인하고 동생들을 살려달라며 부탁한다. 하지만 태종은 용상에서 일어나 원경왕후의 어깨를 짚으며 자신이 국문하고 있는 죄인들은 중전의 아우들이 아닌, 이름도 얼굴도 없는 어느 외척이자 자신이 만들려는 나라에 있어서는 안 되는 그저 불행한 생명이라고 단언하고 편전을 나가려고 한다. 이에 태종의 용포를 붙잡고 아우들을 살려달라며 마지막까지 매달리지만, 이미 뜻을 굳힌 태종이 자신이 더는 사람이 아닌 국왕이고 피도 눈물도 잊었다고 하자 표정이 굳어진다. 끝내 태종이 편전을 나가 버리자 바닥을 기어가며 애타게 부르다가 오열한다. 결국 태종이 남은 두 동생들을 유배 보내게 되고, 친정으로 가서 어머니 송씨와 함께 울면서 슬퍼한다.[53]

그렇게 믿은 세자가 남편의 숙청을 막기는 커녕 자신의 남은 두 동생마저 모두 잃게 만들자 결국 대노하여 세자를 찾아간다.[54] 이윽고 세자를 보자마자 뺨을 후려치고[55] 여전히 핑계를 대는 세자에게 '네놈은 악귀다', '널 낳은 것이 이렇게 후회가 될 줄 몰랐다'며 폭언을 날린다.[56] 이전에 낳은 세 아들이 모두 요절하고 겨우 얻은 첫 적장자가 바로 지금의 세자였기에, 자식들 중에서 가장 애지중지했던만큼 그에 대한 실망과 분노, 배신감이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3.5. 권력에 환멸을 느끼고 떠나다

며느리인 경숙옹주 심씨가 찾아오자 매우 반갑게 맞이해주는데, 심씨로부터 아들인 충녕이 부왕에게 기회를 얻고서 왕위를 노린다는 이야기를 듣자 매우 근심한다.

태종을 찾아가서는 충녕에게 기회를 준 것에 대해서 항의한다. 더 나은 자를 군왕으로 가려내는 것이 자신이 죄를 씻기 위해 마지막으로 할 일이라는 태종의 말에, 형제끼리 용상을 두고 다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며 생각하라면서 이미 죽은 이방석까지 거론하고는 "죄를 씻겠다는 명목으로 더 큰 죄를 짓는 사람이 바로 전하,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어떤 큰 죄라도 기꺼이 행하는 것이 전하"라면서 일갈하고 물러간다.[57]

태종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자, 이번에는 충녕의 사가에 찾아가 거문고를 선물하면서[58] 그의 방에 있는 서책을 모두 치우게 한다. 충녕이 큰형의 편을 드는 것이냐며 반발하자, 어느 어미가 오직 한 자식만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면서, 부모 형제 간의 관계마저도 잊게 만드는 용상을 만만하게 보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동생들을 모두 잃고 자신에게 남은 건 자식들뿐인데 자식까지 잃을 수는 없다며 눈물로 그만두라고 애원한다.[59]

얼마 후 충녕이 찾아오는데, 자신의 말을 오래 생각해 보았다는 충녕의 말에 기대하지만, 충녕은 형제 모두가 살기 위해선 자신이 왕이 되는 수 밖에 없다면서, 자신이 경쟁에서 이겨 왕이 된다면 맹세코 형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을 듣게 된다. 그 말을 듣고 착잡한 표정을 짓는다.

이후 정 상궁에게 세자를 중궁전으로 부르라고 했다가 말을 번복하고 자신이 직접 가겠다며 세자의 처소로 간다. 이 때 세자가 또 어리를 끌어들여 주색잡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매우 실망한 나머지 둘을 마당으로 끌어내고는 "네가 사람이길 포기했으니 이제 내가 널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넌 군왕의 자격도, 내 아들로서의 자격도 없는 놈"이라고 꾸짖는다.

그 후 동궁전을 나가려 했으나 세자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이방원과 막내 충녕을 마주하자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 후 분기를 품고 말없이 떠나버린 아버지를 보고 겁먹은 양녕이 애처롭게 도움을 청하지만, 그저 씁쓸하게 바라보기만 하고 동궁전을 떠난다.[60][61]

폐세자되고 자신을 용서하지 말라며 인사한 양녕대군을 눈물로 떠나 보내고, 이후 세자에 올라 인사하러 온 충녕대군에게 '용상은 잔인한 짐승이며 가 스스로 그 짐승을 찾아온 것에 너무나 서글프다.'라며 앞으로의 일을 암시한다. 이후 태종에게 전하의 얼굴을 보면 지금까지 저지른 일과, 앞으로 저지를 일이 보인다. 원하시는 대로 홀로 서는 군왕으로 만들어주겠다란 자신의 남편과 권력에 대한 환멸감이 묻어나는 발언과 함께 사가로 가겠다는 선언을 한다.[62]

궁을 떠나는 날, 세자빈이 된 심씨에겐 "앙녕의 처가인 김씨는 평범한 가문이라 괜찮았다.[63] 그러나 너희 심씨도 우리 여흥 민씨같은 명문가니 주상은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 숙청을 경고하며 집안에 자중할 것을 전하라고 조언해준다. 조언을 끝마치고, 궁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쓸쓸히 궁을 떠나 홀로남은 어머니[64]가 계시는 사가로 돌아간다.'

3.6. 차가운 조선의 법도에 갇혀 생을 마치다

심온에게 사약을 내리려는 이방원을 만나 자신의 설득이 무의미할 것임을 알지만, 이 일은 주상에게 상처를 남길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방원이 7일 내로 사람을 보낼 테니 궁으로 돌아오라고 말하지만 가만히 듣고만 있는다. 이후 이방원이 중궁전 상궁과 궁녀들을 보냈지만, 행선지도 알리지 않고 사가를 떠나버렸다. 부부니까 짚이는 곳이 있지 않느냐는 세종의 이야기를 들은 이방원은 이화상과 함께 모처에 있는 절을 찾아간다.[65]
파일:(32) 애증.png
이방원과 민씨의 마지막 만남

자신을 찾아와 용서를 빌며 "부인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변함이 없었소."라고 말하는 이방원에게 "서방님을 사랑했지만, 지금은 서방님을 용서하지 않는 것밖에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사옵니다."는 말을 남긴다. 또한 절반은 증오로, 절반은 사랑으로 채워진 육신을 버리고 자유로워지고 싶으니 이만 돌아가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자신이 학질에 걸린 것을 알게 된 이방원이 가마를 준비해서 억지로 데려가면서 함께 궁궐로 돌아가게 된다.[66]

이후 궁궐로 돌아와 자신을 지켜보는 양녕, 효령, 충녕(세종)의 이름을 한 번씩 불러본 후 세 아들과 손을 잡고 나서 숨을 거두는데, 자신의 탕약을 손수 가지고 오던 이방원과는 끝내 화해하지 못했다. 어떤 측면에서는 태종 이방원에게 가장 잔인한 복수를 임종에 이르러서야 한 셈.[67]
파일:(32) 민씨 승하.jpg
"서기 1420년, 세종 2년, 원경왕후 민씨가 숨을 거두었다. 이방원을 왕으로 만든 일등공신이었지만 이방원의 손에 아우들을 모두 잃어야 했던 원경왕후 민씨, 고려의 여걸로 태어난 민씨는 그렇게 조선의 법도에 갇혀 숨을 거두었다."

- 원경왕후 민씨의 졸기

2년 후 남편 이방원도 세상을 떠나 원경왕후 옆에 묻힌다.

4. 인간 관계

4.1. 이방원

고려 말부터 생사고락을 함께해온 정치적 동지이자 평생의 반려자. 그러나 프롤로그에서 암시된 것처럼 남편이 즉위한 시기를 기점으로 애증의 관계로 돌변하게 된다.

1차 왕자의 난2차 왕자의 난 이후 세자가 된 이방원과 함께 세자빈에 책봉되지만, 몇몇 측근[68]만 데리고 처가를 방문했다가 안뜰을 가득 메운 민씨 가문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그 위세를 깨달은 이방원은 무의식적으로 처가 식구들을 경계하게 된다. 이후 사병 혁파를 자신의 남동생들이 반대하고 외척에 대한 경계를 드러내는 이방원에게 가문의 공로를 내세우면서 갈등이 시작되고, 이방원이 중전이 된 자신의 영향력을 깎아내리기 위해 매일밤 침소에 다른 여인을 들이면서 이러한 갈등은 본격화된다. 결국 민씨의 형제들인 민무구와 민무질을 유배보내 사사시키면서 이성을 잃고 중전으로서의 체면마저 내팽개치고 편전 앞에 꿇어앉아 이방원에게 온갖 저주를 퍼붓고, 남은 형제들인 민무휼과 민무회마저 효빈 김씨의 일과 세자의 참소를 근거로 유배보내 자결을 강요하자 전부 자기가 한 짓이니 자신을 벌해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부부관계는 파탄에 이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원경왕후 자신은 남편 이방원에 대한 분노와 후회를 작중 내내 절절히 토해내고 끝내 마지막까지 그를 용서하지 않았지만, 이방원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했던 아내에 대한 죄의식만큼은 제대로 자각하고 있고 그녀와의 부부의 연을 결코 놓지 않았다.[69][70] 1화에서 세자가 된 충녕에게 자신이 저지른 죄를 열거하며 스스로를 책망하면서, 민씨에게 지옥을 선사한 것을 후회하며 대성통곡을 할 정도다. 친정의 연이은 숙청으로 민씨가 잘못을 빌며 고통스러워하자 용서를 포기했다는 듯, 자신은 국왕일 뿐이라며 뜻을 관철했지만 괴로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지막회에서 상왕으로 물러나 사돈인 심온 일가마저 숙청하여 모든 것을 정리한 이방원이 자신에 대한 사랑만은 늘 변함이 없었다며 뒤늦게야 용서를 빌지만, 자신도 이방원을 남편으로서 진심으로 사랑했던 마음만은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죽는 그 순간까지 이방원을 용서하지도 않고 화해하지도 않은 채로 사망한다. 이방원은 아내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이성도 체면도 내팽개치고 절규했으며, 본인도 2년 뒤에 승하하면서 이 애증어린 부부는 무덤에 나란히 안장되어 죽어서나마 함께하게 된다. 그야말로 극도로 증오하면서도 부부의 연을 놓을 수 없었던 애증이란 것이 무엇인지 여과없이 보여준 부부라고 할 수 있다.

4.2. 이성계

시아버지. 이방원이 이성계의 가슴에 대못을 박으면서 민씨에게도 불똥이 트인다. 그래도 마지막에 이성계가 이방원을 용서하고 국왕으로 인정했으니 민씨도 시부에게 죄책감을 많이 느끼고 태상왕의 국상에서 애도를 했다.

4.3. 민제

자신의 아버지이자 여흥 민씨 가문의 수장으로 자신의 가장 든든한 뒷배였다. 자신에게 정치적인 식견과 처신에 대해서도 성심성의껏 가르쳐준 스승이나 다름없었고, 원경왕후도 어려울 때마다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을만큼 의지했다.

민제 역시 사위인 이방원이 즉위하자마자 수많은 후궁을 들이며 딸 원경왕후의 권위를 떨어뜨리자 분노하여 그동안 태종의 견제를 피해 자중하려던 것까지 그만두고 휘하의 문생들을 이용해 집단 상소를 올리는 무리수를 두고, 이후로도 외척을 극도로 견제하는 이방원과의 갈등과 친정에 대한 걱정으로 계속 고통받는 딸을 안타까워하며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부디 강건하게 버티시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원경왕후를 걱정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였다.

4.4.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

자신이 아끼던 동생들. 훗날 이방원에게 숙청된다. 남편 이방원을 보위에 올려 자신을 중전으로 만들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형제들이기에 더욱 돈독한 우애를 자랑한다. 결국 장남 양녕대군의 배신으로 민무구와 민무질 모두 사약을 받게 되자 중전으로서의 체면도 내팽개치고, 편전 밖에서 이방원을 부르짖으며 비난을 퍼붓고 지쳐서 쓰러진 채로도 아우들을 살려달라고 되뇌일 정도로 이성을 잃는다.

이후 민무휼과 민무회마저 효순궁주를 학대한 일이 드러나[71] 체면은 물론 자존심까지 버려가면서 태종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외면받고, 외숙부들의 실언을 고변하며 처벌을 주장한 세자를 찾아가 빰을 후려치며 장남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저버리게 되는 계기가 된다.

4.5. 이방우

큰 아주버님. 위화도 회군 이후 자기 남편과 서로 다른 신념 때문에 다투는 걸 지켜본다. 적장자가 후계자 경쟁에서 제외될 것을 꿰뚫어보고 나머지 아들들은 장자가 아니니, 능력으로 후계자를 선택할 것임을 예측하여 이방원의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친정 아버지까지 동원하여 내조한다.

4.6. 신덕왕후

시어머니. 남편의 친모가 아니지만 개경에 같이 머물고 있다 보니 한씨보다 더 가까운 고부관계이다. 하지만 점차 대업이 가까워 올수록 정치적으로 대립할 조짐을 보였다. 결국 조선 개국 이후 신덕왕후가 친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만들고, 이방원을 비롯한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핍박하면서 갈등이 폭발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분노로 신덕왕후를 대놓고 적대하는 이방원과 달리, 민씨는 앞에서는 생글생글 웃으며 뒤로는 복수를 꿈꾸는 와신상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방원에게 앞날을 위해 간곡히 호소할 정도. 하지만 이방원은 이미 신덕왕후의 사례로 권력욕이 강한 중전의 위험성을 깨우쳤고, 22회에서 방원이 방과에게 "아바마마가 실패한 이유"중 하나로 지적한다. 결국 강씨로 인해 방원은 민씨에게 신하가 될 것을 요구하고 민씨가 이를 거절하며 관계가 틀어지게 된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다.

작중에서 원경왕후에게 신덕왕후는 일종의 안티테제로 비추어 진다.[72] 신덕왕후는 태조에게 고개 숙이고 여성으로 행세함으로서 태조의 신뢰를 얻어 권력의 중심에 다가갔지만, 원경왕후는 신덕왕후의 방식을 혐오하고 태종과 반려자라는 동반자적 입장으로서 고개를 뻣뻣하게 세우고 당당하게 권력을 잡고 싶어한다. 태종은 21회에서 민씨가 사병혁파를 반대하면서 도를 넘는 발언을 하기 전까지 상술한 권력욕 강한 중전의 위험성은 딱히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결국 신덕왕후가 이방원, 민씨 두 사람에게 준 경각심이 부부의 파멸을 가속화한 셈이 되었다.

4.7. 양녕대군

양녕대군 이전에 낳은 세 아들이 모두 요절했기에 더욱 특별한 자식 중 하나였고 그 누구에게도 기죽지 않는 여장부인 민씨의 사실상 유일한 약점이기도 했다. 왕비가 되어 궁궐에 들어온 후 남편과 반목하게 되었지만, 자식들이 관련되면 누가 먼저 말할 것도 없이 단합하였다. 그러나 점차 양녕대군이 성장하면서 아들과의 관계가 급격하게 틀어진다. 자신의 동생들을 살려줄 것이라 믿었던 양녕대군이 태종 앞에 나아가, 그 둘을 극형에 처해야한다고 고하면서 믿었던 맏아들에게 배신을 당했으며, 이후 남은 두 동생마저도 양녕이 이전 이야기를 고백하며 죽음에 이르렀다. 이에 민씨는 동궁에 쳐들어가 양녕의 뺨을 때린다. 양녕이 자신이 살기 위해 그랬다며 충녕대군이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고 하자 "이제는 동생까지 끌어들이는 것이냐"며 비난하고 "넌 악귀다. 널 낳은게 이렇게 후회가 될 줄 몰랐다"라고 폭언하였고, 기어이 어리를 다시 궁에 들여온 장면까지 목격하면서 "이제 사람이길 포기한 너를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 "넌 국왕의 자격도, 내 아들의 자격도 없다"며 일갈하고 등을 돌리며, 둘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이 나고 말았다. 그래도 천륜을 끊을 수 없는지, 폐세자가 되어 양녕 군호를 받은 뒤 외숙부들을 사지로 몰아놓고도 폐세자 당한 자신을 용서치 말라고 잘못을 빌고 통곡하는 것을 보고는 아들의 처지를 안타까워 하며 눈물을 흘린다.

4.8. 효령대군, 세종

양녕대군과 더불어 민씨가 특별하게 생각하는 자식들. 양녕대군이 세자가 된 뒤 민씨의 동생들을 죽이는데 거의 앞장시피 하다 하여 반목이 커진 뒤, 어머니에게 효심이 깊은 효령과 충녕과는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고 있다. 민씨의 남은 두 동생이 죽었을 때도, "너희까지 함께 슬픔에 빠뜨리고 싶지 않구나"라고 말하며 효령과 충녕을 오히려 위로해주기도 한다. 특히 충녕대군에게는 "너를 낳고 난 뒤가 가장 행복했던 때였구나"라고 회상하며 충녕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이기도 한다. 다만 이미 남편이 세자 및 용상의 자리를 두고 형제들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직접 겪었던 터라 세자와 보위를 노리는 충녕에게 내 자식들마저 권력을 두고 잔혹한 싸움에 휘말리게 하는 걸 보기 싫으니 형의 자리를 탐하지 말라는 주의를 주지만, 충녕의 야망은 쉽게 꺾이지 않고 오히려 보위에 올라도 형의 목숨과 안전은 보장하겠다며 다짐을 하는 모습을 보고 더욱 걱정한다.

4.9. 소헌왕후

셋째 며느리. 험악했던 신덕왕후와의 고부 관계와 달리, 시어머니로서의 원경왕후는 소헌왕후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충녕이 세자에 책봉되고 중궁전을 알현했을때 원경왕후의 시선은 심씨에게로 향했고, 궁궐을 떠날때도 새 중궁전의 주인이 되는 며느리에게 이방원의 칼날이 자신과 같은 명문인 심씨 가문에게 향할 것임을 알고 자신과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따뜻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소헌왕후 역시 자신을 제외한 가문이 멸문지화되는 고통을 겪었으나, 시아버지 태종이 몰고 온 피바람에 부부관계가 파탄난 시어머니와 달리, 세종과 좋은 부부관계를 유지하며 태평성대에 살 수 있었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다.

4.10. 이화상

고려말 자기에게도 일을 달라는 이화상에게 저자거리 민심을 알아달라고 부탁한 것을 시작으로 시묘살이 중인 방원에게 심부름 보내는 등 믿고 일을 맡긴다. 민씨가 무슨 일을 하는 장면에서는 거의 이화상이 거드는 것으로 나오고, 그만큼 서로 큰 격의없을 정도로 친밀하다. 14화에서 건네는 농담(민씨가 싸움을 잘 해서 방원이 첩을 안 둔다)도 이런 관계가 기반이 된 것. 하지만 궁으로 들어간 후로는 점점이 없다.

5. 인물 묘사

영민하고 당당하면서도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말선초 명문가의 여인인 원경왕후를 굉장히 잘 살렸다. 2회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우왕의 반격 장면만 봐도, 임신한 상태에서 칼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압권이다. 그 이후에도 정세를 굉장히 정확히 파악하며, 시대상에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남편을 왕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정확히 그려내고 있다.

강단있는 모습 말고도 이전 작품들에 비해서도 유난히 이방원과 달달한 모습도 잘 보여준다. 단순히 서로를 잘 이해하는 동지를 넘어 갓난 아들을 두고 내가 더 효도 받을 거라고 농담을 주고 받거나, 그 아들을 잃자 자기도 힘들면서 서로를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모습처럼 정말 애정 깊은 부부의 모습을 보여다. 그런데 이 드라마 자체가 왕이 되기 전 이방원의 고난이 잘 그려지다보니 어찌보면 당연한 상황이다. 극중에서 아버지와 계모에 이어 형제들과 스승에게까지 버림받으면서, 의지할 곳이 사라진 이방원을 전적으로 믿어주는 건 아내와 처가인 민씨 가문뿐이다. 하지만 21화 이후로 둘의 부부관계는 거의 파탄났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갈라졌다.[73] 가례색을 폐하게 한 뒤로는 한동안 부부관계가 다시 원만해졌으나, 이방원이 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게 자결을 명한 뒤로는 그에게 대놓고 저주를 퍼부을 정도로 사이가 냉랭해졌다.

용의 눈물의 원경왕후와 비교하면 강한 성격의 순수 여장부에 가까운 용의 눈물과 달리 정적인 모습과 강단있는 모습이 섞인 모습을 보인다. 특히 신덕왕후를 대하는 모습은 용의 눈물과 정반대이다. 용의 눈물에서는 민씨가 앞뒤 없이 폭주하며 신덕왕후와 대립하고 이방원은 이를 조율하며 선을 지키는 모습이었다면[74], 본작에서는 반대로 이방원이 신덕왕후와 대놓고 지나치게 적대하려 하고[75] 이를 민씨가 말리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또한 용의 눈물에서의 원경왕후는 4명의 남동생들이 모두 남편에 의해 숙청을 당한 이후로는 이전의 여장부로서의 모습은 사라지고 처량한 분위기로 묘사되었는데 여기서는 남동생들이 모두 숙청을 당해도 세자인 양녕대군의 뺨을 때리거나 일침을 가하는 등 왕후로서의 강단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76]

1차 왕자의 난 때 무기를 숨기거나 본인도 직접 무장을 하는 등 아예 본인 집안과 함께 킹메이커의 중추에 있다. 이러한 모습으로 자신을 비롯한 민씨 일가가 왕으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 태종이 민씨 일가를 박살냈을 때 배신감에 대한 빌드업을 착착 진행하는 중이다. 다만 무장했을 때 갑주가 다른 등장인물들과 달리 디자인이 너무 판타지스러워서 어우러지지 못하는 점이 아쉬운 부분.[77]

주인공 이방원과 함께 본작의 주제인 ‘가(家)를 넘어 국(國)으로’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이방원이 자신의 가문을 위해 새 왕조를 세우기로 다짐했고, 원경왕후 또한 남편 이방원과 가족인 민씨 가문을 위해 적극적으로 그를 보필했지만, 둘 다 종래에는 국가를 세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가문의 대부분을 잃고 만다. 그러나 이방원은 스스로가 악역을 자처하고 이런 일을 벌였으나, 민씨는 이방원에 의해 모든 걸 잃었다. 즉, 이방원이 가문을 넘어서 국가를 생각하는 인물로 변모했다면, 원경왕후는 국가에 의해 가문이 멸문당했다는 점에서 서로 대비된다. 특히 이 드라마에서는 왕가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어, 원경왕후는 이방원과 마찬가지로 극을 이끌어가는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반영하듯 이 작품에서 이방원과 더불어 첫 회부터 최종회까지 모든 회차에 개근한 단 둘 뿐인 인물이다. '家를 넘어 國'을 이루는 주체인 태종의 행보에서 가장 큰 피해자이기도 하다. 킹메이커로서 본인과 집안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20회 이후로 점점 선을 넘는 모습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78], 결국 이러한 모습이 태종의 경계를 사서, 자신은 중전에 즉위하자마자 가례색 설치와 궁인 추방이라는 굴욕을 당하여 결국 태종의 권위 앞에 수그리게 되고, 국가를 건실하게 만드는 것이 자신의 죄과를 씻는 유일한 길이라는 명목 하에 처가 형제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아들들끼리 서로 정적이 되는 광경까지 보고 만다. 본인과는 다른 성정을 지닌 며느리의 가문이 본인처럼 박살나는 것은 덤.

'家를 넘어 國'을 만들기 위한 이방원의 비정한 행보에 연루되는 사람과 희생양들이 모두 민씨와 가까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민씨의 고통은 배가 된 것.

6. 기타

  • 남편 역의 주상욱을 비롯해 다른 드라마에서 이미 호흡을 맞춰본 배우들이 많은 터라, 비주얼이나 연기 합이 잘 맞는다는 점도 메리트다.

6.1. 정적?

21회에서는 나레이션이 "민씨가 이방원의 정적이 되었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실제 역사를 비추어보면 원경왕후가 태종의 정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평가할 수 없다. 물론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여러 차례 야심을 비추며 남편을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친정인 여흥 민씨가 고려 시대 때부터 이름을 알린 명문가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태종이 왕위에 오른 뒤 다른 왕비들처럼 정치적인 야망을 드러내거나 정치적인 당수 역할을 했는지가 불분명하기 때문. 태종실록에 왕비가 투기가 많다, 그리고 친정이 멸문지화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을 때 태종에게 험한 말을 퍼부었다는 등의 기록은 남아있지만, 정작 해당 실록에서 태종의 정치적 행보에 제동을 걸었다던가, 태종의 정책에 격렬히 반발하는 모습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전개는 원경왕후를 비롯한 여흥 민씨 가문에 대한 이방원의 가혹한 숙청을 단순한 토사구팽이 아닌, 내부 권력 투쟁의 결과로 설정하고, 이를 통해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일 수 있다.[79][80] 향후 드라마에서 원경왕후가 어떤 정치적 입지를 가지고, 어떻게 태종과 정치적으로 충돌할 지 잘 묘사해내는 것이 관건이라고 여겨졌으나 결국 막바지까지 이와 같은 묘사가 제대로 다뤄지지는 못했다.

사람이길 포기했다는 자학도 서슴치않고 쏟아낼 정도로 국왕의 권위를 다져 국왕이 국가를 운영해나갈 기틀을 잡는데 집착했던 태종과, 그에 휘말려 가문이 풍비박산이 나며 모든 것을 잃었으나, 자식들이 권력 투쟁으로 내몰리는 것을 막고자 했으며 며느리의 가문까지 박살내는 태종을 어떻게든 막아세우고 싶었던 원경왕후의 구도가 대립적이기는 하나, 극 내내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적대적이라기보다는 애증의 관계에 가깝기에, 정적의 대립 구조로 해석할 여지를 남기기에는 여전히 문제가 많다.[81] 연출로 다 풀어내지 못한 이런 복잡한 관계는 막바지에 원경왕후에게 '함께 이룬 것은 함께 나눠야 한다는 중전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지만 내가 원하는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닌 홀로 서는 왕, 가문을 넘어서는 국가다' 라고 정리하는 태종의 대사에서 잠깐이나마 엿 볼 수 있다.

7. 어록

서방님을 더 큰 사람으로 키울 겁니다. 정말 큰 사람으로요.

- 5회, 가족에게 포부를 밝히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서방님이 전하를 거역한건 오직 한 번 뿐입니다. 한데 전하는 그 한번만을 기억하시는 겁니까? 그냥 서방님께서 전하를 위해 한 일은 다 지우시는 겁니까? 전하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일조차 기억에서 지우신 겁니까.

- 9회, 이성계에게 버림받은 이방원의 처지를 비관하며
살려주십시오, 왕비마마.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대신 사죄드리옵니다. 이렇게 비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전하께 버림받은 충격으로 온전치 못한 사람이옵니다. 이제는 그저 불쌍하고 가여운 사람이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옵니다. 그러니... 그러니 제발... 살려만주십시오. 최영의 군대를 피해서 왕비마마와 세자저하를 모시고 산으로 오가던 그때를 돌아보시어 제발, 제발 목숨만 살려주시옵소서... (강씨의 다리에 매달리며) 이렇게 비옵니다. 살려만 주시옵소서. 왕비마마....

- 10회, 실성한 이방원이 신덕왕후를 해치려하자 이를 막고 대신 사죄하다
우리 이쁜 아들...갑갑해서 어찌 할꼬... 추워서 어찌 할꼬... 이 못난 애미를 만나 원통해서 어찌할꼬...

- 10회, 조졸한 세번째 아들을 가을 바람이 부는 산 속에 매장하면서 통곡을 하다
서방님, 전 이제 잃어버렸던 걸 되찾았습니다. 서방님은 언제 다시 찾으실 겁니까? 서방님이 그 자리를 되찾지 않으시면 우리 아이들은 영영 빼앗긴채로 살아가야합니다. 세자가 되고, 왕자가 될 수 있던 아이들이 거렁뱅이가 되어 구걸을 할 수도 있습니다. 저라면 그리 놔두지않을 겁니다. 내 아이를 위해서라면 저는 무엇이든지 할 겁니다. 배고파서 울부짖으면 제 살을 잘라서 먹일 겁니다. 추워서 우들거리면 제 몸을 태울겁니다. 지옥에 떨어져 영겁의 고통을 겪는다해도 내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겁니다. 서방님, 제발 용기를 내십시오. 우리는 빼앗는게 아니라, 되찾는 겁니다.

- 13회, 다시 세 아이를 얻은 후 이방원에게 권력 투쟁의 의지를 다시 일으켜주다
간신 정도전이 어린 세자를 등에 업고 정안군을 죽이려 했네! 전하께서 쓰러진 틈을 타 왕자들 모두를 도륙하려 했네! 그래서 이렇게 할 수 없이 칼을 들었네. 어쩌겠는가? 나와 정안군을 위해서 싸워주겠는가!

- 16회, 1차 왕자의 난 때 함께 거병하며
접니다. 서방님의 아내요. 이제까지 모든걸 함께하던 사람입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논의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안된다는 겁니까? 이제와서 절 버리시겠다는 겁니까? 함께 이루었습니다. 당연히 함께 이뤄가야 합니다.

- 20회, 이방원에게 권력을 나눌 것을 요구하며
저는 차라리 역적이 되겠습니다.

- 21회, 신하가 되어 달라는 이방원의 부탁을 거절하며
며칠 밤을 지새우면서 고민을 해봤습니다. 과연 제가 전하께서 원하는 여인이 되어드릴 수 있을지를요. 되어드릴 수 있습니다. 나무가 되라 하시면 나무가 되고, 풀이 되라 하시면 풀이 될 수 있습니다. 벙어리가 되라 하시면 입을 다물고, 장님이 되라 하시면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하나, 그리 되면 제가 아니더군요. 저는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도 그렇게 살고자 한 적이 없습니다. 하여, 제가 전하의 바램을 들어드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더군요. 제가 싸늘한 주검이 되는 거지요.

- 22회, 태종의 허락 없이 무단 입궁한 뒤
얼마나 시급한 정사를 논하시기에 중전이 이리 다급하게 달려와 청하는데 만나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끝내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제가 직접 이 문을 열고 들어가겠습니다. 모든걸 제 손으로 하라고 중궁전의 궁녀들까지 내쫓으셨으니, 전하의 명을 받들어 이 문도 제 손으로 직접 열겠습니다.

- 23회, 가례색을 설치한 태종에게 항의하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너희가 지금 정신이 나갔구나...? 주상 전하마저 잃은 군사들이 태상왕 전하의 군대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어림없는 소리... 하루만에 도성이 함락돼, 우리 가문 전체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할 것이다! 그것도 헤아리지 못하느냐...?

- 24회, 조사의의 난 당시 실언을 한 아우들을 꾸짖으며
네가 어서 자라면 된다. 네가 자랄 수록 너의 힘은 점점 세질 것이다. 그럼 그 힘으로, 숙부님들을 꼭 구해다오.

- 26회, 외숙부들이 자기때문에 귀양간 것에 슬피 우는 어린 세자를 위로하며
세자! 세자!!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 아느냐? 네가 지금 누굴 죽이는 지 아느냐! 세자! 이걸 놓지 못하겠느냐! 놓거라! 세자!!

- 27회, 믿었던 장성한 세자에게 배신을 당하다
전하...! 전하가 사람이오? 내 아우들이 무슨 죄가 있소? 아우들이 뭘 어찌 했습니까...? 전하를 위해서, 목숨 바쳐 싸운 게 죕니까...! 그러고도 주상의 눈치를 보느라 숨죽이고 있던 게 죕니까...! 말해 보시오... 어서 말을 해보시오... 어찌하여, 짓지도 않은 죄를 물어! 목숨을 빼앗아가는 겁니까...?

- 28회, 민무구·민무질의 사사에 절규하며
기어이 남은 아우들까지 죽이시겠다는 겁니까? 그럼 절 죽이십시오. 아우들은 죄가 없습니다, 다 제가 시켰사옵니다. 제가 질투심에 눈이 멀어 벌인 일이옵니다. 절 벌 주십시오.

- 29회, 민무휼과 민무회까지 죽이려는 태종에게 애원하며
가 사람이더냐?! 네가 정녕 어미의 뱃속에서 열 달을 채워 나온 그 아이가 맞는 것이냐?

- 29회, 남은 아우들마저 죽음으로 몰고 간뒤 자신이 납치한 어리에게 술상을 요구하고 술을 마시다 황급히 어리를 뒷방에 숨긴 세자를 꾸짖으며
죄인이라는 구실은 더 이상 입에 담지 마십시오. 죄를 씻는다는 명분으로 또 다른 죄를 짓는 사람이 바로 전하십니다. 실상은 원하는 게 있으면 아무리 큰 죄라도 기꺼이 행하는 게 바로 전하십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 오로지 권력만을 생각하시는 게 바로 전하십니다.

- 30회, 충녕에게 기회를 준 태종에게 항의하며
제발, 그만 두거라. 이 어미가 또 누굴 잃어야 한단 말이냐? 아우들로 부족하여 이젠 자식까지 잃어야한단 말이냐? 이 어미가 그리 많은 죄를 지은 것이냐? 제발, 멈추거라. 너희까지 잃으면 못 산다. 이제 나한테 남은 건 너희들 뿐이다.

- 30회, 왕권에 도전하는 충녕을 막아세우며
가 다시 부른 거냐? 널...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 더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으니 이제 뭐라고 해야 하느냐.

- 30회, 어리를 또 다시 세자궁에 들인 세자에게 일갈하며
앞으론 절 찾지 말아 주십시오. 전하의 얼굴을 뵐 때마다 전하께서 그간 하신 일들이 떠오릅니다. 전하께서 앞으로 하실 일들도 그려집니다. 이제는 차라리 보고 싶지 않으니 절 다시는 찾지 마십시오. 늘 오롯이 홀로 서는 국왕을 꿈 꾸셨지 않습니까? 원하시는 대로 혼자가 되십시오.

- 31회, 환멸을 느끼고 떠나다
울지말거라. 그렇게 심약해서는 의 가문을 지키지 못한다. 이제 너의 가문의 수장은 바로 너다. 가문 사람들에게 은밀하게 전해라. 절대로 책잡힐 일은 벌이지 말라고. 절대로 위세를 드러내는 일은 하지 말라고. 알겠느냐?

- 31회, 떠나기전, 새 중전이 될 며느리 심씨에게 남기는 충고
저도 분명, 서방님을 사랑했습니다. 하나 이젠, 서방님을 용서하지 않는 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어서 놓으십시오.

- 32회, 방원을 용서하지 않다
서방님...

- 32회, 혼수상태에 빠진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이방원에게
양녕... 효령... 충녕...

- 32회, 임종 직전 자식들을 부르며

[1] 주상욱과 마찬가지로 궁녀, 구암 허준 같은 퓨전사극에 출연했으나 정통사극은 이번이 첫 출연이다.[2] 박진희가 맡은 황정연은 주상욱이 맡은 조민우와 라이벌 관계였던 주인공 이강모의 연인이자 훗날 배우자가 된다. 한편 조민우는 이강모의 여동생 이미주와 연인이었으며 훗날 배우자가 된다. 결국 두 배역은 결말에서 처남댁-시매부 관계가 됐다.[3] 태종이 즉위하자마자 실컷 후궁을 들여대는 것은 물론 외척을 경계한 남편의 무자비한 숙청에 의해, 원경왕후 본인의 남동생들이 처형당하면서 친정이 사실상 멸문에 가까운 화를 입는다.[4] 이방원이 외척인 자신의 가문을 몰살시킨 것 때문으로 보인다.[5] 프롤로그는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넘기려는 장면인데, 실제 역사에서 원경왕후는 이후 2년 뒤에 사망한다.[6] 태종이 말한 이 모습은 28회 초반부에 나온다. 자신의 아우들인 민무구와 민무질의 죽음이 확정되자 편전 밖에서 아우들을 살려달라고 밤새도록 오열하며, 손톱에서 피가 날 정도로 땅바닥을 긁고 편전 문을 두드리며 남편을 저주하다가 결국 실신한다.[7] 당시 이방원의 장인 민제는 '예의판서'(예의사는 고려시대 중앙정무기관이며, 이전 '상서육부(尙書六部)'중 하나인 예부를 공민왕 때인 1362년에 고친 것이며, 위화도 회군 이후인 1389년예조로 고쳤다. 그리고 그 부서의 최고위직이 판서이다.)인데다가 왕실과 통혼할 수 있는 재상지종이자 당대의 권문세족의 일원인 '여흥 민씨' 집안이다.[8] 고위 가문의 여성답게 값 비싼 몽수를 쓰고 나온다.[9] 훗날의 일이지만 양녕대군이 막내 동생뻘인 성녕대군이 죽을 때 활을 쏘고 노는 등 막장인성의 끝을 달리는데도 원경왕후가 마지막까지 그의 세자 폐위를 반대하고, 폐세자 이후에도 최대한 궁궐 가까운 곳에 지내게 하려고 애썼던 이유가 이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아들을 셋이나 앞세우고 뒤늦게 다시 얻은 귀한 아들인데다 조선 개국 후 신덕왕후에 의해 경원시 당할 때, 무릎에 올려두고 직접 기른 아들이여서 7남 5녀 중에서도 특히 마음가는 자식이었다는 것.[10] 그동안 사극에서 보기 드물었던 고려의 상류층 여성들이 승마를 할 때 입는 의복인 말군이 해당 장면에 등장한다.[11] 이때 슬퍼하는 장면이 워낙 절절해서 양녕이 그렇게 깽판을 쳐도 놓지 못한게 절로 이해간다는 감상이 많았다.[12] 이방원은 강씨를 참아주지 않겠다는 입장이었고, 민씨는 참고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13] 이때 자신은 이제 자식을 셋이나 앗아간 하늘을 믿지 않으며 오직 서로를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등 민씨도 나름대로 독을 품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14] 여담으로 이 인사는 이방원이 명나라로 떠날 때 둘이서 주고받았던 것이다.[15] 얼핏 들어보면 전주 이씨가 역성 혁명에 성공했는데, 여흥 민씨가 못할 것이 뭐냐로 들리기도 한다. 때문에 이후 벌어질 이방원의 여흥 민씨 숙청의 복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16] 이 당시가 경안공주와 양녕대군, 효령대군을 낳았거나 임신 중이던 상황이다.[17] 실제로 제2차 왕자의 난 당시 이방원의 생사가 불분명하자 자신이 직접 나가 싸우겠다며 강단을 보이던 일화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18] 실제 역사에서 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행방이 묘연하자 본인이 직접 무장하고 싸우겠다고 했던 일화를 참고한 연출인 듯 하지만 혼자 퓨전사극을 방불케 하는 판타지 갑옷 디자인이 너무 튀는데다, 후술할 군사행동에 동참하는 모습까지 세트로 엮여 시각에 따라선 민씨부인 올려치기 왜곡이라는 등 시청자 사이에서 호불호가 극렬히 갈린다.[19] 거사의 주체를 '정안군'이 아닌 '부부'라고 칭해 자신 역시 거사의 양대 축임을 말하는 대사. 무인정사에 대한 민씨의 생각을 알 수 있음과 동시에 이것이 훗날 외척 견제의 동기로 이어질 수도 있다.[20] 신의왕후의 딸인 경신공주, 경선공주로 이방원의 누이들이다.[21] 이는 24회 조사의의 난이 벌어지고 친정을 떠나기 전날에 실행한다.[22] 이전 사극들에서도 원경왕후는 자기 집안의 공을 강조했지만 그래도 공신 중 으뜸인 쪽에 가까운데, 이 드라마의 원경왕후는 공동정권의 양대 축으로 인식하여 그만큼 이방원으로서도 더 경계대상이 되었다. 사병혁파에는 동의하던 용의 눈물의 원경왕후와 달리, 여기선 사병혁파가 갈등의 시작이라는 것도 차이점.[23] 용상에 있어보니 어떠냐는 이방원의 말에 나쁘지 않다며 모든 게 발 아래에 있다고 하는데, 이때 구도상 이방원은 용상 아래에 있었기에 이방원으로서는 마치 아내가 자기도 아랫사람처럼 여기는 거라고 의심하게 만들기 좋았다. 그 다음 대화의 흐름이 왕의 어머니로서 권력을 누리려 함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더더욱.[24] 민씨가 부부간의 관계 개선을 위해 자식들을 이용한건 엄연한 사실이긴 하다. 22회뿐만 아니라 21회에서도 어떻게든 이방원과의 대화의 물꼬를 틀려 시도를 해봐도 여의치 않자 아들들을 모두 집으로 데려왔다는 화두를 던져 이방원과 대화할 기회를 만들었는데, 이것도 자식들을 미끼로 이용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별 수 없는게 이방원은 이미 자기랑 얼굴 마주치는 것조차 피하고 있는 상황이며, 그의 시선을 가족으로 돌려 대화라도 나누려면 결국 자식들을 끌고 오는 방도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파탄난 태종 부부를 묶어 놓을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자식들이었다. 그래도 부부가 아이들을 생각한다는 점이 드러나는 연출이 있는데, 부부의 대립이 이렇게 심각해졌는데도, 정작 아이들은 뭔일이 일어난 줄 전혀 모른다. 비록 이용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민씨 나름 자식들이 휘말리지 않도록 신경쓰고 있다는 의미다.[25] 태종실록 1권에 따르면 원경왕후는 1월 10일에 따로 즉위식을 했다고 한다. 이 기록을 기반으로 부부 간의 알력 싸움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26] 이는 기록에 따라 다르다. 태종은 효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경녕군을 낳았는데 기록에 따라 경녕군의 출생시기가 1395년(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의 사이) 혹은 1402년(충녕대군 출생 이후)으로 달라서 사실 여부가 불분명하다. 적어도 본작에서는 1402년 생 설을 채택한 듯 하다. 과거 용의 눈물에서는 1395년 생 설을 채택 한 듯 사가에서 원경왕후와 효빈 김씨의 에피소드가 들어가 있다. 경녕군이 비중 있게 출현하는 대왕 세종에서도 사가에서의 회상씬과, 1397년생인 충녕대군이 경녕군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묘사를 통해 경녕군이 1395년생으로 설정되어 있다.[27] 친정어머니가 직접 보내준 궁녀가 그 사실을 이방원을 기다리는 민씨 앞에서 언급하며 "전하께서는 마마를 정말 사랑하시는 게 분명하옵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28] 친정어머니가 집에 데려왔고, 전하께서 마마를 정말 사랑하신다며 입에 발린 소리를 하던 바로 그 궁녀.[29] 그러나 이전까지 보여준 친자매처럼 다정한 모습은 사라지고 이후로 대전상궁이 벌을 내릴 때도 말리지 않고 오히려 방관했다.[30] 이보다 앞서 친정 어머니가 자신과의 만남에서 방원의 푸대접에 섭섭해할 때만 해도, 원경왕후는 그것이 자신을 굴복시키려는 의도임을 안다며 참아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원경왕후가 평정심을 잃은 모습을 보일 정도였으니, 방원이 가비 궁녀를 처소에 끌어들인 것이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 잘 보여준다.[31] 대전상궁에게 들었다면서, "네년이 전하께 얼마나 교태를 부렸는지 모를 줄 아느냐!"라고 호령한다.[32] 잡곡밥에 나물 한 접시에 간장 한 종지.[33] 흰쌀밥에 나물 세 접시에 간장 한 종지에 맹물 한 사발.[34] 다음 씬에서 푸짐한 반찬이 차려진 이방원의 수라상과 비교된다. 물론 이것도 일반 밥상이라면 푸짐하지만, 수라상 치고는 소박한 편이긴 했다. 다만 이방원도 마음이 편치 않았는지 겨우 밥만 한술 뜨고는 반찬에는 손도 대지 않고 바로 상을 물렸다.[35] 다만 이미 후보를 정했다는 하륜의 항변을 들은 이방원이 가례색은 폐해도 예정자는 가마에 태워 입궁시켜서 후궁으로 삼으라고 명했다.[36] 태종은 조사의의 반란을 끝내 중전에게 알리지 않아 직접 알아 봐야 했는데, 심지어 실권없이 뒷방에서 사는 동서인 정안왕후조차 알고 있는 사실을 궁의 안주인인 민씨만 모르고 있었다. 이게 과연 태종이 민씨를 따돌린 것인지, 아니면 걱정끼치기 싫어서 말 안 한 건지는 알 길이 없다.[37] 거의 울 듯한 얼굴을 하는데, 이방원이 지금 애들의 이름을 지어 준 이유가 살아 돌아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어서임을 눈치챘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들들에게 왕자로서의 격에 어울리는 이름을 지어주는 건 부부가 완전히 갈라지기 전에 한 약속이었기에 더 뭉클했을 듯.[38] 이미 원경왕후 소생의 적자만 세 명이고 이방원도 신덕왕후의 전례 때문에라도 오로지 적자만을 세자로 책봉할 것임을 천명한 상태에서, 한미한 신분의 궁녀에게서 태어난 서자는 왕위계승에 명함도 못 내밀 것이므로 민씨 가문의 술책은 불필요한 무리수였다. 오히려 민씨 가문의 기세를 꺾은 정도로 만족하고 처가를 방문해 화해하려던 이방원이 마음을 돌려, 민씨 가문을 완전히 숙청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결국 자신들의 몰락을 재촉하는 자충수가 되었다.[39] 결국 아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인데, 자신도 찔리니까 껄끄러워 하는 면모를 보인다.[40] 동생들을 귀양보낸 것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을 수도 있고, 양위선언 직후에 바로 태종의 진의를 읽어낸 만큼 동생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동정적인 태도를 보이면 오히려 위험하기에 더 단호하게 나온 것일 수도 있다.[41] 자녀들의 성인 배역이 등장하는 27회부터는 세월이 많이 지난 것처럼 표현했는지 흰머리가 조금씩 보인다.[42] 18화에서 무인정사로 모든걸 잃은 이성계가 이방원과 만난 자리에서 "그것이 부모의 업"이라면서 자식은 부모에게 칼을 겨눌 수 있으나 부모로서 자식에게 그렇게 할 순 없는 것이라 졌다고 말한 부분이 오버랩된다.[43] 덤으로 대간들의 주장이 실은 '아버지의 뜻'이라고 세자에게 귀띔해주지만, 이 말은 원경왕후의 입장에서 치명적인 역효과를 낳는다.[44] 앞서 세자는 자신이 왕이 되는데 부왕 방원의 지지가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서 그동안 방원에게 가졌던 반항심을 일단 거두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방원의 환심을 사려 두 외숙부의 극형을 지지한다고 한 것이다. 물론 실록에서 백관이 처벌을 주장할 때 세자까지 합세하여 두 외숙부의 처벌을 주장하는 기록이 남아있기는 하다 .[45] 이 모습을 지켜보던 아들 효령대군충녕대군은 물론 중궁전의 상궁마저 오열하고, 편전 건너편에 있던 이방원마저 눈물만 흘리지 않을 뿐 이에 못지않은 참담한 표정을 할 정도로 처참하고 절박한 모습이였다. 배우 박진희의 연기력을 다시 봤다는 평가까지 나왔을 정도. 또한 1회 프롤로그에서 이방원이 원경왕후에 대해 언급한(밤마다 울부짖으며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궁궐 바닥을 기어다니면서 피를 토했다) 그대로다.[46] 이성을 잃을 수준으로 분노하는데도, 자신을 배신한 아들 양녕대군의 이야기는 단 한 마디도 안 꺼내는 게 포인트. 아들을 부르기는 하지만 남편에게 하듯 비난을 하지는 않는다. 원경왕후에게 있어 아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적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47] 이때 동생이 둘이나 있는 충녕에게 사가 시절의 호칭인 막둥이라고 부른다.[48] 대표적으로 이때 세자 이제(훗날의 양녕대군)가 여흥 민씨 집에서 성장한다.[49] 이는 비록 친정이 숙청당했다지만 엄연한 내명부의 수장인 중전에게 미천한 노비 출신의 일개 후궁 따위가 협박을 가하는 명백한 하극상이다. 당장 왕실의 권위를 누구보다 중요시하는 태종부터가 이 일을 알게 된다면, 원경왕후가 아니라 윗전에게 대들은 효순궁주를 처벌하고도 남을 일.[50] 즉 경녕군은 왕자가 아니라 종의 아들, 못해도 고려 우왕 꼴이 나게 만들것이며, 효순궁주는 감히 왕의 자식을 낳았다고 사칭해 자신의 아들을 왕자로 만든 대역죄인으로 만들겠다는 말.[51] 이때 받은 국문은 압슬이었다.[52] 이때 자신을 폐서인하여 사약을 내려 달라는 말까지 한다. 그만큼 절박했다는 것.[53] 하지만 태종은 끝까지 원경왕후를 폐서인하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만약 원경왕후를 폐출시키고 새 중전을 세운다면 외척의 숙청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만약 새 중전에게 아들이 태어난다면 후계구도가 완전히 꼬여버리고 이방원 본인이 당했던 일이 대물림되게 된다. 태종이 훗날 사돈인 심온을 숙청시켰지만 며느리 소헌왕후만은 폐서인하지 않은 이유도 이와 같다.[54] 이때 세자는 곽선의 첩 어리를 강제로 데려와 희롱하는 중이었고, 원경왕후가 왔다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어리를 황급히 뒷방으로 숨기는 추태를 보였다.[55] 세자의 간언으로 인해 동생 민무구, 민무질이 사사당했을 때 그녀가 세자를 탓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해보자.[56] 무인정사때 아들 이방원에게 굴복당한 이성계가 "널 낳은 것이 최악의 업보이다."라고 한탄하는 장면이 연상된다. 어찌보면 이성계가 느꼈던 고통을 며느리이자 공범이었던 민씨가 물려받은 것이다. 아울러 앞선 화에서 충녕에게 "네가 태어났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와는 상반되는 부분이기도 하다.[57] 태종 역시 이런 부인의 항의와 팩트폭력에 아무런 반박을 하지도 못했다.[58] 양녕도 충녕에게 "비파나 켜고 시나 지으면서 왕이 되지 못하는 왕자로 살라"고 한 적이 있음을 고려하면, 원경왕후의 거문고 선물은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조용히 살라는 의미이다. 또 공교롭게도 세종은 음악에 소질이 있는지 정간보 창안을 등 음악 분야에 적극적인 기록이 있어 이를 암시하는 게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59] 원경왕후가 충녕에게 모질게 나온 게 이해가 안 될 수 있는데, 사실 이는 당연한 일로 후계자 경쟁은 양녕이 자폭하지 않았으면 충녕의 패배가 확정이었기 때문이다. 충녕이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서열이 중시되는 전근대 사회에서 후계자로 책봉된 후 10년 넘게 자리를 잡은 적장자를 쿠데타 없이 이기는건 일반적으로 불가능하다. 양녕이 왕위에 오르면 어그로를 끈 충녕을 해하려 들 것이기 때문에. 기어이 양녕이 자폭해서 충녕이 살아남은 데다 후계자 자리까지 차지하긴 했지만.[60] 양녕이 보위경쟁에서 패배한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인지, 못난 아들이어도 어머니로써 안쓰러운 마음이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61] 만약 중전이 양녕의 편이었어도, 과거의 권세를 거의 잃은 중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62] 실제로 이 시기 병세가 완연해진 원경왕후가 피접을 여러 차례 나섰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서 아예 궁을 떠나는 쪽으로 묘사했다. 말년에 원경왕후가 여기저기 피접을 다닌다는 묘사를 넣은 용의 눈물이나 대왕 세종과는 대조적. 사료에 따르면 원경왕후의 사망 원인은 학질(말라리아)였다.[63] 다만 양녕의 처가 광산 김씨 역시 조선시대의 상당한 명문가였다. 그러나 이 당시보다는 조선 중후기 무렵에 가문이 크게 현달하여 국반의 반열에 오른다.[64] 삼한국대부인 송씨는 1424년에 8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는데, 자신의 딸보다 4년, 사위보다 2년을 더 살다가 떠난다.[65] 극 초반에는 부부가 다툰 뒤 집을 박차고 나간 남편이 어느 계곡에 앉아있는 것을 원경왕후가 찾아간 것과 대비되는 부분.[66] 고열로 의식을 잃어가는 원경왕후를 발견한 태종에게 건넨 "서방님.." 이라는 한 마디가 연출상 남편에게 건넨 마지막 대사가 되었다.[67] 임종 순간 이방원과 단 둘이서 화해했던 용의 눈물과는 정반대의 최후. 이방원은 탕약을 가지고 가던 도중 내관으로부터 중전이 승하했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들고있던 탕약 그릇을 떨구고 이성도 체면도 잃은 채로 쓰러져 절규한다.[68] 하륜, 이숙번, 박은 외 1명.[69] 비가 오는 날 효빈 김씨를 하루종일 바깥에 세워둬 쓰러지게 만든 일로 분노하여 가례색을 설치하고, 냉대하긴 했지만 금세 다시 화해했고 민씨 가문을 무자비하게 숙청하면서도 원경왕후만은 절대 폐비시키지 않았다.[70] 하지만 원경왕후를 폐비시키게 되면 세자, 효령대군, 충녕대군마저 폐비의 자식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위치가 상당히 애매해진다는 문제도 있었다. 이방원이 자신의 생모가 중전이 아니었다는 이유만으로 온갖 차별과 굴욕을 겪었던 걸 생각하면, 아내로서 사랑하는 마음도 있지만 자식들을 생각해서라도 원경왕후의 폐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71] 정확하게 말하면 이 드라마 한정으로 어머니 삼한국대부인 송씨가 한 짓이다. 원경왕후 본인과 아버지 민제는 효순궁주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고, 남동생들마저 왕의 씨를 가진 여인에게 이래도 되냐고 우려를 표했으나 송씨가 관철했다.[72] 재미있는 점은 며느리인 소헌왕후는 신덕왕후와 또 다른 타입의 원경왕후의 안티테제라는 것. 원경왕후는 작중에서 조용하게 자리를 지키는 고목을 보고 도저히 너처럼 되지 못하겠다며 한탄하는데, 소헌왕후는 원경왕후와 똑같이 태종에 의해 친정 가문이 멸문당한 상태에서 그걸 이룬 여자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설정에 소헌왕후의 기록까지 더하면, 고부가 3대에 걸쳐 안티테제가 되는 셈이다.[73] (고증 여부는 둘째치고) 내레이션에서 대놓고 정적이라고 표현했다.[74] 예를 들면 태종에게는 알리지도 않은 채 조영무를 시켜 현빈 유씨의 간통 사건을 크게 터뜨리기도 했으며, "어머니(신덕왕후)는 지금 이러저러하고 있는데 서방님께서는 지금 뭐 하시는 거냐" 라며 부추기는 장면도 꽤 여러 번 나온다. 의안대군이 세자로 책봉된 뒤에는 태종도 뒤늦게 일이 돌아가는 걸 깨닫고 신덕왕후와 적대하게 되지만, 그 전까지는 "아니, 어머님이 설마 내게 그러실 리가..." 라는 모습도 여러 번 묘사되었다.[75] 정확히 말하자면 신덕왕후가 이방원을 더 적대한다. 이방원이 신덕왕후를 적대하게 되는건 신덕왕후가 본심을 드러낸 이후이다. 이 작품에서는 용의 눈물 그리고 정도전보다 더 악독하게 나온다.[76] 용의 눈물에서의 원경왕후가 작품 후반에는 유약한 캐릭터로 바뀌었다고까지 보기도 하지만, 소헌왕후 집안을 절단내러 가는 태종을 막아서는 등 괄괄한 모습을 몇 번 더 보여주긴 한다. 다만 친정집이 박살이 나면서 왕비로서의 힘을 완전히 잃은 것이 그려질 뿐. 마침 비슷한 시기에 태종이 가례도감을 설치하고 중전의 역할을 대신할 후궁들을 들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양녕의 뺨을 때리는 장면은 없었지만 궁궐까지 들어와 그와 어울려 놀던 구종수, 이오방 패거리들을 혼쭐내는 모습 등은 묘사되었다.[77] 주인공의 반려가 갑옷/남장으로 전장에 동행하는 연출은 KBS 대하사극이 수십년전부터 대대로 해온 연출이다. 용의 눈물에서 최명길이 분한 원경왕후도 1차 왕자의 난 때 남복 차림으로 반대파 제거를 마치고 정도전을 죽이러 가던 방원을 찾아왔었고, 복장은 안 갖추었지만 2차 왕자의 난 때에는 태종이 패한 것으로 오해하고 나가서 싸우다 죽겠다는 식으로 나오기도 했다(다만 이건 실록에도 있는 묘사다). 태조 왕건의 도영(염정아 분)이나 대조영의 초린(박예진 분)도 그랬다. 태조 왕건의 대주도금, 무인시대의 오랑, 소랑, 철랑, 대조영의 금란 같은 여무사 캐릭터도 역사가 아주 깊다. 갑옷만 조선시대에 일반적으로 착용한 찰갑이나 흉갑을 입고 나왔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것이다.[78] 20회에서의 "조선의 절반은 내 것" 발언이나 21회에서의 "차라리 역적이 되겠습니다" 발언 등.[79] 본작에서 정도전과 신덕왕후가 단순히 이성계의 개인적 신임에만 의존해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반면, 여흥 민씨 가문은 원경왕후를 비롯해 다수가 이방원의 조정에서 공식 직위를 갖고 참여하는 입장이다. 때문에 국왕인 이방원을 상대로 권력 투쟁을 벌이기에 충분한 입지를 보유하며, 그만큼 이방원의 입장에서도 앞선 2차례의 왕자의 난에 못지않은 의지를 갖고 숙청을 강행해야 할 명분을 갖는다.[80] 오늘날의 상황에 대입하자면, 현직(혹은 차기) 대통령(혹은 내각제의 수상)과 집권당 내부의 최대 계파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고, 해당 계파와 보스가 대통령(혹은 수상)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토 의사를 나타내거나, 아예 탈당해서 야당 세력으로 돌변하는 것과 비슷하다.[81] 명나라 황제가 결혼을 요청했을 때 자식들을 빨리 혼인을 보낸 것에 태종이 동의하거나, 초기에 태종이 세자 시절 사병 혁파 문제로 대립할 때도 민씨 가문 전체를 원경왕후가 설득시킨 것 등이 그 예. 실제 역사대로 애증의 관계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