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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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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 및 왕실의 구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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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한국3. 서양4. 나무위키에 항목이 개설된 인물
4.1. 실존인물
4.1.1. 한국4.1.2. 서양
4.2. 가상인물

1. 개요

Queen Dowager

제후국에서 선대 국왕의 왕비, 즉 현 국왕의 모후가 받게 되는 지위.[1][2][3] 황태후와 사실상 같은 의미로 명칭만 다르다. 황태후를 줄여 태후라고 했던 것처럼, 대비도 왕대비(王大妃)를 줄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대 국왕과 왕비의 자식이 세자가 되므로 왕의 친모가 곧 대비였으나, 후궁의 자식 혹은 방계 혈통이 즉위할 경우 대비는 왕의 법적인 어머니였다.

왕이 어린나이에 즉위할 때는 수렴청정을 행하기도 하였다. 대비를 가리켜 그가 거처하는 장소인 대비전 자체가 대비를 상징하였고 자전(慈殿), 자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대왕대비가 없는 이상 왕실의 최고어른으로 존중 받았다. 다만 한국사에서 수렴청정으로 인하여 폐해가 빚어지기도 했다.[4]

2. 한국

한국사에선 사실 태후가 대비보다 훨씬 많이 쓰였다. 고려말, 조선조 이전의 대비 사용례는 손에 꼽는 정도다. 고려엔 왕대비 외에 왕태비(王太妃), 국대비(國大妃)도 있었다.

대비에 대한 한국사 최초의 기록은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은팔찌 유물에 '백제국왕대비(百濟國王大妃)'라는 칭호가 적혀 있었던 것. 그러나 이름이나 가문, 생애에 대한 다른 기록이나 단서는 없어 무령왕의 왕후일 것이라는 추측만 있다.

그 다음 기록은 고려 왕조이다. 기록을 살펴보면, 문화왕후현종 때 대비로 올려졌다. 그녀는 고려초기 왕후로 추존할 만한 왕의 모후, 조모, 외조모도 아니었으나[5] 궁에서 성종의 조카 목종과 현종을 양육했고 그녀의 딸 원정왕후가 현종의 1비가 되었으므로 자신의 양어머니나 마찬가지였기에 현종이 대비의 존호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문화왕후 이전에 태조 왕건의 6녀 순안왕대비가 있지만, 그녀는 왜 '왕대비'가 되었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고려 초중기에는 왕의 어머니가 무조건 태후가 되었다. 죽은 경우 태후로 추존했는데 시호에서 왕후보다 높은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태후와 왕후의 중간 대우를 받은 경우가 있다. 문종 때는 생전 왕비가 아니었고 자식도 없었던 원목왕후에게도 왕후의 시호를 올렸다. 대신 능호를 만들지 않고, 절에서 제사를 그만두는 등 차등을 두었다. 이는 신하들이 또 다른 현종의 비 원순숙비[6]의 장례를 치를 때 문화왕후의 예에 의하여 장례를 치르되 그 능호는 없이 했는데, 원순숙비와 원목왕후 둘 다 선왕의 비이니 예우가 달라서는 안 된다고 건의했기 때문이다. 인종의 두번째 왕비로 책봉된 선평왕후의 경우, 의종 때 연수궁주 - 왕태비(延壽宮主 - 王太妃)로 책봉되었다. 이유는 생전 왕비였으나 자식이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중국 왕조의 정석적인 방법이 아닌 왕태후의 대체제로서 쓰였다.

그러니까 고려 초중기에는 애매한 위치의 비 혹은 왕비[7]가 죽으면 예우 차원에서 왕후로 올려주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런 애매한 위치에 있는 이들보다는 나으나 태후가 될 수 없는 경우에는 한단계 아래인 대비, 태비로 올렸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고려 말 원 간섭기부터 정석적인 방법으로 왕대비 제도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충렬왕충선왕 때에는 기존의 천자국식 태후, 왕후 제도를 완전히 폐지하지 못하고 태후와 대비가 섞여서 쓰였다. 이후 대비만 쓰다가 공민왕 때 반원 자주 정책으로 인해 다시 태후가 섞여서 쓰인다.

원 간섭기부터 여말까지 왕대비 또는 대비 칭호를 받은 여성은 다음과 같다.
  • 근비 이씨: 창왕의 어머니. 창왕이 즉위하여 왕대비가 되었다가 쿠데타로 쫓겨났다.
  • 정비 안씨: 공양왕 때 왕실의 어른으로서 정숙선명경신익성유혜왕대비(貞淑宣明敬信翼成柔惠王大妃)로 올려졌다.
  • 국대비 왕씨: 공양왕이 자신의 어머니를 자예정명익성사제혜덕삼한국대비(慈睿貞明翼聖思齊惠德三韓國大妃)로 올렸는데 이 존호를 줄여서 삼한국대비, 국대비라고 한다.

명덕태후는 장남 충혜왕 때 왕대비에 준하는 대접을 받았고 차남 공민왕 때 정식으로 왕대비가 되었는데 신돈 사후에 왕태후로 격상되었고 사후 시호를 태후로 받았다.

공양왕은 이성계권신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왕권이 거의 없었다. 그러니 자신의 부모를 왕비, 국왕으로 추존하지 못하고 삼한국대비, 삼한국 대공[8]으로 한단계씩 낮춰서 추존한 것이다. 국대비는 오대십국 시대에 왕의 모친을 국태부인으로 삼은 것에서 딴 것으로 보인다.

조선 왕조는 성리학적 제후국을 자처해 갑오개혁 이전까지 '왕대비' 또는 '대비'를 사용했다. 대비가 왕대비의 준말인지라 원래 둘은 동의어였다. 그러나 철종 대부터는 대비가 3명이 되는 바람에 대비를 왕대비보다 한 단계 낮은 격으로 썼다. 사실 성종 대에도 이랬지만 3명 모두 고부지간인 철종 대와 달리 인수대비인혜대비가 동서지간이었으로 같은 왕대비지만 서열을 두는 걸로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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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서양

서양에서는 죽은 남편으로부터 재산과 지위를 상속받은 과부를 'Dowager'라고 불렀고, 왕비도 마찬가지로 왕이 죽으면 Queen에 Dowager를 붙어서 'Queen Dowager'라고 불렀다. 직역하자면 '미망인 왕비'라고 할 수 있다.

동양과는 다르게 과부라고 해서 재혼이 불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Queen Dowager도 재혼할 수 있었다.[9] 헨리 8세의 마지막 부인 캐서린 파는 헨리가 죽고 나서 재혼했다. 물론, 재혼할 경우 Queen의 칭호는 소멸된다. 만약 Queen Dowager의 자식이 왕위를 계승하면 보통 Queen Mother라고 불러서 Dowager랑 차이를 두었다.[10] 다만 영국에서는 Queen까지만 법적 정당성이 있기 때문에 Queen Mother는 정식 작위가 아니라 관습적인 경칭이다. 퀸 마더라는 호칭으로 유명했던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이 있긴 하지만, Queen Dowager 작위가 너무 격식에 매여 있는 것 같아 Queen Mother라고 불리길 원했던 거라고 한다.

또한 왕의 어머니라고 무조건 Queen Mother를 사용할 수 없었다. 엄연히 호칭에 왕비가 들어가기 때문에, 왕비로 책봉됐어야 한다. 실제로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는 왕비로 책봉된 적이 없어서 Queen Mother을 사용할 수 없었고, 단순히 Queen's Mother이라고 명명됐다.

4. 나무위키에 항목이 개설된 인물

4.1. 실존인물

4.1.1. 한국

대왕대비가 된 경우는 제외했다. 지위 체계가 바뀐 이후부터는 왕대비가 된 경우도 제외했다.

4.1.2. 서양

4.2. 가상인물


[1] 다만 서양과 동양 둘 다 후계자들의 유무 및 왕위계승법에 따라 그 형제가 합법적으로 왕위에 오르는 경우들도 분명 있기 때문에 '현 국왕의 모후 = 대비'의 공식이 무조건 성립되는건 아니다. 일단 이런 경우는 동서양 막론하고 왕실 위계질서가 확립되어있다면 대비가 되는건 똑같다. 현대에도 벨기에의 보두앵 국왕의 왕비인 파비올라 왕비가 살리카법이 폐지된 상황이었음에도 남편 보두앵 국왕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하나도 낳지 못했기 때문에 시동생인 알베르 2세가 왕이 되었으며 파비올라 왕비는 선왕의 왕비 자격으로 대비가 되었다.[2] 다만 알베르 2세의 아들인 필리프 국왕이 즉위했을때는 알베르 2세의 왕비이자 필리프 국왕의 친모인 파올라 왕비가 왕대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비올라 왕대비는 대왕대비로 승격되지 못했다. 물론 필리프 국왕 즉위 이후 1년여만에 파비올라 왕대비가 세상을 뜨긴했으나 수 개월은 살아있었고, 이미 왕실문화나 예법이 더 보수적인 20세기에도 엘리자베스 2세 즉위 1년만에 세상을 떠난 메리 대왕대비가 생전 승격된것과는 대조적이다.[3] 이 경우는 조선의 인종의 왕비인 인성왕후 박씨와 비슷한 사례로 볼 수 있으나 전근대 유교 왕조인 조선은 대왕대비 승격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반면, 벨기에는 이미 입헌군주국에 정교분리 민주주의 국가에다 현대 21세기에 정상 국가이므로 자녀가 아예 없는 피비올라 왕대비가 대왕대비로 진봉한다고 해도 문제될 것이 없는걸 생각하면 의아한 부분.[4] 대표적으로 조선 명종 시기 성렬대왕대비를 등에 업은 파평 윤씨일가의 국정농단과 순조에서 철종의 재위기간동안 명경대왕대비를 뒷배로 둔 안동 김씨 일가의 세도정치가 있다.[5] 고려 초기엔 외할머니도 왕후로 추존되었는데 고려 초기 근친혼 때문에 왕이 된 이들의 외할머니가 선대의 비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즉, 모계가 공주이거나 왕족이었다.[6] 생전 경흥원주 - 덕비.[7] 왕자가 없거나 뒷배경이 없거나 등등.[8] 대공도 한국사에서 유일하다.[9] 보통의 경우, 후계자가 자신의 소생이면 재혼하지는 않았다. 재혼한 대비들은 후계자가 자신의 소생이 아닌 경우가 대다수이다.[10] 동양도 마찬가지지만 서양에서도 선왕의 왕비가 새 왕의 계모라면 대비라도 왕의 친모는 아닌데, 이것을 별개의 호칭으로 나눈 셈이다. 단 서양에서는 후궁제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후궁 소생의 왕자가 왕이 되어도 선왕의 정비가 대비가 되는 동양과는 달랐지만.[11] 대왕대비이지만 왕대비로서 지낸 기간이 더 많은데다 엘리자베스 2세의 공식 즉위 및 대관식을 모두 치르기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 목록에 넣는다.[12] 아사가후궁이었지만 군후인 소이나는 오래 전에 죽은데다 아사가의 유일한 아들인 유진의 어머니이기에 유진이 즉위하면서 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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