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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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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대2. 사후
2.1. 조선 초2.2. 조선 중기~후기2.3. 현대

1. 당대

폐세자되기 전까지의 행적을 보면 양녕대군은 대개 천박한 무리들과 어울려 시장 바닥을 헤매고 다닌다거나 이런저런 여자와 더러운 스캔들을 만들었다. 큰아버지인 정종이 아끼던 기생과 관계를 갖기도 했지만 일단 이건 모르고 한 일이기에 어떻게든 무마되었다.[1] 태종은 국초 정통성의 확립과 세 명의 아들이 연이어 요절한 이후 낳은 사실상의 적장자인 양녕대군에 대한 애정으로, 여러차례 그의 비행을 봐주었으며 어떻게든 양녕대군의 후계자 지위를 유지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양녕대군은 여러 차례의 만행과 추태로 스스로의 평판을 추락시켰으며 마침내 고관대작의 첩이었던 어리와의 간통을 저지르고도, 반성하기는커녕 태종에게 "아버지도 후궁 잘만 두시면서 왜 저한테만 그러십니까?" 라고 망언을 일삼고 패륜을 자행하며 맞서다가 끝내 폐세자되었다. 입지상에서 전혀 뒤떨어질 것이 없었고 오히려 우월한 조건에서 순전히 그 자신의 처신 문제로 후계에서 도태된 것이니 자업자득.

양녕대군 입장에서 보면 아버지, 어머니, 후일 아버지를 이어 지존이 된 동생 복을 타고났다는 시각도 있다. 자신의 친족 혈육들을 무찌르며 왕위를 차지할 정도로 냉혈한 군주인 부왕 태종은 자기 자식들에게만큼은 다정했고 특히 장자인 양녕대군에게 한없이 물렀으며, 모후인 원경왕후 역시 양녕대군을 폐세자되기 직전까지도 두둔했고, 폐세자가 된 양녕을 대신해 세자 자리를 이어 왕위에 오른 동생 세종은 양녕대군의 비행을 끝까지 눈감아주었다.[2] 조선사 전체를 봐도 인위적으로 폐위된 세자가 조정의 비호 아래에서 여생을 누린 경우는 양녕대군이 유일하다. 양녕대군 외에 조선에서 폐위된 세자는 이방석, 폐세자 이황, 폐세자 이지, 사도세자가 있는데 저들은 정변이나 반정으로 폐위되거나 막장스런 사태로 폐위된 터라 여생을 누리고 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양녕대군은 비록 폐세자이긴 하나 장세손이기에 불온 세력들이 양녕대군에게 붙어 바람을 넣는 등으로 모반을 일으킬 여지가 있었기에 숙청으로 이어지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애초에 멀쩡한 인간이었다면 폐위당하지 않을 테니, 폐세자는 왕의 자격이 없는 걸로 이미 충분히 검증된 주제에 순수히 서열빨로 후대의 왕권을 위협하는 위험인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때문에 반드시 죽이던가 손발을 확실히 잘라놓고 외국으로 내돌리는 식의 숙청 작업이 필수적이다. 폐세자는 본인 세대의 가장 큰형이기 때문에, 전세대 왕이 책임지고 제거하지 않으면 2세대 왕과 그 후대가 폐세자를 해치울 방법이 마땅치 않으며, 본인 세대 때에는 괜찮더라도 재수가 없으면 훗날 차세대, 차차세대 왕이 단종 엔딩을 맞을 수도 있다. 어쨌든 폐세자는 죽거나, 지지기반 그딴거 없는 이역만리로 반쯤 볼모삼아 내쫓기거나 하는 게 전세계적으로 공통된 운명인데 운이 좋게도 양녕은 살아남았다.[3]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는 칼같이 제거했던 킬방원이 제대로 교통정리를 못한 드문 사례.

폐세자가 되어 대군으로 강등된 이후에는 자신의 비행을 덮어 준 세종의 은혜를 친인척간의 골육상쟁을 일으킨 수양대군을 지지하는 것으로 되갚았고,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한 이후에 단종복위사건이 터지게 되면서 동생 효령대군[4]과 함께 명색에 종손자인 그를 죽일 것을 앞장서서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여기에는 조금 다른 시각도 있는데, 단종이 종손자이긴 하지만 수양대군 역시 양녕에게는 둘째 조카이자 동생 세종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양녕대군 입장에서는 조카손자와 둘째 조카 중 둘째 조카의 손을 들어주었을 뿐이라 볼 수도 있다.

양녕대군은 자기 아들의 까지 빼앗았다. 이 일로 인해 아들이 반쯤 미쳐서 유배지에서 자결 시도를 한 후 후유증으로 사망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는데 양녕대군의 적자 중 3남인 서산군 이혜가 그 주인공. 이혜는 아버지 양녕대군보다 더한 망나니였는데 단오절(端午節)에 금지된 석전(石戰)을 하다가 탄핵받고 충청도 진천군으로 추방당하거나, 한 기생을 차지하겠다고 다른 사람과 싸움을 벌여 또 탄핵을 받았고, 시전에서 종친들과 패싸움을 벌이고 남의 첩을 빼앗기도 했으며, 사람을 때려죽이라고 시켰으며 과격한 놀이판을 벌이다가 사람을 다치게 한 일도 있었다. 결국 세종 29년(1447년) 10월 3일, 술주정을 하다가 사람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종부사(宗簿寺)[5]에서 그 죄를 청하자 세종은 “직첩(職牒)[6]을 거두어 고성현에 안치하고 그 도의 감사에게 일러 밭과 집을 주게 하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사냥을 나가지 못하게 하며 또 바깥사람과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세종실록》 세종 32년(1450년)의 기사에서는 이러한 명령을 내린 데에 “혜는 양녕대군 이제의 아들인데, 사랑하는 첩을 아비한테 빼앗기고 울화병이 생겨 술김에 사람을 자꾸 죽여 이러한 명령을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왕자의 아들인 군(君)의 칭호를 몰수당하고 서산윤(尹)으로 강등당한다.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는지 사람을 구타한 일로 이마저도 서산윤에서 황계령(黃溪令)[7]으로 강등되었다. 세종이 승하한 직후 유배지에서 도망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고 양녕대군이 사람을 시켜 찾게 했으나 소득은 없었다. 그 동안에 금강산에 입산해 지내다가 돌아왔으며 문종 2년(1451년)에 유배지에서 자결을 시도하여 그 후유증으로 1451년 4월 10일 사망했다.

“살아서는 왕의 형, 죽어서는 부처의 형(王兄佛兄)”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는데 양녕대군의 생애를 묘사하는 말로 그보다 어울리는 말은 없다고 해도 될 수준. 나머지 남동생들은 예의바르고 의젓하며 인정도 많았는데 양녕대군은 비정하고 방탕하고 철없다는게 대수였다. 온갖가지 비행과 말썽이 백성들의 동정론을 불러오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사실로 볼 수 없는게 세종 사후에도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을만한 민폐와 말썽을 골라 피워댔다.

2. 사후

이렇게 생전에는 망나니였던 양녕대군은 사후 조선 중기부터 도리어 평가가 올라가는데, 심지어 폐세자된 사연이 아우가 성인(聖人)인 것을 알고 세자 자리를 양보했다는 이야기로 둔갑했다.

2.1. 조선 초

조선 전기의 기록에서는 양녕의 세자 양보설을 찾아볼 수 없다.

양녕이 사망한 해에 급제해서 조정에 들어와 세조 시대에 벼슬을 지낸 성현의 《용재총화》에서만 해도,
”양녕이 세자로 있을 때에, 노래와 여자에게만 빠져서 학업에 힘쓰지 않았다.”
라고 하면서 대놓고 까고 있다. 다만 《용재총화》에서는 또,
“양녕이 비록 실덕(失德)하여 세자의 위는 폐함을 당했지만, 만년에는 때를 따라서 스스로를 숨겼다.”
라고 세조와 농담을 주고받은 것도 기록하면서, 미약하게나마 실드를 쳐주고 있다. 또 선조시대에 써진 《동각잡기》에도 양녕대군을 상당히 까고 있어서, 이 시기까지만 해도 양녕대군에게 긍정적인 여론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조 자신도 《선조실록》의 기록에서…
옛날에 양녕대군(讓寧大君)이 매우 광패(狂悖)하였으므로 외방에 두었으나 제어하지 못하였다.
선조 34년 신축(1601) 2월 10일(기묘) 기사 중
라고 언급하여 양녕대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8]

2.2. 조선 중기~후기

그런데 같은 《선조실록》에서 2년 뒤 양녕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나타났다.
옛날 태종조(太宗朝)에 양녕 대군 이제(讓寧大君 李禔)는 세종(世宗)이 응부(應符)한 것을 알고는 즉시 미친 체 하였다. 그리하여 강관(講官)이 진달하는 글은 모두 읽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언문(諺文)으로 번역한 연후에야 진달하도록 허락하였다. 어느 날 야반(夜半)에 효령대군 이보(孝寧大君 李𥙷)의 집에 뛰어 들어가자, 효령 일가가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양녕은 곧장 침실로 들어가 효령의 귀에 대고 몇 마디 말을 하고는 돌아왔다. 동틀 녘에 효령 역시 가사(袈裟)를 걸치고 불문(佛門)에 몸을 의탁하고 말았다. 양녕은 또 복중(服中)에 궁성(宮城)을 넘어서 양주(楊州)의 기사(妓舍)로 가거나, 혹 사냥꾼들과 함께 응견(鷹犬)을 싣고 산골짜기로 출입하거나 하였으므로, 태종이 대노한 나머지 주청(奏請)하여 폐위(廢位)시키고, 세종을 세자로 세웠다. 대개 효령은 차서가 세종 위에 있었으므로, 양녕 자신이 폐위당하여도 효령에게 죄가 없으면 세종이 설 수 없을까 염려한 나머지 귀엣말을 한 것으로, 실은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세종이 즉위하여서는 우애가 지극히 돈독하였다.
선조 36년 계묘(1603, 만력 31) 3월 9일(을축) 사관의 논(論) 중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게 1443년 12월인데 양녕대군이 세자 시절(1400~1418)에 언문(諺文)읽고 있었다고 쓰고 있다.[9] 게다가 효령대군이 아예 출가를 했다는 황당한 이야기까지 쓰고 있다.

이런 주장이 완전히 표면으로 드러나는 것은 인조 시대의 문신 김시양이 쓴 《자해필담》이다.
양녕대군은 세자가 되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체하고 사양하니, 태종이 결국 폐하고 세종을 세웠다. 양녕이 능히 때에 따라 자기의 재주를 감추어 드러내지 않고 이럭저럭 지냈기 때문에, 내외(內外)ㆍ상하(上下)에 모두 환심을 얻었고, 세종도 양녕을 높이고 사랑하여, 매양 대궐로 맞아들여 술을 대접하고 거의 매일 서로 즐겼다. 여러 번 잔치하는 기구를 주셨고, 양녕이 사냥을 좋아하므로 세종이 여러 번 성 밖으로 나가 청하니, 지극한 정의가 무간(無間)하였다. 세조(世祖)가 임금이 된 뒤에 왕자와 대신이 많이 죽음을 당하였지만, 양녕은 능히 지혜로써 스스로를 보전하였고, 세조도 혐의 없이 높이 대우하니, 사람들은 그가 임금 자리를 사양하여 어진 이에게 밀어 준 것을 어려운 일이라 하지 않고, 끝까지 몸을 잘 보전한 것을 더욱 어렵다 하였다.
이렇게 세자 양보설을 주장하였고, 또한 양녕대군의 문재(文才)를 칭찬했다.
양녕은 젊어서부터 문장을 잘 하였으나, 세종에게 성덕(聖德)이 있음을 보고 짐짓 글을 모르는 체하고 미친 체하여 방자히 놀았기 때문에, 태종도 글하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중간에 양녕의 시를 기술) 비록 문인(文人)이라고 하는 사람도, 필시 이보다 훨씬 낫지는 못할 것이다.
또한 조선 후기에 나온 연대 미상의 이야기책인 《축수편》에서는
양녕이 비록 실덕(失德)을 하여 폐함을 당하였지만, 미친 체하고 방랑하는 것이 실로 태백(泰伯)과 같다고 하였다. 지금 남대문 현판인 숭례문(崇禮門) 석 자는 그가 쓴 글씨로서, 웅장하고 뛰어남은 그의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라고 하여, 그를 옛날 주나라(周)의 태백(泰伯)[10]에 비유하였다.

그리고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도 양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양녕은 어려서부터 글을 잘하였으나 글을 알지 못하는 척했다. 스스로 미친 척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여, 아무도 양녕의 진심을 아는 이가 없었다.
이로써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양녕대군이 왕위를 양보했다는 출처 불명의 낭설이 돌기 시작했으며 서서히 이것이 국가의 공식적인 "역사적 사실"로 인정되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조선 왕실 입장에서는 이런 "와전된 사실"이 나도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일국의 세자였던 인물인데 '개망나니 짓을 하다 폐위당했다'보다는 '동생이 어진 것을 알고 일부러 왕위를 양보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왕실의 체통을 위해서라도 더 낫지 않은가. 양녕대군의 비행이 문제가 되던 조선 전기에도 왕실의 체통을 고려해서 양녕대군의 이미지를 최대한 좋게 하려던 흔적이 보이는데 바로 양녕대군의 봉호이다. 양녕(讓寧)의 ‘양()’이 바로 양보한다, 사양한다는 뜻이다.[11] 이런 야사가 공식화되는건 왕실 체통을 살리는 것과 동시에 세종의 위엄을 강조하는 효과도 있으니 세종의 후손인 조선 후기의 왕들에게도 나쁠게 없다. 조선 전기에야 정통성을 위해서라도 양녕대군의 비행을 비판할 필요라도 있었지만 선조 재위기 정도 되면 100년 전에 죽은 양녕대군을 포장해준다고 정통성에 흠이 나지도 않을테고, 사대부나 일반 백성들만 해도 흑역사급 조상들에 대해서는 삭제나 왜곡을 해서라도 숨기려 애쓰는 경우가 허다한데 하물며 왕족, 그것도 왕의 친아들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액면 그대로 기록해 눈살을 찌푸리게 할 필요가 있을까?

이러한 추세에 따라 양녕대군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기록들이 많아졌다. 그저 난봉꾼이던 양녕대군의 이미지는 세자 양보설 덕분에 '권력을 버리고 쾌락을 택한 호남아'로 향상됐다. 결국 숙종 원년인 1675년 양녕대군의 외손 계열인 허목의 주청으로 세자 양보설은 완전히 국가의 공인을 받아 양녕대군은 '태백과 같이 덕이 있는 아우에게 왕위를 양보한 현인'이라는 명분으로 사당[12]에 모셔졌는데 효령대군도 같이 모셔졌다. 이후 1789년엔 정조의 친필 편액까지 내려왔다.

2.3. 현대

조선 왕실의 미화 및 장남으로서 물려받았어야 할 왕자리가 동생에게 간 것에 대한 동정심 등으로 인해 양보설은 조선이 멸망한 후에도 정설로 여겨졌다.

대한민국 수립 후 대중들의 인식에서도 1950년대에 나온 조흔파의 <주유천하> 와 1960년대에 나온 월탄 박종화의 역사소설 《세종대왕》, 《양녕대군》에서 이 양보설이 차용되면서 완전히 평판이 굳어졌다.[13] 월탄은 양녕대군에 대해서 왕조 시대와는 또다른 해석을 더했다. 기존의 '양보설'과 양녕대군의 방탕한 모습을 조합한 정신적 해석으로서 바로 양녕대군은 태조와 태종 시기의 살육에 혐오감을 느꼈고 권력을 버리고 인간적인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했다는 '예술가적 해석'이다. 이 때문에 양녕대군의 패륜과 폭력은 단순한 위악적인 모습을 넘어서 호탕하고 인간적이며 통쾌한 "현대적인" 수식어까지 얻게 된다. 《세종대왕》 머리말에서는 아예 대놓고 '부정적 인간형' 양녕대군과 '긍정적 인간형' 세종대왕을 대비하여 탐구해보겠다고 밝히고 있다.단종 피눈물 어린이용 위인전들도 이런 시각을 그대로 따랐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보고 자랐을 사극 드라마들을 제작한 방송 업계에서 특히 이러한 관점이 널리 받아들여졌는데 1990년대의 드라마 《용의 눈물》 역시 이런 관점에서 써진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이 드라마는 월탄의 《세종대왕》을 원작으로 삼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비록 <조선왕조실록>이 완역되었을 시점에 제작되었기에 <조선왕조실록>을 어느 정도 참고해서 썼다고는 하지만 야사들도 많이 반영한 결과이다. 현대인들의 뇌리에 박혀있는 '머리좋고 재능있지만 놀기 좋아하고 인간적인 이미지'의 양녕대군은 이 드라마에서 이민우의 본좌연기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그나마 21세기에 <조선왕조실록>이 인터넷에서 널리 알려지자 양녕의 속살이 까발라져 부정적인 면모를 다루는 작품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녕의 긍정적 이미지와 양보설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가령 2008년에 나온 드라마 《대왕세종》에서는 더 미화되어 북벌을 하려는 열혈 왕세자로 나왔다. 또 2014년 2월 9일 KBS 교양프로그램 《역사저널 그날》에서 양녕대군에 관해 다루었는데 참석한 이해영 영화 감독은 자꾸만 양녕대군을 세속의 부와 권력을 초월한 호탕하고 통쾌한 인물로 해석하여 같이 있던 역사학자의 안색을 어둡게 만들었다. 역사학자가 “그 양반 단종 죽이는데도 한 몫했을 정도로 권력에 기웃거린 양반입니다만?”이라고 지적해줘도 “그냥 살고 싶어서 세자 자리를 그만둔 조선사에 통쾌함을 남긴 남자”라고 결론을 짓는 등 요지부동이었다. 심지어 옆에 있던 인문사회학자 남경태는 “태종은 양녕대군을 보면서 참 나를 닮았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시인 류근도 여기에 동조하였다.

이렇듯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 사이에선 양녕의 왜곡된 이미지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나마 실록의 완역과 역사 고증을 통해 진면목이 밝혀진 현대에는 역사 덕후들 사이에서 그냥 왕이 되면 안 되었던 양아치이자 부모와 형제의 은덕을 배반한 배은망덕한 인간 쓰레기로 재평가되어 크게 비판받고 있다

그리고 이런 재평가에 맞춰 2021년 12월에 KBS에서 방영된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고증대로 개망나니짓을 일삼다 동생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긴다. 그나마 이 작품에서도 아버지 태종과 충녕에 대한 컴플렉스를 겪는 장면이 가끔 나오지만, 왕위에 오르기 위해 외숙부들을 모두 팔아먹으면서도 끝내 어리를 다시 궁에 입궐시키고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다 폐세자 당한다. 같은 대하드라마인 용의 눈물에서 그려진 모습과 180도로 다른 모습에서 지난 15년 동안 양녕대군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14]

[1] 양녕대군의 폐세자에 대해 황희가 반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2] 만약에 양녕 이 자의 아버지가 태종이 아닌 영조고려광종이었다고 생각해보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3] 세종이 정 형을 제거하고 싶었다면 2차 왕자의 난 때처럼 잔뜩 떡밥을 투척하고 도발해서 저쪽에서 먼저 들어오게 만든 다음에 죽여버리는 방법도 있고, 세종쯤 되는 튼튼한 왕권이 있다면 트집 잡아서 죽이자면 못 죽일 것도 없지만 만약 친형인 양녕대군을 죽였다면 지금의 성군같은 이미지와 함께 킬방원의 유전자를 확실하게 물려받았다는 약간 더 무서운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사실 세종은 흔히 알려진 성군 이미지와는 별개로 대군 시절부터 왕위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인물이었는데 이 점만 봐도 아버지의 권력욕과 능력 모두를 확실하게 물려받은 셈이다.[4] 단, 효령대군은 계유정난을 대놓고 지지한 형 양녕대군과는 다르게 계유정난에 크게 개입하지 않았다.[5] 왕실의 계보를 찬록(撰錄)하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던 관아.[6]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7] 령(令)은 종5품 종친의 작위이다.[8] 아무 맥락없이 양녕대군을 깐건 아니고, 주로 선조 자신의 아들인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이 막장짓을 하고 다녀서 강하게 처벌하라는 대간의 탄핵에 대해서 양녕의 전례를 들며 회피하는 논리로 사용했다. "양녕도 그렇게 온갖 막장짓 하고 다녔지만 강한 처벌은 하지 않았고 외방에 내쳐서 자유롭게 사는 정도로 적당히 봐줬듯이 내 아들들도 적당히 봐달라"는 뜻. 하지만 천수를 누리며 행복하게 놀다가 죽은 양녕대군과는 달리, 선조가 열심히 보호해줬음에도 선조 아들들의 말년은 다들 썩 좋지는 못했다.[9] 다만 여기서 언문이란 한자어는 꼭 한글을 가리키는게 아니라 읽기 쉽게 구어체로 쓴 문장을 지칭할 수도 있다. 한글/역사 항목의 '언문' 단락 참조.[10] 주(周) 나라 태왕(太王)의 장자(長子). 태왕이 그의 아우 계력(季歷)의 아들인 문왕(文王)에게 성덕(聖德)이 있음을 알고는 왕위를 계력에게 전하려 하자, 왕위를 아우 계력에게 양보하고서, 형월(荊越)지방으로 피하여 은둔하였음.[11] 동양서양을 막론하고 왕실에게 있어 체통이란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 실권없이 상징으로 남아있는 왕실일지라도 왕실 인물이 불륜, 욕설, 폭행 등 비도덕적인 일을 저지르면 언론에 대서특필되지 않던가.[12] 단적으로 양녕대군이 모셔진 사당의 이름은 지덕사(至德祠)인데 지덕(至德)이란 표현 자체가 공자가 태백을 일컫는 말이다.[13] 단, 이를 마냥 비판 할 수는 앖는 것아 당시 환경에서 <조선왕조실록>은 전문가들이나 한학자들이나 보는 수준이었고 <연려실기술> 정도가 일반인들이 훨씬 접하기 쉬운 책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14] 여기서의 망나니 짓들도 사료의 언급과 비교하면 순화된 거라 이를 안 사람들은 '이게 순화된 거면 실제로는 얼마나 더 막장이었냐?', '세자 시절 연산군과 아버지의 핍박에 못 이겨 광인이 된 사도세자가 차라리 나아보일 정도다'라고 할 정도다. 양녕대군의 폐세자에 결정적인 사건이 된 에피소드를 보면 이전의 잘못들에 대한 반성은 고사하고 다시 대판 술자리를 벌이던 양녕을 목격한 원경왕후가 '네가 사람이기를 포기했으니 널 이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였는데, 사료에서는 태종이 직접 양녕대군에게 '네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냐?'고 질타했다고 나온다. 그리고 충녕대군과 함께 그래도 나름 마지막 믿음을 가지고 양녕대군을 보러 온 태종도 이 장면을 보자 할 말을 잃었는지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노기에 가득한 표정만 보이며 그냥 돌아가버렸고, 뒤늦게 자기에게 매달리는 양녕대군에게 원경왕후 역시 더 이상 말도 하지 않고 손절해버린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아 그런 한심한 양녕대군을 쏘아보는 충녕대군에게 적반하장으로 맞쏘아보는 양녕대군의 모습이 참 가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