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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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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창제 원리
2.1. 조음기관 모방
2.1.1. 자음2.1.2. 모음
2.2. 파스파 문자 기원설
2.2.1. 가설의 근거 및 지지 관점2.2.2. 파스파 모방설의 한계
2.3. 그 외 학설
2.3.1. 모음의 하도 기원설
3. 한자와의 관계4. 만든 이는 누구인가?
4.1. 신미 창제설?
5. 사용자는 누구인가?6. 글자 수의 변화7. 자모 순서의 변화8. 한글의 호칭 변화9. 자형의 변화10. 한글을 이용한 한국어, 외래어, 외국어 표기의 역사11.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까닭12. 왕실에서 본 훈민정음13. 연산군의 훈민정음 탄압14. 숙종

1. 개요

한글의 역사를 서술하는 문서.

한글그레고리력 1444년 1월 중순~2월 중순(세종 25년 12월)에 창제되었다. 국사편찬위가 번역한 기사에는 30일로 되어 있어서 오해할 수 있는데 분명히 원문은 '이달에(是月)'이라고만 표현할 뿐 정확한 날짜를 기재하지 않았다.

근대에 들어서는 주시경의 주도로 표준화를 위한 근대적인 연구가 시작되었으며 그 후신인 조선어 학회가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면서 지금의 형태로 완성되었다.

2. 창제 원리

한글의 창제 원리에 대한 이론은 조음기관 모방설과 파스파 문자 모방설 등이 있으나, 국내 학계에서는 조음기관 모방설이 정설로 통한다.

2.1. 조음기관 모방

글자에 대해 설명한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는 기본 자모가 조음기관에서 따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2.1.1. 자음

正音二十八字,各象其形而制之。정음 28자는 각각 그 형상을 본떠 만들어졌다.
初聲凡十七字。초성은 모두 17자이다.
牙音ㄱ象舌根閉喉之形。아음(어금닛소리)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본떴고,
舌音ㄴ象舌附上腭之形。설음(혓소리) ㄴ은 혀가 윗잇몸에 붙는 모양을 본떴고,
脣音ㅁ象口形。순음(입술소리) ㅁ은 입의 모양을 본떴고,
齒音ㅅ象齒形。치음(잇소리) ㅅ은 이의 모양을 본떴으며,
喉音ㅇ象喉形。후음(목구멍소리) ㅇ은 목구멍의 모양을 본떴다.
ㅋ比ㄱ,聲出稍厲,故加劃。ㅋ은 ㄱ보다 소리 남이 약간 더 거세므로 획을 가하였다.
ㄴ而ㄷ,ㄷ而ㅌ,ㅁ而ㅂ,ㅂ而ㅍ,ㅅ而ㅈ,ㅈ而ㅊ,ㅇ而ㆆ,ㆆ而ㅎ,其因聲加劃之義皆同,ㄴ→ㄷ→ㅌ, ㅁ→ㅂ→ㅍ, ㅅ→ㅈ→ㅊ, ㅇ→ㆆ→ㅎ도 소리에 따라 획을 더한 뜻은 모두 같다.
而唯ㆁ爲異。半舌音ㄹ,半齒音ㅿ,亦象舌齒之形而異其體,無加劃之義焉。그러나 오직 ㆁ은 달리 했다. 반설음 ㄹ, 반치음 ㅿ도 혀와 이의 모양을 본떴으나[1] 형태는 다르게 해, 획을 더한 뜻은 없다.

해례본에 명시된 원리로, 한글 자음은 조음기관을 본떠서 기본자를 만든 다음, 기본자에 획을 더하거나(가획, 加劃), 기존의 글자를 나란히 붙여 쓰거나(병서, 倂書), 기본자를 다소 이질된 형태로 바꾸는(이체, 異體) 등의 방식으로 만들었다. 괄호 안에 있는 글자는 현대 한국어에서 쓰지 않는 글자들이다.
분류 유래 기본자 가획 각자 병서 이체
아음(牙音)
연구개음
혀뿌리가 연구개를 막는 모양 (ㆁ)
설음(舌音)
설단非치찰음
혀끝을 윗잇몸에 대는 모양 ㄷ ㅌ
순음(脣音)
양순음
입술 ㅂ ㅍ
치음(齒音)
설단치찰음
이빨 ㅈ ㅊ ㅆ ㅉ (ㅿ)
후음(喉音)
성문음
목구멍 (ㆆ) ㅎ (ㆅ) (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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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음(연구개음), 설음·치음(치경음), 순음(양순음)을 발음할 때 조음기관 사이에서 폐쇄가 일어나는 부분을 각각 강조한 것. 조음의 요점이 잘 잡혀 있어 한글이 굉장히 단순하고 직관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아음과 설음은 혀를 옆에서 본 모양을 본뜬 것인데, 당시에 MRI 따위의 기계가 없었음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수준. ㅅ이 이의 앞모습을 본뜬 것인지 옆모습을 본뜬 것인지에는 논란이 있다. ㅅ을 이의 앞모습을 본뜬 것이라고 생각하면 한글의 ㅁ·ㅅ과 한자의 口(입 구)·齒(이 치) 안쪽의 ㅅ 모양은 상형 원리가 완전히 같다.

또한 합자해에서는 위 훈민정음 23자모 외에도 연서로서 ㆄ · ㅸ · ㅹ · ㅱ을 설명하고 있다. 순경음은 실제로 용례를 보이고 있으나 반설경음은 l과 ɾ을 구분하기 위함이란 설명만 나와있다.

2.1.2. 모음

실증주의에 입각한 자음과는 대조되게 모음 부분의 창제 원리는 관념성이고 철학성이다.
中聲凡十一字중성은 모두 11자다.
ㆍ舌縮而聲深,天開於子也。形之圓,象乎天也ㆍ는 혀가 오그라져 소리가 깊으니[2] 하늘이 子時(자시)에 열린 것과 같이 맨 먼저 만들어졌다. 둥근 모양은 하늘을 본떴다.[3]
ㅡ舌小縮而聲不深不淺,地闢於丑也。形之平,象乎地也ㅡ는 혀가 조금 오그라져 소리가 깊지도 얕지도 않으니[4] 땅이 丑時에 열린 것처럼 두 번째로 만들어졌다. 평평한 모양은 땅을 본떴다.
ㅣ舌不縮而聲淺,人生於寅也。形之立,象乎人也ㅣ는 혀가 오그라지지 않아 소리가 얕으니[5] 사람이 寅時에 생긴 것처럼 세 번째로 생겼다. 일어선 모양을 한 것은 사람을 본떴다.
此下八聲,一闔一闢이 밑의 여덟 소리는 하나는 합(闔)[6]이고 하나는 벽(闢)[7]이다.
ㅗ與ㆍ同而口蹙,其形則ㆍ與ㅡ合而成,取天地初交之義也ㅗ는 ㆍ와 같으나 입이 오므라지며, 그 모양은 ㆍ와 ㅡ가 어울려 이룸이며, 하늘과 땅이 처음 어우르는 뜻을 취하였다.
ㅏ與ㆍ同而口張,其形則ㅣ與ㆍ合而成,取天地之用發於事物待人而成也ㅏ는 ㆍ와 같으나 입이 펴지며, 그 모양은 ㅣ와 ㆍ가 어울려 이룸이며, 우주의 작용은 사물에서 나지만 사람을 기다려 이루어지는 뜻을 취하였다.
ㅜ與ㅡ同而口蹙,其形則ㅡ與ㆍ合而成,亦取天地初交之義也ㅜ는 ㅡ와 같으나 입이 오므라지며, 그 꼴은 ㅡ와 ㆍ가 어울려 이룸이며, 역시 하늘과 땅이 처음 어우르는 뜻을 취함이라.
ㅓ與ㅡ同而口張,其形則ㆍ與ㅣ合而成,亦取天地之用發於事物待人而成也ㅓ는 ㅡ와 같으나 입이 펴지며, 그 꼴은 ㆍ와 ㅣ가 어울려 이룸이며, 역시 우주의 작용은 사물에서 나지만 사람을 기다려 이루어지는 뜻을 취하였다.
ㅛ與ㅗ同而起於ㅣㅛ는 ㅗ와 같으나 ㅣ에서 시작되고[8],
ㅑ與ㅏ同而起於ㅣㅑ는 ㅏ와 같으나 ㅣ에서 시작되고,
ㅠ與ㅜ同而起於ㅣㅠ는 ㅜ와 같으나 ㅣ에서 시작되고,
ㅕ與ㅓ同而起於ㅣㅕ는 ㅓ와 같으나 ㅣ에서 시작된다.

천(天), 지(地), 인(人). 삼재(三才)가 기본자이며 그 기본자는 각각의 형상을 본떠서 만들었으므로 이 역시 상형자이다. 동양철학에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며(평평하며) 사람은 서 있다는 관념. 삼재에 대응되는 기본자를 바탕으로 초출자와 재출자를 만들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물론 이 대목은 그 만든 이유를 철학으로 풀이하고 있지만 국어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동양철학은 어렴풋한 그 무엇일 뿐.

실은 이런 떡밥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해례본의 설명부터, 특히 모음 부분의 설명이 난해하다.

현재까지는 해례본의 문장 하나하나가 어떤 맥락에서 뚜렷하게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었는지 명쾌하게 해석되고 있지 못하다. 자형의 언어학 분석과 이 구체적 분석의 바탕이 되는 당시의 언어학 이론에 대한 이해, 여기에 다시 이 언어학 이론의 바탕이 되는 동양철학적 맥락 부여가 동시에 요구되기 때문이다.

기존 연구들이 이들을 전부 통합해서 세밀한 부분까지 깔끔하고 꼼꼼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어학자들은 철학적 부분에서 막히니까 그 쪽은 논외로 하고 과거 동양철학 쪽에서 훈민정음의 내용을 이해하려던 학자들은 언어학적 분석을 논외로 하니 말이다. 이와 관련된 학설 중 하나로 하단 기타 학설에 모음의 하도 기원설이 소개되어 있다.

이렇듯 해례본의 모음자 해설이 현대의 음성학적 서술과는 상이한 부분이 있으므로, 당시 모음자의 음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외국어 전사 자료를 동원하곤 한다. '사성 통해', '번역박통사', '사성통고', '해동제국기', '조선관역어' 등 당대 중국어, 일본어, 유구어 학습서, 혹은 조선어 음차 표기가 실려 있는 중국 서적들에 나오는 표기를 참고하면 당시 한글의 모음자 발음을 유추해 낼 수 있다.

그렇다고 해례본의 모음자 설명에 이런 뜬구름 잡는 것 같은 철학적 면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위 해설에도 나와 있듯이 '설축(舌縮)', '설소축(舌小縮)', '설불축(舌不縮)', '구축(口蹙)', '구장(口張)'과 같은 용어가 등장하는데, 각각 '혀가 오그라짐', '혀가 조금 오그라짐', '혀가 오그라지지 않음', '입(술)이 오므라짐', '입(술)이 펴짐'의 의미다.

그런데 설축, 설소축, 설불축의 '축(縮)'은 현대 음성학에서의 "혀의 전후 위치(전설 모음~중설 모음~후설 모음)", "혀의 상하 높이(고모음~중모음~저모음)" 그 어느 것과도 일치하지 않는 독특한 기준이다. 그리고 '구축', '구장'은 그나마 "원순 모음"과 "비 원순 모음"을 가리키는 말인 것 같기는 하다. 위 해례본의 설명에도 나와 있듯이, ㅗ, ㅏ, ㅜ, ㅓ, ㅛ, ㅑ, ㅠ, ㅕ 여덟 자 중 '합(원순 모음)'은 '구축'인 ㅗ, ㅜ, ㅛ, ㅠ에 해당하며, '벽(비 원순 모음)'은 '구장'인 ㅏ, ㅓ, ㅑ, ㅕ에 해당한다. 그러나 'ㆍ, ㅡ, ㅣ'는 구축에도 구장에도 포함되지 않으므로 모든 모음을 원순과 비 원순으로 나눌 수 있는 현대 음성학의 기준과는 역시 차이가 있다 하겠다.

대강 '설축'은 혀가 깊이 오그라드는 후설 중모음(ㅗ), 중설·후설 저모음(ㅏ·ㆍ),[9] '설소축'은 혀가 덜 오그라드는 중설·후설 고모음(ㅡ·ㅜ), 중설 중모음(ㅓ),[10] '설불축'은 전설 고모음(ㅣ)을 의미하는 듯하다. 이 한 모음은 모음조화에서 중성 모음으로 분류된다. '구축'은 원순 모음, '구장'은 비 원순 모음인 듯하다. 그러나 논저마다 당대 모음들을 모음 사각도로 배치한 결과가 판이한바, 아직 딱 떨어지는 정설이 없다…. 당대 음가에 대한 음성 자료가 없고 문헌만 존재하는 형편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

일단 훈민정음의 모음 설명에 근거하여 현대 음성학에 부합하는 모음 사각도를 그려 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고 생각된다. [ ]국제음성기호는 추정치. 물론 추정치이니만큼 완전한 정설은 아니다(이 사각도와 달리 ㅡ가 [ə]였고 ㅓ가 [e]였다는 견해도 있다).

파일:attachment/한글/vowel.png

혀가 제일 안쪽으로 오그라진 설축, 덜 오그라진 설소축, 완전히 펴진 설불축의 모습이 어느 정도 그려지기는 한다. 이 각각의 세 부류에 모음 기본자인 ㆍ, ㅡ, ㅣ가 천, 지, 인의 순서대로 배치되는 것. 즉 혀를 안쪽으로 오그렸다가 차차 펴면서 내는 음가를 기본자로 삼은 것이다. 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하늘이 자시에 먼저 열리고, 땅이 축시에 열렸으며, 사람은 인시에 생겼다는 성리학적 자연관이 반영된 듯하다. 사각도에 굳이 넣을 필요가 없다.

그 후 ㆍ에서 입을 오므리면(구축) ㅗ, 입을 펴면(구장) ㅏ가 되며, ㅡ에서 입을 오므리면(구축) ㅜ, 입을 펴면(구장) ㅓ가 된다. 여기까지가 점 하나씩을 더한 초출(初出). 그 다음으로 점 둘씩 더한 재출(再出)자인 ㅛ, ㅑ, ㅠ, ㅕ가 있는데, 이는 구축과 구장을 거친 초출자 ㅗ, ㅏ, ㅜ, ㅓ 앞에 반모음 y[j]가 더해진 이중모음이므로(해례본 설명에도 'ㅣ에서 시작되고'라고 나온다.

ㆍ는 본래 당시 국어 모음 체계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음양 이론을 무리하게 대입했기에 만들어진 인위적 모음(!)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오늘날에 ㆍ모음이 소멸된 것(사실 소멸된 것이 아니라 제주어 등에 어느 정도 바뀐 형태로 남아 있다.)은 이런 태생적 한계 때문이었다는 것. 이에 따르면 훈민정음 창제 당시 중세 국어의 단모음은 'ㅏ, ㅓ, ㅗ, ㅜ, ㅡ, ㅣ[a, e, o, u, ə, i]' 여섯 개였다. 여기서는 ㅡ가 [ə\]였고 ㅓ가 [e\]였다고 본다.

ㅡ[ə\]는 고대 국어에는 존재하지 않던 모음이었는데, 중세 국어 시기에 들어 음절 말 자음인 받침을 명확히 발음해 주기 위해서 추가된 음소로 본다. 예를 들어 '먹-'이라는 어간 뒤에 '-며'라는 어미가 오면 발음이 동화되어 [멍며\]가 되므로, 이를 막기 위해 'ㄱ'를 확실하게 발음해 주기 위한 새로운 중성적 모음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ㅡ'이었다는 것. 이를 추가하면 '먹으며[머그며\]'가 되어 'ㄱ'가 유지된다.

이 여섯 개 중 'ㅏ, ㅓ, ㅗ, ㅜ[a, e, o, u]'를 일종의 음양 대립으로 보아 ㅣ를 중심 모양으로 양 옆으로 점을 찍어 양성 모음 ㅏ[a]와 음성 모음 ㅓ[e]를 상정하고, ㅡ를 중심 모양으로 위아래로 점을 찍어 양성 모음 ㅗ[o]와 음성 모음 ㅜ[u]를 상정하였다. 그 다음 남은 'ㅡ, ㅣ[ə, i]' 중 ㅣ[i]를 중성 모음으로 설정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ㅡ[ə]를 음성 모음으로 설정하고 나니 이에 대응하는 양성 모음이 없는 것. 그래서 인위로 ㆍ[ʌ]를 가정하고 이를 양성 모음이라고 해석했다는 견해인데, 이게 옳다고 본다면 아무래도 새로 글자를 만드는 시점이었으니 그나마 이런 일이 가능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상 가능하다시피 표기가 한 번 고정되고 나면 새로운 음소나 기호를 덧붙이는 일이 굉장히 어렵다. 물론 이 역시 확고한 정설은 아니다…

솔직히 중간 중간 나오는 오행이나 삼재 같은 개념만 무시하면 그냥 간단하게 음운론이거나 글자 사용하는 매뉴얼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긴 한데 사용법이 아닌 내부 구조까지 이해하려면 결국 언어학적 분석과 함께 그런 동양철학의 개념이 동원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지. 기본자까지는 어찌어찌 설명한다 해도, ㅗ, ㅏ, ㅜ, ㅓ의 초출자에 담긴 의미가 매우 어렵다.

그 중 특히 모음에서 철학적 설명이 많은데, 이는 아마 자음에 비해 분석이 용이하지 않아 그런 듯하다. 실제로 모음에 관한 자세한 분석이 이루어진 건 X선을 이용해 구강 구조를 관찰할 수 있게 된 이유였다. 그에 반해 X선 같은 게 없던 15세기에는 알다시피 신하들 입 벌리게 해서 연구했다. 언어학으로 설명이 힘들 수밖에.

위에서 인용된 부분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제자 원리에 관한 핵심 내용이지만 여기에 여러 가지 부가 설명들과 적용 용례들이 추가되어 있다. 일단 그런 부분들 중 어학적 내용에 직접 대응되지 않는 것들은 국어학자들에게는 사실상 무시되고 있다.

위에서처럼 철학적 풀이를 무시하고 언어학적 측면만 보는 것이 옳은 것인지, 언어학적 분석과 철학적 해석이 어떻게든 관련을 맺은 상태에서 제자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철학적 내용을 이해한 상태에서 그에 대한 적절한 평가를 내리는 것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분과학문(언어학, 국어학)의 경계를 넘어서기 때문에 애써 무시하는 것과는 차이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언어학적 측면에서만 접근할 때에 많은 부분들이 적절하게 이해되긴 하지만 여전히 100% 언어학적 설명만으로 제자원리의 모든 부분을 설명하진 못하고 있다. 이것은 국어학계에서도 제자 원리의 구체적 부분까지 완벽한 동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즉 제자 원리에 아직도 미해결된 부분이 일부 남아 있다. 각종 떡밥이 여전히 남아 있는 이유이다.

단 이런 미해결된 부분이라는 것은 발음기관의 상형이 뚜렷하게 어떤 의미이며 발음기관의 어떤 모습을 어떻게 시각화한 것인가? ㅅ이 치열을 나타낸 것이냐 이빨의 단면을 나타낸 것이냐 등과 같은 문제. 초성자(자음자)와 중성자(모음자)를 구성하는 기본자들과 거기에 부가되는 각각의 획이 언어학에서 어떤 구체적 의미를 지니는가 아닌가 등의 세밀한 부분에 관한 문제. 기본자에 부가되는 획이 특정한 음운적 자질에 해당하는 것인가 그것과는 다소 다른 상대적 청각의 세기에 해당하는 것인가, 모음을 구성하는 기본자나 그 기본자들의 결합방식이 어떤 음운론적 해석에 대응되는가와 같은, 정말 전문가들이나 관심 있어 할 문제들. 박사 논문에나 나올 이야기이므로 보통 사람들에게는 넘사벽 급인 문제들이다.

2.2. 파스파 문자 기원설

세종실록에는 '字倣古篆(글자는 '古篆'을 본떴다)'이라 기록되어 있다. 일반의 해석은 '고전 전서체의 상형 방식(또는 글씨체)을 본떴다'이다.[11] 그러나 컬럼비아 대학의 한국학 교수인 개리 레드야드(Gari Ledyard)는 고전(古篆)이 몽고전자(蒙古篆字), 즉 원나라의 공용문자였던 파스파 문자('Phags-pa script)를 가리키는 것이라 주장했다. 참고.

파일:파스파 문자와 한글 비교.svg

레드야드의 이론[12]에 따르면 한글의 자음 ㄱㄷㅂㅈㄹ는 각각 발음이 비슷한 ꡂ [k\], ꡊ [t\], ꡎ [p\], ꡛ [s\], ꡙ [l\]을 단순화한 형태이며, ㄱ, ㄷ, ㅂ, ㅈ에 획의 변화를 가해 유기음 ㅋ, ㅌ, ㅍ, ㅊ을 만들었고, ㄱ, ㄷ, ㅂ, ㅈ에서 한 획씩 지워 지속음 ㆁ, ㄴ, ㅁ, ㅅ을 만드는 식으로 한글의 자음이 제작되었다는 가설이다.
파스파 문자[13] 기본자 가획(유기음) 감획(비음 및 마찰음)
ꡂ [k] [14]
ꡊ [t]
ꡎ [p]
ꡛ [s]
ꡙ [l] - -

레드야드 외에 유창균 교수, 중국의 주나스트를 비롯한 몇몇 몽골인 교수 등이 이 가설을 주장해왔으며 이후 지속된 토론의 대상이 되어 오면서 2010년대부터는 한글학회나 국어학회 등에도 국어 연구자들이 관련 논문을 게재하고 있다. #

조음기관 모방설이 주류인 국내 학계에 비해서 서양 학계에서는 파스파 모방설이 더 널리 퍼져 있는 듯하다.
1966년에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의 학위논문으로 제출된 [레드야드의] 논문은 대부분의 서양학자들에 의하여 인정되어 서양에서는 한글이 파스파 문자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정광. "훈민정음의 중성 (中聲) 과 파스파 문자의 모음자." 국어학 (國語學) 56 (2009): 221-247.)
[서양의] 문자학자들은 훈민정음이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큰 문자로 파스파 문자와 인도계 문자를 언급하는데, 이는 국내 학계의 분위기와는 다른 셈이다. (연규동. "일반문자학에서 바라본 훈민정음." 동방학지 181 (2017): 223-257.)

그러나 국내학계에서도 아예 파스파 이론이 사장된 것이 아니며 지속해서 관련 연구들이 출판되고 있다. 레드야드의 이론 외에도 의 기능이나 [15] 한글의 음절 표현 구조에서 [16] 파스파 문자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다만 레드야드 교수의 연구는 '파스파 모방설의 주창자'라는 세간의 인식과는 거리가 있다. 한글의 기원을 파스파 문자, 티베트 문자, 버마 문자 등 남아시아 문자들에서 찾아보려는 시도 자체는 서구에 한글이 알려진 당시부터 수없이 있어왔다. 다시 말해, 서구권 학계에선 처음부터 이쪽으로 가닥을 잡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던 것이지, 레드야드가 기존에 없던 파스파 모방설을 주장하자 점차적으로 그 논리에 설득되어 수용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레드야드의 연구는 이런 기존 가설들을 본인의 논문 집필 시점 몇년 전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새로 알게 된 창제원리와 합치하게끔 다듬은 절충안에 가깝다.

정작 레드야드 본인은 한글이 파스파문자의 개량형이라기보단 처음의 기본 자음 5자를 만들 때 파스파자를 참조했을 뿐 그 이후의 과정은 따로 음운학에 기초해 완성했다는 관점으로, 박사 논문에서 한글 창제 과정에서 몽골 파스파 알파벳의 역할이 상당히 제한돼있다고 서술한 바 있다. 자음의 일부는 파스파 문자에서 따왔지만 ㅇ과 가획원리, 모음 등은 세종의 창작이라는 것.

2.2.1. 가설의 근거 및 지지 관점

  • 해례본은 ㄹ은 혀의 모양을 본따고 그 형태를 달리한 것이지 ㄴ에 가획을 한 것은 아니라고 예외를 부여하나, 어떻게 해서 그런 형태가 도출되는지 설명이 부족하다. 반면 ㄹ을 파스파 문자에서 /l/ 음가에 해당하는 ꡙ을 간략화한 것으로 보면 간단히 설명된다.
  • ㄱㄴㅁㅅ이 기본자라면 왜 ㄱ은 파열음이고 ㄴㅁ은 비음이며 ㅅ은 마찰음인지 설명하기 어렵다. 반면에 ㄱㄷㅂㅈ를 기본자로 본다면 모두 파열음(내지는 파열음과 흡사한 파찰음)이라는 점에서 일관적이다.
  • 불청불탁 ㅁ에 가획을 해서 전청을 만든다면 왜 ㄴ > ㄷ, ㅅ > ㅈ, ㅇ > ㆆ처럼 상단에 가로획을 더한 ㅡ + ㅁ 같은 형태가 아닌가? 그 편이 쓰기도 쉽고 더 직관적임에도. 반대로 기존의 ㅂ에서 상단 획을 감획하여 ㅁ을 만드는 것은 ㄷ > ㄴ, ㅈ > ㅅ의 감획 원리와 동일하다.
  • ㄷ > ㅁ, ㅈ > ㅅ, ㅂ > ㅁ와 마찬가지로 ㄱ은 이렇게 상단을 감획을 하면 ㅣ자 형태가 되는데, 식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그리고 초성에서 불청불탁 후음 ㅇ와 구분이 잘 안되던 /ŋ/의 성질을 반영하여 ㅇ을 붙였다고 생각하면 ㆁ의 형태가 설명이 된다.
  • 레드야드가 지적한 부분인데, 훈민정음언해에 제시된 ㄷ의 윗획에는 왼쪽으로 튀어나온 부분이 있다. 간결함을 추구하는 한글의 디자인에서 있을 이유가 없는 부분이고, 한자에서도 보통 匚같은 자형에 튀어나오는 부분이 있지는 않기에 한글 내적으로도 한자 영향으로도 이러한 잉여적인 부분을 설명하기가 힘들다. 레드야드에 따르면 이는 마찬가지로 왼쪽으로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 파스파 문자 ꡊ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 ㄱㄷㅂ가 /g d b/에 해당하는 파스파 문자 ꡂ ꡊ ꡎ 에서 따온 것임을 감안할 때 ㅈ 역시 유성파찰 /dz/에 해당하는 ꡒ에서 따왔어야 일관적이기는 하나 이는 형태적으로 ꡎ와 유사하다는 단점이 있었을 것이고 따라서 ㅈ의 감획 버전인 ㅅ에 대응하는 ꡛ에서 대신 빌려왔을 가능성이 있다.
  • 훈민정음의 순경음 ㆄ · ㅸ · ㅹ · ㅱ는 파스파의 ꡧ /w/를 자음 하단에 붙여 /Cw/를 만드는 원리와 음운적으로도 형태적으로도 매우 비슷하다. 물론 ㆄ · ㅸ · ㅹ · ㅱ은 파열음에서 순치음을 만드는 것이고 (p > f) 파스파의 ꡧ은 일반 자음에 원순 조음을 부여하는 것이라서 (p > pw)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으나, 일단 (1) 입술 조음과 관련이 있고 (2) 자음의 하단에 위치한 도형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 해례본에선 파스파 문자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이유는 성리학에 기반한 당대 조선사회에서 오랑캐 취급받던 몽골의 문자를 모방한다는 건 용납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 간섭기에 태어난 노인들이 세종 즉위 시점까지 생존해 있었고, 조공하는 명나라가 바로 몽골을 몰아내고 세운 나라였다. 따라서 몽골에서 만든 파스파 문자의 모양을 본땄다고 해도 공식 기록에 사실대로 밝히기 어려웠을 것이고 고전자古篆字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얼버무렸을 가능성이 크다.

2.2.2. 파스파 모방설의 한계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파스파 가설이 상당한 비판의 여지가 있는데,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 훈민정음은 파스파 문자와 달리 각 음소의 간결한 표기를 위해 획을 최소한만 사용한다. 다음으로 이렇게 획수가 제한되고 좌측상단부터 직선으로만 긋는 조건에서 나올 형태는 한정된다. 처음에ㆍ, ㅡ, ㅣ를 그리면 그 다음 가능한 획은 ㄱ, ㄴ 두개다. 여기에 획을 더해가면 당연히 밭 전田형태 범위의 문자들만 나온다. 그래서 티벳자를 정방형으로 다듬은 파스파자와 기본 골격이 비슷해보일 수 있다. 근데 그게 전부다.
    한 두 획으로 음소를 나타내는 한글과 달리 파스파 문자는 기존 문자를 손봤을 뿐이라 획은 훨씬 많고 일관성이 떨어지는 데다 대부분의 글자가 ㄲ, ㄹ, ㅌ를 닮았다. 여기에서 ㄱ, ㄷ, ㄹ, ㅂ, ㅈ의 다섯 기본형을 추출해내기는 어렵다.
  • 치음과 순음의 기본자인 ㄴ, ㅁ 등이 유성 비음(불청불탁음에 속함)임에 비해 아음의 기본자인 ㄱ은 무성 무기 파열음(전청음에 속함)이라 일관성이 없다고 하였으나, 이미 해례본에서 /ŋ/이 아음의 불청불탁음인데도 아음의 기본자로 나타내지 않은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ŋ/은 아음(연구개음)이긴 하되 목구멍 쪽에서의 콧소리가 섞이는데다([+ 비음성]), 이미 중국 현지 음운체계에서도 성모 疑/ŋ/가 喻/∅/와 구분이 흐려져 혼용되던 현실을 반영해 아음의 기본자 'ㄱ'으로 나타내는 대신 목구멍 모양을 본뜬 'ㅇ'에 획을 따로 더한 'ㆁ'으로 나타냈다는 것이다. 여기에 아음은 오행상 나무에 속하고 후음은 오행상 물에 속하는데, 나무의 새순은 물을 많이 머금고 있기에 아음의 불청불탁자는 후음 기본자 'ㅇ'과 유관한 'ㆁ'으로 나타냈다는 음양오행적 해설까지 더했다.
  • 그리고 이와 같은 비일관성은 자연어를 표기하는 문제에 있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현상이라 할 수 있는데, 이론적 정합성 뿐만 아니라 그 언어 화자들이 사용할 때의 실용성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구강 구조 때문에 각 조음부위와 조음방식에 따른 발음과 변별의 난이도가 달라지고, 따라서 음소의 분포와 사용 빈도도 달라지며, 여기에서 일관성과 편의성 사이의 불일치가 발생하기에 두 가지 원칙 사이에서 저울질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앞서 말한 아음 성모 疑/ŋ/는 많은 언어들에서 어두에 오는 경우가 드문 자음이다. 한국어도 예외가 아니라 고유어와 한자어를 막론하고 예전부터 어두에서 발음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며, 서술했다시피 중국조차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이미 기존 중고한어 성모체계의 疑/ŋ/, 影/ʔ/, 喻/∅/ 사이 구분이 무너져 소실되는 초기 관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어두에 올 때 일본어처럼 [ɡ]로 발음되었다면 모를까, 한국 고유어와 한자어 모두에서 묵음이며, 중국 관화에서조차 소실된 초성 /ŋ/를 표기하기 위해 음운론에 맞춰 아음의 기본형 "ㄱ"을 할당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일이다.
    치음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로, 불청불탁은 조음부위가 달라 반치음으로 따로 분류될 뿐더러 조음이 불안정하여 중국에서도 이미 [ʑ], [j], [z] 등으로 변한데다 한국에서도 비음 대신 [z]로 발음되는 日/ɲ/ 뿐이라 순음, 설음의 경우처럼 불청불탁-전청-차청으로 이어지는 가획원리를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 그럴 바에야 반치음 대신 훨씬 사용빈도가 높은 세치음 心/s/에 기본형 "ㅅ"을 할당하고 여기에 가획을 해 ㅈ, ㅊ을 만드는 것이 실용적이다.
    해례본에서도 이런 불균일성을 의식해 어째서 기본자 ㄱ, ㅅ은 ㄴ, ㅁ, ㅇ과 달리 청음이 배당되었는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 위처럼 충분히 우연의 일치가 나올 수 있는 부분을 가지고 따왔다고 하는 것은 언어학적 무리수이다. 예컨대 한글 ㅣ가 로마자 I와 모양과 소리가 똑같다고 로마자 모방설이 타당하다 할 수는 없다.
  • 파스파 문자에서 참고한 것은 자형이 아니라 표음문자의 개념이고 파스파 문자에서만 참고한 것도 아니다. 예컨대 합자원리는 세로로 줄줄이 늘어놓는 파스파 문자보다는 오히려 여타 한자와 남아시아권 나가리계 문자들과 더 비슷하다. 그리고 이미 중국에선 불교의 전래와 함께 인도의 음운학을 받아들여 조음부위에 따라 성모를 분류하고 이를 운모와 짝지어 한자들을 분류, 정리한 <광운>, <집운> 같은 운서들을 내놓을 정도로 발전시킨 상태였기에 음소의 조합으로 한 음절이 만들어진다는 개념이 전대미문의 것도 아니었다.
  • 세종실록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다. 안 그래도 자국만의 오랑캐 문자만든다고 신하들과 유생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힌 세종대왕이다. 한자의 전서체를 참고했다고 밝혔으나, 반대쪽에선 뭘 참고했건 새로운 문자체계 만드는 것을 오랑캐짓 취급해서 씨알도 안 먹혔다. 조선이라는 나라부터가 여말의 신진사대부들 중에서도 북원과의 화친을 극렬히 반대했던 급진반몽주의자들이 세운 나라인데 조선 초기에 문자를 만들면서 오랑캐 문자인 몽골문자에서 따왔다고 밝힐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내막이야 어찌되었든 조선 왕실의 공식 주장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것이지 파스파 문자에서 베껴왔다는 게 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 레드야드는 실록 등에 나오는 고전자古篆字를 몽고전자蒙古篆字로 해석했지만 고古를 몽고로 해석한 것부터가 비약이다. 조선조에 '몽골(ᠮᠣᠩᠭᠣᠯ)'의 한자 표기 '몽고(蒙古)'를 약칭할 때는 '몽(蒙)'으로 썼다. "몽어유해"의 "몽어(蒙語, 몽골어)"가 그러하며,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되는 몽서(蒙書, 몽골 글), 몽자(蒙字, 몽골 문자)가 그러하다. (실록 기사) '고(古)'로 쓴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고전자(古篆字)'가 "몽고 전자(蒙古篆字)'이기 힘들다. 그러니 기록의 맥락에도 어긋나는 해석이다.
    실록 중 이 표현이 나오는 부분에서 최만리는 새 글자를 반대하며 이렇게 운을 뗀다: 儻曰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 "혹 말하기를 언문은 다 옛 글자를 본떴고 새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비록 모양은 옛 전문篆文을 베꼈어도 음을 쓰거나 글자를 합치는 것은 다 옛것에 거스르는 것이니 실로 근거랄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표음과 자모 조합이라는 방식만을 지적하며, 이어서 다음 논거를 든다: 自古九州之內, 風土雖異, 未有因方言而別爲文字者, 唯蒙古, 西夏, 女眞, 日本, 西蕃之類, 各有其字, 是皆夷狄事耳, 無足道者."옛부터 구주 안의 풍토는 비록 달라도 지방의 말 때문에 따로 글자를 지은 일이 없고, 오직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 무리만이 각기 글자를 가졌지만 이는 다 오랑캐짓일 뿐이니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오랑캐에 몽골도 있다. 만약 고전자가 이 "오랑캐"의 문자를 뜻했다면 최만리가 당연히 고전자부터 문제삼으며 '모양도 (몽)고전자 따위를 본뜨고...'라는 식으로 글자의 형태부터 비판했을 것이나, 그는 새 문자의 창제와 음소조합이라는 문자의 원리를 비판할 뿐 고전자 부분에선 오히려 "비록(雖) 고전자를 본떴지만"이라며 한 수 무른다.
    따라서 적어도 최만리가 언급한 고전古篆이라는 표현은 한자의 전서체를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 파스파 모방설은 이를 지지할 만한 당대 기록이 없는 것을 넘어 자음자 형태의 설명에 있어서도 비교우위를 가지지 못한다.
    가령 파스파 모방설 쪽에선 순음에 해당하는 글자들의 형태적 비일관성을 지적하며 ㅁ-ㅂ-ㅍ이 가획을 통해 도출된다는 설명이 이상하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들도 파스파자의 ꡎ에서 어떻게 ㅂ이 도출되고 여기에서 다시 日같은 형태 대신 ㅍ이 나오는지 명료히 설명하지 못한다. ㅂ과 ㅍ의 비일관성을 설명하기 위해 파스파자를 끌어오기엔 정작 이에 해당되는 ꡎ, ꡍ의 형태가 서로 유사하다. 그래서 모음과 결합하기에 적합한 구조로 만들다 보니 위 아래로 평평한 ㅍ의 형태가 도출되었다는 식의 설명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럼 굳이 설명을 위해 파스파자를 끌어올 필요가 없어진다.
    그 외에 파스파 모방설 측에서는 치음의 설명에 있어서도 다른 부위들과 달리 몽고자운의 성모 精/ts/에 해당하는 ꡒ 대신 세치음 心/s/에 해당하는 ꡛ에서 기본형 ㅈ을 추출하는데 음가는 /ts/을 배당하고 여기에서 다시 감획해 ㅅ/s/을 만들었다는 식으로 불필요하게 복잡하고 자신들이 강조하는 일관성도 유지하지 못한다.
    그와 달리 조음기관을 모방했다는 해례본과 고전체를 모방했다는 실록의 내용을 종합하여 한자의 고전체 중에서 조음기관의 형태를 표현한 상형자들을 자음자의 기본형으로 삼았다고 보면 자음자들의 형태가 간단히 설명된다.
    가령 치음 ㅅ의 형태는 치열을 드러낸 입 모양을 묘사한 한자 齒의 이빨 부위와 일치하며, 순음 ㅁ의 형태는 입술의 모양을 본뜬 한자 口와 일치한다. 또한 ㅁ에서 파생되었다는 ㅂ의 형태는 口의 전서체와 일치한다.
  • 레드야드는 ㄷ 좌측 상단의 돌출부가 부자연스럽다고 하나 한자식 필법에 따르면 상단부는 아랫부분과 별개의 획으로 그어져서 匸 같은 형태가 나올 수 있다. 그리고 해례본에 따르면 돌출부가 없이 매끄러운 ㄹ, ㅁ, ㅅ 등과 달리 ㄷ은 기본자 ㄴ의 위에 가획을 해서 파생된 글자이기 때문에 첫획이 하단과 구분될만한 이유가 있다.
  • 순경음의 경우 파스파자는 후음 ꡯ/h/에 활음 ꡧ/w/를 덧대어 ꡤ를 만드는 식으로 표기하지만, 훈민정음은 중순음 ㅂ, ㅍ, ㅃ에 ㅇ을 덧대어 조음을 약화시킨 형태로 표기한다. 더 나아가 해례본에선 반설경음을 표시할 경우를 예로 들며 필요할 경우 순음 뿐만 아니라 다른 자음들의 하단에도 같은 용도로 ㅇ을 합자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 파스파자의 하단 ꡧ는 원순성을 의미하는 반면, 훈민정음의 하단 ㅇ는 조음의 약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또한 훈민정음은 파스파자와 달리 /w/ 등의 활음을 표기하기 위한 별도의 글자가 없다는 점에서도 다르다.
  • 또한 파스파 모방설 측에서는 훈민정음의 초성이 절운 이래 중국 운서들의 전통적인 성모 배치처럼 순, 설, 치, 아, 후 순서가 아닌 아, 설, 순, 치, 후 순서로 배치되는 것을 두고 파스파자가 병기된 원나라 운서인 몽고자운 등을 따른 것이라는 식의 주장을 하지만, 이같은 성모의 배치는 남송 이전 시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등운서인 <사성등자(四聲等子)>에서 이미 사용된 이래 <경사정음절운지남(經史正音切韻指南)> 등에서도 사용되던 체계이다.

2.3. 그 외 학설

파스파 문자가 주로 거론되지만 거란 문자(거란 소자)의 글자 만드는 방식을 따 왔을 거란 설도 종종 다뤄진다. 거란 소자는 한글의 초성, 중성, 종성처럼 정해진 몇 문자를 옆과 아래에 조합해 하나의 네모난 글자를 만드는 표음문자기 때문이다.

창작자가 세종이라는 것은 틀림없으나 옛 전자를 모방하였다는 구절을 가지고 인도의 범자나 한자의 전서체(篆書體)가 기원이라거나, 심지어는 창틀 모방설이 나오기도 했다.

1940년대에 처음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은 안동본이다. 이 안동본이 위서라느니 하는 말이 있었으나 완전히 같은 내용의 상주본이 다시 발견된다. 이것은 소유주와 점유자의 분쟁 속(10년 이상 되었다)에 최근 화재로 행방이 더욱 묘연해졌다.

신대문자라는 주장, 가림토라는 고대문자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은 현재 학계에서는 논의할 가치가 없는 이야기로 여겨지며, 일제 시절에 처음 등장한 것은 맞지만 신대문자를 주장한 이들이 주로 사이비교단 신자들이라 이미 당대에 일본 정부에게 탄압을 받았다.

또한 극우 혐한 성향의 일본인들은 세종대왕이 일본 글자인 가타가나를 보고 이를 모방하여 한글을 만들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2.3.1. 모음의 하도 기원설

파일:하도_상생.jpg

하도는 고대 중국에서 산신의 연못에 살던 거북의 등껍질에 그려져 있었다는, 우주 창조의 비밀이 담긴 그림이라고 한다. 이는 음양오행론의 한 축을 담당한다.

1952년 중국의 한 한국학자가 한글 모음의 하도 기원설을 주장했는데, 6.25 전쟁 때문인지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훈민정음의 설명에서 모음의 기본자인 ㆍ, ㅡ, ㅣ가 상형자라는 것 외에 초출자와 재출자의 제자원리는 너무 추상적이고 철학적이라는 문제가 있는데, 이 철학성을 하도에 대입하여 해석한 것이다.

모음의 상형자인 ㆍ, ㅡ, ㅣ 3자를 5, 10 부분에 배당하고 하도에 맞춰서 셋을 조합하여 초출자 및 재출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각 모음에 부여한 숫자 및 오행원리와도 맞아떨어지고, 음양론상 홀수가 양수, 짝수가 음수에 해당하므로 모음을 양성모음, 중성모음, 음성모음으로 구분한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ㅗ, ㅏ, ㆍ, ㅛ, ㅑ는 홀수에 배당되므로 양성모음, ㅜ, ㅓ, ㅠ, ㅕ, ㅡ는 짝수에 배당되므로 음성모음, ㅣ는 배당되는 숫자가 없으므로 중성모음인 것이라는 것이다. 하도에 대한 모음 배당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ㅛ (7)
ㅜ (2)
ㅕ (8) ㅏ (3) ㅡ (10) ㅓ (4) ㅑ (9)
ㅣ (X) ㆍ (5) ㅣ (X)
ㅡ (10)
ㅗ (1)
ㅠ (6)

3. 한자와의 관계

한글과 한자의 관계는 매우 깊다. 다만 동아시아의 다른 고유 문자인 가나주음부호, 거란 문자 등의 문자가 한자로부터 직접 파생된 것과는 달리, 한글은 한자에서 직접 파생된 문자는 아니다. 하지만 한글을 창제하던 시기에는 한자가 주류였고, '한자가 곧 문자' 라는 통념이 당연시되던 전근대 동아시아였기 때문에 한글 역시 한자의 제자 이념에 기초해 독자적으로 상형하여 만들어졌다. 가나주음부호한자의 직계 자손이라 치면, 한글은 가까운 방계 친척뻘 정도가 되는 셈.

한글한자는 언어를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각각 표음/표의로 뚜렷한 차이점을 보이지만 형태상으로는 신체 기관을 본뜬 상형원리[17], 가획을 통해 거센 소리를 낸다는 개념과 모아쓰기 등 공통점이 많다.

한국어학자들도 훈민정음 해례본의 내용을 부정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한자가 형태 면에서 한글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앞에서 말한 상형원리나 모아쓰기는 한자의 영향이 확실하다. 세종은 직접 "初中終三聲,合而成字。"(초성, 중성, 종성의 세 소리가 모여야 글자를 이룬다.)라고 "훈민정음(해례본)"에 서술해 놓았는데, 이는 세종대왕이 음소를 나타내는 낱자를 모아 1음절로 만들어야 진정한 글자가 된다고 보았음을 의미한다. 이는 정확히 한자의 '1음절 1문자'의 원리이다. 당대 동아시아에서 격식 있는 문자는 한자였기 때문에 '글자'라는 개념의 형성에 한자 외의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신생 문자인 한글과 기존 한자와의 호환을 위해서라도 음절 단위 모아쓰기 채택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4. 만든 이는 누구인가?


과거에는 세종대왕의 지시 아래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 창제의 실무를 전담하고 세종대왕이 관리, 감독자 역할만 한 뒤 국왕으로서 자기 이름으로 반포한 것처럼 여겨진 시기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한글은 문종을 비롯한 소수의 직계 가족의 도움만 받아 창제했다는것이 정설로 여겨진다. 세종실록에서 자문을 받기 위해 신하들을 불렀다가 격렬한 반발을 받고 참다 참다 분노한 세종이 반대한 신하들을 전부 의금부에 가두고 한 명은 파직시켰을 정도로 당시 기득권층의 반발이 매우 심했었다.#

월인석보에 수록된 훈민정음 언해본의 표제는 세종어제훈민정음(世宗御製訓民正音)인데, 이 '어제(御製)'라는 표현은 왕이 시를 짓거나 교지를 내리거나 그림에 짧은 칭찬 문구를 남기거나 책을 써서 하사하는 등 직접 작성한 것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조선왕조실록에 御製이라는 표현은 약 750회 등장한다. 신하가 왕을 가르치는 경연 자리에서 오히려 왕이 신하를 꾸짖으며 툭하면 책과 시를 지어 신하들에게 공부하라고 보내길 밥먹듯이 한 영조실록에 300회가 나온다. 영조만큼 신하들을 구박하진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박식했던 정조실록에 124회 정도 등장한다. 연산군은 맨날 술만 마시고 시만 읊었던 탓에 82회 등장한다. 즉 어제라는 표현은 몇몇 특이했던 왕만 집중하여 썼으며, 흔하게 찾아볼 수 없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에도 고작 9번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임금이 직접 만들었든 누굴 시켜서 만들었든 단순한 총괄만 담당한 것이 아니라 직접 제작 과정에 참여하여 상당히 참견을 할 정도로 관심을 가지고 만들었다는 말

그리고 당시의 여러 정황상 세종대왕이 혼자서 만든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선결되어야 하는 자료 수집량이 개인이 모으기에는 지나치게 방대하다는 등의 문제가 있다. 단 그 개인이 한 나라의 왕이니 얘기가 다르기는 하다. 대개 대학에서 교수님들이 제자 시켜서 자료 수집해 오는 것처럼 세종대왕이 주도하면서 신하들에게 자료 수집 등의 보조 업무를 시키는 형식을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

세종이 소수 정예 인원이 참여하는 비공식 계획최일선 실무자이자 관리자로서 작업에 주도해 참여한 것은 분명하다. 직계 가족들이 관여했을 거라는 것도 세자 문종 한 사람만 직접적인 문헌증거가 남아있고 그 외에는 가정일 뿐 확실한 직접적 증거는 없다. 세종대왕이 아무래도 바쁘기도 하고 참고자료의 양이 워낙 많아서 세종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세조, 안평대군 등)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제법 높을 뿐이다.

이러한 방대한 작업의 확실한 참여 기록이 없다는 것도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의도해서 은닉하였더라도 대개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명백한 참여 증거들이 나오기 마련인데(일부러 밝히는 때야 말할 필요도 없고) 그렇지 않았다. 이래서 아직까지도 한글의 제작자에 여러 추측이 나온다. 그 일단이 아래이다.

세조 6년 5월 28일 기사에 예조에서 《훈민정음》·《동국정운》·《홍무정운》을 문과 초장에서 강할 것 등을 아뢰어 따르다라는 기사가 있는데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선왕(先王)께서 손수 지으신 책이요, 《동국정운(東國正韻)》·《홍무정운(洪武正韻)》도 모두 선왕께서 찬정(撰定)하신 책이요-라는 대목이 나온다. 정조 7년 7월 18일 기사에 수레·벽돌의 사용, 당나귀·양의 목축 등 중국의 문물에 대한 홍양호의 상소문이 실려 있는데 이 상소에서도 오직 우리 세종대왕께서 하늘이 낸 예지(睿智)로 혼자서 신기(神機)를 운용(運用)하여 창조(創造)하신 훈민정음(訓民正音)은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하나,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여러가지 완호(玩好)는 대개 지기(志氣)를 빼앗는다.’ 하였고, ‘서찰(書札)에 이르러서는 선비의 하는 일에 가장 가까운 것이나, 외곬으로 그것만 좋아하면 또한 자연히 지기가 상실된다.’ 하였습니다. 이제 동궁(東宮)이 비록 덕성이 성취되셨다 할지라도 아직은 성학(聖學)에 잠심(潛心)[18]하시어 더욱 그 이르지 못한 것을 궁구해야 할 것입니다. 언문이 비록 유익하다 이를지라도 특히 문사(文士)의 육예(六藝)[19]의 한 가지일 뿐이옵니다. 하물며 만에 하나도 정치하는 도리에 유익됨이 없사온데, 정신을 연마하고 사려를 허비하며 날을 마치고 때를 옮기시오니, 실로 시민(時敏)의 학업에 손실되옵니다.[20] 신 등이 모두 문묵(文墨)[21]의 보잘것없는 재주로 시종(侍從)에 대죄(待罪)하고 있으므로, 마음에 품은 바가 있으면 감히 함묵(含默)할 수 없어서 삼가 폐부(肺腑)를 다하와 우러러 성총을 번독하나이다."

(중략)

임금이 소(疏)를 보고 최만리 등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하는 것이 아니냐?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어째서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또 소(疏)에 이르기를,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技藝)라’ 하였으니, 내 늘그막에 날[日]을 보내기 어려워서 서적으로 벗을 삼을 뿐인데, 어찌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여 하는 것이겠느냐. 또는 전렵(田獵)으로 매사냥을 하는 예도 아닌데 너희들의 말은 너무 지나침이 있다. 그리고 내가 나이 늙어서 국가의 서무(庶務)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으니, 비록 조그마한 일일지라도 참여하여 결정함이 마땅하거든, 하물며 언문이겠느냐.[22]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東宮)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宦官)에게 일을 맡길 것이냐. 너희들이 시종(侍從)하는 신하로서 내 뜻을 밝게 알면서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 옳단 말인가?” 하였다.
세종실록 103권, 세종 26년(1444년) 2월 20일 1번째 기사: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아뢰다 #

그러나 당시 세자였던 문종은 위와 같이 창제에 상당히 깊이 관여했을 것이 거의 확실한데,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최만리의 상소에서 동궁(東宮, 문종)이 해야 할 다른 일이 많은데도 훈민정음 창제에 지나치게 관여하고 있음을 우려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리고 세종 본인도 문종이 한글 창제에 상당부분을 담당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한편, 성삼문이 쓴 직해동자습 서문에서 훈민정음은 세종문종의 작품이라고 한 것을 보면 세종 '혼자서' 만든 것은 아니고 세자 문종에 한해서는 창제에 상당히 크게 관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훈민정음 창제 초창기부터 이미 훈민정음의 원리에 능통해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을 편찬한 것이라거나 운회를 정리하는 데 문종과 수양대군, 안평대군이 참여한 것을 보면 문종은 크게 관여했고 나머지 2명은 적어도 창제 이후의 검증 작업에는 적극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실록의 관련 내용 참고). 집현전 학자들은 이를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 정황상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가 온전히 비밀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창제 과정에서도 집현전 학자들이 보조 연구원의 형태로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때에도 주도 역할은 어디까지나 세종대왕이며, 문자 창제라는 진짜 목적은 숨긴 채 음운론 정리 등을 구실로 이리저리 자료를 수집하도록 했을 가능성이 높다. 집현전 학자들은 나중에 훈민정음을 가지고 한자음을 정리하는 작업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조차도 소장파에 국한되었다. 집현전 최선임 상근직인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한 보수파들은 세종의 역린을 건드려 투옥까지 될 정도로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 외에 죽산 안 씨 족보에는 세종대왕소헌왕후의 차녀 정의공주가 대군들이 풀지 못한 문제의 답변을 잘하여 노비 수백을 상으로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게 기록된 이유는 정의공주가 죽산 안 씨 가문으로 출가했기 때문. 족보에 실렸다는 이 내용은 문제가 많다. 상으로 노비 수백을 내릴 정도라면 개국공신, 반정공신 정도는 돼야 받을까 말까 한 비현실성으로 큰 상이다. 왕실의 재산에 타격을 줄 정도다.

이런 큰 상을 받을 정도면 실록에 실리지 않을 수 없으며, 세종대왕의 정치 방식상 이렇게 상을 남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족보는 여러 이유로 과장이나 거짓이 많이 포함됨을 고려하면 사실 여부가 의심스럽고, 정의공주가 한글 창제에 참여했을지라도 후대에 어떤 이유에선지 엄청난 왜곡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1. 신미 창제설?

훈민정음의 제작에 신미대사가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설이 있다. 이 견해의 근거로는
  • 세종대왕이 업무도 바쁜 와중에 어린 자식들만 데리고 아무런 전문가의 도움 없이 훈민정음을 만들 수는 없었을 것이고, 유학자들은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을 넘어 오히려 반대했었기 때문에 '숨겨진 전문가'가 있었을 것이다.
  • 신미대사가 세종의 총애를 받은 승려였다. 범어 문자[23]의 전문가였기에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 세종이 승하하면서 유언으로 신미에게 '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者)'라는 법호를 내렸다. 조선시대뿐 아니라 우리 역사 전체를 볼 때에도 왕이 이렇게 법호를 내리는 일이 흔하지 않다.[24]
  • 조선왕조실록이나 훈민정음 해례본에 나온 공식 기록에선 숭유억불을 기본으로 하는 조선에서 승려가 국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공식 기록에 남길 수가 없어서 모든 공식문서에는 세종대왕의 단독작업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렇듯 불교 측에서는 정황상의 근거로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의 언어학적 능력과 기획력 + 신미대사의 전문가로서의 큰 도움 + 자식들의 도움 + 집현전 학자들의 (약소한) 도움으로 창제되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일각에서는 아예 신미대사가 훈민정음을 창제한 장본인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훈민정음이 창제하기 8년 전인 정통 3년(1435)에 신미대사가 저작한 저서라는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를 근거로 든다. 이러한 주장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 2019년에 개봉한 영화 나랏말싸미이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위 주장들은 궤변에 가까운 엄청난 확대해석이다.
  • 불교 일부 측에서는 숭유억불을 기조로 한 사대부들의 반발 때문에 세종이 훈민정음에 대한 승려들의 공을 지우고, 문종이 세종이 신미를 안 것을 훈민정음 창제 3년 뒤라고 인정하는 등 기록을 조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종과 문종 대의 왕권을 생각하면 일리가 없다. 조선은 한반도 왕조에서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고, 세종은 셋째아들이긴 했으나 태종이 깔아준 발판과 본인의 능력으로 인해 왕권이 강력했고 문종도 나중에 3년상을 치르고 사망해서 그렇지 적장자로서의 권위와 오랜 대리청정으로 세종보다 더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있었다.[25]
    아무리 숭유억불 기조가 강해도 이런 막강한 왕권을 가진 왕들이 사대부의 눈치를 보느라 역사 조작을 할 필요가 없다. 왕권이 하락한 후대의 명종 때도 사대부들의 극심한 반발에도 승과를 부활시키고, 임진왜란 때 활약한 승병장들의 공로가 엄연히 실록에 남아있다. 왕권이 약해지고, (불교 사원이 성리학 서원으로 교체되는 등) 불교에 대한 차별이 훨씬 심한 후대에도 왕실에서 불교를 두둔하는 것을 막지 못하는데 세종 때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26] 사실 불교계의 이런식의 역사를 조작했다는 주장은 원균옹호론에서 비슷한 양상을 띈다. 궤변측이 논파당하면 "역사는 승자의 역사", "옛날 일을 네가 봤냐? 어떻게 아냐?" 소리로 일관한다.[27]
  • 이에 후대의 역사조작을 주장하는 측도 있는데 이도 말이 안 된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이라도 함부로 못 보고, 왕이라도 함부로 수정할 수 없다. 그런데 일개 사대부가 이를 조작한다면 다른 사대부에게 탄핵을 받아 귀양 혹은 처형 당할 일이다. 그리고 만약 조작을 했다면 신미라는 인물을 철저히 묻어버리지 실록에 남겨둘 리가 없다.[28] 게다가 조선왕조실록은 유실을 우려해서 백업의 예시로 들 정도로 여러 복사본을 만들어 보관했다. 만약 한 곳에서 몰래 조작해도 다른 곳에 있는 조선왕조실록 판본과의 비교로 이가 들어나야 한다. 게다가 신미의 동생 김수온이 1441년에 급제해 집현전 학사로 있었는데 그 김수온조차 한글 창제에 별 역할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 신미가 훈민정음으로 초기 불교 저서들을 저술할 수 있다는 이유로 신미가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할 정도로 훈민정음의 이해가 깊다고 하는데 훈민정음과 한글은 원래부터 배우기 쉽게 만들어졌다. 훈민정음에서 세종대왕이 사람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자로서 만들었다고 써 있다. 신미가 그냥 훈민정음을 배웠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29]
  • 불교가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기록은 사찰 기록에도 없다. 아무리 숭유억불이라도 불교 측에서 자체로 하는 기록까지 일일이 감시할 수는 없는데 당대에나 후대에나 승려들이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없다.
  •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는 종이의 연대가 현대이며 책의 형식도 세종 대와 다르고 쓰인 언어가 15세기 한국어가 아니며 해례본에서 자음을 해부하여 만든 것이라고 간단명료하게 설명한 것과 다르게 제대로 설명도 못 한다. 이렇게 중요한 서적이 있다면 실록이나 다른 불교 저서에 그 이름이라도 남아 있어야 하는데 원각선종석보를 언급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냥 생뚱맞게 나타난 위서이다. 링크[30]

신미대사가 세종대왕에게 자문을 준 것과 훈민정음을 전국에 보급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인 건 맞지만 신미대사가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링크 불교계는 이러한 사실을 외면한채로 한글 신미창제설을 정설인 마냥 불교방송에서 주야장천 주장하고 있다.[31][32]참고영상[33]

세종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건 '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존재하는 제대로 된 기록들이 다 뒷받침하는 유일한 정론이다. 만약 세종시대가 기록이 부족한 고대도 아니고, 왕의 사소한 발언 하나까지 기록해 실록으로 남기던 시대인데 기록으로 명확히 드러난 사실을 근거도 없이 뒤집으려는 건 말 그대로 억지에 지나지 않는다.[34]

5. 사용자는 누구인가?

알려진 것처럼 왕족이나 양반들은 계속 한문을 주요 표기법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한글도 병용했다. 친밀한 사람에게 보내는 개인 편지 등 양반들이 남긴 순한글 문서들이 존재하는 것이 증거. 어릴 적부터 아이들 공부용으로 한문 교재 아래나 옆에다가 한글로 음을 달거나 하는 식으로 교육했으므로 한자 교육과 함께 한글 교육도 같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또한 상급 기관에서 하급 기관으로 보내는 명령서인 전령의 경우에도 일반 백성들에게 알려야 하는 사안이 있으면 반드시 한글로도 내용을 써야 했다.

인민 교화를 위해 만든 삼강행실도 같은 것 외에 각종 경전도 한글로 번역해 보급했고, 성균관 같은 최고 학문 기관에서는 학생들이 한글로 풀이된 읽기 쉬운 '보조 교재'만 읽고, 한문 경전은 통 읽지 않는 바람에 조정에서 성균관 학생들의 경전 이해도를 문제 삼아서 성균관에서 시험을 칠 때 한글 번역본이 없는 경전의 내용을 시험에 출제할 것을 지시하는 일도 있었다.

그 이외에는 알려진대로 주로 양반가 부녀자들이 사용했다. 군대에서 암호문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중국인에게 한글을 알려준 사람을 기밀 유출 혐의로 처벌했다는 기록이 있다.

18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로 쓰인 노비들의 계모임 문서가 발견된 적도 있다.

한글의 보급은 세종대왕기때 시작이 되었고, 세조대에는 한글서적 보급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여나갔다. 그 영향으로 궁중과 관료층들에게 한글이 재빨리 전파되었지만, 일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 보급은 성종때까지도 지지부진해서 한양과 그 근교에서나 퍼진 수준으로 파급력이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한글서적 발행이 꾸준히 이루어지고, 지방에서도 배우기 쉬운 한글을 먼저 떼고 한문을 익히는것이 교육적인 효율성이 높다는게 널리 알려짐에 따라 중종대 이후로는 한글의 보급률이 꾸준히 늘어났고, 16세기 중순 경에는 한글이 한국어를 표기하는 문자로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다만 일제강점기인 1930년과 해방 직후인 1945년의 문맹률 통계에서 한글을 능숙하게 읽고 쓸줄아는 사람의 비율이 20% 초반에 불과했다는 점을 볼때, 조선시대에 한글을 능숙하게 읽고 쓸수있던 비율은 대략 20% 내외 정도로 추정된다. 물론 이 정도도 전근대 기준에서는 문맹률이 제법 낮은 축에 들기는 했다.

5.1. 한글 비하 표현에 대한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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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글자 수의 변화

  • 훈민정음 창제 시 초성 17자, 중성 11자, 종성 부용 초성(단 8종성가족용)에 의해 28자. 순경음 비읍(ㅸ)과 지금의 된소리인 전탁자, 거듭 적은 글자들은 인정되지 않는다. 거기에 초출, 재출자를 제외한 합용자 18자(, , , , , , , , , , , , , , , , ㆈ, ) 역시 인정되지 않는다. 이들은 IPA의 구별기호처럼 사용되거나(순경음) 이중모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순경음에서는 ㅂ은 한때나마 독립된 음운이기는 하였지만 나머지 순경음들은 한자음 표기 외에는 그 용도가 없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 최세진의 훈몽자회(1527)에서는 여린히읗(ㆆ)이 글자에서 완전히 탈락해 있다. 그래서 모두 27자. 동국정운식 한자음 표기를 완전히 포기한 듯. 그리고 이때 현대까지 쓰일 자모의 명칭과 배열순서가 정해졌다.
  •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면서 자음 14자, 모음 10자로 모두 24자. 빠진 것은 모음에서는 (아래아. 단 제주 방언에는 아래아의 음가가 변화된 형태로 아직도 남아 있다), 자음에서는 (여린히읗), (옛이응), (반치음)이 탈락한 결과. 이 중에서 옛이응은 IPA 표기상 [ŋ]의 음가를 갖는 글자로, 발음은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글자는 ㅇ에 흡수되었다.
  • 소멸한 4개의 낱자 중 ㆆ(여린히읗)이 가장 먼저 소멸하였고 그 다음은 ㅿ(반치음), 또 그 다음은 ㆁ(옛이응)이 소멸하였으며 ㆍ(아래아)가 가장 마지막에 소멸하였다. 이 순서를 '10원(ㆆ)을 갖고 산(ㅿ)에가서 사과(ㆁ)를 사 먹으니 씨(ㆍ)만 남더라.'[35]로 많이 외운다.

현재 쓰이지 않는 글자의 정보는 이쪽을 참고하자.

7. 자모 순서의 변화

한글이 만들어졌을 당시 한글의 자모 순서는 현재와는 많이 달랐다. 훈민정음에 나오는 자모의 순서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훈민정음 앞부분(해례 이전 부분)에서 자모의 음가를 설명할 때 및 훈민정음 해례의 용자례(用字例)에서 나오는 순서이다.
  • 자음
ㅋㆁ: 아음(牙音)
ㅌㄴ: 설음(舌音)
ㅍㅁ: 순음(脣音)
ㅊㅅ: 치음(齒音)
ㅇ: 후음(喉音)
ㄹㅿ: 반설음(半舌音), 반치음(半齒音)
(붉은색은 음가 설명 부분, 파란색은 용자례에만 등장한다)
  • 모음
ㆍㅡㅣ: 기본자
ㅗㅏㅜㅓ: 초출자(初出字)
ㅛㅑㅠㅕ: 재출자(再出字)

자음은 오음(五音)에 따라 아, 설, 순, 치, 후 순으로 나누고, 같은 항목 내에서는 청탁에 따라 전청, 차청, 불청불탁 순으로 하되 전탁(쌍자음)은 기본 자음 바로 다음에 설명했다. 모음은 다른 모음의 바탕이 되는 세 모음을 먼저 설명하고, 그 다음 초출자(初出字), 그 다음 재출자(再出字) 순으로 설명했다.

두 번째는 훈민정음 해례의 제자해(制字解)에서 나오는 순서이다.
  • 자음
ㄱㅋ
ㄴㄷㅌ
ㅁㅂㅍ
ㅅㅈㅊ
ㅇㆆㅎ
ㆁㄹㅿ
  • 모음
ㆍㅡㅣ
ㅗㅏㅜㅓ
ㅛㅑㅠㅕ

모음은 첫 번째의 순서와 동일하고, 자음의 순서만 바뀐 것으로, 기본자음에서 가획해 가는 순서이다. 마지막의 ㆁㄹㅿ는 이체자만 따로 모아놓은 것이다. 사실 이 순서는 글자를 어떤 과정으로 만들었는지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순서이지, 한글 자모의 순서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외에 세종 시대에 지어진 책 중 자모의 순서라고 할 만한 게 나오는 책은 동국정운 정도가 있다. 한국 한자음을 표준화한 운서로, 이 책에서 나오는 자모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 자음
ㄱㅋㄲㆁ
ㄷㅌㄸㄴ
ㅂㅍㅃㅁ
ㅈㅊㅉㅅㅆ
ㆆㅎㆅㅇ
ㄹㅿ
  • 모음
ㆍㅡㅣ: 기본자
ㆎㅢ: 기본자 + ㅣ
ㅚㅐㅙㅟㆌㅖㆋ: 초출자, 재출자 + ㅣ
ㅗㅛ: ㅗ 계열
ㅏㅑㅘ: ㅏ 계열
ㅜㅠ: ㅜ 계열
ㅓㅕㅝㆊ: ㅓ 계열

1527년에 지어진 훈몽자회의 범례에는 한글 자모의 발음을 설명하는 내용의 글이 실려 있는데, 이것이 오늘날 쓰고 있는 가나다 순의 원형이 된다.
  • 자음
ㄱㄴㄷㄹㅁㅂㅅㆁ: 초성종성통용8자
ㅋㅌㅍㅈㅊㅿㅇㅎ: 초성통용8자
  • 모음
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ㆍ: 중성독용11자

자음은 오음 순서대로 배열한 것은 이전과 동일하나, 아음에 속하는 ㆁ이 후음 자리로 밀려난 것을 볼 수 있다.

8. 한글의 호칭 변화

새로운 문자를 임금인 세종대왕이나 신하들은 모두 '훈민정음', 혹은 줄여서 '정음'으로 불렀고 이후 '언문(諺文)', '언서', '반절' 등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그 외에 '암클'(여자가 쓰는 글), '중글'(중이 쓰는 글)[36], '상말글'(상놈들이 말하는 것을 적은 글, 혹은 상스러운 말을 적는 글)이라 격하하여 부르기도 하였다.

이렇게 조선 시대의 상류 사회에서는 표면으로는 한글의 대우가 박했으나 서포 김만중이 '국서(國書)'라고 언급했을 정도로 세간의 인식이 아주 푸대접은 아니었다. 왕실에선 세종 이후의 조선 왕들부터가 꾸준히 왕실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를 한글로 썼고 실생활에서도 한글을 사용했다. 이는 의외로 가장 극렬하게 반대했던 양반들도 마찬가지였다. 왜냐면 싫어도 배우기가 너무나 쉽고 유용했으니까. 생각나지 않는 어려운 벽자 대신 그 자리에 한글을 쓴 흔적들도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정조의 편지중 '요즘처럼 벽파가 뒤죽박죽일때...' 라는 구절에서 딱히 '뒤죽박죽'이라는 한자 표현이 생각이 안 났는지 그냥 "뒤쥭박쥭"이라는 한글을 써넣은 것이 발견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당시 왕족을 비롯한 상류층들이 서로에게 한글로 써 보낸 편지나 메모 같은 것이 많이 남아 있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한글 소설을 읽고 독후감을 적는 양반들의 기록이 그 예이다. 메모에선 특히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학문을 연구하고 배울 때 적은 획으로 빠르게 강연자의 말을 옮겨적거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 오히려 반발이 심했던 유생들 사이에서 크게 애용되었다.

이렇게 내외적으로 훈민정음이 정착해가기 시작했고 근대화 과정, 특히 1894년 갑오개혁 이후 당시 조선이 처한 험난한 시대상 속에서 주체적 문자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국문(國文)'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글이라는 호칭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10년대이다. 대부분 주시경이 만든 명칭이라고 알려졌지만 처음 한글이라는 이름을 누가 언제 사용했는지는 명확히 설명하는 기록이 없다. 다만 1913년 3월 23일 주시경이 '배달말글몯음(조선어문회, 朝鮮言文會)'을 '한글모'로 바꾼 바 있어서 이 사실을 근거로 주시경이 만든 명칭이라 추정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 호칭이 일반화한 것은 1928년 조선어학회가 1926년에 제정했던 가갸날(훈민정음 반포 기념일. 음력 9월 29일)을 한글날이라 고쳐 부르면서이다.

9. 자형의 변화

현용 한글은 모양이 어느 정도 미학에 따라 재구성 되었으나, 창제 당시의 훈민정음은 정말 동그라미, 세모, 네모, 선, 점이라는 단순한 구성으로만 되어 있고 여기에 딱 구분이 갈 만큼만의 변형이 있다. 물론 이런 극도의 추상 디자인 또한 미학에서 다루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형태는 다른 표음 문자에선 찾아보기 힘든 특징이다.

노마 히데키 교수는 《한글의 탄생 - 문자라는 기적》(김지아, 김기연, 박수진 옮김)에서 이 간단한 모양은 무식한 백성들이 쉽게 배울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같은 번거로운 서예 도구를 쓰지 않고도 문자를 쓸 수 있도록 하려는 뜻이었다고 주장했다.

한글의 형태는 시대에 따라 서서히 변천해 왔다. 장식성으로 변하고, 모양이 다양해지며 한 자모에 대해 여러 가지 형태가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사실 이건 어떤 문자건 마찬가지다. 소문자 a만 해도 통용되는 모양이 두 개다. (a, α)
  • ㄱ: ㄱ은 본래 수직으로 꺾어진 모양이었으나, 궁서체나 오른쪽에 쓰는 중성 ㅏㅐㅑㅒㅓㅔㅕㅖㅣ와의 조합에서는 숫자 7, 가타카나 후(フ)자와 비슷하게 휘어진 모양을 가지게 된다.
  • ㅋ: ㅋ은 본래 ㄱ의 안에 수평선이 더해진 모양이지만 7 위에 수평선이 더해진, 가타카나 라(ラ)자와 비슷한 모양도 나타났다.
  • ㅌ: ㅋ과 비슷하게, ㄷ 위에 가로줄을 긋는 형태가 생겨났다. 이는 지금도 널리 쓰이는 필기 스타일로 가로줄 대신 세로선을 ㄷ 위에 긋는 바리에이션도 있으나 2000년대 이후 거의 보이지 않고 북한에서의 사용이 간간히 보인다.
  • ㅅ: ㅅ은 본래 좌우대칭이지만 궁서체에서 사람 인(人)자와 비슷한 좌우 비대칭 형태가 나타났다.
  • ㅈ: ㅈ은 본래 3획이었으나, 가타카나 스(ス)자와 비슷한 2획 형태가 나타난다.
  • ㅊ: 본래의 ㅊ은 ㅈ의 위에 점을 찍은 모양이다. 시대가 지나면서 점이 수직선, 수평선 등으로 바뀌었다.
  • ㅎ: 모자 부분이 ㅗ 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二도 나타났다.
  • 점이 선으로 바뀜: 모음, 자음에는 본래 점을 사용했으나 대부분의 점이 짧은 선으로 바뀌었다.

10. 한글을 이용한 한국어, 외래어, 외국어 표기의 역사

세종대왕은 당대 한국어뿐만 아니라 중국어, 그리고 운서 등에서 다루는 고전 중국어 발음과 대응되는 이상적 한국 한자음을 표기하려는 욕심이 있었다. 당시의 한국어 표기 실험은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의 한글 언해 문헌을 통해 이루어졌다. 세종 대에 훈민정음으로 한국 한자음을 정립하려는 시도는 동국정운 등에서, 중국 한자음을 정립하려는 시도는 홍무정운역훈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음(正音) 운동은 현실 한자음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조선에서 주변 나라 언어를 배우기 위해 펴낸 교재의 발음 표기에 이를 사용하여, 몽골어, 만주어, 일본어 소리에 대응하는 표기법도 갖추게 되었다.

현재 우리들은 세종대왕이 만든 형태가 아니라 주시경의 영향 하에 조선어학회에 의해 완성된 한국어 표기법, 즉 20세기의 국어학자들이 현대 한국어 표기에 더 최적화해서 만든 – 현대 한국어의 말소리에 대응되면서 동시에 말소리보다는 형태소의 일관성을 좀 더 잘 보여 주는(이른바 끊어 적기, 분철) – 한글 표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사실 한국어는 말소리에 글자가 그대로 대응되게 구현하는 것형태소(의미의 기본 단위)의 형태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을 동시에 만족시키기가 다른 언어들보다 꽤 어렵게 되어 있다.
장사꾼왠지 갓길에서 며칠이고 몇 달이고 궂은 날씨에 상관없이 굳이 그 자리에서만 "떡 . 오늘 갓 만듦. 맛있는지 맛없는지 직접 확인하시오."라는 간판을 세워 두고 떡을 파는데, 불법 영업이라서 단속반이 좌판을 들어내려 하면 웃통을 벗어 문신을 드러내며 저항하곤 해서 단속의 어려움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하 내용 없음. 보고 끝.

현재도 한글 표기 규정에 예외나 불규칙한 측면이 많이 있는 것은(예: 두음 법칙, 겹받침, 사이시옷) 다 한글이 아닌 한국어 탓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정작 현대 한글로는 모든 현대 한국어의 음소를 표기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사귀었다', '바뀌었다' 등의 단어를 빨리 발음할 때 한 음절로 줄어들어서 나는 ㅟ+ㅓ 발음[ɥʌ] 등이 있다. 하지만 한글에, 심지어는 옛한글에마저 ㅟ와 ㅓ의 합자는 없다. ㅟ는 원칙상 전설 원순 고모음([y])을 나타내는 모음자로, 단모음이다. 단지 이중 모음으로 발음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심지어 아나운서마저도!) 이중 모음 발음 [wi], [ɥi]도 허용된 것뿐이다. 또 남부 사투리나 강원도 사투리에 있는 ㅣ+ㅡ 발음도 한글로는 표기가 안 된다.

한글 우월론자들은 이런 것, 혹은 외국어 발음 또한 옛 훈민정음식 표기를 하면 모두 표기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무리다. "해례본의 이론에 따라 새로 자모를 만들고 보조 기호도 새로 만들면 가능하다." 식의 주장을 하지만 문제는 해례본의 이론으로 이 세상의 모든 발음을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국제음성기호의 모음자 28개에 해당하는 한글 모음자를 해례본의 이론에 근거하여 만들어보면 한글의 원리로 이 세상 모든 발음을 적을 수 있다는 것은 오만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현대 한국어 화자들은 발음 습관이 굳어져서 올바른 음가를 발음하지 못한다. 한국어도 바뀌어 음운 체계가 바뀌는데 세종이라고 해도 그 모든 미래까지 예측하여 문자를 만들기란 예언자가 아닌 한 불가능하다. 훈민정음은 어디까지나 세종 당시의 조선말(과 세종 당시의 중국어 표기)만을 염두에 둔 글자라 모든 언어의 발음을 표기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저 억지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지구상에서 모든 언어와 발음을 표기하는 문자부터가 없다. 그 언어가 사용하지 않는 발음을 기호화해서 외운다는 것부터가 낭비일 뿐이다. 굳이 따지면 영어 사전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국제음성기호를 들 수 있는데, 음성기호가 같다고 완벽히 같은 발음인 것도 아니다.

11.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까닭

한글을 창제한 까닭이 무엇인지는 한국어학계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문제이다. 한 예로 한글 창제 이후로는 양반들이 한문을 공부할 때, 한국어와는 체계가 다른 한문의 구절마다 한글로 된 토를 달아서(현토) 훨씬 배우기 쉽게 하는 등 양반들에게도 무척 유용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기록을 보면 남구만이라는 관료가 '식년시가 구송(입으로 위우는 것)만 시키니 시골동네에선 어려서부터 언문(한글)으로 토를 달고 공부하는 바람에 막상 과거에는 합격해도 편지 한 장 쓸 줄을 모른다'라고 한탄한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양반은 한문을 배울 기회가 없는 부녀자[37] 및 평민들[38]과 글로 소통할 필요성이 있었고 천자문같은 기초교육교재도 한글로 음을 달거나 뜻을 풀이하는 식으로 출간하였기 때문에 당대의 식자층이라면 기본 소양으로 한글을 모두 알고는 있었다. 물론 연암 박지원처럼 끝내 한글을 배우지 못했던 사람도 있었다.

실제 조선시대에 쓰인 한글은 글 읽기보다 생계에 바빴던 평민층에 비해 오히려 양반 부녀자층이나 중인층에게 유용하게 쓰였으며, 특히 실질 행정 실무를 담당했던 중인층에게 유용했다는 점에서 통치 체제 강화에 적지 않게 일조하였음이 눈에 띈다. 내명부 최고위층(대비, 중전)들의 언문교지나 현종의 유시를 백성들이 언문으로 번역해 돌려보던 것처럼 공식 통치행위에서도 언문이 곧잘 사용되고 있었는데, 대비나 중전이 자지(慈旨)를 내린 것부터가 고려시대에는 전례가 없던 일임을 생각하면 이러한 변화에 한글의 지분도 적지 않게 평가할 수 있다.

세종이 오로지 백성들을 위해 한글을 지었다면 정작 그의 치세에 한글로 번역되거나 반포된 책들이 《월인천강지곡》 같은 불교언해나 이성계의 역성혁명(실패했으면 빼도 박도 못 하는 역모다)을 정당화하는 《용비어천가》 등의 책들 말고는 왜 그다지 주목할 만한 것이 없는지도 고려해 봐야 할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훈민정음》의 주된 창제 사유를 통치 체제 강화에서만 찾는 것은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한 채 판단하는 오류이다. 애초에 양반들을 비롯한 지배층의 편의성이 주된 사유였다면 만들 때 반포 사유로도 그것을 내세우는 편이 훨씬 설득력 있고 반대에 부딪힐 확률도 훨씬 줄어든다. 물론 최만리와 같은 보수파는 이조차도 "이미 이두 잘 쓰고 있는데 언문이 왜 또 필요함?"이라며 반박했다.

더욱이 훈민정음의 창제는 이후 양반 지배층 이외의 계층들 사이에서도 문화를 꽃피우는 근본이 되었다는 점에서 단지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 세종의 궁극적 의도가 이룩됐다고 볼 수 있다. 최만리의 상소 사건 때 세종이 정창손을 콕 집어서 "넌 삼강행실도를 언문으로 번역해도 효자 열녀가 안 나온다니 그게 선비라는 놈이 할 소리냐?"라고 갈구면서 오히려 언문을 통해 충신, 효자, 열녀가 무리로 나올 것이라고 말한 걸 보면 이미 반포 당시부터 일반 상민층을 대상으로 하는 언문 번역사업은 구상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의 통치철학인 유학의 이상인 '만민이 가르침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 즉 신분여하를 따지지 않고도 가르침을 통해 군자가 될 수 있단 것을 세종이 보다 쉬운 문자인 훈민정음을 통해 구현하려 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세종은 정창손을 보고 성리학자로서, 그리고 성리학을 통달했으니 이를 가지고 사람들을 계몽시키도록 정치를 하게 뽑은 관리로서도 실격이란 말을 한 것이며 실제로 이 후 정창손은 파직된다.

일본의 언어학자 노마 히데키는 저서 《한글의 탄생》에서 당대 조선에서 사용되던 기록은 모두 붓을 사용하여 한자로 쓰인 것이었음을 지적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바로 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붓으로 글씨를 쓸 때에 생기는 획의 삐침이나 획 사이의 여백, 그리고 글씨를 이어서 쓰는 연서 등은 필연한 것이자, 동시에 글씨의 형태를 완성할 때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자는 연필 등의 다른 필기구로 쓰이지만 이러한 삐침은 사라지지 않고 획에 포함되어 유지되고 있다. 만일 사대부들의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서 글씨를 만들었다면 당연히 그들이 사용하는 필기구인 붓을 사용할 것을 전제로 자형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자모만큼은 그러한 삐침 등이 완전히 생략된, 다시 말해 나뭇가지와 같은 원시적 도구로도 충분히 쓸 수 있는, 선과 네모, 원으로 이루어진 간결함의 극치를 보인다.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붓을 쓰던 시대에 훈민정음은 자형을 만드는 단계에서 이미 을 쓰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만들어졌다. 노마 히데키는 훈민정음의 극도로 단순한 모양은 붓과 먹, 종이 같은 필기 도구를 살 형편이 안 되는 백성들까지도 문자를 쓰게 될 것을 배려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측했다.

저자의 말을 덧붙이면...
'훈민정음은 어리석은 백성이 모래 위에 나뭇가지로 낙서하듯 그리기에 어려움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 참고로, 훈민정음에 연서와 삐침이 등장한 것은 창제 후 수 세기가 지나고 궁체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이와 비슷하게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많은 문자들이 대개 복잡하면서 장식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실용성만을 고려하여 장식성을 완전히 배제한 초창기 훈민정음의 모양은 어떻게 보면 당대의 서체 미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전위적인 형태이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거의 근대 모더니즘을 연상케 한다.

즉 세종이 한글을 만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훈민정음》 서문에도 잘 나와 있듯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펼칠 수 없는 백성들을 위해서였다.

12. 왕실에서 본 훈민정음

'언문'이나 '암클'은 구한말에 살았던 한글 학자들의 증언이 있으므로 창제 이후 구한말까지 양반 식자층에서 한글을 얕잡아 보는 분위기가 쭉 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하지만 조선시대 내내 '왕실의 공식 견해'는 한글 비하와는 매우 동떨어진다.

조선 왕실의 공식 견해에 따르면 훈민정음은 하늘이 내린 위대한 성인(聖人)이신 세종대왕범인(凡人)을 초월한 성지(聖知)로서 지어낸 글자라고 말하고있다. 여기에는 세종대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조선 왕실의 정통성과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세종대왕의 업적을 드높이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 이순간에도 모든 사람들이 널리 쓰는 문자보다 세종대왕의 위대함을 알기 쉽게 드러내는 업적은 없다.

한글로 쓰인 문장은 속된 것이며 낮은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글이 문제였다기보단 한국어로 된(=한문이 아닌) 문장을 격이 낮고 속되다고 인식했을 가능성이 크다. 비슷하게 전근대 중국에서도 입말을 그대로 쓴 것은 백화문이라 하여 속된 말로 인식했고, 문장을 쓸 때는 고문(古文)을 써야만 했다. 중화권과 약간은 동떨어진 일본마저 자기들 글인 가나(仮名), 즉 가짜글 임시글 취급했으며 한자어를 마나(真名), 즉 진짜 글자 취급을 했다. 지금도 히라가나와 가타가나의 취급 차이가 있기도 하고.

그와는 상관없이 문자 자체는 왕조의 위업으로 여겨져 조선시대 내내 극한 칭송의 대상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며, 조선의 역대 왕들도 한글을 천시하기는커녕 되려 경서 언해본을 발행시키는 등 한글 전파에 힘을 썼다. 왕이나 왕족들이 한글로 작성한 편지는 매우 찾아보기 쉽다. 여기 참조.

다만 위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편지를 한글로 보낼 때 보내는 이 혹은 받는 이 중에는 여자가 많았다. 과거시험을 보려면 한문을 알아야 되었는데 여자는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고 그만큼 한문을 따로 익힐 필요성이 적기 때문이었다. 편지 전체가 아니라 단어 일부를 한글로 표기하는 일도 있었다. 정조는 심환지와 주고받은 어찰 중 한글로 뒤죽박죽(원문은 뒤쥭박쥭)이라고 적은 것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또한 공문서도 대부분 한문이나 이두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관리로 일하려면 한자를 아는 것은 필수였다.

13. 연산군의 훈민정음 탄압

연산 10년(1504) 7월 19일, 연산군의 처남이 되는 신수영(愼守英 ?-1506)에게 웬 사람이 찾아와, 자신이 이규(李逵 1454-1505)의 심부름꾼이라고 하면서 서찰 하나를 전해주었다. 신수영은 서찰을 연산군에게 은밀히 올렸는데, 연산군이 읽어보니 자신을 비방하는 언문(한글) 투서였다. 내용은 몇몇 의녀들이 모여서 "우리 임금이 신하들 죽이기를 파리 잡듯이 하고 여자를 밝히니 반드시 화가 있으리라."라고 말했으니 벌하라는 것이었다.

연산군은 투서의 내용에 노하여 다음날(7월 20일) 도성의 문을 닫고 투서자를 추적하며 투서에 언급된 의녀들을 국문하였다. 그런데 막상 조사해보니 의녀들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며, 이규 또한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였다. 누군가 자신을 감추고 이규와 의녀들의 이름을 팔아 연산군에게 욕을 한 것이다. 그러나 끝내 진범은 잡히지 않았으며 억울하게 고초를 겪은 사람만 늘어났다. 또한 같은 날에 한글 사용을 전면 금지하고 쓰거나 배우는 자는 무조건 체포하며, 이런 사람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같이 벌하라고 명령하고, 관련 서적은 소각하도록 하였다. 그 외에도 일일이 한글 아는 자를 추려 투서와 필적을 비교하여 찾아내도록 하였다.

하지만 훈민정음은 이미 세종대왕의 확고한 업적으로 민간에 자리잡았는데 이를 억압하였으니 연산군의 행동은 곧 조상이자 선대 왕인 세종대왕의 업적을 모독하여 그 포악성이 만대에 드러났음을 알리는 사례이기도 하였다. 세종대왕은 연산군의 고조부이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고조부까지는 제사를 지내는 집들이 많았다. 딱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인데 엄청나게 가까운 직계 조상이다.[39]

연산군도 처음 분노했을 때는 모든 한글을 없애버릴 기세였지만 노기가 조금 가라앉자 자기가 생각해도 아니다 싶었는지 명령을 내리고 이틀 만에(7월 22일) "언문을 쓰는 자를 벌하고 언문으로 구결을 단 책을 불사르되, 한문을 언문으로 번역한 책 따위는 내두라." 하고 슬쩍 숨통을 열어주었다.

언문을 금지한 지 반 년도 되지 않은 12월부터 연산군 본인이 언문으로 번역하라고 지시한 전교가 수두룩하다. 연산군이 놀기 위해 만든 흥청의 음악교본도 언문으로 제작되었다. 진지하게 언문을 탄압할 생각이 아니라 홧김에 내린 명령이라 은근슬쩍 철회한 듯하다. 언문으로 번역하라는 전교가 다른 역대 조선 왕들보다도 많기 때문에, 하교한 것만 보면 오히려 한글을 장려했다고 보일 정도다.

그런데 연산 11년(1505) 5월에는 겸사복(일종의 왕궁 호위무사) 한 명이 첩에게 언문 편지 한 통 썼다고 의금부에서 잡아들였다. 연산군 본인은 반 년 전에 역서를 언문으로 번역하라고 지시해놓고는 갈팡질팡했다. 과연 연산군답다. 아무튼 연산군 시기 한글 탄압 정책은 스스로도 지키지 않으니 시간이 조금 지나자 어느새 사라졌다.

14. 숙종

숙종이 《훈민정음》 후서를 썼다. 왕이 후서를 썼다는 것은 숙종대에 새로이 훈민정음의 중간본을 냈다거나 내지는 이와 관련된 책을 낸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게 하지만 실록에 아무 기록이 없어 그냥 숙종이 책과 무관하게 쓴 것으로 보인다.

숙종대에 남구만"요새 식년시에서 구송만 시키니까 시골애들은 아예 언문으로 공부해서 한문으로 서찰도 못쓰는 것들이 과거급제자라고 들어오는데 이러니까 삼사에는 쓸 사람이 없어서 허덕이죠."라고 지적한 바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정규시험인 식년시 응시자들이 이럴 정도였으면 지방 벽지에서는 지역사회가 언문으로 돌아갔을 가능성도 높아보인다. 다만 아직까지는 그 수준의 물적 증거가 소개되지는 않았다.


[1] 설음과 치음의 기본음이 되는 ㄴ과 ㅅ을 모양의 베이스로 삼지 않았다는 뜻으로 보인다.[2] 강모음[3] 아래아를 기반으로 모음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 아래아를 다른 모음에 비교하여 어떤 것에 치우치지 않는(입을 완전히 벌리거나 완전히 다물거나 오므리거나 하지 않는) 중립 모음으로 간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어에서도 이와 비슷한 것이 있는데, schwa(중설 중모음 [ə\])가 이에 해당한다.[4] 중모음[5] 약모음[6] 원순 모음[7] 비 원순 모음[8] ㅣ 발음과 ㅗ 발음을 연이어 하는 발음이라는 뜻이다[9] 이 세 모음은 모음조화에서 양성 모음으로 분류된다.[10] 이 세 모음은 모음조화에서 음성 모음으로 분류된다.[11] 예를 들면, ㄹ은 1획으로 적을 수 있지만 처럼 3획이다.[12] Ledyard, Gari. "The International Linguistic Background of the Correct Sounds for the Instruction of the People." In Young-Key Kim-Renaud, ed. The Korean Alphabet: Its History and Structure.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7.[13] 시계방향으로 90도 돌려서 봐야 한다.[14] ㄱ의 윗부분을 감획한 후 ㅣ와의 분별을 위해 이응을 아래에 더한 것[15] 연규동, and 최계영. "훈민정음 후음자 ‘ㅇ’의 기능과 파스파 문자." 국어학 (國語學) 90 (2019): 83-109.[16] 연규동. "훈민정음의 음절 이론과 파스파 문자." 국어국문학 188 (2019): 5-31.[17] 한자는 신체 기관, 사물, 생각 등을 본떠 만들었고, 또 그 글자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며, 한글도 목구멍, , 치아 등의 발음 기관을 본떠 만들었다. 이러한 공통점 때문에 한글과 한자는 서로 비슷하게 생긴 자형이 많다.[18] 성리학에 마음을 둠.[19] 유학자들이 즐겨야할 기예 6가지. 몸가짐과 마음가짐 올바르게 하는 것(禮), 음악(樂), 활쏘기(射), 말타기(御), 글쓰기(書), 수학(數).[20] 시민(時敏)은 창경궁의 동궁인 시민당을 말한다. 시민당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던 장소로 해석하면 "언문 창제는 세종의 왕세자의 공부에 방해만 된다." 정도가 되겠다.[21] 시를 쓰거나 서화를 그리는 것을 말한다.[22] 세자가 국가의 행정을 돌보고 있는데, 어떻게 훈민정음 창제에서 뺄 수 있겠는가[23] 梵語, 고대 인도의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를 표기하는 문자[24] 신미대사의 동생인 김수온이라는 유학자도 세종에게 총애를 받아, 병조정랑, 지영주군사, 판중추부사, 호조판서 등 여러 관직을 제수받았다.[25] 훗날 세조가 되는 동생 수양대군이 철저히 몸을 사릴 정도였으며, 야심만만한 왕제였던 수양은 형인 문종이 붕어(崩御, 왕의 죽음을 뜻함)한 뒤 너무 어렸던 조카 단종이 즉위한 뒤에서야 야심을 드러냈다.[26] 불교 측의 주장이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것이 양반들이 훈민정음을 업신여겼으니 양반으로 가득한 집현전에서 훈민정음을 만들었을 리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훈민정음을 만든 공로를 가로채고자 역사를 조작했다고도 주장하고 있다. 시작부터 엉망인 주장인데, 조선실록에는 집현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세종대왕이 직접 창제했다고 나온다. 즉 양반들은 '업신여기는 훈민정음 창제의 공로를 집착해서 가로챘다'고 주장하고 있다.[27] 분명 역사서에서도 기록되어 있으나 현실적으로 무리라서 신빙성이 의심받는 기록이 있긴하다 예시로 삼국지의 칠종칠금 이건 연의의 창작이 아니라 자치통감에서도 칠종칠금을 묘사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전투에서 적의 장수를 사로잡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한 번도 하기 힘든 일을 일곱 번이나 반복했다는 점에서 당연히 신빙성을 크게 의심받고 있다. (여러 사료에서 버젓이 나온 내용을 우리가 보기에 터무니없어 보인다고 무작정 허구 취급하는 것도 그다지 좋은 태도는 아니다) 신미창제설은 세종이 혼자서 한글을 창제할수 있는건 힘들다, 주변인들(문종,세조,집현전학사,신미)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는 현대인의 관점으로 기존 기록을 곡해하고 왜곡해서 마치 신미가 한글창제를 일부 기여한게 아니라 혼자 다 한것마냥 사설을 만들고 현재의 정설을 뒤집으려는 것은 비판받아야 한다.[28] 이건 불교측이 실록을 입맛대로 해석하는 경향이 크다. 애초에 신미 우국이세 언급되는 부분은 문종실록에서 나오는데 왜 남겼냐는 자기당착 모순에 빠진다.[29] 애초에 글자를 배우는것과 배운 글자를 토대로 글자를 창조해내는건 별개의 영역이다. 약사가 외과수술을 하고 외과의가 약을 제조하는 격. 애초에 훈민정음 서문이 나랏'말'과 '문자(한자)'가 다르기에 세종은 처음부터 백지부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30] 이에 대한 반응이 가관인게 원각선종석보라는 직접 증거는 아쉽게도 위작으로 판명되었지만 신미대사가 세종에게 총애를 받았다는 간접증거(우국이세 혜각존자祐國利世 慧覺尊者 시호)가 남아 있다고 한다. 당연히 이런 변명은 한글창제에 대한 간접증거가 절대 될수 없다. 불교가 입맛대로 이 우국이세=나라를 이롭게 하였다. 를 한글 창제로 해석하듯 해석에 따라서는 세종 자신이 창제한 한글을 백성들에게 보급하는데 신미 대사가 공이 있으니 이롭게 하였다고 해석이 가능하며 창제보다 보급의 공이 더 설득력이 있다. 더구나 임금이 중에게 내린 법호나 시호에 '세상을/사람을 이롭게 했다.'는 구절은 고려시대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런점을 감안하면 우국이세를 한글 칭제의 근거로 삼기에는 비약이 너무 심하다.[31] 당연한 이야기지만 신미창제설이 '정설'로 받아들일려면 최소한 '뒷받침해줄 그 시대의 기록'이 기본적으로 있어야 한다.[32] 예시로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으로 공식 인정을 받자 가장 반발하던 게 중국이었는데 중국은 금속활자로 28부 인쇄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239년 이전에 금속활자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존재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는 중국이라는 주장을 하지만 '이를 뒷받침 해줄 활자본이나 유물이 없어' 인정 받지 못한다. 이보다 더 기록 자체가 없는 한글 신미 창제설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에 불과하다. 애당초 기록을 뒤집을 만한 역사적 물건이 아예 없으니 역사관련 국가기관에 제시도 못하는 실정이다.[33] 참고로 이 위서의 존재는 2002년대에 1999년 일타스님(현재 사망)이라는 사람이 중국에서 복사한 사본이고 그걸 모 대학 교수에게 기증 이후 학계에 나왔으나 딱히 주목받지 않았다.[34] 당연히 대중들은 그렇게 까지 바보가 아니라서 이 신미 창제설에 동조하긴 커녕 오히려 반발했으며 대한민국 불교계의 이미지만 나빠지는 중이다.[35] 국어 강사로 이름 날렸던 서한샘의 강의에서 나왔다.[36] 숭유억불 기조에 따른 멸시적 발언이다. 정작 승려들은 불경 때문에 한문을 익히는 게 필요했다. 한문을 안 쓰는 현재도 승려들은 한문이 필수다.[37] 예컨대 양반 집안의 여자 어른.[38] 드물지만 토지매매 계약서 같은 것.[39] '4대조'이지 '4촌'이 아니다. 직계 조상과는 촌수를 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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