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蒙語類解조선 영조 44년(1768년)에 이억성(李億成)이 개정하여 간행한 몽골어 단어 사전. 총 2권 2책인데 서울대학교 규장각, 일본 도쿄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2. 편찬 배경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몽골의 흥성을 걱정하며 몽골어 교육에 매진해 왔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이전 왕조였던 고려가 몽골족에게 나라를 거의 내어주었던 것에 따른 방어기제였지만 이와는 별개로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몽골에 대한 걱정은 더욱 커졌다.병자호란이 끝난 다음날인 인조 15년, 즉 1637년 2월 1일자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이들은 청나라 군대와 함께 당시 조선을 침공한 병사들이었다. 이처럼 청나라 만주족들과 몽골족은 뚜렷한 구분이 없이 서로 형제처럼 지냈다.
즉, 몽골족이 융성하여 원나라를 세웠을 땐 고려의 북방에 있던 여진족이 몽골족에 협조하여 고려를 침공했었고 이번에는 여진족이 융성하여 청나라를 세우자 몽골족이 협조하여 같이 조선을 침공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몽골족과 청나라 만주족의 전신, 여진족은 서로 국경의 경계가 없었고 한쪽에서 들고 일어나면 다른 한쪽에서 협조를 하여 같이 들고 일어나는 식이었다.
몽골족과 여진족은 비록 문화와 민족은 달랐어도 국가적으로는 서로 말타고 오고가는 친족 관계의 민족들이었다. 다만 몽골은 좀 더 조선에서 떨어져 있었고 여진족은 바로 조선의 인근에서 국경선을 맞대고 있었던 민족이었을 뿐이다. 이런 관계로 인해 조선은 청나라 만주족만큼이나 몽골족도 무시할 수 없었다.
1737년 5월 14일에는 좌의정 김재로가 상소문으로 몽골족의 발흥과 관련 역관들의 몽골어 구사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지적하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몽골은 종류가 가장 강성하여 실로 다른 날의 깊은 우려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이 옛날과 지금이 다르기 때문에 통역관이 몽골의 글을 읽어 익힌 자도 몽골 사람을 만나면 전혀 언어가 통하지 못합니다. 지난해 역관 이창경이 연경에 갔을 적에 몽골 사람과 서로 언어를 질정하여 책을 만들어 가지고 왔고, 요즈음 다시 청문문감을 얻어 왔으니 이제부터는 몽골어를 통달하여 해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사역원 제학의 예에 의거하여 몽학총민청을 설치하고 권과하여 강습하고 잡과에서 시험하여 뽑도록 하소서."
영조 33년, 즉 1757년 11월 3일에 영조가 몽골에 대한 걱정을 표시한 기록이 있다.
"중원은 회복할 기약도 없고 몽골인들의 세력이 점점 번성하여 가니 나는 진실로 그것을 근심하는 바이다. 어찌하여 경들은 목전의 계획만 생각하고 후일을 염려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렇게 몽골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조선은 끊임없이 몽골에 역관과 사신을 보내고 몽골어 교육에 매진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나온 책 중 하나가 몽어유해다.
3. 내용
내용 부분은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을 참고하였다.정확한 편찬 연대는 불분명하지만 기록상으로 1768년에 이억성(李億成)이 개정하여 간행하였다고 한다. 같은 외국어 단어 암기책이었던 역어유해(譯語類解), 동문유해(同文類解), 왜어유해와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 것으로 보고 있다.
크게 상권, 하권, 보편, 어록해로 구성되어 있다. 상권에 「천문(天文)」·「시령(時令)」·「지리(地理)」등 27문(門) 1,916항(項), 하권에 「전농(田農)」·「미곡(米穀)」·「채소(菜蔬)」 등 27문 1,926항, 보편에 「천문보(天文補)」·「시령보(時令補)」 등 48문 1,475항이 실려 있어 도합 5,317항이 수록되어 있다.
몽어노걸대, 첩해몽어와 함께 몽학삼서(蒙學三書)로 꼽히며, 한자, 몽골어, 한국어가 같이 실려 있어 몽골어뿐 아니라 한국어와 중국어를 연구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다. 예컨데 설렁탕의 어원에 대한 단서도 나오는데 "몽골에서는 맹물에 고기를 넣어 끓인 것을 ‘空湯(공탕)’이라 적고 ‘슈루’라 읽는다."는 것으로 보아 설렁탕은 원 간섭기에 전파된 공탕을 몽골어로 읽은 것이 어원임을 알 수 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