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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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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3. 내용4. 노동의 역사
4.1. 산업혁명 이후4.2. 현대
5. "노동의 신성함"에 대한 비판6. 노동의 가치론
6.1. 교환노동 외에도 경제적 가치를 인정해 달라는 의견
6.1.1. 존재 자체에 경제적 가치를 달라는 의견
6.2. 대가가 형편없어도 노동해야 되는가
7. 기본소득, 기초소득8. 각종 오해와 통념들9. 기타10. 관련 항목11. 관련 문서


勞動
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밥먹지 않는다.
- 중국의 승려 백장선사[1]
Arbeit macht Frei.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
-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를 포함한 웬만한 수용소 정문에 써져 있던 독일 격언.[2]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
창세기 3장 19절

1. 개요

사람의 생계·생존·생활을 위한 모든 것들 또는 그것으로 바꿀 수 있는 화폐를 얻기 위해서 특정한 대상이 육체적·정신적으로 행하는 모든 활동들. 그 시간만큼 사람은 꼼짝없이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희생해야 된다. 얼마의 돈을 위하여!

누군가에게는 노동은 고통이며 인격포기일 수도 있다. 자아실현을 위해 노동을 원해서 하는 사람도 있지만 원하지 않음에도 하는 사람이 있다. 무조건적 노동의 미화나 신성화의 위험성은 인간권리인권, 존엄성을 자칫 무시할수 있다는 점이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산업혁명으로 인력 대신 기계화, 자동화 대량생산이 가능한 시스템이 등장했고, 1960년대 이후부터는 전세계적으로 형편없는 대가나 보상을 거부하고 노동 대열에서 이탈하는 움직임도 등장하고 있다. 노동에 대한 무조건적 미화의 문제점은 큰 액수이든 적은 액수이든 돈과 자본에 자신의 권리와 인격, 시간을 고스란히 종속시키는 것을 합리화한다는 점에 있다.

2.

노동은 해도해도 줄어들지 않는 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단어 자체는 한자어순우리말이냐의 차이 뿐이지만, '일'이 일상적으로 노동을 표현하는 말이라면, '노동'은 일에 비해 경제학적인 용어로 많이 쓰이는 편이다.(특히 마르크스경제학에서.) 이 때의 (경제활동)을 벌거나 어떠한 목적을(재화창출) 달성하기 위해 투입되는 인적 자원(즉 인간)의 행동을 이르는 말이며,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꼭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돈이 엄청 많다면 딱히 할 필요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사람이 먹고 살고 싶다면 반드시 해야 할 것들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음식을 먹고 열량을 얻어서 생존해야 하는 소모적인 존재이며 이로 인해서 생존을 위한 노동을 하지 않으면 기아단계를 거친후 아사에 필연적으로 이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노동을 하지 않더라도 생존할 수 있는 방법과 제도적 장치는 존재해 왔다. 복지제도와 세금, 가족주의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대개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수단은 자신이 갖추기를 원하는 분위기가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따라서 과거에는 물론 현대 사회에서도, 개인은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이걸 안 하면 먹지도 말라는 옛 격언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해질 만큼 일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기본 중의 기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노동을 하지 않는다 해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시간만큼의 개인의 인격과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심하면 대규모 흉년에 이은 기아사태가 발생하거나 폭식이 종교적 죄악 으로 지정될 정도로 빈곤했던 과거와는 달리, 풍요로운 현대사회에서는 대규모 기계화 농경을 통한 곡물값의 하락이나, 운송수단의 발달로 식자재의 끊임없는 공급으로 한 사람의 노동이 더 많은 사람을 부양할 수 있게 되었기에 노동을 하지 않는다 해서 생존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또한 과거보다 적은 강도의 노동만으로도 생존에는 충분해져, 노동의 가치가 떨어지고, 생존 문제로 필수적이었던 스스로의 생존을 위한 노동이 다른 사람의 노동에 의존해도 충분히 대체 가능해졌기에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이 아니게 되었다. 그렇기에 현대사회에서는 노동이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닌만큼 반드시 할 필요가 없고 노동을 하는 시간만큼의 개인의 인격과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며 노동은 고통, 혹은 인격을 포기하는 행위라 하며 노동 자체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점에서 놓고 본다면 노동은 고통, 혹은 인격을 포기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는 문제다. 물론 이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하는 현대사회가 유지되고 발전하는 이유가 다른 사람의 노동 덕분이기는 하다. 한편으로, 노동을 저주로 보는 관점 또한 존재한다. 가령 성서에서는 창세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대가로 아담이 끊임없이 노동해야 한다고 신이 선언한 바 있는 걸 보면..

참고로, 일은 직업을 가리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영어론 job 혹은 work라고 한다. job은 직장이라는 뜻이 강하고 work는 노동이라는 뜻이 강하다. 역시 영어 격언으로 job(일)은 study(공부)보다 재미있게 해야 한다고 한다.

3. 내용

돈이 엄청 많다면 딱히 할 필요가 없지만, 보편 복지가 활성화되지 않은 사회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이 살고 싶다면 지금 반드시 해야 할 것이다.

복지제도가 잘 갖춰지지 않은 사회에서 노동을 안 하고 가족에 빌붙어 집에만 쳐박혀 있는 사람을 히키코모리니트라 칭하며, 빌붙을 가족이 없거나 자존심 상 집을 나오는 경우 노숙자가 되거나 눈밭을 떠돌다 결국 얼어죽는 베짱이가 될 확률이 높다.

인간이 생존하고 생활하기 위해서는 의식주를 위한 물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물자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물자를 얻어낼 대상인 자연에 일정한 작용을 가하여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시시대에도 나무에 달린 열매를 채취하는 행위, 사냥, 물고기를 잡는 행위 등과 같은 수렵 활동이 필요하였으며, 농경사회에서는 수렵 활동을 보충한 농업이, 근대산업사회에서는 각종의 생산활동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일련의 인간의 생존을 위한 물자를 얻어내는활동 전체를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활동을 노동이라 한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부터 생존수단의 획득이 필연적이므로 어떠한 사회에서도 그리고 개인으로도 노동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자연 그대로의 노동대상을 상대로 노동해도 물자를 얻을 수 있고, 이러한 노동의 산물인 원료·원자재를 대상으로 하여 노동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노동대상에 일정한 작용을 하거나 또는 그것을 변형시키는 노동을 함으로서 인간의 생존과 생활에 필요하며 유용성을 높이는 활동을 한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를 뜻하기도 한다.

4. 노동의 역사

노동이라는 행위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 계속되어온 것이며 생존과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나 노동이 하나의 사회적 문제가 된 것은 오히려 계급제 사회의 출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즉, 하위 계층이 일을 하는 대가로 상위 계층이 노동을 하지 않으며 노동의 결과물을 영위하기만하는 문제가 발생된 것이며 현대의 자본제 사회는 노예 계층의 노동의 결과를 무위도식 했던 상류층이 존재하던 노예제 사회와 차이점이 적다.이렇게 무위도식 하는 이들이 다시 전면에 등장하면서 자본제 사회에서 노동도 하나의 사회문제로서 대두되었다. 여기서 잠깐 사회적 노동으로서의 노동양식의 역사적 변화를 살펴보면, 원시공동체사회에서는 지배와 피지배관계가 아직 제대로 출현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채취·수렵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당시의 사회에서는 노동의 양식도 다분히 공동체적인 양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농경의 시작으로 인구부양력이 늘어나고 노동력이 필요해진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고대사회에서의 노동은 이와는 다른 양식을 취하였다. 이 사회에서는 생산적인 노동을 노예가 담당하였으며, 그 노동의 결과물은 대부분 노예의 소유주인 상류층들이 영위하였고 노예는 우마(牛馬)와 같은 노동수단·작업수단으로 노예소유주의 재산이었다. 따라서 노예는 매매나 교환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들에게는 어떠한 인격도, 소유도 허용되지 않았다. 계급이 생기기 시작한 이래로 지배-피지배 계층의 존재로 피지배층의 노동이 대부분 지배계층의 생존을 위해서 사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노동도 자연히 천한 일로 치부되었고 이중 로마인들은 노동없는 삶을 최고의 삶으로 여겼다.[3]

이후 중세사회는 봉건제가 지배적이었다. 봉건제 하에서, 그중에서도 서양은 농노제를 통해 농노가 노동을 담당하였으며, 농노는 토지를 비롯한 생산도구를 모두 자신이 소유했으나 봉건제 사회에서의 경제 외적 강제에 의하여 봉건영주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다만 농노에게는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소유가 허용되었고, 생산은 형식상 농노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농노는 생산에 관련되는 모든 책임을 스스로 담당하였지만 봉건적 지대(地代) 등에 의하여 봉건영주에게 가혹하게 수탈당하고 있었으나 단순히 노예-주인의 관계였던 과거와는 다르게 지배층인 기사계층은 농노 계층을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야하는 의무를 수행하였기에 무력 제공 및 치안 유지등의 노동을 실질적으로 해야했다.

4.1. 산업혁명 이후

산업혁명에 이어서 등장한 자본제 사회에서는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와 노동력을 자본가(기업)에게 판매하는 노동자가 등장하게 된다. 자본제 사회는 생산수단(토지·공장·기계 등)이 노동담당자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리하여 노동자는 과거에 존재하던 봉건제적인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났으며 스스로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의미에서 이중적으로 자유로운 몸이 된다. 자본제 사회는 상품화가 극도로 발달된 사회로 생산은 생산자 스스로의 사용을 위함이 아니고 기본적으로 판매를 통한 이윤의 추구를 위해 이루어지는 사회이다. 이 사회는 또한 노동력의 상품화가 비로소 이루어지는 사회이며, 노동자는 스스로의 노동력 판매의 대가로서 임금을 받는다. 이러한 노동양식의 역사적인 변천은 새로운 발명·발견과 기술혁신을 통한 생산성의 지속적인 향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자본제 사회도 산업혁명을 통한 근대적인 기계제 대공장제도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Marx, K.)가 말한 생산력의 발전과 그에 상응하는 생산관계의 발전은 바로 이러한 측면을 지적한 것이다.

4.2. 현대

다음에는 이렇게 상품화된 자본제하에서의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이 지니는 특징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일찍이 마샬(Marshall,A.)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여느 상품과 다른 점을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로 지적하였다.
①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지만 그 자신을 판매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4]
②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할 때 노동자 자신이 그 곳에 가서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노동력과 노동자는 분리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 점 때문에 판매한 것은 노동력이지만 노동자 스스로 사용자의 지휘·감독하에서 생산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형식적·법률적으로는 노사가 대등한 관계이지만 사실상은 지배·복종관계로 되기 쉬운 것이다.
③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사용여부에 관계없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자동적으로 소모되는 상품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궁박적(窮迫的:몹시 곤궁한 상태) 판매를 불가피하게 만든다.
④ 노동력의 판매자는 교섭상 불리한 입장에 서기가 쉽다.
⑤ 노동력의 공급(인구변동)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며, 가격(임금)의 변동에 대한 공급의 탄력성이 매우 작다.

이러한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지닌 불리한 특성 때문에 노사관계에서 항상 대등성을 견지하기가 어려우며 궁박판매·투매가 생기게 된다. 다시말해,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는 노예가 자신이 일하는 생산수단의 소유와 유리되었던 형태와 유사하게 대다수의 노동자가 자신이 하고 있는 노동도구 즉 생산수단의 소유와 벗어나 있다는 점과 노동력이라는 상품 자체가 불리한 특성을 가진 관계로 노예제 사회와 같이 자신의 노동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이를 위해서 불균형적으로 소모되고 있다는 것이다.

5. "노동의 신성함"에 대한 비판

노동은 신성하다고는 하지만 노동을 해야 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노동은 전혀 신성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일하는 시간 동안 인격과 시간, 체력을 고스란히 바쳐야 된다. 인간의 상품화, 기계부품화라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심하면 인권 이전에 인간의 기본 권리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을 하나의 도구, 수단으로 볼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다.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대한 몰이해이며, 다양성, 다원성의 가치를 무시하는 행동이다. 우선 그 시간 동안 얼마의 돈을 위해서 그는 그 시간을 회사, 직장, 혹은 업자에게 행동의 제약, 구속을 당하는 것이다. 근무시간 동안에 그 사람은 자신의 권리와 행동을 회사와 상사에게 고스란히 바쳐야 된다. 그 시간 동안 분명히 다른 일, 다른 활동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누군가에게 있어 노동은 전혀 신성하지 않을 수 있다. 몇 푼의 돈을 벌기 위해서 희생하는 시간동안 휴식을 더 취하거나 잠을 더 잘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여행을 하거나 자기계발을 할 수도 있다.[5] 노동은 기회비용과 마찬가지로 그 시간들을 희생해야 된다. 이러한 포기, 희생이 기쁘거나 달가운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6][7] 노동에 대한 과도한 예찬은 심하면, 여건상 혹은 어쩔수 없지만 노동이 맞지 않는 사람들을 악마화할 수도 있다. 당장 자동화, 기계화를 목전에 둔 21세기인데도 산업혁명 이후의 기준으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멸시하거나, 백수, 니트족, 실업자, 건달, 한량, 룸펜, 놈팡이 등 비하, 폄하, 비난하는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체력이 허약하거나,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노동이 적성에 안맞는 사람들의 존재들도 분명 소수가 있다. 자신의 현재 직장생활이 체질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사람, 전체주의 문화와 조직문화, 조직사회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상당히 부족한 편인 곳이 많다. 노동이 체질적으로 안 맞는 사람, 취직, 직장생활이 안 맞는 사람들이 반드시 귀족, 상류층들만은 아니다. 오히려 장애인, 정신질환자를 포함하는 취약계층 중의 취약계층일 수도 있다.

6. 노동의 가치론

본 문단은 심승현(2016)을 참조하였다.[8]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사람이 생존을 위해 행하는 경제적 활동'으로 보고 있다. 이 노동을 통해 사람들은 돈을 번다. 이 돈은 '역할가치, 교환가치'를 지닌다. 이런 돈의 특성 때문에 사람들은 대개 '교환노동'에 참여한다.

현대 사회의 노동은 대개 교환노동인데, 교환노동은 대개 재미없고 자유를 제약당하고 시간을 빼앗기고 기분나쁜 종류가 많기 때문에 이들은 강제노동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놀이, 호혜, 증여, 참여 등 교환노동에 포함되지 않는 부분들도 노동으로 재해석되어야 우리의 삶이 '자유로운 노동의 장'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한다. 교환노동에 대해 '인간의 상품화'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노동이 강제노동에서 놀이노동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실리콘밸리의 IT기업에서 점점 경제적 성과를 얻고 지지받고 있다. 근무시간에 낮잠을 잔다든지, 산책 시간을 준다든지 하는 개방적인 조직문화를 말한다.

노동요 까지는 안가더라도 근무시간에 음악듣기는 허용해야 하지 않을까?

6.1. 교환노동 외에도 경제적 가치를 인정해 달라는 의견

증여노동에도 경제적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여성학계에서 가사노동에 접근할 때 이루어지고 있다. 종교계에서는 종교활동 역시 경제적 가치를 달라고 한다. 지역사회를 위해 교통정리나 지역 방범 등을 하는 노동도 과거에는 부역, 징용의 강제노동 형태로 이루어졌다면 요즘은 공공근로처럼 경제적 가치를 인정해주고 있다. 징병제 역시 강제노동 형태가 아니라 모병제처럼 경제적 가치를 인정해달라는 주장이 생기고 있다.

또 노동이 필요할 때 교환노동 대신 증여노동으로 대체한다는 식의 접근도 있다. 공동체주의 (꼬뮨주의)가 이런 형태다. 현대 사회에 자리잡은 이런 공동체에서는 숙박비, 식비, 교육비 등의 비용을 거의 받지 않는다. 대신 공동체 구성원들은 밥하는 법을 배워서 요리를 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는 등 적극적으로 증여노동을 함으로써 비용을 줄인다. 그리고 쓰다가 필요없게 된 물건들은 공동체에 기부하여 잔존가치가 0이 될때까지 다같이 활용을 한다.

6.1.1. 존재 자체에 경제적 가치를 달라는 의견

일부 인문학자들은 사람이 사람 속에서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역할가치, 교환가치 외에 '그저 있음의 가치' (존재 자체의 가치)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관점이다. 예를 들어 중증 발달장애인은 일할 수 없는 사람에 해당한다. 이 부모들은 자녀와 함께 생활하면서 사람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결과 나온 답은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가치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심승현 (2016)은 '사람이 살아있음 자체로서 재화나 서비스를 창출'하는 것을 '참여노동'이라고 정의한 뒤 이 역시 경이롭다고 한다. 예를 들어 중증 발달장애인은 상품 생산이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살아 있기 때문에 사회서비스 수요를 창출한다.

이들이 보는 역사에서는 20만여년의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 속에서 '경제적 활동'의 역사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놀이, 예술, 사냥, 휴식 등 다양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다양한 삶 자체가 곧 노동이었다.

이들에 따르면 사랑에 기반을 둔 신뢰와 호혜의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민주적 시민사회의 의식 있는 참여를 끌어내야 한다. 또 기본소득제를 전면시행하여 교환노동을 하기 싫은 사람은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게 해 주어야 행복한 사회가 만들어진다. 이런 제도로 인해 노동하지 못해 존재가치마저 잃은 사람들을 구조할 수 있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청년들, 나이 많은 사람들, 아픈 사람들, 장애를 느끼는 사람들' 등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는 비판이 존재한다. 현재 장애인 수급제도나 기초생활수급자 보호 등은 인간의 존재 자체에 경제적 가치를 인정하고 그들이 굶어죽지 않게 내버려두지 않고 보호하는 제도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지는 몫이 늘어날수록 일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몫은 줄어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 자체에 경제적 가치를 많이 매길수록 재원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 재원 문제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기본소득제 문서 참조.

6.2. 대가가 형편없어도 노동해야 되는가

노동의 신성화의 문제점은 노동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 노동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을 과도하게 비하, 멸시하거나 공격하는데 있다. 또한 노동이 안 맞는 사람, 노동에 참여할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 논리를 정당화한다는 것도 문제점이다. 대가가 없이 하는 노동조차 신성화해야 된다면 그것이 열정페이와 차이점이 있을지 의문이다.

인권의식의 향상과 함께 점차 노동보다는 자신의 소비나 즐기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이들도 프랑스, 독일 등은 1960년대 이후, 미국은 1970년대 이후, 일본은 1980년대 이후, 한국은 1993년 이후로 본격 등장하고 있다. 그렇게 성장한 한 세대가 이미 그 사회의 기성세대에 진입한 상태이다.따라서 변화는 불가피하다. 이때 발생하는 문제가 노동이 무조건 신성하다면, 이들에게 대가가 형편없거나 적은 대가를 받더라도 무조건 노동을 하라고 강요해야 되느냐 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대가나 보상이 형편없더라도 신성하다 할수 있느냐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선택할 권리도 있고, 거절, 거부할 권리도 있다. 맞지 않는 일, 대가나 형편이 형편없다고 느껴진다면 거절, 거부할 수도 있다. 대가나 보상이 형편없더라도 노동을 해야 된다면, 섬노예 등의 납치나, 역시 대가가 형편 없더라도 신분제 사회 하에서 노비노예로 생활하는 것도 정당화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동물의 세계라면 자기 스스로 생존이 어려운 존재는 당연히 도태되어야 옳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에는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인권이란 것이 있다고 여겨지기 떄문에 자기 스스로 생존이 어려운 사람은 당연히 도태되어야 옳다는 생각은 옳다고 여겨질 수 없다.노동을 무조건 신성시한다면 노동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의 선택권과 개성을 무시하는 문제에 봉착할 수 있다.

7. 기본소득, 기초소득

누군가에게는 노동이라는 것이 체질적으로 전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감정노동이든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말이다. 자세한 것은 기본소득제 문서 참조

8. 각종 오해와 통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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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술을 배워 두면 평생 굶을 일이 없을 것이다.
    • 이것도 기술마다 다르다. 시간이 갈수록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새로운 기술이 생겨나기도 하며 한때는 획기적인 기술들도 그 기술을 대체할 새로운 기술로 인해 도태되어 사양길에 오르는 경우도 많다.[9]
    • 웹툰 작가는 수요가 너무 많아서 절대로 굶어죽지 않는 직업 맞지만 미장공은 유로폼틀을 짜서 거기에 콘크리트를 붓는 공법이 생기자마자 바로 도태되어서 현재 밥을 굶고 있는 상황이다.
    • 물론 전기, 화공, 기계의 경우 배워두기만 하면 평생 굶을 일이 없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단, 화공의 경우 최근 들어 침체기에 들어서고 있고, 기계의 경우 점차 침체기에 빠질 위기에 놓여지고 있다. 그나마 전기는 상대적으로 매우 양호한 편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리 기술을 배웠다 해도 그에 걸맞는 자격증이 없으면 취업시장에서는 무조건 나가리다.[10]
  • 일하는 시간과 노동생산성은 정비례한다. 휴일이 많고 휴식이 길면 노동생산성은 떨어진다.
    • 어느 쪽이든 극단적이면 안 좋다. 하루에 365일 단순노동을 하면서 하루에 250일 고도의 지식노동을 하는 사람보다 높은 생산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후자는 휴식이 주어질 때마다 스트레스도 풀고 자기계발도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1주일에 하루 일하는 시간제 노동자가 1년 내내 일하는 전업 노동자만큼 결과물을 내놓고 능력이 쌓이길 바라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어디가 최적치인지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른데 국가별 1인당 노동생산성을 보면 얼추 최적치를 파악할 수 있다.
    • 네덜란드 VS 대한민국 네덜란드는 연간노동시간이 1,300시간에 1인당 국민소득 44,864$ VS 대한민국은 연간노동시간 2,200시간에 1인당 국민소득 27,561$. 네덜란드가 은행강도국가인가? 대한민국이 뻘짓국가인가? 심지어 연간노동시간 2,000시간이 넘는 4개국 대한민국, 칠레, 멕시코, 그리스 모두 GDP는 네덜란드나 연간노동시간이 1,700시간 수준인 일본보다 낮다.
  • OECD국가 중 한국의 노동시간은 압도적으로 길다. 하지만 노동생산성은 하위권이다. 2009년 기준 연간노동시간 2074시간으로 1위. 유일하게 2000시간이 넘는 국가이다. 반면 근로시간당 노동생산성은 25$로 뒤에서 3번째이다. 자료 솔직히 노동시간이 긴 것은 생산적 정도다. 사무직의 경우는 회사에 있는 시간이 긴 거지 노동시간이 긴 것이 아니다. 이 글을 회사 컴퓨터로 보고 있다면 딱이다.
  • 비슷한 것으로 "공부하는 시간과 성적은 정비례한다"가 있다.
  • 산업사회라면 몰라도, 현대의 후기산업사회에서는 쉬는 것도 노동에 간접적으로 도움이 된다. 대신, 빈둥빈둥 시간만 때울 게 아니라, 정말 잘 쉬어야 한다. 집약적 노동에 의존하던 기존의 생산환경은 이제는 가치창출, 지식근로 환경으로 옮겨가고 있고, 이 때문에 인간의 창의성과 혁신, 그리고 영감은 도리어 쉬는 시간에 끌어올려지는 경우가 많다. 괜히 "아이디어가 안 떠오르면 잠시 밖에 나가서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 는 충고가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나라는 일하는 것, 공부하는 것만 무식하게 가르친 탓에, 어떻게 쉬고 어떻게 노는 것이 잘 쉬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은 생활리듬이 망가지고 컨디션이 도리어 저조해지며, 늦잠에 나른하게 TV보기가 휴식의 전부인지라 리프레쉬가 사실상 안 되는 문제가 생기곤 한다. 또한 현대에 와서는 여가와 관련된 서비스업 산업의 중요도가 올라갔다.
  • 굳이 요즘의 산업 구조의 변화까지 끌고 올 것도 없이, 충분한 휴식을 취한 사람의 생산 능력이 더 우수한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월화수목금금금에 박봉과 12시간이 넘는 과중한 업무 시간에 찌들어가던 산업 혁명기의 생산량과 복지의 개념이 적용된 현대적인 산업 현장의 생산량을 비교해봐도 알 수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생산량의 증가를 감안해도 업무 시간과 업무 일자를 강제로 제한하는 현대의 업무 환경이 생산량이 더 월등하며, 이는 19세기 영국사회주의 운동가이자, 기업인이었던 리처드 오언에 의해 이미 증명되었다.[11]
  • 귀농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백수 및 무직자다.
    • 예전에 농어촌을 떠나 도시로 잦은 이주를 하였던 시절에는 귀농 및 귀촌을 하는 사람을 보면 도시에서 아무것도 못한 백수건달이나 무직자 취급을 받아왔지만 현재는 도시 직장에서 은퇴하거나 중퇴한 사람 또는 애초부터 귀농을 원했던 사람들이 증가하게 되면서 이러한 편견은 사라지게 되었다[12][13]. 또 경제불황과 장기화된 실업난 및 구직난까지 한몫하였다.
    • 또한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굳이 서울에 살 필요가 없어져서 귀농하는 경우도 있다.
    • 이와 비슷한 맥락의 편견도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아래 농어촌 문단으로.
  • 대기업의 고위 임원이 되면 외제차를 끌고 골프를 치러 다니며 온갖 호사를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 것이다.
    • 임원과 재벌의 일가는 별개의 개념이다.
    • 대부분의 대기업들의 고위 임원들은 계약직이다(…). 봉급도 빠방하고 고급 세단에 전담 기사, 개인 비서까지 딸려 주지만 그만큼 잔혹하리만치 일을 시킨다. 이에 대해 정작 당사자들은 "고급차를 주는 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라는 뜻, 기사와 비서를 붙여주는 이유는 업무 중에 한눈팔지 말라는 뜻"이라고 자조하기도 한다. 골프도 업무의 연장선이라 마냥 노는 것도 아니며, 저 라면 상무도 놀러간 것이 아니라(…) 업무 관련하여 출국하던 길이었다. 극악할 정도의 냉혹한 실적주의가 적용되기 때문에 오히려 불안 불안한 자리다. 중년의 임원들이 뛰어난 아랫사람들이 치고 올라오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고 토로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괜히 임원이 임시 직원의 줄임말이라는 자조가 있는 게 아니다.
    • 만일 당신이 일 중독자라면 꽤 행복할지도 모른다. 대신 가정에서 부모로서의 역할은 아예 포기해야 하니, 가정적인 성향이라면 거의 행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승진 한 번 할 때마다 집에서 잠을 자는 밤 수가 절반씩 감소한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 육체 노동을 하는 일꾼들은 월급 다음날 도망가는 경우가 많다.
    • 작업 도중에 도망가는 경우(...)도 있고, 애당초 일용직이라 딱히 소속이 된 것도 아니니 도망간다는 표현은 어폐가 있다.
    • 육체 노동자들이라도 당장 종사하는 직업 말고는 갈 곳이 없거나, 노동 강도만큼 보수가 충분하다거나, 그 직업 자체가 자신에게 천직으로 여겨지는 경우라면 거의 평생에 가깝게 종사하고자 한다. 먹물인데도 몸 쓸 일이 많은 고고학자나, 고생물학자, 지구과학자나, 무형문화재 이수자들은 그 직업을 천직으로 여겨서, 채굴하면 돈이 되는 석유나 각종 광물을 채굴하는 광부들이나 대기업의 생산직 노동자들은 빡센 노동 강도에 걸맞은 높은 보수 때문에 육체노동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외에는 교육 수준이 낮거나, 나이가 많다거나 하는 등의 이유로 계속 육체노동에 종사하지 않을 수 밖에 없기도 한다.[14]
  • 월급을 받는 직업은 무조건 안정적이다.
    • 최근에는 정직원 채용보다는 비정직원을 채용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옛날 얘기다.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월급을 받는 것일 뿐이지 몇 개월 단위로 계약하는 곳이 많기 때문에 안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계약이 끝나고 재계약을 하지 못하면 다른 일 찾아봐야 한다. 게다가 이런 경우는 이전 직장의 경력호봉도 인정되지 않는다.
    • 공공기관공기업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도 점차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을 늘리고 있다. 1사람이 8시간 일할 것을 2사람이 4시간 일하는 시간선택제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 연휴마다 인천국제공항 등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걸 보면, 힘들다 힘들다 해도 실상은 다들 배불리 먹고 살만하니 해외로 놀러 나가서 국부를 펑펑 써 버리는 것이다.
    • 조사해보기 전에는 모른다. 업무상 용건으로 출국하는 사람들, 답사, 봉사활동 등으로 나가는 사람도 분명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 설령 레알 해외에 나가서 돈을 펑펑 쓰고 온다 해도 그 자체로 도덕적인 문제제기를 할 수는 없다. 이들은 이 날을 위해 지금껏 근면 성실하게 일해 왔던 것이고, 그렇게 모은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는 전적으로 그 사람들의 개인적 영역이자 속칭 "남의 집 가정사"에 속하기 때문이다. 소위 국부유출이니 뭐니 하는 문제도 매국노처럼 취급하던 시절이 있었으나 현대에는 외국계 기업의 국내기업 인수나 국내 사업수익의 반출, 산업 스파이 등 다양한 이슈들이 떠오르고 경제활동에서 국경이 낮아짐에 따라 예전처럼 관광객 개인들에게 마구 몰아붙이지는 않는다.
    • 정말 부자들은 성수기와 비수기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해외를 오갈 수 있다. 즉, 연휴에 해외에 나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서민일 가능성이 평일에 해외에 나가는 사람에 비해 좀 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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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기타

작은 돈을 받고 다른 인간과 업무에 대한 불쾌감, 업무난이도에 따른 고통을 견디느니 부모와 주변의 눈치를 보더라도 노동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인간군상도 등장했다. 1980년대 영국에서 이런 유형의 인간을 개념하는 단어가 명명되었는데, 이를 니트족이라 부른다.

10. 관련 항목

11. 관련 문서


[1] 비슷한 표현으로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라는 격언도 있는데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서도 언급된다. 이후 공산주의권 국가에서도 이 구절을 일종의 정치 표어로 사용하였다.[2] 여담이지만 저 팻말은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이 명령을 받고 만들었는데, 팻말를 만들 때, 저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새로 들어오는 포로들에게 알리려고, 일부러 Arbeit의 "B"를 위 아래로 뒤집어서 붙였다고 한다. 출처:다큐멘터리 SHOAH[3] Csikszentmihalyi,'몰입의 즐거움',이희재 역,해냄,2010,p69에서 재인용[4] 그러나 그 시간 동안 그 사람은 회사, 직장에 의해 행동의 자유를 억압, 구속당한다.[5] 그래서 한국 기준 2010년 이후 공무원과 공기업에 학습휴가 개념이 등장했다.[6] 현직 직장인들도 불금, 불토, 월요병 등 출근하기 싫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7] 일이 좋아서 하는 경우도 적지는 않다만 그 대다수도 자기 일에 애착을 가지는 경우고. 남 밑에서 일하면서 일이 좋은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8] 사람과 노동에 관한 인문학적 고찰, 심승현 (2016), 부산교육대학교 석사학위논문[9] 대표적인 경우가 필경사이다. 원래는 글씨를 깔끔하게 잘 쓰고 필사를 빠르게 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직업이었으나, 인쇄 기술이 발달하면서 망했어요. 또한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인쇄 기술인 목판 인쇄가 대세이던 시절에는 인쇄공 개개인의 세공 기술이 매우 중요했으나, 이것도 활자의 보급으로 인해 필경사랑 같이 망했어요(...).[10] 또 평생 굶을 일이 없다는 것도 최소 기능장, 기사 이상은 취득해야 비로소 전문기술자로 대우를 받는다. 멋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무시하는 기능장, 기사의 합격률은 10%도 안 된다! 이는 가히 공무원 시험급 수준이다.[11] 공산주의의 역사를 논할 때 언급되는 공상적 사회주의의 제창자인 오언이 맞다.[12] 귀농을 원하는 사람 중에서는 원래 고향이 시골인데 도시에서 살다가 고향이 그리워져서 도로 내려온 사람도 있다. 사족으로, 귀농 문서를 보면 시골 현지인들의 텃세나, 오지랖 등으로 인해 귀농에 실패하고 도시로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원래 고향으로 돌아온 경우라면 이미 현지 사정을 잘 알고 현지인들과도 연줄이 깊어서 귀농에 성공할 확률이 높은 편이다.[13] 귀농한 사람의 사례들 중에 TV동물농장에 나온 사례로, 집에 대형견을 키우고 있는데 도시에서는 강아지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데가 없어서 땅이 넓은 시골로 이사간 사례도 있었다. 창작물 속의 이야기지만, 디즈니 애니메이션101마리 달마시안의 결말 부분에서도 인간쪽 주인공인 로저와 아니타 부부가 원래 17마리에 불과했던 자신들의 강아지들이 101마리로 늘어나서 돌아오자, 강아지들을 자유롭게 키울 환경을 찾고자 가정부 할머니와 함께 시골에 대농장을 구매해서 이주하기로 결정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게 생계와 무관한 이유로 귀농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이미 사회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거나, 생계유지 문제로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14] 육체노동자가 도망간다는 것은 위에서 젊은이들이 3D업종에 종사하지 않으려는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보수가 지나치게 낮거나,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거나, 일하다가 죽을 가능성이 100%에 가까운 경우라면 젊은이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일하려 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시간당 고작 5000원 받아가면서 높으신 분들에게 매일같이 조인트 까이면서 후쿠시마같은 위험지대에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이는 반대로 말하면, 보수가 두둑하고, 사측으로부터 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사고율이 낮은 안전한 근무 환경에서 일해야 한다면, 아무리 일이 힘들어도 웬만해서는 다들 앞다퉈서 일하려 할 것이다.[15] 다만 건물주들에게는 굉장히 큰 변수가 하나 있는데, 바로 정부에서 여러 채의 건물을 보유한 사람에 대해 규제를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최근 들어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건물주들의 횡포가 극심하자, 미국중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정부가 토지공개념헌법 단위에서 확립시켜서, 갖은 규제를 하고 있다. 대한민국문재인 정부의 출범 이후로 다주택 보유자에 대하여 세금을 올려버리는 등으로 극심한 규제를 하고 있는 중이며, 10차 개헌이 논의될 때, 여러 선진국들의 선례를 따라서 토지 공개념을 적용하고자하는 시도도 있었다. 즉, 정부 시책에 따라서 자기 소득의 몇십 %를 떼여야 할 수도 있으므로(...), 마냥 건물주 노릇만 하는게 좋은 것도 아니다. 또 사람들이 건물주가 되려는 이유도 돈을 갈퀴로 긁어모을 수 있다는 점 이외에도 부동산 가격 자체가 상당히 안정적일 것이라는 근거없는 믿음때문인 경우가 많은데, 부동산 가격이 지나치게 높은건 결국 가격에 거품이 낀 거다. 이게 터진다면, 부동산에 묻어놓은 돈들이 눈먼 돈이 되는 것도 순식간인데,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1980년대 일본 거품 경제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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