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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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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3. 내용4. 노동의 역사
4.1. 산업혁명 이후4.2. 현대
5. "노동의 신성함"에 대한 비판6. 노동의 가치론
6.1. 교환노동 외에도 경제적 가치를 인정해 달라는 의견
6.1.1. 존재 자체에 경제적 가치를 달라는 의견
6.2. 대가가 형편없어도 노동해야 되는가
7. 기본소득, 기초소득8. 기타9. 관련 항목


勞動
네가 죽어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 일해야 먹을 것을 얻어 먹으리니
- 창세기 3:19
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밥먹지 않는다.
- 중국의 승려 백장선사[1]
Arbeit macht Frei.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
-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를 포함한 웬만한 수용소 정문에 써져 있던 독일 격언.[2]
네가 내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너는 평생토록 땀 흘려 일해야 먹을 것을 얻을 수 있고, 죽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파워 바이블에서 야훼아담에게 야훼의 명령을 어겼다고 하는 말

1. 개요

사람의 생계·생존·생활을 위한 모든 것들 또는 그것으로 바꿀 수 있는 화폐를 얻기 위해서 특정한 대상이 육체적·정신적으로 행하는 모든 활동들. 그 시간만큼 사람은 꼼짝없이 다른 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희생해야 된다. 얼마의 돈을 위하여!

누군가에게는 노동은 고통이며 인격포기일 수도 있다. 자아실현을 위해 노동을 원해서 하는 사람도 있지만 원하지 않음에도 하는 사람이 있다. 무조건적 노동의 미화나 신성화의 위험성은 인간권리인권, 존엄성을 자칫 무시할수 있다는 점이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산업혁명으로 인력 대신 기계화, 자동화 대량생산이 가능한 시스템이 등장했고, 1960년대 이후부터는 전세계적으로 형편없는 대가나 보상을 거부하고 노동 대열에서 이탈하는 움직임도 등장하고 있다. 노동에 대한 무조건적 미화의 문제점은 큰 액수이든 적은 액수이든 돈과 자본에 자신의 권리와 인격, 시간을 고스란히 종속시키는 것을 합리화한다는 점에 있다.

2.

노동은 해도해도 줄어들지 않는 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단어 자체는 한자어순우리말이냐의 차이 뿐이지만, '일'이 일상적으로 노동을 표현하는 말이라면, '노동'은 일에 비해 경제학적인 용어로 많이 쓰이는 편이다.(특히 마르크스경제학에서.) 이 때의 (경제활동)을 벌거나 어떠한 목적을(재화창출) 달성하기 위해 투입되는 인적 자원(즉 인간)의 행동을 이르는 말이며,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꼭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돈이 엄청 많다면 딱히 할 필요가 없지만 그렇지 않은사람이 먹고 살고 싶다면 반드시 해야 할 것들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음식을 먹고 열량을 얻어서 생존해야 하는 소모적인 존재이며 이로 인해서 생존을 위한 노동을 하지 않으면 기아단계를 거친후 아사에 필연적으로 이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노동을 하지 않더라도 생존할 수 있는 방법과 제도적 장치는 존재해 왔다. 복지제도와 세금, 가족주의 등이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대개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수단은 자신이 갖추기를 원하는 분위기가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 따라서 과거에는 물론 현대 사회에서도, 개인은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이걸 안 하면 먹지도 말라는 옛 격언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해질 만큼 일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기본 중의 기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노동을 하지 않는다 해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시간만큼의 개인의 인격과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심하면 대규모 흉년에 이은 기아사태가 발생하거나 폭식이 종교적 죄악 으로 지정될 정도로 빈곤했던 과거와는 달리, 풍요로운 현대사회에서는 대규모 기계화 농경을 통한 곡물값의 하락이나, 운송수단의 발달로 식자재의 끊임없는 공급으로 한 사람의 노동이 더 많은 사람을 부양할 수 있게 되었기에 노동을 하지 않는다 해서 생존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또한 과거보다 적은 강도의 노동만으로도 생존에는 충분해져, 노동의 가치가 떨어지고, 생존 문제로 필수적이었던 스스로의 생존을 위한 노동이 다른 사람의 노동에 의존해도 충분히 대체 가능해졌기에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전제조건이 아니게 되었다. 그렇기에 현대사회에서는 노동이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닌만큼 반드시 할 필요가 없고 노동을 하는 시간만큼의 개인의 인격과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며 노동은 고통, 혹은 인격을 포기하는 행위라 하며 노동 자체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점에서 놓고 본다면 노동은 고통, 혹은 인격을 포기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는 문제다. 물론 이들이 생존할 수 있도록 하는 현대사회가 유지되고 발전하는 이유가 다른 사람의 노동 덕분이기는 하다. 한편으로, 노동을 저주로 보는 관점 또한 존재한다. 가령 성서에서는 창세기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대가로 아담이 끊임없이 노동해야 한다고 신이 선언한 바 있는 걸 보면..

참고로, 일은 직업을 가리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영어론 job 혹은 work라고 한다. job은 직장이라는 뜻이 강하고 work는 노동이라는 뜻이 강하다. 역시 영어 격언으로 job(일)은 study(공부)보다 재미있게 해야 한다고 한다.

3. 내용

돈이 엄청 많다면 딱히 할 필요가 없지만, 보편 복지가 활성화되지 않은 사회에서 그렇지 않은 사람이 살고 싶다면 지금 반드시 해야 할 것이다.

복지제도가 잘 갖춰지지 않은 사회에서 노동을 안 하고 가족에 빌붙어 집에만 쳐박혀 있는 사람을 히키코모리니트라 칭하며, 빌붙을 가족이 없거나 자존심 상 집을 나오는 경우 노숙자가 되거나 눈밭을 떠돌다 결국 얼어죽는 베짱이가 될 확률이 높다.

인간이 생존하고 생활하기 위해서는 의식주를 위한 물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물자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물자를 얻어낼 대상인 자연에 일정한 작용을 가하여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원시시대에도 나무에 달린 열매를 채취하는 행위, 사냥, 물고기를 잡는 행위 등과 같은 수렵 활동이 필요하였으며, 농경사회에서는 수렵 활동을 보충한 농업이, 근대산업사회에서는 각종의 생산활동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일련의 인간의 생존을 위한 물자를 얻어내는활동 전체를 인간의 육체적·정신적 활동을 노동이라 한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부터 생존수단의 획득이 필연적이므로 어떠한 사회에서도 그리고 개인으로도 노동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자연 그대로의 노동대상을 상대로 노동해도 물자를 얻을 수 있고, 이러한 노동의 산물인 원료·원자재를 대상으로 하여 노동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노동대상에 일정한 작용을 하거나 또는 그것을 변형시키는 노동을 함으로서 인간의 생존과 생활에 필요하며 유용성을 높이는 활동을 한다.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를 뜻하기도 한다.

4. 노동의 역사

노동이라는 행위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 계속되어온 것이며 생존과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나 노동이 하나의 사회적 문제가 된 것은 오히려 계급제 사회의 출현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즉, 하위 계층이 일을 하는 대가로 상위 계층이 노동을 하지 않으며 노동의 결과물을 영위하기만하는 문제가 발생된 것이며 현대의 자본제 사회는 노예 계층의 노동의 결과를 무위도식 했던 상류층이 존재하던 노예제 사회와 차이점이 적다.이렇게 무위도식 하는 이들이 다시 전면에 등장하면서 자본제 사회에서 노동도 하나의 사회문제로서 대두되었다. 여기서 잠깐 사회적 노동으로서의 노동양식의 역사적 변화를 살펴보면, 원시공동체사회에서는 지배와 피지배관계가 아직 제대로 출현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채취·수렵노동을 기반으로 하는 당시의 사회에서는 노동의 양식도 다분히 공동체적인 양식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농경의 시작으로 인구부양력이 늘어나고 노동력이 필요해진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고대사회에서의 노동은 이와는 다른 양식을 취하였다. 이 사회에서는 생산적인 노동을 노예가 담당하였으며, 그 노동의 결과물은 대부분 노예의 소유주인 상류층들이 영위하였고 노예는 우마(牛馬)와 같은 노동수단·작업수단으로 노예소유주의 재산이었다. 따라서 노예는 매매나 교환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들에게는 어떠한 인격도, 소유도 허용되지 않았다. 계급이 생기기 시작한 이래로 지배-피지배 계층의 존재로 피지배층의 노동이 대부분 지배계층의 생존을 위해서 사용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노동도 자연히 천한 일로 치부되었고 이중 로마인들은 노동없는 삶을 최고의 삶으로 여겼다.[3]

이후 중세사회는 봉건제가 지배적이었다. 봉건제 하에서, 그중에서도 서양은 농노제를 통해 농노가 노동을 담당하였으며, 농노는 토지를 비롯한 생산도구를 모두 자신이 소유했으나 봉건제 사회에서의 경제 외적 강제에 의하여 봉건영주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다만 농노에게는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소유가 허용되었고, 생산은 형식상 농노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농노는 생산에 관련되는 모든 책임을 스스로 담당하였지만 봉건적 지대(地代) 등에 의하여 봉건영주에게 가혹하게 수탈당하고 있었으나 단순히 노예-주인의 관계였던 과거와는 다르게 지배층인 기사계층은 농노 계층을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야하는 의무를 수행하였기에 무력 제공 및 치안 유지등의 노동을 실질적으로 해야했다.

4.1. 산업혁명 이후

산업혁명에 이어서 등장한 자본제 사회에서는 생산수단의 소유자인 자본가와 노동력을 자본가(기업)에게 판매하는 노동자가 등장하게 된다. 자본제 사회는 생산수단(토지·공장·기계 등)이 노동담당자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리하여 노동자는 과거에 존재하던 봉건제적인 신분적 예속에서 벗어났으며 스스로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의미에서 이중적으로 자유로운 몸이 된다. 자본제 사회는 상품화가 극도로 발달된 사회로 생산은 생산자 스스로의 사용을 위함이 아니고 기본적으로 판매를 통한 이윤의 추구를 위해 이루어지는 사회이다. 이 사회는 또한 노동력의 상품화가 비로소 이루어지는 사회이며, 노동자는 스스로의 노동력 판매의 대가로서 임금을 받는다. 이러한 노동양식의 역사적인 변천은 새로운 발명·발견과 기술혁신을 통한 생산성의 지속적인 향상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자본제 사회도 산업혁명을 통한 근대적인 기계제 대공장제도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Marx, K.)가 말한 생산력의 발전과 그에 상응하는 생산관계의 발전은 바로 이러한 측면을 지적한 것이다.

4.2. 현대

다음에는 이렇게 상품화된 자본제하에서의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이 지니는 특징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일찍이 마샬(Marshall,A.)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여느 상품과 다른 점을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로 지적하였다.
①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지만 그 자신을 판매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4]
②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할 때 노동자 자신이 그 곳에 가서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노동력과 노동자는 분리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 점 때문에 판매한 것은 노동력이지만 노동자 스스로 사용자의 지휘·감독하에서 생산작업을 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형식적·법률적으로는 노사가 대등한 관계이지만 사실상은 지배·복종관계로 되기 쉬운 것이다.
③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사용여부에 관계없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자동적으로 소모되는 상품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궁박적(窮迫的:몹시 곤궁한 상태) 판매를 불가피하게 만든다.
④ 노동력의 판매자는 교섭상 불리한 입장에 서기가 쉽다.
⑤ 노동력의 공급(인구변동)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며, 가격(임금)의 변동에 대한 공급의 탄력성이 매우 작다.

이러한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지닌 불리한 특성 때문에 노사관계에서 항상 대등성을 견지하기가 어려우며 궁박판매·투매가 생기게 된다. 다시말해,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는 노예가 자신이 일하는 생산수단의 소유와 유리되었던 형태와 유사하게 대다수의 노동자가 자신이 하고 있는 노동도구 즉 생산수단의 소유와 벗어나 있다는 점과 노동력이라는 상품 자체가 불리한 특성을 가진 관계로 노예제 사회와 같이 자신의 노동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라 다른이를 위해서 불균형적으로 소모되고 있다는 것이다.

5. "노동의 신성함"에 대한 비판

노동은 신성하다고는 하지만 노동을 해야 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노동은 전혀 신성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일하는 시간 동안 인격과 시간, 체력을 고스란히 바쳐야 된다. 인간의 상품화, 기계부품화라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심하면 인권 이전에 인간의 기본 권리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을 하나의 도구, 수단으로 볼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일 수도 있다.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대한 몰이해이며, 다양성, 다원성의 가치를 무시하는 행동이다. 우선 그 시간 동안 얼마의 돈을 위해서 그는 그 시간을 회사, 직장, 혹은 업자에게 행동의 제약, 구속을 당하는 것이다. 근무시간 동안에 그 사람은 자신의 권리와 행동을 회사와 상사에게 고스란히 바쳐야 된다. 그 시간 동안 분명히 다른 일, 다른 활동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누군가에게 있어 노동은 전혀 신성하지 않을 수 있다. 몇 푼의 돈을 벌기 위해서 희생하는 시간동안 휴식을 더 취하거나 잠을 더 잘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여행을 하거나 자기계발을 할 수도 있다.[5] 노동은 기회비용과 마찬가지로 그 시간들을 희생해야 된다. 이러한 포기, 희생이 기쁘거나 달가운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6][7] 노동에 대한 과도한 예찬은 심하면, 여건상 혹은 어쩔수 없지만 노동이 맞지 않는 사람들을 악마화할 수도 있다. 당장 자동화, 기계화를 목전에 둔 21세기인데도 산업혁명 이후의 기준으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멸시하거나, 백수, 니트족, 실업자, 건달, 한량, 룸펜, 놈팡이 등 비하, 폄하, 비난하는 일이 얼마나 비일비재한가?

체력이 허약하거나, 혹은 이런저런 이유로 노동이 적성에 안맞는 사람들의 존재들도 분명 소수가 있다. 자신의 현재 직장생활이 체질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사람, 전체주의 문화와 조직문화, 조직사회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상당히 부족한 편인 곳이 많다. 노동이 체질적으로 안 맞는 사람, 취직, 직장생활이 안 맞는 사람들이 반드시 귀족, 상류층들만은 아니다. 오히려 장애인, 정신질환자를 포함하는 취약계층 중의 취약계층일 수도 있다.

6. 노동의 가치론

본 문단은 심승현(2016)을 참조하였다.[8]

현대 사회에서 노동은 '사람이 생존을 위해 행하는 경제적 활동'으로 보고 있다. 이 노동을 통해 사람들은 돈을 번다. 이 돈은 '역할가치, 교환가치'를 지닌다. 이런 돈의 특성 때문에 사람들은 대개 '교환노동'에 참여한다.

현대 사회의 노동은 대개 교환노동인데, 교환노동은 대개 재미없고 자유를 제약당하고 시간을 빼앗기고 기분나쁜 종류가 많기 때문에 이들은 강제노동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놀이, 호혜, 증여, 참여 등 교환노동에 포함되지 않는 부분들도 노동으로 재해석되어야 우리의 삶이 '자유로운 노동의 장'으로 이동할 수 있다고 한다. 교환노동에 대해 '인간의 상품화'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노동이 강제노동에서 놀이노동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실리콘밸리의 IT기업에서 점점 경제적 성과를 얻고 지지받고 있다. 근무시간에 낮잠을 잔다든지, 산책 시간을 준다든지 하는 개방적인 조직문화를 말한다.

노동요 까지는 안가더라도 근무시간에 음악듣기는 허용해야 하지 않을까?

6.1. 교환노동 외에도 경제적 가치를 인정해 달라는 의견

증여노동에도 경제적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여성학계에서 가사노동에 접근할 때 이루어지고 있다. 종교계에서는 종교활동 역시 경제적 가치를 달라고 한다. 지역사회를 위해 교통정리나 지역 방범 등을 하는 노동도 과거에는 부역, 징용의 강제노동 형태로 이루어졌다면 요즘은 공공근로처럼 경제적 가치를 인정해주고 있다. 징병제 역시 강제노동 형태가 아니라 모병제처럼 경제적 가치를 인정해달라는 주장이 생기고 있다.

또 노동이 필요할 때 교환노동 대신 증여노동으로 대체한다는 식의 접근도 있다. 공동체주의 (꼬뮨주의)가 이런 형태다. 현대 사회에 자리잡은 이런 공동체에서는 숙박비, 식비, 교육비 등의 비용을 거의 받지 않는다. 대신 공동체 구성원들은 밥하는 법을 배워서 요리를 해야 하고 청소도 해야 하는 등 적극적으로 증여노동을 함으로써 비용을 줄인다. 그리고 쓰다가 필요없게 된 물건들은 공동체에 기부하여 잔존가치가 0이 될때까지 다같이 활용을 한다.

6.1.1. 존재 자체에 경제적 가치를 달라는 의견

일부 인문학자들은 사람이 사람 속에서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역할가치, 교환가치 외에 '그저 있음의 가치' (존재 자체의 가치)도 존중받아야 한다는 관점이다. 예를 들어 중증 발달장애인은 일할 수 없는 사람에 해당한다. 이 부모들은 자녀와 함께 생활하면서 사람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결과 나온 답은 '사람은 존재 그 자체로 가치있다'는 것이라고 한다. 심승현 (2016)은 '사람이 살아있음 자체로서 재화나 서비스를 창출'하는 것을 '참여노동'이라고 정의한 뒤 이 역시 경이롭다고 한다. 예를 들어 중증 발달장애인은 상품 생산이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살아 있기 때문에 사회서비스 수요를 창출한다.

이들이 보는 역사에서는 20만여년의 호모 사피엔스의 역사 속에서 '경제적 활동'의 역사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놀이, 예술, 사냥, 휴식 등 다양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다양한 삶 자체가 곧 노동이었다.

이들에 따르면 사랑에 기반을 둔 신뢰와 호혜의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민주적 시민사회의 의식 있는 참여를 끌어내야 한다. 또 기본소득제를 전면시행하여 교환노동을 하기 싫은 사람은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게 해 주어야 행복한 사회가 만들어진다. 이런 제도로 인해 노동하지 못해 존재가치마저 잃은 사람들을 구조할 수 있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청년들, 나이 많은 사람들, 아픈 사람들, 장애를 느끼는 사람들' 등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는 비판이 존재한다. 현재 장애인 수급제도나 기초생활수급자 보호 등은 인간의 존재 자체에 경제적 가치를 인정하고 그들이 굶어죽지 않게 내버려두지 않고 보호하는 제도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일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지는 몫이 늘어날수록 일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몫은 줄어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 자체에 경제적 가치를 많이 매길수록 재원 문제가 일어나게 된다. 재원 문제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기본소득제 문서 참조.

6.2. 대가가 형편없어도 노동해야 되는가

노동의 신성화의 문제점은 노동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사람, 노동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을 과도하게 비하, 멸시하거나 공격하는데 있다. 또한 노동이 안 맞는 사람, 노동에 참여할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 논리를 정당화한다는 것도 문제점이다. 대가가 없이 하는 노동조차 신성화해야 된다면 그것이 열정페이와 차이점이 있을지 의문이다.

인권의식의 향상과 함께 점차 노동보다는 자신의 소비나 즐기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이들도 프랑스, 독일 등은 1960년대 이후, 미국은 1970년대 이후, 일본은 1980년대 이후, 한국은 1993년 이후로 본격 등장하고 있다. 그렇게 성장한 한 세대가 이미 그 사회의 기성세대에 진입한 상태이다.따라서 변화는 불가피하다. 이때 발생하는 문제가 노동이 무조건 신성하다면, 이들에게 대가가 형편없거나 적은 대가를 받더라도 무조건 노동을 하라고 강요해야 되느냐 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대가나 보상이 형편없더라도 신성하다 할수 있느냐는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선택할 권리도 있고, 거절, 거부할 권리도 있다. 맞지 않는 일, 대가나 형편이 형편없다고 느껴진다면 거절, 거부할 수도 있다. 대가나 보상이 형편없더라도 노동을 해야 된다면, 섬노예 등의 납치나, 역시 대가가 형편 없더라도 신분제 사회 하에서 노비노예로 생활하는 것도 정당화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동물의 세계라면 자기 스스로 생존이 어려운 존재는 당연히 도태되어야 옳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에는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인권이란 것이 있다고 여겨지기 떄문에 자기 스스로 생존이 어려운 사람은 당연히 도태되어야 옳다는 생각은 옳다고 여겨질 수 없다.노동을 무조건 신성시한다면 노동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의 선택권과 개성을 무시하는 문제에 봉착할 수 있다.

7. 기본소득, 기초소득

누군가에게는 노동이라는 것이 체질적으로 전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감정노동이든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말이다. 자세한 것은 기본소득제 문서 참조

8. 기타

작은 돈을 받고 다른 인간과 업무에 대한 불쾌감, 업무난이도에 따른 고통을 견디느니 부모와 주변의 눈치를 보더라도 노동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인간군상도 등장했다. 1980년대 영국에서 이런 유형의 인간을 개념하는 단어가 명명되었는데, 이를 니트족이라 부른다.

9. 관련 항목



[1] 비슷한 표현으로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마라."라는 격언도 있는데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서도 언급된다. 이후 공산주의권 국가에서도 이 구절을 일종의 정치 표어로 사용하였다.[2] 여담이지만 저 팻말은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이 명령을 받고 만들었는데, 팻말를 만들 때, 저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새로 들어오는 포로들에게 알리려고, 일부러 Arbeit의 "B"를 위 아래로 뒤집어서 붙였다고 한다. 출처:다큐멘터리 SHOAH[3] Csikszentmihalyi,'몰입의 즐거움',이희재 역,해냄,2010,p69에서 재인용[4] 그러나 그 시간 동안 그 사람은 회사, 직장에 의해 행동의 자유를 억압, 구속당한다.[5] 그래서 한국 기준 2010년 이후 공무원과 공기업에 학습휴가 개념이 등장했다.[6] 현직 직장인들도 불금, 불토, 월요병 등 출근하기 싫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7] 일이 좋아서 하는 경우도 적지는 않다만 그 대다수도 자기 일에 애착을 가지는 경우고. 남 밑에서 일하면서 일이 좋은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8] 사람과 노동에 관한 인문학적 고찰, 심승현 (2016), 부산교육대학교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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