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윌리엄 르 그로스 William le Gros | |
생몰년도 | 1115년경 ~ 1179년 8월 20일 | |
출생지 | 노르망디 공국 오말레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노스 링컨셔 쏜튼 커티스 마을 인근 쏜튼 수도원 | |
아버지 | 에티엔 르 오말레 | |
어머니 | 하비사 드 모티머 | |
형제 | 에티엔, 앙게랑, 아델리자, 마틸드, 아네스 | |
아내 | 세실리아 피츠윌리엄 | |
자녀 | 하비사 | |
직위 | 오말레 백작, 요크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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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오말레와 요크 백작. 무정부시대 시기에 스티븐 왕의 편에 서서 마틸다와 대적했다.2. 생애
1115년경 노르망디 공국의 오말레에서 윌리엄 1세의 조카인 오말레의 에티엔과 노르만족 기사이며 모티머 가문의 시조인 랄프 드 모티머의 딸 하비사의 장남이다. 형제로 에티엔, 앙게랑, 아델리자[1], 마틸드[2], 아네스[3]가 있었다. 1127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노르망디의 오말레 백작령과 웨스트요크셔의 홀더니스 등 광범위한 영지를 물려받았다.1135년 12월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가 사망한 후, 윌리엄은 스티븐 왕을 군주로 받든 최초의 앵글로색슨-노르만 귀족 중 한 명이었으며, 이후 마틸다의 지지자들과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스티븐 왕을 지속적으로 지원했다. 1136년 마틸다를 위해 찬탈자 스티븐을 몰아내겠다는 명분을 내건 스코틀랜드 국왕 다비드 1세의 잉글랜드 북부 침공을 격퇴하기 위해 군사 작전을 이끌었으며, 1138년 8월 다비드 1세의 대규모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요크셔 귀족들의 사병대 총사령관을 맡아서 8월 22일 스탠더드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1138년 12월, 스티븐 왕은 그의 승리를 기리기 위해 요크 백작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또한 그는 요크셔의 왕실 영지, 숲 및 성의 통제권을 얻었으며, 요크셔의 보안관을 겸임했다. 이리하여 그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요크셔의 실질적인 지배자로서 잘 요새화된 스카버러 성을 건설했으며, 지역 기사들로부터 토지세를 받아냈다. 또한 무역 촉진에 큰 관심을 기울이면서 요크셔 동부 해안의 항구에서 교역이 활발해졌다. 한편, 그는 자신의 영지를 확장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1140년 링컨셔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갖춘 길버트 드 건트를[4]여러 장원을 접수했다. 뉴버그의 윌리엄 등 당대 연대기 작가들은 그가 요크셔에서 스티븐보다 더 강한 왕이었다고 밝혔다. 1141년 2월 2일 링컨 전투에 참전해 분견대를 이끌고 마틸다 측 장군 라눌프 드 제르논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몰아붙였지만, 다른 전선이 무너지면서 전투는 패배했고 스티븐은 생포되었다. 그는 급히 전장을 탈출해 요크셔로 귀환했다.
이후 마틸다가 한동안 잉글랜드의 권력을 장악했지만 그해 6월 28일에 런던 시민들의 봉기로 밀려났고, 윈체스터 전투 이후 스티븐 왕이 자유를 얻으면서 내전은 재개되었다. 무정부시대는 1154년까지 이어졌고, 윌리엄은 그 사이에 북부 잉글랜드에서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면서 스티븐에게 병력과 물자를 조금씩 지원했다. 윌리엄이 킹스턴 어폰 헐의 북쪽에 있는 메우스의 시토회 수도원과 노스 링컨셔에 있는 쏜튼 수도원을 건립한 것도 이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154년, 헨리 2세가 스티븐 왕 사후 단독 왕위에 오른 뒤 왕권 강화 정책을 즉시 추진했다. 이중에는 내전 당시 영주들의 지배하에 놓인 왕실 소유의 성을 반환하고 불법적으로 건설된 요새를 파괴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헨리 2세는 윌리엄을 요크 백작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1155년 그가 소유한 왕실 영지를 몰수하고 성을 돌려보내라고 강요했으며, 스카버러 성을 파괴했다. 그 후 조용히 지내던 그는 1173년 노르망디에서 헨리 2세의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반기를 든 반란군에게 오말레 성을 빼앗겼고, 시몽 3세 드 몽포르와 함께 가까운 플란데런 백국으로 피신했다가 은밀히 반란군을 지원했던 플란데런 백작 필리프 1세에게 생포되었다.[5] 1174년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뒤 영지로 돌아갔고, 1179년 8월 20일 자기가 세운 쏜튼 수도원에서 사망한 뒤 그곳에 묻혔다.
그는 생전에 모레이 영주 윌리엄 피츠던컨의 딸이자 스코틀랜드 국왕 던컨 2세의 손녀인 세실리아 피츠윌리엄과 결혼해 외동딸 하비사를 낳았다. 하비사는 그가 사망한 뒤 영지를 물려받았고, 1180년 에식스 백작 윌리엄 드 멘데빌과 초혼했고, 기사 윌리엄 드 포트와 재혼했으며, 베쑨노 영주 보두앵 드 베쑨네와 삼혼했다. 1194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는 노르망디를 석권하면서 오말레 백국을 비롯해 하비사의 영지를 몰수했다. 하비사가 사망한 후 잉글랜드 영지와 오말레 백작이라는 칭호는 하비사가 두번째 경혼에서 낳은 윌리럼 드 포스에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