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루이 드 나바르 Louis de Navarre |
출생 | 1341년 |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에브뢰 | |
사망 | 1376년 6월 26일 |
나폴리 왕국 두라초 | |
아버지 | 필리페 3세 |
어머니 | 호아나 2세 |
형제 | 호아나, 마리아, 루이스, 블랑슈, 카를로스 2세, 필리페, 아녜스, 호아나 |
아내 | 두라초의 조반나 |
자녀 | 샤를(사생아), 트리스탄(사생아), 잔(사생아) |
직위 | 보몽 르 로제 백작, 두라초 공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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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몽 르 로제 백작, 두라초 공작. 나바라 왕국의 국왕 카를로스 2세의 형제로, 프랑스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형을 대신해 나바라 왕국을 다스렸고, 노르망디에서 샤를 5세와의 전쟁에 참여했다. 이후 이탈리아로 건너가 아내의 영지인 두라초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단행해 성사했지만 얼마 안가 사망했다.2. 생애
1341년경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지역의 에브뢰에서 에브뢰 백작이자 나바라 국왕 필리페 3세와 샹파뉴 백국 상속권자이자 나바라 여왕 호아나 2세의 여섯 번째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호아나[1], 마리아[2], 루이스[3], 블랑슈[4], 카를로스 2세, 필리페, 아녜스[5], 호아나[6]가 있었다.1349년 보몽 드 로제 백작령을 상속받았으며, 1351년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형을 대신해 나바라 왕국 보안관을 맡아 나바라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고, 병력이 필요한 형을 위해 나바라군을 꾸준히 파견했다. 1356년 아라곤 국왕 페로 4세와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간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고수했다. 1358년 11월 17일 교황 특사 볼로냐의 귀도가 나바라 왕국을 방문했을 때 성대하게 환영했고, 귀도가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간의 전쟁을 중재하는 걸 도왔다. 1363년 그동안 카를로스 2세를 옆에서 충실히 도왔던 형 필리페가 사망한 뒤 카를로스 2세의 주요 협력자가 되었다.
1364년, 카를로스 2세는 루이에게 가스코뉴로 이동해 그곳에서 가스코뉴인들을 끌어모은 뒤 부르고뉴를 공략하게 했다. 루이는 아키텐 공국을 지나 가스코뉴군과 합세한 후 9월 23일 노르망디에 도착했다. 그러다가 5월 16일 코르슈렐 전투에서 나바라 왕국군과 잉글랜드 용병 연합군이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완패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부르고뉴 공략을 포기하고 코탕탱 반도를 탈환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부하들이 프랑스 마을들을 심하게 약탈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이로 인해 민심은 카를로스에게 등을 돌렸다.
여기에 교황 우르바노 5세가 부르고뉴와 노르망디의 국경지대인 앙스 마을을 초토화한 루이의 부하 세갱 드 바드폴을 파문하는 등 교회마저 등을 돌리자, 카를로스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와 화해하기로 했다. 1365년 5월, 카를로스와 샤를 5세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는 정복한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고 자신의 추종자들의 사면을 받아냈으며, 처형된 나바라인들의 유해를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고, 포로들이 몸값없이 상호 석방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가 확보한 영토는 하나같이 초토화되었기 때문에 별다른 실익이 없었다. 그 후 루이는 나바라 왕국으로 돌아갔다.
1366년, 두라초 공작 카를로와 칼라브리아의 마리아[7]의 딸인 두라초의 조반나와 결혼해, 두라초에 대한 권리를 얻었다. 당시 두라초는 1368년 알바리아 공 칼 토피아에게 공략되었기에, 그는 무력으로 두라초를 탈환하기로 했다. 1372년 프랑스에 있던 나바라 용병단을 고용했고, 1375년 나바라 왕국에서 직접 신병을 모집했으며, 공성 무기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엔지니어들을 대거 고용했다. 1376년 한여름 두라초 공방전을 벌인 끝에 공략에 성공했지만, 그해 6월 26일 두라초에서 병사했다.
루이는 생전에 아내 조반나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지만, 나바라 귀족 여성인 정부 마리아 데 리자라주와의 사이에서 세 명의 사생아를 낳았다. 딸 호아나 드 보몽(1359 ~ 1411)은 1373년 페드로 데 라사가와 결혼했고, 첫째 아들 카를로스 데 보몽(1361 ~ 1432)은 1381년 카를로스 2세에 의해 나바라 왕국의 보안관이자 산 후안 데 피에 데 푸에르토 성주에 발탁되었으며, 훗날 나바라 왕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보몽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둘째 아들 트리스탄 드 보몽(1363 ~ 1396)은 팔플로나 대성당의 정경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