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15 09:19:46

프랑스령 튀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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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식민제국의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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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 프랑스 보호령
Protectorat français de Tunisie
الحماية الفرنسية في تونس
파일:프랑스령 튀니지 국기.svg 파일:프랑스령 튀니지 국장.svg
국기 국장
1881년 5월 12일 ~ 1956년 3월 20일
성립 이전 독립 이후
오스만 제국
튀니지 왕국
<colbgcolor=#ce1126> 위치 튀니지
수도 튀니스
통화 튀니지 프랑
공용어 프랑스어, 아랍어

1. 개요2. 역사
2.1. 초기2.2. 양차 대전기2.3. 독립

1. 개요

1881년부터 1956년까지 튀니지에 존속했던 프랑스의 보호령.

2. 역사

2.1. 초기

당시 튀니스 베이국의 인구는 백만 명이 조금 넘었다.이 중 절반은 주로 북동부에 살았던 정착 농부였고 나머지 절반은 내륙을 돌아다니는 유목민이었다. 이런 소국이던 튀니스 베이국은 근대화를 하려고 했지만 거액의 빚만 떠안은 채 실패로 끝이 났다. 거액의 빚 때문에 정부는 과도한 세금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였고, 이는 반란으로 이어졌다. 이 가운데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튀니스 베이국을 자국의 식민지로 삼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프랑스가 튀니지를 차지하는 것을 영국은 막으려고 했지만, 베를린 회의에서 프랑스가 영국의 키프로스를 차지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대가로 튀니지를 프랑스가 차지하는 것을 인정하였다. 한편 이탈리아도 튀니지를 노리고 있었으나, 영국과 독일이 튀니지를 프랑스의 것으로 인정하자 포기하였다.

1881년 3월 30일과 31일 튀니지의 부족 크루미르가 프랑스령 알제리를 침공한 것을 구실로 프랑스는 튀니스 베이를 침공하였다. 이 침공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프랑스는 별 다른 피해없이 튀니스 베이국을 자국의 식민지로 삼았다. 튀니스 베이국을 점령한 프랑스는 이전에 알제리에서 했던 것처럼 영토를 22개의 구역과 부속 구역으로 나눈 뒤 직접 통치하였다.

첫 30년 동안 튀니지는 엄청나게 개발되었다. 1895년까지 튀니지 해안에는 53개의 등대가 세워졌고, 튀니스, 수스, 스팍스 등 튀니지의 주요 도시에는 새롭게 개조된 항만이 들어섰다. 또한 튀니지 북부의 항구 도시 비제르트에는 거대한 프랑스 해군 기지가 들어섰다. 1890년에는 도로망이 550km에 불과했지만 1896년에는 1,400km, 1901년에는 2,200km, 1907년에는 3,100km , 1914년에는 4,100km로 확장되었고, 튀니지 곳곳에는 철도가 세워졌다. 하지만 이런 개발은 프랑스에서 이주해 온 프랑스인들을 위한 것이었지 현지 주민들은 그 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다. 프랑스 식민 당국은 프랑스 정착민들에게 토지를 제공하기 위해 토지법을 제정하였다. 토지법에 따라 100만 헥타르 이상의 농지가 프랑스 정착민들에게 강제로 팔렸다. 농업 총국 문서에 따르면 1914년에 920,000 헥타르의 토지가 유럽인의 손에 있었고 그 중 85%가 프랑스인의 손에 있었다고 한다.

이에 튀니지인들은 계속해서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탈라-카세린 폭동이다. 1906년 초, 종교적 지도자 알리 벤 가다프와 일부 수피 추종자들이 중심이 되어 “프랑스 식민자들을 몰아내자”는 운동이 확산되었다. 4월, 탈라와 카세린 지역에서 무장 봉기가 일어나 프랑스 경찰관 및 관리들이 살해당하자 프랑스는 즉시 군대를 파견해 진압, 시위대 수십 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마을이 불태워졌다. 프랑스 당국은 이를 종교적 광신자들의 폭동으로 규정하면서 사건을 축소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폭동은 규모는 작았지만, 튀니지 민족운동의 상징적 출발점으로 여겨졌고, 이후 지식인들과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프랑스 식민 체제에 대한 비판 의식이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1911년 11월 튀니스에서 가장 큰 공동 묘지인 젤라즈 묘지가 튀니지 자치 정부에 등록되어야 한다는 발표는 화약고에 불을 지폈다. 왜냐하면 주민들은 이를 보호령 정부가 이토록 존중받는 땅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빼앗으려는 야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반대하는 주민들은 시위를 하려고 했지만, 프랑스 당국이 이를 허가하지 않자 보안 기관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경찰관들은 린치를 당했고, 군인들은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틀 간의 폭동 끝에 약 10명의 유럽인과 10명에서 30명의 튀니지인이 사망했다. 이러한 가운데 1912년 2월 8일 튀니지 어린이가 이탈리아인이 운전하는 전차에 깔려 사망하자 이에 화가 난 튀니지인들은 전차를 타지말자는 보이콧 운동을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아랍어 표지판 사용, 전차의 운행 속도 감소, 급여 인상을 요구했지만 식민 당국은 위원회 위원 7명을 튀니지에서 추방하고 르 튀니지앙(Le Tunisien)의 발행을 금지함으로서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2.2. 양차 대전기

튀니지는 교전국은 아니었지만, 프랑스 사령관의 지휘 하에 튀니지군에 병력을 편입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전쟁 중 튀니지 군인들의 희생과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 튀니지인들에게 희망이 되었다. 전 튀니지 청년단원들은 압델라지즈 탈비가 작성한 팸플릿에 자신들의 요구를 담아내기로 결정했는데, 이 요구는 바로 튀니지의 독립이 아닌 자치였다. 하지만 프랑스가 이들의 요구를 무시했고, 내부에서도 민족주의자들과 실용주의자들 사이에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해 결국 이 사건은 유야무야되었다.

1930년대 튀니지는 대공황의 여파에 휩싸였다. 대공황으로 인한 수출 감소로 농부들과 기업들은 파산하였는데, 그 중 작고 영세한 튀니지 농부와 기업들은 대공황의 여파를 프랑스 기업보다 더 크게 맞았다. 이 상황에서 프랑스에서 인민전선이 집권하고, 식민지에 대한 개방 정책을 추구했던 레옹 블룸이 총리로 집권하자 하비브 부르기바는 의회 설립과 자지권 회복을 주장하며 프랑스 외무 장관인 알베르 사로를 만났다. 이 만남에서 하비브 부르기바는 프랑스가 튀니지에게 자치권을 줄 생각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후 튀니지로 돌아온 부르기바는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시위대가 수천 명의 시위대가 “튀니지 의회를 설치하라!”(Nous voulons un parlement tunisien!)를 외치며 튀니스 중심부로 행진하였다. 프랑스 식민 당국은 시위대를 폭동 세력으로 규정하고 군대와 경찰을 투입하였고, 군이 발포해 다수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이 시위를 이끌던 하비브 부르기바와 네오 데스투르 지도자들이 구금되었다.

더구나 프랑스령 튀니지에 살고 있던 유럽계의 절반인 이탈리아인들이 베니토 무솔리니의 영향을 받아 튀니지의 이탈리아 편입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곧 파시스트 군복을 입은 채 거리를 행진하면서 "프랑스인의 수염으로 베니토 무솔리니의 구두를 닦을 솔을 만들자" 라고 노래하였다. 또한 베니토 무솔리니의 사위인 갈레아초 치아노 백작은 이탈리아 하원에서 튀니지, 지부티, 코르시카, 니차, 사보이아!"라는 구호를 크게 외쳤고, 이에 많은 의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에 프랑스 국무회의 의장인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군사 퍼레이드를 벌여 프랑스의 건재함을 과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1942년 6월 19일 새롭게 즉위한 무함마드 7세는 16가지 요구 사항을 담은 각서를 장피에르 에스테바 총독에게 제출하였다. 하지만 총독은 이 각서를 철저하게 무시하였다. 곧 미국과 영국이 튀니지를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독일-이탈리아 연합군는 튀니지에서 철수했고, 이는 프랑스의 영향력이 다시 회복되었음을 의미했다. 튀니지 국민들에게 크게 신망을 받았던 무함마드 6세는 추축국에 협력했다는 죄목으로 강제로 폐위된 뒤 알제리 남부의 라구아트로 강제 추방되었다.

2.3. 독립

제2차 세계대전이 추축국의 패배로 끝난 뒤 전 세계의 식민지에서 탈식민주의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튀니지인들은 폐위된 베이의 복귀와 제도 개혁을 요구했다. 이들은 1938년 4월 9일 시위에서 요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당국에 자치권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 요구는 전과 마찬가지로 무시당했고 하비브 부르기바는 체포를 피해 카이로로 도주하였다. 이렇게 프랑스가 튀니지를 탄압하는 와주에 새로운 총독으로 루이 페릴리에가 임명되면서 상황은 호전되는 듯했다. 페렐리에는 민족주의자들을 포함한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였고, 공무원에 튀니지인 채용을 늘렸다. 하지만 새 정부의 권한은 제한적이어서 민족주의자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다 주었고, 튀니지의 주권은 이따금 무시되었다. 하지만 이런 유화책은 프랑스 강경파에게 큰 비판을 받았고, 결국 새 총독으로 강경파인 장 드 오트클로크가 임명되었다.

새로운 총독인 장 드 오트클로크는 민족주의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도착하자마자 튀니지 정부의 해산을 요구했지만, 라민 베이는 이를 강력히 거부했다. 1월 18일 일련의 체포로 공산주의자와 네오 데스투르 지도자들이 투옥되자 경찰과 시위대는 크게 충돌하기 시작했다. 1952년 3월 25일 라민 베이가 장관들을 해임하기를 거부하자, 장 드 오트클로크는 그들을 체포하여 케빌리에 감금하였다. 하지만 이는 튀니지인들의 분노를 샀고, 특히 노조 지도자인 파르하트 하셰드가 프랑스 테러 조직 붉은 손에 의해 암살당하자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프랑스 당국은 장 드 오트클로크를 해임하고 피에르 부아자르를 새총독에 임명했다. 부아자르는 통금령을 해제하고, 체포된 인사와 시위대를 석방한 뒤 튀니지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새 정부를 수힙했다. 그 후 프랑스 각료평의회 의장인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가 튀니스를 방문해 "프랑스 정부는 튀니지 국가의 내부 자치권을 다른 의도 없이 인정하고 선포한다" 고 선언했다. 6개월간의 협상 끝에 1955년 6월 3일 자치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부르기바는 6월 1일 튀니스로 돌아와 시위대의 큰 환영을 받았다. 8월 7일 베이는 프랑스와 합의한 협약에 자신의 인장을 찍었고 이는 1881년 보호령이 수립된 이후 처음으로 9월 1일에는 상주 총독의 승인을 받지 않은 법령에 자신의 인장을 찍은 것이었다. 이후 사실상 튀니지는 독립하였고, 튀니지에 살고 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 인구가 대거 이탈했다. 1966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1956 년 255,224명에서 32,767명으로 83% 감소했다. 또한 기독교 공동체가 사라지고 예배 장소가 버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