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08 00:54:43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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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식민제국의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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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다가스카르 식민지 및 속령들
Colonie de Madagascar et dépendances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 국장.svg
국기 국장
1882년~1958년
마다가스카르 보호령 시대: 1882년~1897년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 시대: 1897년~1958년
성립 이전 해체 이후
메리나 왕국마다가스카르 제1공화국
프랑스령 코모로 코모로 영토
프랑스의 여러 남부 제도 및 남극 지역 프랑스령 남방 및 남극 지역
수도 타나나리브
언어 프랑스어, 말라가시어, 코모로어, 아랍어
통화 1897~1925: 프랑
1925~1958: 말라가시 프랑
1. 개요2. 상세
2.1. 마다가스카르 보호령 시대2.2.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 시대
2.2.1. 제2차 세계 대전과 현대 시대
3. 둘러보기

1. 개요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는 1897년부터 1958년까지 마다가스카르에 존재했던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정식명칭은 마다가스카르 식민지 및 속령들이다. 중심지는 메리나 왕국의 수도였던 안타나나리보였다.

2. 상세

2.1. 마다가스카르 보호령 시대

프랑스는 1820년대부터 마다가스카르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온 국가였다. 19세기에 메리나 왕국이 쇠퇴할 당시 영국프랑스는 메리나 왕국을 침공했다.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고, 이들은 메리나 왕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로 가는 해상 통로에 위치한 이 섬을 지배하려고 했다. 하지만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영국에게는 이 섬의 가치가 떨어져서 영국은 이 섬을 식민화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한편 당시 마다가스카르는 귀족 혁명이라고 불리는 1863년 쿠데타로 라다마 2세가 살해당했다. 이후 마다가스카르의 실권은 라이니보니 니나히트리니오니 총리에게 갔지만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자, 총리 직은 그의 남동생인 라이닐라이아리보니가 승계하였다. 이후 라이닐라이아리보니는 30여년 간 마다가스카르를 실질적으로 다스리게 되었다.

이 가운데 프랑스는 마다가스카르를 자신의 식민지로 삼기위해 노력했다. 이런 야욕을 눈치 챈 마다가스카르 정부는 영국과 미국을 끌어들여 프랑스의 시도를 막으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1880년대 초, 프랑스 식민지 세력, 우익 가톨릭 로비단체, 레위니옹 의원들은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마다가스카르를 침공해야 한다고 울부짓었다. 그들은 마다가스카르 정부가 10%의 로열티를 대가로 마다가스카르의 모든 광물, 삼림, 그리고 미점유지를 독점적으로 개발할 권리를 조제프 프랑수아 랑베르에게 준 랑베르 헌장을 어겼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빌미로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가운데 프랑스 국민 한 명이 안타나나리보에서 살해당했고, 안타나나리보에 위치한 프랑스 조계지에서 프랑스 국기를 마다가스카르 국기로 바꾸라고 당국이 요구하자 이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마다가스카르는 북부 해안의 안치라나나를 프랑스에 할양하고 1천만 프랑의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되었다.

하지만 라나발로나 3세는 프랑코-호바 조약이 메리나 왕국을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삼는 조약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양국 간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가운데 프랑스가 영국의 잔지바르 점령을 승인하는 대가로 마다가스카르에 대한 프랑스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프랑스는 마음 놓고 마다가스카르를 자신의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다. 프랑스는 메리나 왕국이 프랑코-호바 조약을 준수하지 않는다면서 파기를 선언한 다음 마다가스카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토아마시나와 마하장가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곧장 안타나나리보로 진격하였다. 또한 라나발로나 3세에게 불만을 지닌 반란이 마다가스카르 곳곳에 발생하면서 마다가스카르군은 효과적으로 대응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안타나나리보로 진격하던 프랑스는 말라리아와 이질, 장티푸스 등으로 병력 3분의 1이 사망하자 진군을 멈춘 뒤 본국에서 원군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9월 말에 도착한 원군은 수도 주변에 위치한 고지대에 대포를 놓은 다음 왕궁을 향해 발사하였다. 왕궁이 포탄에 공격당하자 라나발로나 3세는 즉시 프랑스에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후 뒤센 장군은 10월 1일에 도시에 입성했고 라나발로나 3세 여왕은 마다가스카르를 프랑스 정부의 완전한 보호령으로 만드는 조약에 서명하였다. 그 이후 라나발로나 3세는 프랑스령 레위니옹, 그리고 알제로 추방었고, 마다가스카르는 본격적으로 프랑스의 식민자가 되었다.
파일:마다가스카르 보호령 국기.svg
마다가스카르 보호령의 국기
파일:마다가스카르 보호령 국장.svg
마다가스카르 보호령의 국장

2.2.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 시대

이후 보호령이 종식되고 본격적인 식민지가 시작되자 전국에 흩어졌던 농촌 게릴라들이 반발하였다. 이에 프랑스 식민 당국은 "평화 유지"를 명목으로 이들을 강도높게 진압했으며 이로 인해 10만~70만명의 마다가스카르인들이 사망했다. 이후 프랑스 대기업들에게 마다가스카르의 막대한 광산 및 임업 허가가 부여되었으며, 이를 위한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마다가스카르인들에게 강제 노동을 요구하였다. 프랑스는 이에 반방하는 말라가시인들을 탄압했으며, 마다가스카르에는 식민지 교육과 기반시설이 갖춰졌다. 1912년에는 프랑스령 코모로가 마다가스카르에 병합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아후 프랑스에서 군 복무를 한 마다가스카르 참전 용사들은 민족주의 운동을 시작하였고, 마다가스카르 노동조합이 지하에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마다가스카르 지역 공산당이 결성되었다.

2.2.1. 제2차 세계 대전과 현대 시대

제2차 세계 대전때엔 비시 프랑스에 복속되었다.그리고 나치 독일의 계획대로라면 유대인들을 마다가스카르의 상당수 지역에 수용시키고 주요 항구에 친위대를 배치해서 유대인들의 탈출을 감시할 예정이었다. 유럽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알아서 먹고 살아라 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영국이 비시 프랑스를 공격했고 마다가스카르는 영국에 점령되었다.[1] 이후 들어온 영국은 세금 대신 강제 노동,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위한 비자발적 징집, 그리고 매년 1인당 대량의 쌀 공여를 요구하는 정책은 시행하였고 이에 대중의 분노는 걷잡을수 없이 커졌다. 1944년 브라자빌 회의에서 샤를 드골 장군이 모든 식민지가 프랑스 국민의회 에서 대표권을 가질 자격이 있는 프랑스의 해외 영토라고 선언하고 해외 식민지 주민들에게 시민권을 약속하자 이에 희망을 품은 마다가스카르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마다가스카르의 독립을 달성하려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다시 프랑스의 지배가 시작된 후, 1945년 11월 파리에서 소집된 제1차 전후 제헌 의회에서 프랑스 제4공화국의 헌법을 초안하기 위해 마다가스카르를 대표하는 두 명의 의원은 마다가스카르가 프랑스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도록 하는 법안을 제출했지만 프랑스 의원들은 이를 거부했다. 프랑스 의원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에 마다가스카르를 양보해 달라고 굴욕적으로 요구해야 했고, 프랑스 정치 지도자들은 영국이나 남아프리카가 프랑스로부터 마다가스카르를 빼앗으려 할 것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에 더욱더 매몰차게 거절했다.

이처럼 정치적 압박이 계속되자 일부 급진 세력은 무장 봉기를 계획하게 되었고, 1947년 3월 29일 동부 해안 지역과 고지대에서 수천 명의 마다가스카르인이 프랑스군을 공격하면서 봉기가 시작되었다. 반란 세력은 주로 토착민으로 구성되었고 무기는 열세였지만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며 프랑스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초기에는 반군이 상당 지역을 장악하고 행정청을 습격하는 등 성공을 거두었으나, 프랑스는 곧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여 강경 진압에 나섰고, 비행기 폭격과 고문, 민간인 학살 등의 잔혹한 수단까지 동원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프랑스군의 보고에 따르면 1948년까지 계속된 이 진압 과정에서 약 1만 명이 사망했다고 하나, 실제로는 최대 1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당시 마다가스카르 전체 인구의 약 2~3%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특히 마날라나, 모로만가, 페리네 등 주요 지역에서는 집단학살과 같은 대규모 탄압이 자행되었고, 수천 명이 고문을 당하거나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반란이 진압된 이후 프랑스 정부는 마다가스카르 민주 진보당 지도자들을 반란 배후로 지목하고 군사재판에 회부했으며, 일부는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감형되었다.[2]

이렇게 1947년 일어난 마다가스카르 봉기는 실패로 끝이났지만 계속해서 탈식민주의 바람이 불자 1958년 마다가스카르는 프랑스의 자치 공화국이 되었고, 1960년에는 완전 독립국이 되었다. 코모로는 1946년부터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로부터 분리되어 별도로 지배되다가, 1961년 자치권이 부여되었고, 1975년에 완전히 독립했다.

3. 둘러보기

마다가스카르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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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이후로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2] 마다가스카르 정부는 1967년 3월 29일을 처음으로 애도의 날로 선포한 이후 봉기를 기념하는 공식 연례 행사를 조직해 왔다. 현재는 순교자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