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 초대 회계검사원장 야마구치 마스카 山口尚芳 | Yamaguchi Masuka | |
<colbgcolor=#000><colcolor=#FFF> 출생 | 1839년 6월 21일 |
히젠국 기시마군 하나지마 (現 사가현 다케오시 공민관 부지) | |
사망 | 1894년 6월 12일 (향년 43세) |
도쿄도 도쿄시 | |
재임기간 | 원로원 간사 |
1880년 3월 8일 ~ 1881년 5월 28일 | |
초대 회계검사원장 | |
1881년 5월 ~ 1881년 10월 | |
통칭 | 한조(範蔵, 範造, 範三, 繁蔵) |
학력 | 나가사키 영어 전습소 치원관[1] |
부모 | 아버지 야마구치 나오스미 |
묘소 | 아오야마 영원 |
상훈·관위 | 훈1등 서보장(현 서보대수장) 정3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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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관료, 정치가로 일본 회계검사원의 초대 원장을 지냈다.2. 생애
2.1. 사가의 난 이전
1839년 사가번 기시마군에서 야마구치 나오스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번주에게 장래성을 인정받아 다른 번사의 자제들과 함께 나가사키로 유학을 떠나 네덜란드어와 영어를 배웠다. 또한 오쿠마 시게노부·소에지마 다네오미와 함께 귀도 베르벡의 제자가 되어 영어와 성경을 배웠다. 귀향한 후에는 번역가 겸 훈련교관으로 근무하였으며 사츠마 번과 초슈 번의 번사들과 교류해 삿초 동맹이 체결되는 것에 협조하기도 했다.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각 지방관청과 외국관 판사로 근무했으며 1868년 12월에는 카쿠레키리시탄 색출 시 행해진 고문에 관한 심의 조사를 위해 나가사키에 파견되었다. 1869년 4월 경제관청인 통상사의 총괄로 임명되었고 6월에는 회계관 판사가 되어 오사카로 파견, 7월에는 대장대승 겸 민부대승에 임명되어 대장대보 겸 민부대보 오쿠마 시게노부를 보좌하였다.
1870년 홋카이도 개척 어용 책임자에 임명되었고, 1871년 8월 외무소보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0월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이와쿠라 사절단의 부사에 임명되어 각국을 순방했다.
2.2. 사가의 난과 그 이후
귀국 후에 일어난 정한논쟁에서는 오쿠보 도시미치·기도 다카요시 등과 함께 견한사절을 파견하는 것에 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이 때문에, 1874년 2월에 정한론을 주장한 에토 신페이가 일으킨 사가의 난 당시에는, 정부군 측에 서서 난의 진압에 힘썼다. 우선 고향 다케오의 전 영주 나베시마 시게하루와 그 가신이었던 사족들을 회유하여 반란에 대한 호응을 억제했다. 또한 스스로는, 2월 12일, 나가사키에 들어가, 해군 경비병을 이끌고 오무라, 다케오를 거쳐 3월 1일에 사가에 입성, 난의 진압을 성공시켰다. 덧붙여 사가의 난의 때, 다케오는 반란군의 협박에 굴복해 64명의 병사를 어쩔 수없이 반란군에 파견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지만, 야마구치는 나베시마 시게하루가 정부군에 제출할 사과문을 첨삭하는 등 고향 다케오에 얽힌 죄를 면하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1875년 4월, 원로원 의관, 1880년에는 원로원 간사 가 되어 회사병조합 조례 심사 총재가 되었다. 1881년 5월, 전 해에 설치된 회계검사원의 초대 원장으로 취임했으나 같은 해 10월 오쿠마 시게노부가 정변으로 축출되자 축출에 반발하여 원장직에서 사임하였다. 그 대신 참사원 의관으로 선출되어 외무부장 겸 군사부장의 임무가 맡겨졌다. 1885년 참사원이 폐지되자 다시 원로원 의관이 되었고 1887년 2월, 고등법원 배석 재판관이 되었다. 1890 년 9월 29일, 귀족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20일 원로원이 폐지되고 의관이 비직되어 금계간지후[2]를 분부받았다.
1894년 5월, 정3위에 서임되었으나 중병이 들어 모든 직위에서 사임하였고 같은 해 6월 12일 향년 5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후 훈1등 서보장에 추서되었다.
야마구치 마스카의 생가는 다케오시 하나지마에 있었으나 현재 그곳엔 공민관이 들어섰다. 또한 공민관의 옆자리엔 현지의 지역유지가 1930년에 세운 기념비가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