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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키나와/류큐의 역사. |
이 문서는 오키나와의 역사와 그 간략한 내용을 다룬다.
2. 오키나와 역사의 연구
일본 제국 시기, 일본 본토로부터 차별당하면서 류큐인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오키나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는 오키나와의 민속, 종교, 언어, 문화, 역사를 연구하는 오키나와학(沖縄学)의 탄생으로 이어졌다.대표적인 오키나와 역사학자로는 오키나와학의 아버지 이하 후유(伊波普猷)가 있다. 도쿄제국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한 그는 오키나와가 일본에서 차별받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여러 연구를 수행했으며,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에는 강연활동을 펼쳐나가기도 했다. 이외에도 역대보안(歴代宝案)을 연구한 히가시온나 칸쥰(東恩納寛惇), 류큐 왕국 왕들의 어진 사진을 남긴 가마쿠라 요시타로(鎌倉芳太郎) 등이 있다.
오키나와는 일찍이 문자(한자 및 가나)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역사 연구에 필요한 기록물들이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주요한 기록물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오모로소시(おもろそうし): 1531년부터 1623년까지 편찬된 류큐 왕국의 신가집(神歌集). 히라가나와 약간의 한자로 기록되었다. 류큐의 신화와 역사들이 풍부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하 후유의 중심 연구대상이었다.
- 중산세감(中山世鑑): 1650년 완성된 류큐 왕국의 역사서. 가나와 한자로 쓰여졌다.
- 중산세보(中山世譜): 1701년 완성된 류큐 왕국의 역사서. 한문으로 쓰여졌다.
- 구양(球陽): 1745년 편찬된 류큐 왕국의 역사서. 외권(外券)은 유로설전(遺老説伝)이라고 하며, 여러 전설과 민담을 담고 있다.
- 류큐신도기(琉球神道記): 류큐에 건너갔던 일본의 승려 타이츄(袋中)가 저술한 책. 1605년 완성되었다.
- 역대보안(歴代宝案) : 류큐 왕국의 외교문서들을 모아놓은 자료집이다.
이외에 외국의 문서들에도 류큐가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유구국(琉球國)이란 단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3. 시대 구분
오키나와는 본토 일본과는 다른 동네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본토 일본사의 시대 구분을 적용하기가 힘들다. 대개 다음과 같이 오키나와의 역사의 시대 구분이 이루어진다.시대 | 시작 | 끝 | 설명 |
선사시대 | 11세기 경 | 류큐 열도에 문명이 발달하기 이전 시대 구석기 시대, 패총시대 | |
고류큐[1] | 11세기 말 | 1609년 | 류큐에 문명이 시작된 이후 독자적인 사회를 이루어 나가던 시대 구스쿠 시대, 삼산시대, 류큐 왕국 전반부 |
근세 | 1609년 | 1879년 | 사츠마의 침입 이후. 외세의 간섭 가운데 여러모로 변화를 이루었다. 류큐 왕국 후반부 |
근대 | 1879년 | 1945년 | 일본 제국에 흡수된 시기. |
현대 | 1945년 | 오키나와 전투 이후 |
4. 시기별 역사
오키나와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한 표.
4.1. 선사시대
선사시대에는 선주민으로 볼 수 있는 조몬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지질 특성상 오키나와에는 선사시대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다. 다만 문명이 시작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오키나와의 선사시대는 뗀석기를 사용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를 사용한 패총시대(貝塚時代)로 나뉜다. 여러 유적에서는 일본 본토와 교류했던 증거들과 함께 독자적인 양식의 토기들이 발견되는데 이는 일본어족 화자들이 오키나와 일대에 정착한 영향으로 보인다.[2]
4.2. 구스쿠 시대
11~12세기경부터 구스쿠라는 성곽이 류큐 곳곳에 세워지며 오키나와에 문명이 시작되었다. 이 시대부터 일본 열도에서 도래인이 다수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당시 오키나와의 선주민이었던 조몬인 세력을 밀어내거나 포섭하여 각자 세력을 구축했다. 구스쿠 시대에 오키나와인들은 금속을 다루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농경사회를 구축했으며 아지(按司)라고 하는 군장들이 나타나 류큐 각지에서 할거했다.4.2.1. 삼산시대
구스쿠 시대의 일부로, 오키나와가 북산, 중산, 남산의 세 나라로 나뉜 시기를 말한다. 세 나라는 경쟁적으로 중국과 조공무역을하며 패권다툼을 벌였다.4.3. 류큐 왕국
1429년, 중산의 쇼하시 왕에 의해 통일 류큐 왕국이 건설되었다. 류큐 왕국은 지리적 이점을 살려 중개무역으로 번성하였고, 일본 외에도 명나라, 조선 등과 교역하였다. 그러나 항해술이 발달하며 중간무역의 허브 기능을 상실한 채 쇠락했고, 결국 1609년 사츠마 번 시마즈 타다츠네의 침략으로 정복을 당하며 속국이 되었다.사츠마 번은 청나라를 자극하지 않고 류큐를 대청 무역창구로 이용하기 위해 류큐 왕국을 공식적으로 멸망시키지는 않았다. 그래서 류큐 왕국의 조공사절단은 멀쩡하게 청나라에 왕래하며 조공무역을 했는데 당연히 무늬만 류큐고 실제론 사츠마의 뒷주머니 무역이었다. 이외에도 쌀 생산을 끊고 사탕수수 생산을 강제당했는데, 사탕수수를 값싸게 강탈당하고 쌀은 비싸게 강매하며 착취당했다. 또한 높은 인두세로 인해 인구 증가도 정체했다.
4.4. 일본 제국 오키나와 현
자세한 내용은 오키나와/역사/일본 제국 문서 참고하십시오.4.5. 미군정
전략적 요충지로서 오키나와의 가치를 알아본 미국은 오키나와에 기지를 설치하고 미군정을 두어 통치하였다. 그러나 말이 미군정이지 오키나와인, 즉 류큐인들은 이 시기에 미국 국민도, 일본 국민도 아닌 사실상 무국적자나 다름 없었고, 미군 기지는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안겼다.[3] 이러한 이유로 본토 복귀 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4.6. 본토 복귀 이후
1972년 오키나와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여전히 미군 기지 문제는 미국 정부, 일본 정부와 오키나와 현주민 사이의 갈등으로 남아있다. 일부 독립운동 세력이 여전히 존재한다.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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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학자 이하 후유가 쓴 동명의 저서에서 온 단어이다.[2] 이러한 이유로 류큐는 사쓰마 번의 침략(1609) 이전에도 범일본 문화권에 속했다. 물론 분화한지 오래되었기에 일본 본토의 문화와는 상당히 이질적으로 변모했다.[3] 사실 류큐인들한테 미국이나 일본이나 다 거기서 거기였다. 미국이 일본만큼 강압적이고 폭력적으로 통치하진 않았지만 외세인 건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