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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서 대분열 이후 서방 가톨릭 라틴 교회에서 동방의 교구에 자체적으로 임명한 총대주교.2. 역사
1054년 교회의 대분열로 인해 5대 총대주교구 중 콘스탄티노폴리스·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 4개 관구가 서방교회(라틴교회)와의 단절을 선언했다. 이후 십자군 전쟁을 통해 다시금 중근동 지역에 발을 딛은 서방교회는 십자군 왕국들과 십자군으로 파견된 서방교회 신자인 병사들을 사목하기 위해 이들 4개 관구에 자체적으로 총대주교를 임명하기로 하고, 교황의 권한으로 안티오키아를 시작으로 예루살렘·콘스탄티노폴리스·알렉산드리아에 차례로 라틴 총대주교를 임명하였다.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나고, 십자군 국가들이 이슬람 세력들에게 정복당함에 따라 영향력을 소멸했다. 이후 주교좌를 잃어버린 대주교들은 로마에 상주하는 명예직으로 남았다. 이후 잦은 공석 등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다가 1950년대 들어 임명이 중단되었다. 결국 1965년을 끝으로 교황청에서 예루살렘 총대주교를 제외한 콘스탄티노폴리스·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 3개 라틴 총대주교좌를 폐지하였다.
2.1. 폐지
교황청이 라틴 총대주교좌를 폐지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먼저 가톨릭과 정교회의 관계가 20세기 들어 크게 호전되었다는 점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쳐 1965년에 당시 교황 성 바오로 6세와 정교회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아티나고라스가 만나서 역사적인 화해를 이루고 상호파문을 철회하였다. 정교회를 정통교회로 인정을 했으니 이제 저 관구들에 라틴 총대주교를 별도로 임명해 정교회의 어그로를 끌 이유가 없다.
두번째로는, 정교회나 오리엔트 정교회로부터 독립한 일부 지역 교회들 상당수가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며 동방 가톨릭 교회란 형태로 가톨릭 교회의 일원으로 귀순한 것이다. 실제로 교황과 일치를 이룬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가 한 명, 안티오키아 총대주교는 무려 세 명이나 존재한다. 이 상황에서 라틴 총대주교까지 또 있을 필요가 없다.
다만 예루살렘은 그 위상도 위상일뿐더러 성지 관리, 그리고 남부 레반트에 있는 상당한 규모의 가톨릭 교회의 관리를 위해 라틴 총대주교좌가 존속하고 있다. 적절(?)하게 예루살렘 총대주교좌를 둔 동방 가톨릭 교회도 없고.
3. 목록
3.1. 초대교회 5대 관구의 라틴 총대주교
- 콘스탄티노폴리스 라틴 총대주교(1204년부터 임명, 1948년부터 공석, 1965년 폐지)
4차 십자군이 동로마 제국을 일시 멸망시키고 라틴 제국을 세웠을 때 설치된 총대주교좌. 정교회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는 동로마인들의 망명국가 니케아 제국에서 총대주교좌를 유지하였다. 따라서 당시에는 동로마 황제도 두 명,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도 두 명이라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니케아 제국이 라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후로는 로마에 상주하는 명예직으로 존속했다가 폐지되었다.
- 안티오키아 라틴 총대주교(1098년부터 임명, 1953년부터 공석, 1965년 폐지)
십자군 국가인 안티오키아 공국의 성립과 함께 생긴 총대주교좌. 안티오키아 공국이 망한 이후에는 역시 명목상으로만 유지되었다.
- 알렉산드리아 라틴 총대주교(1954년부터 공석, 1965년 폐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좌는 14세기부터 기록이 시작되며, 알렉산드리아까지 십자군이 지배하진 않았기에 주교가 배치되지 못한 채로 명목상으로만 유지되어 다른 라틴 총대주교가 겸직 혹은 로마에 상주하다가 결국 폐지되었다.
-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1099년부터 임명)
자세한 내용은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예루살렘 왕국) 문서 참고하십시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잃은 1187년부터는 마지막 남은 십자군 영토인 아크레에 상주하다가, 아크레마저 무너진 후에는 키프로스·로마로 옮겨다녔다. 1847년까지는 로마에 상주하는 명예직이었으나 1847년 다시 제대로 된 라틴 총대주교좌가 예루살렘에 세워졌다.
현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좌는 프란치스코회 출신의 이탈리아 사람인 피에르바티스타 피자발라(Pierbattista Pizzaballa) 추기경이다. 예루살렘 교구의 성지관리원장이던 피에르바티스타 피자발라 신부는 전임자 트왈의 은퇴로 대주교로 임명되어 예루살렘 교구장 서리를 맡고 있었다. 다른 지역 총대교구와 달리 지역적으로 두드러지는 동방 정교회 또는 오리엔트 정교회도 없고, 동방 가톨릭교회 내에도 예루살렘 총대주교를 칭하는 주교는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4년 가까이 공석은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게다가 임명된 피자발라는 34년만에 외방 교구인이 임명된 경우이다. 참고로 피자발라는 아랍어는 물론 모국어 이탈리아어와 영어·히브리어, 심지어 아람어까지 구사 할 수 있는 먼치킨이다. 1965년을 끝으로 콘스탄티노플·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의 라틴 총대주교좌는 폐지되었으나 예루살렘의 경우는 성지 관리와 팔레스타인 지역 일대의 사목을 위해 총대주교좌를 존속시켰다. 현재는 관구 관할 없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요르단·키프로스 4개국의 라틴 교회 신자를 관할하고 있다.
3.2. 이외의 라틴 총대주교
한편, 이들 5대 관구의 총대주교 이외에도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서방교회에서 신설한 총대주교좌가 몇 군데 있다. 그러나 이들 총대주교좌는 가톨릭에서만 인정하고 타 교회의 총대주교좌와 겹치지 않기 때문에 굳이 라틴 총대주교라고 구별하여 부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들 총대주교들도 기존 총대주교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베네치아 총대주교: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의 삼장서 단죄에 반발하여 북이탈리아 일대에서 발생한 교회 분열 때 주동 역할을 했던 아퀼레이아 주교가 총대주교를 자칭했는데, 분열이 수습된 뒤에도 자칭했던 호칭이 남아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베네치아는 따라서 총대주교좌(Patriarchal See)로 불린다.
베네치아 총대주교좌는 아래의 다른 총대주교좌와는 달리 정교회의 총대주교좌에 조금 더 가까운데, 약 150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아퀼레이아 시절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어느 쪽의 수위권에도 얽매이지 않는 독립된 교회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으며, 이 결과 다시 로마의 수위권을 받아들인 뒤에도 19세기까지 고유의 전례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리스본 총대주교: 포르투갈이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막아낸 보상격으로 1737년 처음 주어졌다.
- 동인도 총대주교: 인도 지역의 첫 라틴전례 교구인 고아 대교구장 대주교에게 명예칭호로 결부되었다. 1886년에 처음 주어졌다.
- 폐지되었거나 공석인 총대주교좌
- 서인도 총대주교: 1524년에 처음 주어진 명예칭호로, 태생부터 어느 한 교구에 결부되지 않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신세였다. 1705년에 스페인군 군종대목구에 결부되면서 떠다니는 신세를 일단 면했다가,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정부가 대목구를 폐지하면서 또 여기저기로 떠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마지막 보유자이자 마드리드 대주교 레오폴도 에이호 이 가라이가 선종한 1963년 이후에는 새로 임명되지 않았다.
- 아퀼레이아 총대주교: 553년 자칭(및 로마와 분리), 698년 파비아 회의를 통해 로마와 재통합되어 유지되다 1752년 폐지. 교구 영역은 우디네 대교구와 고리치아 대교구로 분할되었고, 교구장 명의는 1968년에 명의대교구좌로 부활하였다.
- 그라도 총대주교: 606년 아퀼레이아가 랑고바르드인의 침략으로 함락되면서 당시 삼장서 논쟁으로 인해 분열 상태이던 아퀼레이아 총대주교가 동로마 제국과 화해하고 그 영향권인 그라도로 이동하면서 분리되었다.[1], 1451년 폐지되어(주교좌는 이미 1105년부터 베네치아로 이동하여 유명무실해진 상태) 베네치아 총대주교좌의 근간이 되었다.
[1] 한편 아퀼레이아를 정복한 랑고바르드 왕국은 별개의 아퀼레이아 총대주교를 자체적으로 선임함으로써, 삼장서 분열은 698년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