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43대 황제 콘스탄티우스 1세 CONSTANTIVS I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 (Flavius Valerius Constantius) |
출생 | 250년 추정 |
로마 제국 다키아 나이수스 | |
사망 | 306년 7월 25일 (향년 56세) |
로마 제국 에보라쿰 | |
재위 기간 | 서방 부제 |
293년 3월 1일 ~ 305년 5월 1일 (12년) | |
서방 정제 | |
305년 5월 1일 ~ 306년 7월 25일 (1년 2개월) | |
전임자 | 막시미아누스 |
후임자 | 콘스탄티누스 1세 |
배우자 |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293년 이혼) 플라비아 막시미아나 테오도라 |
자녀 | 콘스탄티누스 1세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 아나스타시아 플라비아 율리아 콘스탄티아 에우트로피아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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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43대 황제이자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창건자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버지이다. 제1차 사두정치 시대에서 서방 황제를 역임했다.(부제: 293년 ~ 305년, 정제: 305년 ~ 306년)본명은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지만 흔히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혹은 콘스탄티우스 1세로 불린다.
2. 생애
고향은 다키아 일대의 모이시아 속주 출신인 일리리아인이다.함께 제국을 통치한 세베루스 2세, 갈레리우스, 막시미누스, 막시미누스 다이아와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 변방의 촌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 허나 《황제전(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의하면, 선대 군인황제들 중 한 사람이었던 클라우디우스 2세, 즉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조카딸 클라우디아와 지방 귀족 에우트로피우스의 아들로 모계를 통해 고귀한 군인황제이자 전쟁영웅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피를 이은 후손이라고 한다. 그러나 후세의 역사가들 대부분은 이것이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자신의 가문을 황가와 연결짓기 위해 조작한 것으로 의심하며 실제로도 신빙성이 거의 없다. 당장 콘스탄티우스 1세는 살아생전 단 한번도 자신이 클라우디우스 2세, 퀸틸루스 형제의 외종손이라는 주장을 입 밖에 꺼낸 적도 없었고, 이름이나 혈통 등을 통해 출신 민족이 일리리아인으로 밝혀진 상태다. 더군다나 클라우디우스 2세, 퀸틸루스 형제의 바로 아랫 동복동생이라고 주장된 크리스푸스라는 사람은 가상인물이거나 동명이인일 확률이 높으며, 애당초 이름이나 발견된 비문 등에 클라우디우스 2세 형제의 혈육이라는 어머니와 그 부모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주장은 이 역사서 편찬을 지시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정통성을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된 프로파간다 수단일 확률이 매우 높다.
아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지시로 작성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일찍이 입대해 아우렐리아누스 황제 휘하의 프로텍토레스 부대에서 프로텍토레스 아우구스티 노스트리(황제 경호대 장교)로 복무하면서 팔미라 정복전쟁에 참전했고, 이후 프로부스 황제에게 둑스(Dux) 칭호를 부여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주장 중 상당수는 거짓말로 보이며, 콘스탄티우스가 군대에서 본격적으로 능력을 인정받고 승진한건 카루스 황제가 집권하기 직전이라고 한다. 이때 콘스탄티우스는 대대장이 됐는데, 하층민 출신임을 감안하면 군대 내에서 여러 군공을 세워 능력을 확실히 인정받은 듯 하다. 대대장 승진 이후, 카루스 황제 아래에서 달마티아[1]의 총독에 올랐다.
이 시기, 콘스탄티우스는 그때부터 상당한 재능을 보였는지 카루스 황제 생전에 일시 후계자 후보에도 거론되었다고 하는데 실은 이것도 그저 소문에 지나지 않으며, 그가 최고 권력에 참여하게 된 것은 카루스 황제와 그의 아들 카리누스가 사망한 뒤 권력을 장악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의 일이다. 카루스, 누메리아누스, 카리누스 3부자에 비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원래 누메리아누스의 호위대장이었다가 그의 죽음으로 얼떨결에 황제가 되었던 만큼 꽤 불리한 처지였지만, 콘스탄티우스는 달마티아 속주 총독을 하다가, 카리누스와의 전투 전에 디오클레티아누스 측으로 전향했던 주요인사 중 하나인 만큼,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겐 천군만마와 같았고 향후의 부제위는 콘스탄티우스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은혜를 보답한 측면도 있다 할 수 있다.
황제의 지상책무를 군의 장악과 국경 방위로 생각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제국을 4분하여 동쪽과 서쪽에 각각 정제(正帝 ;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와 부제(副帝 ; 카이사르)를 배치하는 새로운 형태의 통치제도를 고안했는데, 이것을 흔히 사두정치라고 한다. 콘스탄티우스는 이 새로운 통치제도 하에서 서부 제국의 부제위를 맡게 되었는데, 그 대가로 원래의 처였던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와 이혼하고 서부 제국의 정제 막시미아누스의 의붓딸인 테오도라와 재혼한다.
이후 그는 지금의 영국과 프랑스에 해당되는 브리타니아, 갈리아 지역의 통치를 담당하게 된다. 제국 방어에 있어 최고 수준의 난이도를 자랑하던 라인 강 방어선을 관할하는 갈리아를 통치하는 것은, 비교적 안정된데다 부유했던 아프리카와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밑에서 설명하듯 브리타니아는 초반에만 좀 어려웠지 일단 장악하고 난 후에는 상대적으로 지키기 쉬운 지역이었고 3세기의 위기 때도 아프리카와 함께 가장 피해를 상대적으로 덜 본 지역에 들어가는 부유한 땅이어서 어느 정도 이 부담을 덜어줬던 것으로 생각된다.
293년, 그가 부제가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때까지 무려 7년 동안 북부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에서 황제로 군림하던[2] 카라우시우스(Carausius)를 무찌르는 일이었다. 콘스탄티우스의 군대에 밀린 카라우시우스는 그의 부관격이었던 재무장관(rationalis) 알렉투스에게 살해되었는데, 콘스탄티우스는 자신의 근위도독(a prefect of the Praetorian Guard) 아스클레피오도투스를 파견하여 296년에 알렉투스까지 처단하고 서부 제국 전역을 평정하는데 성공한다. 여기서 일종의 성동격서 내지는 양동 작전을 썼는데, 오늘날의 칼레 근처인 불로뉴(Boulogne)항에 해군을 모으는 척 하다가,[3] 아스클레피오도투스와 휘하의 다른 부대를 브리튼 섬의 서쪽으로 돌아 보내서 급습에 성공했다고 한다.
또 알렉투스가 처형된 해인 296년,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의 링고나이(랑그르)에서 게르만 족의 분파인 알레만니 족을 격파하는데 이때 그는 무려 여섯 시간이나 링고나이 성벽 안에서 몇 안되는 병사들과 함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는 근성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후 지금의 스위스 빈디쉬에 해당되는 빈도니사에서 알레만니 족을 결정적으로 격파하면서, 그의 재위기에 로마 제국은 라인 강 방어선의 평화를 확정할 수 있었다.
유명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대박해 때도 기독교도들을 가급적이면 죽이지 않으려고 했고 박해도 재량 안에선 최소화했던 건 사실이었다. 때문에 잠재적 기독교도가 아니었을까라는 추측이 있을 정도인데, 그러나 콘스탄티우스의 관할 구역 안에서 기독교도 자체가 애초에 적었던데다 훗날에도 입증되듯 콘스탄티우스 자체가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불필요한 살해나 갈등은 피하는 성실한 성격이었던 게 이유가 커 보인다.[4]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퇴위하면서 두 정제는 각자의 부황제를 맡던 갈레리우스(동부)와 콘스탄티우스(서부)를 각각 자신들의 후임 정제로 승격시켰고, 부제는 발레리우스 세베루스[5](서부)와 막시미누스 다이아(동부)[6]가 선발되었다. 이때 브리타니아와 갈리아만 부제로서 통치하던 콘스탄티우스는 막시미아누스에게서 히스파니아 및 북아프리카 관구를 넘겨 받았고, 갈레리우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 아나톨리아 전부를 받아 부제 때보다 넓은 영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콘스탄티우스는 카이사르로 임명받을 당시 아우구스투스 헤르쿨레스인 막시미아누스의 직속 부하였는데도 카이사르 요비우스로서 아우구스투스 세니오레스, 즉 대표 황제(=선임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카이사르인 갈레리우스보다 서열이 앞서 있었기에, 이 정제 승격 때 아우구스투스 세니오레스로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표 황제 지위 또한 넘겨 받게 된다.
이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정에 있던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아들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의 진영에 합류한다. 갈레리우스가 콘스탄티누스를 보내주지 않으려 했던 건 갈레리우스를 미워한 기독교측 역사가들 견해와는 달리, 유능하고 일 잘하는 맹장 콘스탄티누스를 잃고 싶지 않았던 갈레리우스의 인재욕 때문이었다.[7] 하지만 어쨌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20년 전 서열 정리 탓에 엄연히 아우구스투스로서는 콘스탄티우스가 선임자였고, 때문에 갈레리우스는 어쩌는 수 없이 콘스탄티누스를 보내주게 된다. <비잔티움 연대기>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를 경계했던 갈레리우스로부터 필마단기로 도망쳐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때는 칼레 근처의 소도시에서 자꾸 하드리아누스 방벽을 넘어 깔짝대는 픽트족[8]에 대한 브리튼 원정을 준비중이었는데, 이게 맞다면 당시 동방 정제의 치소였던 니코메디아 ~ 칼레 근방 즉 유럽을 남동쪽에서 북서쪽까지 통째로 횡단했다는 것이 된다.
한편 권력욕과 명예욕 측면에서는 오히려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보다 갈레리우스와 훨씬 비슷했던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의 군대에 종군하며 몇차례 군공을 세워 병사들의 신망을 모았는데[9],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에게 충성했던 콘스탄티우스는 이런 아들의 권력욕을 상당히 경계했다고 한다.[10][11]그러나 306년, 지금의 영국 요크에 해당되는 브리타니아의 에보라쿰에서 만 56세로 급사하고 휘하 군인들이 순번을 거슬러 부제도 아니었던 콘스탄티누스를 정제로 추대하는 사태가 일어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2차 사두 정치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사두정의 내전)
콘스탄티누스의 권력욕이 이유였다는 말이 있으나, 이는 애초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고른 두 카이사르 후보는 본인들마저 놀랐을 정도로 매우 의외였고 사실 공감대도 널리 얻지 못한 조치였음을 간과한 채 결과만 두고 하는 단견에 불과하다.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우스가 정제가 되기 꽤 오래 전에 막센티우스와 함께 이미 카이사르 후보로 언급되는 처지에 있었던 반면, 발레리우스 세베루스는 그나마 장교단 내에서 평판이 좋았고 갈레리우스에게서도 인정받은 반면 그밖엔 이렇다할 인지도는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갈레리우스 누나의 아들이었음에도 아예 군사적 업적 측면에서조차 별반 주목을 받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니 적어도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는 스스로들의 힘으로 권좌를 움켜잡을 수밖에 없었으며, 그렇지 못하면 그들에게 닥칠 장래는 목숨마저 위험했을 상황이었다.
3. 관련 전승
기독교를 최초로 공인한 황제의 아버지이자, 서부 제국 제일의 오지였던 브리타니아에서 생을 마감한 황제이기 때문인지 기독교 측에서는 그가 잠재적인 기독교도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며[12], 영국에는 그가 영국의 추장이었던 코엘의 딸 헬레나와 결혼하여 콘스탄티누스를 낳았다고 되어 있다.[13][14]4. 여담
- 클로루스(Chlorus)는 동로마 제국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불린 별칭인데, 창백한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런 명칭 때문에 일부에서는 그의 사망 원인이 백혈병이나 폐결핵이 아니었는가 추측하기도 한다. 흰 피부가 트레이드마크인 게르만족 혈통이 로마 최고 권력층에도 드물지 않던 당시 정황을 생각해 볼때, 어지간히 하얗지 않았다면 창백한 황제라고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1세, 즉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버지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콘스탄티우스는 순전히 본인 실력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에게 인정받아 부제 그리고 마침내 황제 자리까지 오른, 유능한 인물이었다.
- 조각상에서도 보이듯이 상당히 주걱턱이었던듯 하다.
5. 출처
<비잔티움 연대기> by John Julius Norwich등등
[1] 그래서 그런지 아들과, 그 아들(즉 손자)의 이름 중 각각 달마티우스가 있다.[2] 막시미아누스도 진압을 시도했지만 실패해서 289년에 어쩔 수 없이 인정했다.[3] 거기는 바다 넘으면 바로 런던 근방이다. 즉 브리튼 섬의 남동부.[4] 적어도 콘스탄티누스와는 대단히 성격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5] 갈레리우스의 측근, 부하[6] 갈레리우스의 외조카[7] 딱히 그가 콘스탄티누스를 핍박했다는 증거도 사실 없고, 콘스탄티누스가 제3자가 볼 때는 정신 나갔다 싶을 정도로 목숨을 내던지듯 적진 돌격을 즐긴 건 있었지만 그건 갈레리우스가 몰아댄 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가 자청했던 돌격들이었다.[8] 켈트계 스코틀랜드 원주민[9] 이게 다 군심을 모아 나중에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한 것이다.[10] 여차하면 자기도 세트로 묶여 같이 위험해지니까. 집안 싸움이 아닌 이상, 그리고 아들들이 여럿 되는데 그들이 서로 다른 편에 서지 않는 이상, 부자가 정치적 공동운명체인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똑같다. 이괄의 난 참조.[11] 알다시피 일단 결과는 좋았고, 아들 콘스탄티누스 본인은 여러 업적은 물론 65세로 천수를 누리고 갔지만, 그 아들과 조카들(즉 콘스탄티우스에게는 모두 손자)은 7명 중 콘스탄티우스 2세[15]를 빼고는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모두 비참하게 죽었다.[16][12] 카이사레아 주교 에우세비우스의 "콘스탄티우스 황제전"이 출전, 그의 첫 아내격인 헬레나 태후는 독실한 기독교도로서 많은 전설을 남기기도 했다.[13] 실제로는 전혀 근거가 없으며 아나톨리아 니코메디아 시 근방의 헬리오폴리스(드레파나) 출신이다.[14] 근거없는 날조는 아니고 콘스탄티누스 1세가 요크에서 군복무를 했고 그곳에 황제로 추대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크는 자신들의 시조를 콘스탄티누스 대제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