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게해 인근 도시에 대한 내용은 이즈미르 문서
, 니케아로 유명한 도시에 대한 내용은 이즈니크 문서
참고하십시오.이즈미트 전경 | 이즈미트 만 |
튀르키예어 | İzmit |
그리스어 | Νικομήδεια |
라틴어 | Nicomedia |
영어 | Izmit/Nicomedia |
1. 개요
튀르키예 코자엘리 도의 도청소재지. 이즈미트 만 안쪽에 위치해 있다. 옛 이름은 니코미디아.[1]2. 지리
현재 인구는 30만명이다. 농촌 일대까지 합치면 140만이다. 이즈미트 만의 시작점인 보스포루스 해협을 따라 해안선이 이어지는 끝에 위치하다보니, 보스포로스 해협의 중심도시인 이스탄불과 해안선을 따라 연결되어있으며, 이스탄불의 위성도시로 기능하고 그 자체로도 아름다운 항구 도시이자 산업도시로 유명하다.이즈미트에는 한국 기업들이 많이 입주해 있으며, 현대자동차, 현대모비스, 현대제철, 포스코의 공장이 입주해 있다. 특히 현대그룹 계열사들이 많은 편인데, 이로 인해 울산광역시와 자매도시를 맺었다.
3. 역사
로마 시대 수도교 유적. 거의 유일한 옛 니코메디아 시기의 흔적 중 하나이다.
3.1. 고대
기원전 712년에 그리스 메가라 인의 식민 도시로 세워졌다. 당시 이름은 아스타쿠스(Ἀστακός)라 불렸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지배와 알렉산드로스 3세의 원정에서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소도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디아도코이 시대 때에 리시마코스에 의하여 도시가 파괴되었으나 비티니아 왕국의 2대 왕인 니코메데스 1세(기원전 278~255년 재위)에 의해 재건되었다. (기원전 264년) 고대 도시의 시가지는 이 때에 형성되었으며 '니코메디아'라는 도시 이름도 그 왕명에서 유래되었다.니코메디아는 니케아와 함께 비티니아 왕국(기원전 297~74년)의 수도 역할을 하였다. 카르타고의 장수 한니발 바르카도 여기서 말년을 보냈고 근처 항구에서 자살하였다.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니코메디아는 폰토스 왕국에게 일시적으로 점령되기도 하였다. 이후 로마에 의해 복위된 니코메데스 4세는 자신의 사후 왕국을 로마에 넘긴다는 약속을 하였고 따라서 그의 죽음과 함께 로마 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 286년에서 324년 동안 이 도시는 로마 제국 동방 정제의 도읍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를 다시 통일한 324년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까지 임시수도 역할을 하였고 콘스탄티누스도 여기서 죽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와 황후 파우스티나가 묘사된 메달이 니코메디아에서 발굴되었다.
3.2. 중세·근세
이후로도 동로마 제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기능하였다. 잠깐 셀주크 제국이 지배했던 적이 있지만 다시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1337년에 오스만 베이국에 함락되었다. 1402년, 티무르에 의하여 동로마 측에 돌아왔지만 1419년에 다시 오스만의 영토가 되었다. 오스만 치하에서 니코메디아는 이즈미트로 개명되어 코자엘리 산작[2]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3.3. 근현대
오스만 제국은 근대화를 추진하며 이스탄불과 주변 도시들을 잇는 철도 건설을 추진했는데, 아시아 쪽에서 가장 가까운 주요 도시가 바로 이즈미트였다. 따라서 세계적으로도 상당히 이른 시기인 1873년에 이스탄불-이즈미트 철도가 개통하였다. (압뒬아지즈 문서 참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20년에 그리스가 점령하였으나 이듬해에 튀르키예 군이 회복하여 현재에 이른다. 당시 인구는 13,000명이었으나 1990년 경에는 50만명을 돌파하였다. 1999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17,000명이 사망하고 수십만의 이재민이 발생하였으나 신속히 복구되어 현재 인구는 30만명에 이른다.4. 관광
도시의 랜드마크인 시계탑 |
[1] 이름이 비슷해 니케아와 헷갈리기 쉽다. 더군다나 니케아가 니코미디아 바로 남쪽에 위치해 있어서 알쏭달쏭하게 만들지만 이 둘은 엄연히 다른 도시다. 튀르키예어 명칭도 각각 이즈니크와 이즈미트. 거기에 이즈미르까지 추가된다면? 이럴 때는 앞의 이즈를 빼고 니크, 미트, 미르를 생각하면 그나마 '니케'아, (니코)'미디'아, 스'미르'나에 자음 음가가 살아있어서 연상하기 쉽다.[2] Sanjak. 오스만 제국의 지방행정단위 중 하나로, 현대 대한민국으로 치면 도의 하위 단위로 시 몇 개를 묶어 놓은 개념 쯤으로 보면 된다. 이즈미트는 제국 초창기에 오스만에게 함락된 만큼, 코자엘리 산작은 여러 산작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