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2 22:13:20

프라아테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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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국 17대 샤한샤
𐭐𐭓𐭇𐭕 | 프라아테스 4세
파일:프라아테스 4세.jpg
제호 한국어 프라아테스 4세
파르티아어 𐭐𐭓𐭇𐭕
영어 Phraates IV
존호 샤한샤
생몰 년도 ? ~ 기원전 2년
재위 기간 기원전 37년 ~ 기원전 2년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파르티아의 제17대 샤한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침략을 막아내고, 로마 제국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으나 아내인 무사에 의해 독살당했다.

2. 생애

오로데스 2세사카족 공주의 아들이다. 기원전 38년 형 파코로스 1세가 긴다루스 산 전투에서 푸블리우스 벤티디우스 바수스의 로마군과 맞붙다가 전사한 뒤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오로데스 2세는 총애하던 아들 파코로스 1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긴 채 기원전 37년경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오로데스 2세는 차남 프라아테스 4세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왕권이 위협받을 것을 우려하여 이복형제들을 모조리 죽였다. 또한 형제들의 추종자들과 자신의 정적들도 모조리 처형했다. 파르티아 귀족 모나세스(Monaeses)는 시리아로 망명한 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휘하에 들어갔다. 안토니우스는 모나세스에게 라리사, 히에라폴리스, 아레투스 등 3개의 도시를 통치할 권리를 맡기고 파르티아 왕위에 앉혀주겠다고 약속했다. 모나세스는 로마군이 파르티아의 모든 지역을 손쉽게 정복할 수 있다고 장담했고, 안토니우스는 이에 고무되어 전쟁을 준비했다. 안토니우스의 부하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는 아르메니아를 로마의 동맹국으로 만든 뒤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이베리아인과 알바니아인을 물리쳤다. 이리하여 아르메니아 산악지대로 이동할 로마군의 진군로가 확보되었다.

얼마 후 프라아테스 4세가 화해의 손길을 건네자, 모나세스는 고심 끝에 파르티아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후 파르티아 사절이 안토니우스를 찾아가 카르헤 전투 때 노획한 로마 깃발을 반환하고 생존한 포로들을 돌려보내겠다고 제안했지만, 안토니우스는 콧방귀를 뀌며 거부하고 전쟁 준비를 계속했다. 그는 16개 군단 60,000명에 달하는 군단병, 10,000명의 이베리아 및 켈트족 기병, 30,000명의 동맹군으로 구성된, 총 10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편성했다. 안토니우스는 가능한 한 빨리 파르티아의 수도로 가고 싶었기에 300개의 마차에 실린 공성무기, 보급 물자를 싣고 가는 소떼를 오피우스 스타티아누스가 지휘하는 2개 군단에게 맡기고 산길을 따라 빠르게 이동하기로 했다.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원정에 착수했다.(안토니우스의 파르티아 원정) 그는 아르메니아 산악지대를 횡단하여 메디아 아트로파테네를 공략한 뒤 프라아스파를 포위했다. 파르티아군은 처음엔 압도적인 전력차로 인해 연전연패했지만, 곧 그들의 약점을 눈치챘다. 보급부대가 한참 뒤쳐져서 따라가느라 본대의 지원을 받기 힘들었던 것이다. 적군이 프라아스파 요새를 공격하는 데 쏠린 사이에 친히 기병대를 이끌고 적 보급부대를 습격했다. 스타티아누스는 처절하게 맞섰지만 부하들과 함께 전사했다. 파르티아군은 로마군에게 매우 중요한 공성무기와 보급마차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여기에 아르메니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휘하 부대를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돌아가버렸다.

안토니우스는 프라아테스 4세에게 사절을 보내 카르헤 전투 때 노획한 깃발을 돌려주고 포로들을 귀환시킨다면 철수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묵살당했다. 결국 겨울이 가까이 오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프라아테스 4세는 적군이 왔던 길과 같은 길로 돌아갈 것이라고 예상하고 그 주변에 군대를 매복시켰지만, 안토니우스는 그 길을 택하지 않고 적 기병이 활동하기 힘든 언덕을 따라 이동했다. 그러다 사흘째 행군했을 때 둑이 허물어져 도로가 침수된 곳에 이르자, 그는 파르티아군이 이런 짓을 했으리라 판단하고 부하들에게 전투 대형을 결성하라고 명령했다. 얼마 후 파르티아 기병대가 습격했지만, 적군의 맹렬한 반격으로 패퇴했다. 그러나 파르티아 기병대는 끈질기게 추격하여 습격을 가했고, 안토니우스의 유능한 부하 중 한 명인 플라비우스 갈루스 등이 전사했다.

그래도 안토니우스의 통솔력이 상당했기에, 로마군은 갈증과 허기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적군의 모든 습격을 격퇴할 수 있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로마군은 철수하면서 총 18번에 걸친 전투를 치렀다고 한다. 로마군은 프라아스파에서 철수를 개시한 지 27일 만에 메디아와 아르메니아의 국경지대인 아락스 강에 도착했다. 파르티아군은 로마군이 강을 건너자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는 이 전투에서 약 35,000명의 로마군 및 동맹군을 잃었는데, 그 중 절반은 질병으로 사망했다. 프라아테스 4세는 승리를 기념하여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테트라드라크마를 특별 주화에 실었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을 배신하고 아르메니아로 돌아간 아르타바스데스 2세를 용납하지 않았다. 기원전 34년 이른봄 아르메니아로 쳐들어가 아르타바스데스 2세를 사로잡았고, 아르메니아를 비교적 쉽게 정복했다. 아르메니아에 수비대를 배치한 뒤, 이집트로 돌아가 알렉산드리아에서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식을 개최했다.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쇠사슬에 묶인 채 전리품으로 취급되었고, 개선식이 끝난 뒤 처형되었다. 안토니우스는 다시 아락스 강으로 가서 메디아 왕 아르타바스데스 1세와 동맹을 체결했다. 메디아 왕은 아르메니아 영토의 일부를 받았고, 그의 딸 로타파는 안토니우스의 아들과 약혼했다. 여기에 스타티아누스의 패배로 인해 노획된 로마군 전투 깃발도 반환되었다.

아르타바스데스 1세는 안토니우스가 제공한 로마군의 협조를 받아 파르티아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와의 내전이 터지자 안토니우스의 시선은 그쪽으로 쏠렸고, 아르타바스데스 1세는 안토니우스의 지원을 받지 못한채 파르티아군의 맹공을 받고 메디아를 잃은 후 시리아로 도주했다. 메디아에 여전히 남아있던 로마군은 파르티아군에게 살해되었다. 기원전 30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이집트에서 자살할 무렵, 친파르티아파인 아르탁세스 2세(BC 34~BC 20 재위)가 파르티아군의 협조를 받고 아르메니아의 왕위를 확보했다.

그러나 프라아테스 4세는 이 일련의 승리에 자만하여 백성과 귀족들에게 잔혹하게 굴다가 민심을 잃었고, 티리다테스 1세의 반란으로 수도에서 축출되었다. 그는 스키타이 유목민들의 도움을 받아 반격에 나섰고, 기원전 30년/29년 겨울에 티리다테스 1세를 파르티아에서 몰아냈다. 티리다테스 1세는 프라아테스 4세의 막내아들을 유괴한 채 시리아로 도주했다. 나중에 이걸 알게 된 프라아테스 4세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사절을 보내 아들과 티리다테스 1세를 인도하라고 요청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르헤 전투 당시 노획된 전투 깃발을 되돌려받는 조건을 내걸었고, 프라아테스 4세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에 프라아테스 4세의 막내아들이 보내졌지만, 티리다테스 1세는 파르티아로 보내지지 않았다.

기원전 26년 봄, 티리다테스 1세는 추종자들을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 하부 지역에 들어와서 왕을 칭했다. 프라아테스 4세가 곧바로 반격을 가하는 바람에 곧 패퇴했지만 기원전 25년 3월 셀레우키아의 조폐국에서 주화를 발행하며 맞섰다. 그러나 그해 5월 프라아테스 4세가 셀레우키아를 공략하고 셀레우키아 조폐국에서 자신의 동전을 다시 찍게 했다. 티리다테스 1세는 로마로 재차 망명했고,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기원전 20년 5월 12일, 아우구스투스가 로마군을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변에 이르렀다. 이에 파르티아는 지난날 노획했던 로마군 깃발을 내주었으며, 안토니우스를 따랐다가 포로가 된 로마 병사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카르헤 전투 포로들은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나서 다 죽어버렸다며 한 명도 보내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는 뒤이어 티베리우스를 아르메니아로 파견해 친파르티아파 군주 아르탁세스 2세를 몰아내고 친로마파 군주인 티그라네스 3세(BC 20~BC 8 재위)를 왕위에 앉혔다. 파르티아는 강대한 로마군과 정면대결하길 원하지 않았기에 그들의 행위를 용인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파르티아와 협상한 끝에 양국의 경계를 정하는 한편, 프라아테스 4세에게 무사라는 이름의 이탈리아인 노예 소녀를 선물로 보냈다. 아브로마에서 발견된 양피지에 따르면, 프라아테스 4세에게는 이미 올레니에르, 클레오파트라, 바시르타, 비스테이바냅스 등 4명의 황후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프라아테스 4세는 무사에게 완전히 빠져들었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프라아테스 5세를 낳았다. 기원전 10년 또는 9년, 무사는 친아들의 제위를 확보하기 위해 남편 프라아테스 4세로 하여금 세라스판데스, 로다스페스, 보노네스 1세, 프라아테스 등 그의 다른 자식 4명을 로마에 인질로 보내게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4명의 어린 파르티아 왕자들을 대중에 보이면서, 파르티아가 로마에 굴복했다고 선전했다. 기원전 2년, 무사는 프라아테스 4세를 독살하고 아들 프라아테스 5세와 함께 제국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