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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국 23대 샤한샤 𐭍𐭐𐭕𐭓 | 아르타바노스 2세 | ||
제호 | 한국어 | 아르타바노스 2세 |
파르티아어 | 𐭍𐭐𐭕𐭓 | |
영어 | Artabanus II | |
존호 | 샤한샤 | |
생몰 년도 | ? ~ 38년 | |
재위 기간 | 12년 ~ 3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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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르티아의 제23대 샤한샤.파르티아 제국 최초의 방계 왕족 출신 샤한샤이다.
2. 생애
아버지는 카스피 해 동부 해안에 거주한 세 종족들의 연맹인 다하에(Dahae)의 왕자였으며, 어머니는 프라아테스 4세의 딸이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아르타바노스 2세는 히르카니아(Hyrcania) 북동부 출신이었다고 한다. 반면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따르면, 그는 아트로파테네(Atropatene) 출신이었다. 현대 학자들은 히르카니아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아르타바노스는 성인이 되었을 때 메디아 아트로파테네의 통치자가 되었고, 서기 9/10년 귀족들의 추대를 받고 친로마파인 보노네스 1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보노네스 1세는 아직 자신을 따르는 지지자들을 이끌고 반격을 가해 반란군을 쳐부쉈고, 아르타바노스 2세는 산악 요새로 도피했다. 보노네스 1세는 자신의 성공을 기리기 위해 특별 주화를 주조했다. 그러나 아르타바노스 2세가 다른 군대를 모아 공세를 개시했고, 보노네스 1세는 곧 패배한 뒤 티그리스 강을 따라 셀레우키아로 도주했다. 아르타바노스 2세는 서기 12년 크테시폰에 입성한 뒤 샤한샤에 올랐다. 보노네스 1세는 셀레우키아에서 버티다가 결국 파르티아에서 밀려나 마침 왕이 없었던 아르메니아로 피신한 뒤 그곳의 왕(12~18 재위)이 되었다.
서기 15년 또는 16년, 아르타바노스 2세는 아들 오로데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위에 앉히기 위해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보노네스 1세를 축출했다. 그러자 티베리우스 황제는 조카 게르마니쿠스에게 대군을 맡겨 아르메니아로 파견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서기 18년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르탁사타를 공략했다. 하지만 그는 파르티아와 전쟁을 벌이고 싶어하지 않은 황제의 의향에 따라 파르티아에 협상을 제안했다. 아르타바노스 2세 역시 협상에 응했고, 양자는 유프라테스 강의 한 섬에서 만나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 대화를 나누었다.[1]
그 결과 양자는 우호 협약을 맺었다. 파르티아는 로마가 지정한 왕 아르탁세스 3세(18~34 재위)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인정했고, 아르타바노스 2세 역시 로마부터 파르티아 왕으로 인정받았다. 보노네스 1세는 시리아로 이송된 뒤 시리아 총독 실라누스 크레티쿠스의 감시하에 망명 정부를 구성했다. 서기 19년 아르타바노스 2세가 로마에 사절을 보내 보노네스 1세의 존재를 용인하는 것에 항의하면서, 그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이에 따라 보노네스 1세를 킬리키아의 폼페이오폴리스로 옮기기로 했다. 보노네스 1세는 탈출을 시도하다가 경비병에게 살해되었다.
이렇게 로마와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아르타바노스 2세는 파르티아 제국 내에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메디아 아트로파테네, 카라케네, 페르시스, 엘리마이스 등 토착 왕국들을 폐지하고 자신의 아들들을 위한 속주로 전환했다. 하지만 동방 영토에는 이와 같은 정책을 단행하지 못하고 수렌 가문이 계속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 허용했다. 그러면서 제국 내 그리스계 폴리스들이 자치권을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1932년에 서기 21년 아르타바노스 2세가 수사의 도시 장로들에게 그리스어로 보낸 편지가 발굴되었는데, 이 편지에는 조작 논란이 있는 선거를 샤한샤가 중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서기 34년, 아르메니아 왕 아르탁세스 3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사망했다. 아르타바노스 2세는 지금이야말로 자신의 아들 아르사케스 1세를 아르메니아 왕으로 앉히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 아케메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가 소유했던 영토를 언급하면서, 자신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후계자이니 마땅히 아케메네스 왕조가 가졌던 땅을 돌려받을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보노네스 1세가 가져가버린 파르티아 왕실의 보물을 봔환하라고 요구했다.
이때 아르타바노스 2세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던 파르티아 귀족들이 로마에 밀사를 보내 프라아테스 4세의 아들 프라아테스를 왕으로 추대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로마는 이를 수락했지만, 프라아테스는 귀향하던 중 시리아에서 사망했다. 그러자 티베리우스는 프라아테스 4세의 손자인 티리다테스를 보냈고,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를 시리아 총독으로 임명하여 티리다테스를 돕도록 했다. 또한 이베리아 왕국의 군주 파라스마네스 1세의 형제인 미트리다테스(1차 35~37, 2차 42~51 재위)를 아르메니아 왕으로 앉혔다. 그러자 아르타바노스 2세는 아들 오로데스(37~42 재위) 휘하의 대규모 군대를 아르메니아로 파견했지만, 미트리다테스는 알바니아인 및 사르마티아 지원군과 함께 이들을 물리쳤다.
이후 파르티아 일부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르타바노스 2세는 일단 히르카니아로 물러났고, 파르티아 영토 대부분은 크테시폰에서 샤한샤로 추대된 티리다테스 2세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또다른 파르티아 귀족들이 아르타바노스 2세를 지원했고, 로마가 티리다테스 2세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은 덕분에 어렵지 않게 물리쳤다. 티리다테스 2세는 시리아로 피신했고, 아르타바노스 2세는 다시 파르티아 전역을 장악했다.
서기 37년 봄, 미트리다테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칼리굴라에 의해 폐위되어 로마로 송환되자, 그는 이때를 틈타 오로데스를 아르메니아 왕위에 앉혔다. 이후 시리아 총독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와 아르타바노스 2세가 유프라테스 강둑에서 만나 협상했다. 협상 결과, 파르티아는 로마와 동등한 주권을 갖는 걸 인정받고 오로데스의 집권을 인정받았으나 아르메니아 왕이 로마를 섬겨야 한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이에 더해 다리우스라는 이름의 왕자를 로마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그러나 파르티아는 정치적 안정을 되찾지 못했다. 셀레우키아에서는 서기 36년부터 시작된 반란이 42년까지 이어졌으며, 일부 파르티아 귀족들은 아르메니아에 대한 불간섭을 약속한 샤한샤에게 반감을 품고, 아르타바노스 2세의 양자인 키나무스(Cinnamus)라는 인물을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아르타바노스 2세는 수도에서 쫓겨나 아디아베네의 왕 이자테스에게 망명했다. 이자테스는 양자를 화해시키는 데 성공했고, 아르타바노스 2세는 수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서기 38년에 사망했으며, 아들 바르다네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
[1] 이때 아르타바노스 2세는 게르마니쿠스 특유의 겸손하고 정중한 태도에 깊은 인상과 호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게르마니쿠스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냥과 연회를 잠깐 중지하며 애도를 표하게 되는데, 그 긴 로마-파르티아, 혹은 로마-사산조 페르시아 관계에서 로마측 황족이 죽었다고 이란계 군주가 일부러 조의와 애도를 표한 기록은 이 한 번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