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8-27 14:45:23

고타르제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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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티아 제국 9대 샤한샤
𐭂𐭅𐭕𐭓𐭆 | 고타르제스 1세
파일:고타르제스 1세.jpg
제호 한국어 고타르제스 1세
파르티아어 𐭂𐭅𐭕𐭓𐭆
영어 Gotarzes I
존호 샤한샤
생몰 년도 ? ~ 기원전 87년/기원전 80년
재위 기간 기원전 91년 ~ 기원전 87년/기원전 80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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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르티아의 제9대 샤한샤.

이 인물의 치세부터 제15대 왕 오로데스 2세의 집권 이전까지의 30여 년에 걸친 파르티아 역사는 기록의 공백 때문에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워서, 이른바 암흑시대로 지칭된다.

2. 생애

1955년 파르티아 수도 니시에서 발굴된 오스트라콘에 따르면 제3대 왕 프리아파티오스의 손자라고 한다. 그리고 이란 서부의 베히스툰 산에는 다섯 번째 인물에게 경의를 표하는 네 명의 인물을 묘사한 암각부조가 있다. 부조에는 심하게 훼손되어 알아보기 어려운 그리스어 비문이 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코파사테스, 미트리다테스, [마모됨] 사트라프 중 사트라프 고타르제스, 그리고 위대한 왕 미트리다테스.

코파사테스는 파르티아의 사트라프 코프자드를 지칭한 것으로 추정되며, '위대한 왕 미트리다테스'는 미트리다테스 2세를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학계는 이 부조와 비문이 미트리다테스 2세 치세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며, 이로 볼때 고타르제스가 미트리다테스 2세의 후계자로서 일찍부터 지명되었을 것이라 본다. 다만 라힘 M. 사예간은 이 부조는 고타르제스 1세 통치 기간에 건설되었으며,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시도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비문에 등장하는 '미트리다테스'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고타르제스의 형제라는 설이 있고, 바빌로니아의 장군으로 임명된 미트라투라는 설도 있으나, 어느 쪽이 맞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바빌론에서 출토된 명판에 따르면, 기원전 91년 미트리다테스 2세가 사망한 뒤 바빌론에서 왕으로 선포되었고, 미트라투를 바빌로니아의 장군으로 임명했다. 또한 왕비가 두 명 있었는데, 한 명은 아시아바툼(Ashi'abatum)이라 불렸고, 두 번째 왕비의 이름은 읽을 수 없다. 그와 직계 후계자 오로데스 1세는 이 시기의 서판에서 '아르사크'라는 칭호보다 그들의 이름으로 더 자주 언급되는 유일한 군주들인데, 이는 당시 여러 '아르사크'가 있었기에 이름을 별도로 기재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당시 파르티아 내정은 매우 혼란스러웠던 것으로 보이며, 아르메니아 대왕 티그라네스 2세는 이 틈을 타 미트리다테스 2세에게 내줬던 카스피해의 "70개의 계곡"이라고 불리는 지역을 도로 가져갔다.

그러다가 기원전 87년부터 바빌론에서 고타르제스 1세의 이름이 담겨진 주화가 사라지고 '미트리다테스'의 주화가 기원전 80년까지 발행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이 화폐학적 증거를 토대로, 고타르제스 1세는 이때 죽었고 그의 형제인 미트리다테스 3세가 왕위를 찬탈했을 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 문헌 또는 비석, 서판 등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미트리다테스 3세의 존재를 부정하는 의견도 강하다. 그들은 이 '미트리다테스'는 고타르제스 1세이며, 기원전 80년까지 계속 집권했을 거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어느 쪽이 맞는지를 판가름해줄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