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밀카르 𐤇𐤌𐤋𐤒𐤓𐤕 Hamilcar | |
<colbgcolor=#eee8aa><colcolor=#000> 출생 | 미상 |
미상 | |
사망 | 기원전 200년 또는 기원전 197년 |
크레모나 인근 또는 로마 | |
국적 | 카르타고 |
가족 | 미상 |
지위 | 카르타고 장군 |
참전 전쟁 | 제2차 포에니 전쟁, 로마-갈리아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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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카르트 하다쉬트(카르타고)의 장군.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북이탈리아에 파견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조국에 돌아가지 않고 남아있다가 갈리아인들을 선동해 로마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으나 결국 패배를 면치 못했다.2. 행적
그가 갈리아 키살피나 일대에 잔류한 경위로는 두 가지 기록이 제시된다. 하나는 기원전 207년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히스파니아에서 이탈리아로 진군했을 때 함께 했다가 하스드루발이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완패했을 때 목숨을 건져 갈리아인들의 거주지에 은거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기원전 205년 봄 리구리아에 상륙해 갈리아인들을 포섭하여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치른 마고 바르카의 곁을 수행하다가 마고 바르카가 기원전 203년 아프리카로 귀국했을 때 모종의 이유로 따라가지 않고 남아있었다는 것이다.그는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귀국하지 않고 정체를 숨긴 채 로마의 행보를 주시하다가,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하면서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에 주둔한 로마 수비대 규모가 줄어들고 경계도 느슨해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갈리아인과 리구리아인들에게 로마가 조만간 한니발 바르카를 도운 그들에게 보복할 거라고 선동해 로마에 반기를 들도록 유도했다. 그 결과 인수브레스족, 보이족, 케노마니족 등 갈리아 부족들과 일부 리구리아 부족들이 반기를 들었고, 그는 이들의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기원전 200년, 하밀카르는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의 로마 식민도시인 플라켄티아를 기습 공격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내내 고립된 상태에서도 끝내 갈리아인들의 공격을 막아내고 로마 정부에 물자 지원을 해줬던 플라켄티아는 이 기습 공격 한 번에 허무하게 함락되고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그 후 하밀카르는 포 강을 건너 크레모나로 쳐들어갔지만, 그 곳 주민들은 플라켄티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를 강화했다. 하밀카르는 이번에는 당장 공략하지 못하고 크레모나를 수십 일간 포위했다.
한편, 원로원은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벌어진 사태를 전해듣고 이탈리아에 남아있던 집정관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에게 진압을 명령했다. 하지만 코타가 아직 갈리아 키살피나에 도착하지 않은 사이, 현지에 주둔한 2개 군단을 이끌던 법무관 루키우스 푸리우스 푸르푸레오가 크레모나로 진격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갈리아군과 리구리아군은 완패하여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나중에 현장에 도착한 집정관 코타는 자기가 군공을 세울 기회가 사라진 것에 화가 나 푸르푸레오를 에트루리아로 쫓아보내고 로마에 반기를 든 갈리아인과 리구리아인들에게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각지를 약탈했다. 푸르푸레오는 이에 대응해 로마로 예기치 않게 찾아와서 원로원에 개선식을 거행할 권리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일부 원로원 의원은 그가 배정받은 속주를 무단으로 떠났으니 불법이라며 반대했지만, 원로원은 그가 개선식을 거행하는 것을 허락하기로 결의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하밀카르는 이때 전사했다고 한다. 반면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가 전하는 또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는 탈출에 성공한 뒤 여전히 로마에 맞서는 갈리아인들을 이끌다가 기원전 197년 민키우스 강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집정관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패하고 생포되었다. 이후 카테구스가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을 거행했을 때 전리품 취급당한 뒤 광장에서 목졸려 죽었다고 한다. 어느 기록이 사실에 부합한지는 불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