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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학파

1. 개요2. 배경3. 진행4. 결과
4.1. 반론
5. 현대전의 비슷한 사례6. 관련 외부 링크7. 관련 서적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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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Jeune École. 영어로 번역하면 Young School 이지만 영어로도 고유명사 취급해서 그냥 Jeune École 라고 표기한다.

프랑스 해군군사 교리 학파. 어뢰정 양산으로 쉽게 해군력을 증강하자는 이론을 주장한 학파다. 일본에서는 신생학파(新生学派)라고도 한다.

2.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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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11월 19일 작품,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마르 라 투르 전투: 프로이센의 중장기병 7기가 프랑스 대포를 부수는 장면(1870년 8월 16일)

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배로 여파로 프랑스프로이센 왕국에게 거액의 배상금 지급을 하게 되고 이 때문에 국내 경제도 위축되었다.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대항하기 위해 모든 전력을 육군 위주로 구성하고 군비증강도 그에 맞게 진행했고, 재정마저도 더 안 좋아졌기에 결과적으로 프랑스 해군의 예산은 대폭 축소됐다.

거기다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당시 프랑스 해군이 보여준 활약이 미미했던 것도 문제였다. 프랑스 해군이 보유하고 있던 다수의 장갑함은 프로이센 해안 봉쇄나 상륙을 통한 후방 기습에 실패하였고, 오히려 수병이 육지로 기어 올라가 파리 방어전에 참가해야 했다. 이런 타의적이며 환경적인 요인으로 프랑스 해군은 실질적인 전력이 되지 못하였고, 그러한 점 때문에 정부, 국민들에게 외면 받았다.

물론 프랑스 해군에게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던 건 사실이나, 당시의 프랑스 여론이 프랑스 해군에게 좋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었다. 여기에 산업혁명은 불에 기름을 뿌리는 꼴이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해군의 건함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진보해 불과 수 년 전에 건조된 함선이 구식함으로 전락하였다. 이에 당황한 프랑스의 국민들과 전략가들은 기존의 장갑함 위주 전력은 쓸모없다고 생각하였다. 거기다가 보불전쟁으로 인하여 프랑스 해군의 군비가 줄어들자 이런 인식이 더욱 고착됐다. 결국 프랑스의 많은 사람들이 전함과 같은 대형함정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 때 '테오필 오브(Hyacinthe Laurent Théophile Aube)' 제독을 중심으로 뭉친 일단의 장교 무리인 '청년학파'가 그러한 사상적 배경을 체계화시키고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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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조제프 펙상(Henri-Joseph Paixhans), (1783년~1854년).

그리고 청년학파는 이름에서 연상되는 것과는 달리 많은 숫자의 유력한 지지자가 있었다. 초기 청년학파의 지지자 중에는 그랑제콜 에콜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를 졸업한 육군 포병 장교 출신의 앙리조제프 펙상 장군도 있었다.

3. 진행

이들은 당시에 개발되기 시작한 최신기술인 자주어뢰 등을 이용하여 '연안방어'와 '통상파괴' 수행을 하자고 주장했고, 이 이론에 딱 들어맞는 어뢰정이야말로 이상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의 장갑함은 속도와 함포의 장전 속도가 너무 느려서 빠른 소형함에게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반면 어뢰정은 단 한두방으로도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장갑함을 격침시킬 수 있는 위력을 갖추었기에 당시의 대형함에게는 매우 위협적이었다. 게다가 가격은 장갑함들보다 훨씬 싸고 운용 인원도 적었으니 군비가 감축되던 프랑스 해군으로써는 매혹적인 무기체계가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은 이 어뢰정을 바탕으로 대형함들의 해안봉쇄를 막아내는 수세적인 전략을 세워 기존의 대형함 중심 전력체계를 대체하자는 주장을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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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8월 7일 프랑스의 테오필 오브 제독.

1886년에는 청년학파의 핵심 인물인 테오필 오브 제독이 해군장관으로 취임했고, 이후 프랑스 해군은 청년학파의 주장에 맞춰 기존의 건함 계획을 연기하거나 취소하고 어뢰정과 순양함을 다수 취역하는 등 철저히 통상파괴와 연안해군 전략에 의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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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의 SMS 루씬 어뢰순양함.
제조/운용국 함급 만재(전투)배수량 기준 배수량 취역
스웨덴 HSwMS 클로스 우글라 어뢰순양함 810톤 1900년 11월 28일
스웨덴 HSwMS 프실란더 어뢰순양함 810톤 1900년 7월 2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SMS 루씬 어뢰순양함 995톤 1884년 7월 1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SMS 티거 어뢰순양함(1887년) 1,657톤 1888년 3월

1880년 당시의 순양함은 현대의 순양함과 달리 800~2,000톤 사이의 경량급 전투수상함인 어뢰순양함이 있었는데, 이건 사실상 현재의 어뢰정이거나 초계함급이다. 이 당시는 순양함이라는 단어가 나온 초기라서 그냥 대양을 넘나드는 순양항해능력이 있으면 순양함인 거고, 현대의 순양함 함급과는 의미가 다르다.
제조/운용국 함급 만재(전투)배수량 기준 배수량 취역
프랑스 라페루즈급 포좌순양함 2,240톤 1877년 11월 5일 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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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운용국 함급 만재(전투)배수량 기준 배수량 취역
프랑스 아미랄 세실급 방호순양함 5,900톤 1890년 10월 9일 취역

그리고 동일한 시기에 2,000~6,000톤 사이의 포좌순양함(Barbette cruiser)과 장갑순양함(Armoured cruiser), 방호순양함(Protected cruiser)이 건조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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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1895년, 프랑스 해군의 어뢰정 No. 63(33미터형).

19세기 말부터 프랑스 해군이 청년학파의 주장에 따랐고, 당시 프랑스는 거의 200척에 가까운 어뢰정을 보유한 당대 최대의 어뢰정 보유국이 되었다. 만약 청년학파의 예측대로 되었더라면 프랑스는 이 때 세계 최강의 해군이었을 것이다.

4. 결과

하지만 청년학파의 예측과는 달리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정반대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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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프리드 세이어 머핸, (1840년~1914년).

1890년앨프리드 세이어 머핸[1]은 해군 역사를 정리한 책인 해양력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2]을 발표하며 통상파괴 전략의 한계를 주장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청년학파의 의미는 점점 퇴색해 간다.

이때만 하더라도 아직까지는 비판을 덜 받는 상황이었고, 어뢰정의 건조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프랑스는 1895년 195척의 어뢰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술발전으로 인해 제대로 된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청년학파와 전통적인 거함주의자(함대주의자)들 간의 논쟁이 있었고, 1900년에 전함주의의 복귀로 청년학파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이 20여년 동안의 기간 동안 프랑스 해군은 연안해군으로 머물렀다.

이들은 현대의 고속정과 비슷한 다수의 어뢰정으로 영국의 대형 함정을 상대한다는 비대칭 전략을 수립하였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청년학파에 대하여 비난하였고 역사적인 기록도 비난으로 점철되어 있다.

사실 이 청년학파의 어뢰정 중심 건조론은 시작부터 문제가 있었는데, 당시의 프랑스는 이미 해외 각국에 식민지를 보유한 해양 대국이라 어뢰정 중심 전력으로는 이 넓은 해양을 모두 수비하지 못해서 작전계획에 많은 애로사항이 꽃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청년학파 몰락의 결정적 원인은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기술의 발달이었다. 함선들이 속사포와 같은 신형 무기들을 속속 도입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대형함들은 어뢰정에 대항할 힘을 갖추게 되었고, 어뢰정이 대형함을 공격하는 것이 예전만큼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영국이 어뢰정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구축함이라는 중간급 함급을 고안한 게 결정타였다. 영국은 프랑스 해군이 어뢰정 위주로 함선을 건조하는 것을 보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 1893년에 최초의 구축함을 개발하고 그 해부터 '5개년 건함계획'을 세워 총 82척을 찍었다.

크기도 더 크고 어뢰정을 사냥할 무기를 갖추었고 속도도 대형함보다 빨라서 어뢰로 공격하기도 힘든 구축함은 어뢰정으로 상대하는 게 힘들었다. 애초에 구축함(destroyer)이란 함급 이름자체가 어뢰정을 구축하는 군함(torpedo boat destroyer)이란 뜻이므로 어찌보면 당연한 것. 이러한 구축함이 대형함을 호위하기 시작하면서 실질적으로 어뢰정의 타격능력이 무력화되었고, 대형함 타격 이상의 작전능력을 갖추지 못한 프랑스의 200척에 가까운 어뢰정 전력은 그대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1880년~1890년 기간 동안 프랑스는 장갑함전함 건조를 소홀히 하였다. 반면 동시기 프랑스의 경쟁국인 이탈리아는 여러 척의 장갑함과 전함 건조를 시작하여 프랑스와의 격차를 좁혔다. 일부 소규모 국가들만 프랑스 청년학파의 주장처럼 해군을 구성했고, 20여년 동안 프랑스 해군을 지배했던 청년학파의 전략은 선두 영국과 더 긴 격차를 벌어지게 했으며 후발주자인 이탈리아가 프랑스를 따라잡는 계기가 되었다.[3]

청년학파의 이론과 현실은 철저한 비대칭 전략과 연안해군에 의존한 해군이 어떠한 결과를 만드는 지에 대한 좋은 예시다. 간극을 메꾸기 위한 무리수는 어차피 위험한 도박이 따른다. 때문에 무리한 전략의 추진은 위험성이 있다.

유틀란트 해전이나 쓰시마 해전 같이 비슷한 성능의 군함을 보유한 해군이 일정한 규모의 격차를 극복한 사례는 있다. 하지만 청년학파처럼 기술의 출현에 따라서 상대도 안될 수 있는 소형군함들을 수량으로만 도배한다면 일방적인 학살극이 벌어질 수 있다.[4] 이때는 작전이나 운도 바라기 힘든 지경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비대칭전략이나 요행은 상황에 따라서 격차를 회복하는 것이 아닌 더 크나큰 격차를 벌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4.1. 반론

프랑스가 바보여서 이 문제 많은 전략을 오랜 기간 유지했던 것이 아니다. 19세기 말 프랑스는 적대적인 독일 제국과 국경을 맞댄 상태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새로이 탄생한 통일 독일은 경제, 인구 및 육군 전력에 있어 프랑스를 추월했다. 심지어 프랑스는 1871년에 알자스-로렌을 상실하면서 보주 산맥과 라인 강이라는 자연방어선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독일 제국군은 평시에도 라인 강 서안 프랑스 국경에 자그마치 4개 군단을 박아놨고, 보주 산맥 위에서 파리 분지를 감제했다. 국경으로부터 수도 파리까지는 방어선을 삼을 만한 지형지물이 부족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국경을 방위하는 프랑스 육군의 부담이 전에 없을 정도로 늘어났음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프랑스는 우세한 적을 맞아 열세한 국력으로 구멍 난 기나긴 육상 국경을 메워야 했다.

이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 프랑스에게 필요한 것은 전함이 아닌, 당장 동원 가능한 더 많은 육군 장병들과 야포들, 그리고 견고한 요새들이었다. 아무리 해군 전력을 고르게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한들, 주적과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승패가 육상에서 결정될 것이 명백하다면 최대한 해군에 들어갈 여력을 아끼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다. 당장 1870년의 보불전쟁만 하더라도 프랑스 해군이 독일 해안선을 봉쇄했지만, 막상 전쟁의 승패는 해상에서의 우위와는 상관없이 육상의 스당 전투에서 결정되었다. 스당의 전훈은 프랑스가 청년학파 건함사상을 도입하는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였다.

따라서 청년학파 전략을 통해 최소한의 해안 방어 체계만을 구축한 채 남는 여력을 전부 육군에 투자하는 것이 독일 육군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해군이야 어쨌건 프랑스의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했다. 실제로, 이렇게 여력을 최대한 쥐어짜내며 유지했던 프랑스 육군은 1870년 스당에서와 달리, 1914년 여름의 독일군 공세를 제1차 마른 전투에서 기어이 돈좌시켜 버리는 것으로 그 값어치를 입증했다. 결론적으로 청년학파 전략은 해군 전략 그 자체로써는 문제가 많을지 몰라도, 역사적으로 당대 프랑스의 상황에서는 이를 채택하는 것이 어느 정도 불가피했음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해외 식민지를 방위해야 하므로 해군이 필요하다는 주장 역시 당시 프랑스인들에게는 배부른 소리였다. 1880년대 프랑스 식민제국의 확장은 당대 수상 겸 외무장관 쥘 페리의 주도로 이뤄진 것이었다. 막상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다수의 프랑스 국민들은 좌우파를 가리지 않고 정부의 식민정책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좌파는 식민정책에 너무 많은 지출이 발생한다고 여겼으며, 우파는 무능한 정부 놈들이 알자스-로렌 문제로부터 국민들의 눈을 돌리려는 얕은 수작질을 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극우파들은 "우리는 2명의 아이(알자스-로렌)를 잃었는데 정부는 20명의 하인(식민지)를 두고 있다"며 정부를 공격했다. 당대 프랑스 국민들의 외교적 제1 관심사는 식민지가 아니라 독일, 그것도 그들로부터 빼앗긴 자국 영토인 알자스-로렌을 되찾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강대한 해군이 아닌 강력한 육군이었다.

반대로 동시대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야말로, 자국의 안보 상황에 적합하지 않음에도 무리해서 대양해군을 건설하다 국가안보를 망쳤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의 경우 프랑스와 러시아에 양쪽으로 포위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을 겨냥하며 무리한 건함 경쟁을 일삼은 끝에 적을 하나 더 늘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경우, 넓은 육상 국경과는 대비되는 좁은 해안선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것도 오트란토 해협의 입구만 막으면 해안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 이상의 대해군을 유지한 대가로, 실제 주적인 러시아와 세르비아를 상대하는 데 필요한 육군 전력 강화에 악영향을 겪었다.

5. 현대전의 비슷한 사례

19세기의 구형 어뢰정 → 20세기의 어뢰정 → 미사일 고속정지대함 미사일

비슷한 사례는 현대전에서도 존재한다. 구축함의 출현으로 몰락한 프랑스의 어뢰정과 다르게 세계대전에서도 어뢰정은 출현하였다. 현대전의 어뢰정은 1935년 이후 더욱 빠른 속력과 강력해진 어뢰로 인해 나름 성과를 거두었으나 생산된 척수에 비하면 여전히 별다른 활약을 할수 없었다[5]. 주요 해전이 벌어진 태평양 전쟁을 잘 살펴보면 왜 어뢰정이 활약할 수 없었는지가 잘 드러난다. 미군 함대와 일본군 함대는 어뢰정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해역에서 해전을 벌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거의 항상 어뢰정의 천적 구축함들이 함께 돌아다녔다. 구축함 뿐만이 아니라 이미 해전의 대세는 항공모함의 항공전으로 넘어가던 추세였고, 함재기의 기총소사조차 견디기 힘든 어뢰정들에게는 너무 가혹한 환경이었다. 물론 아예 쓸모없진 않았고 어쨌든 연안방어에는 잘 써먹기도 했으며 비스마르크해 해전 같은 곳에서도 간간히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러한 신형 어뢰정들도 19세기의 어뢰정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병기인 대함 미사일이 출현하면서 몰락하였다. 이 대함 미사일을 장착한 미사일 고속정은 '에일라트 쇼크'라는 충격을 주며 임팩트있는 출현을 하였지만 다시 대함 미사일을 격추할 수 있는 대공체계를 갖춘 대형함들[6]에 저지당하고 시 스쿠아 미사일 등 고속정을 격파할 수 있는 경량 대함 미사일을 장비한 대잠헬기들에 학살당하며 몰락했다.[7] 이처럼 소형함은 신기술이 출현할 때 단기간의 선점은 가능하지만 이후에는 통상 대형함에서도 유사한 체계가 장착돼 몰락하게 된다.

해군의 싸움을 극단적으로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무조건 큰 놈이 이긴다."라고 할 수 있다. 단기간의 전투에서 대형함들이 물먹은 적은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항상 대형함들이 승리해왔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대형함의 대표주자인 전함이 몰락했다지만 이는 거함거포주의가 사장된 것일 뿐 큰 배가 유리하다는 대전제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8][9] 대전 이후 해전의 주역이 된 항공모함잠수함에도 거함주의는 유효하다. 항공모함은 덩치가 클수록 많은 항공기를 운용할 수 있고, 잠수함은 항상 협소한 공간으로 인한 문제에 시달리니 말할 것도 없다.[10] 또한 현대 수상전투함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구축함은 과거의 순양함에 비견될 만한 배수량을 갖춰 더 이상 과거의 구축함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11] 해군이 더 큰 배를 추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배가 클 수록 작전 반경이 커지고 더 많은 무장을 탑재할 수 있으며 더 두터운 장갑을 두를 수 있기 때문이다.[12] 해군의 역사는 대형함 발전의 역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21세기 들어 육지에 기반을 둔 대함 탄도 미사일, 장거리 지대함 미사일, 스텔스 성능을 갖춘 미사일 고속정들이 대형함을 특정 해역에서 몰아낼 수 있다는 A2/AD 전략 이론이 나오고,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수상함정 전력이 전멸한 우크라이나군이 오히려 무인공격기와 지상발사 탄도 미사일, 지대함 미사일로 모스크바함 침몰 사건, 베르댠스크항 미사일 공격 등의 전과를 올리며 러시아 흑해함대를 유명무실하게 만든 사례가 있어 청년학파가 다시 힘을 얻을 것이라는 관측이 있으나, 러시아 흑해함대가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제공권을 전혀 장악하지 못하고 구식 대공방어 체계를 가진 함선들이 많은 것이 문제였으며, 미국 해군처럼 항공모함으로 제공권을 스스로 장악할 수 있고 이지스 체계를 탑재한 대형함이 많은 함대였다면 오히려 우크라이나 측 지상발사 대함전력까지 모조리 섬멸당했을 것이었으므로 청년학파의 이론과는 동떨어진 이야기이다. 더군다나 흑해는 일반적인 바다와는 조건이 다르다. 태평양이나 대서양쯤 되는 큰 바다에서는 적을 찾는 것부터가 문제고 사거리 문제로 지상에서 타격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지만 흑해처럼 작은 바다의 경우에는 적이 어디에 있을지 뻔하기 때문에 지상 발진 항공기나 미사일로도 충분히 타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이미 2차 대전 때 지중해태평양의 비교를 통해 드러난 일이었다.

거함거포주의의 기세가 드높던 시절에도 해안포 1문은 동급의 함포 3문과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 상식이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함선이라는 제한된 기반에 비해 육지를 기반으로 할 때 훨씬 강력한 위력의 무기체계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육지 기반 무기체계는 함대와 같은 전략적 기동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 역시 당연한 말이다. 물론 19세기 말~20세기 초에 해안포와 견시수가 담당하던 역할을 21세기 초에는 대함미사일과 항공기, 레이더가 담당하게 됨으로써 '해안 접근 거부'가 미치는 거리 자체는 훨씬 길어지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그 거리가 함대가 가지는 전략적 기동성을 무의미하게 만들만한 거리라고 할 수는 없고, 따라서 구도 자체는 딱히 변했다고 보기 어렵다. 결국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특정한 상황에서는 해안의 방어거점과 연계한 연안해군이 대형함으로 편성된 함대에 대해서도 강력한 저지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이미 널리 알려져 전혀 새로울것이 없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런 '특정한 상황'에 지나치게 집착했다가 '그 외의 상황들'에 대응할 능력을 상실하여 망한 사례가 바로 청년학파의 사례라고 보아야 한다.

6. 관련 외부 링크

7. 관련 서적

8. 관련 문서



[1] 머핸급 구축함이 앨프리드 머핸의 이름을 따서 지은 함급이다.[2] 1999년 <책세상> 출판사에서 1,2권으로 나누어 번역출판하였다. 현재도 쉽게 구매할 수 있으며, 웬만한 도서관에는 모두 비치되어 있다.[3]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공식이다. 오히려 무기체계가 과거보다 복잡해진만큼 최신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적절한 건함 사이클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졌다. 일본 제국과 함께 최초의 항공모함 개발국이자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상당한 항공모함 대국이었던 영국의 왕립 해군도 캐터펄트 발진식 항공모함을 한동안 운용하지 않자 노하우를 모두 상실하여 지금 캐터펄트식 항공모함을 도입하려고 해도 미 해군에 연수 가서 교육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해군 양성론자들이 목에 피가 나도록 주장하는 3,000톤급 이상 대형함의 꾸준한 건조가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4] 비슷한 성능의 함선을 갖추었으나 수적으로 열세인 경우에는 전술로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한 범위일 수 있다. 그러나 '강력한 한 방'을 갖춘 소형선으로 대형함을 상대하는 경우에는 그 '강력한 한 방'이 무력화 되는 순간 전술이고 뭐고 없다. 이쪽의 그 어떤 무기를 들이대더라도 상대에게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못하는 반면, 이쪽은 상대의 화력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이미 전차에는 전혀 통하지 않는 구식 대전차화기만을 가진 보병 부대를 최신형 전차 부대 상대하라고 보내는 꼴이다. 게임이라면 물량으로 게임에서도 아드레날린 업글은 한다. 찍어누르는 것도 가능하다지만 현실은 게임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미 언급했듯 프랑스는 배를 마구잡이로 찍어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즉, 물량으로 압도할 수도 없었다.[5] 일본 제국산소어뢰로 재미를 보긴 했지만 이 산소어뢰들은 어뢰정에서 운용되지 않았다. 작은 배가 항해하기 힘든 태평양을 돌아다녀야 했던 일본 연합함대로서는 어뢰정을 끌고 다닐 수가 없어서 최소 구축함부터 어뢰를 싣고 다니면서 쏘아댔다. 그나마도 태평양 전쟁 중반부터는 더 이상 활약을 기대하기 힘들었지만...[6] 이 대공 호위함의 결정체가 바로 위상배열 레이더와 스탠다드 미사일을 운용하는 이지스함이다.[7] 후술하듯이 체급에 의한 차이가 크다. 3,000톤급 이상 함정의 경우 크고 무거운 레이더와 대공 미사일 등 각종 무기체계를 탑재할 수 있어 대함 미사일이나 항공기를 격추하기 용이하지만, 미사일 고속정은 주력 무기인 대함 미사일을 장착하면 배수량이 거의 안 남기 때문에 대공기관총을 거치하는 것이 고작이고 중장거리 대공방어체계를 구성하기에 매우 요원하다. 따라서 고속정보다도 날렵한 대잠헬기나 고정익 항공기 입장에서는 둔한 고속정을 마음놓고 신명나게 팰 수 있는 것.[8] 그리고 통상파괴전에서는 여전히 전함이 유효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구축함이나 순양함은 전함 근처에 얼씬도 못했다. 전함이 퇴물 취급받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함과 동일한 역할을 더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항공모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그조차도 30기 정도 싣는 소형 호위항모 정도는 대공포로 갈아마시고 다녔다. 순수 해전에서 전함을 잡으려면 최소한 전함에 맞먹는 수만톤급 정규항모가 필요했다.[9] 무엇보다도, 대형함의 대표주자인 전함이 몰락했다고 하지만 그 위상을 대체한 항공모함은 전함 이상으로 크다. 그러니까 거함거포주의가 사장되었다는 것과는 별개로 해전에서는 무조건 큰 배가 무조건 유리하다는 전제는 여전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대포' 라는 구시대의 무기체계가 '미사일과 함재기' 라는 새로운 무기체계로 대체된 것일 뿐이고, 이 새로운 무기체계를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는 큰 배일수록 유리하다는 전제는 여전한 것이다.[10] 물론 해안선이 복잡한 일부 연안에서는 소형 잠수함이 활동하기 편리한 경우도 있는데, 이와 같이 특정한 상황에서는 청년학파의 주장과 같이 해안 전력과 연계한 소형함 위주의 전략이 유효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잘 알려진 사실이다.[11] 현대의 구축함은 더 이상 소형함으로 치지 않으며 주력함으로 분류된다. 과거의 구축함들이 맡던 역할은 호위함으로 불리는 프리깃과 고속정들이 담당하고 있다. 좀 비꼬아 말하자면 전함의 도태 이후 항공모함을 제외하면 구축함이 주력 전투함, 순양햠이 최대 전투함의 위상을 차지했다고 하더니 어느새 그 배들이 조금씩 커져서 옛날 전함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가까운 수준까지 커졌다고 할 정도.[12] 이는 해군 뿐만 아니라 육군이나 공군에도 얼추 통용되는 법칙이다. 전차나 전투기도 크면 클수록 무장과 장갑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다만 중력과 비행력의 한계 때문에 크기 발전에 제약이 있을 뿐이다. 같은 이유로 해군 역시 10만 톤 정도가 한계이고, 수십만 톤 급의 과도한 크기는 역시 지양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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