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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파 / [ruby(統制派, ruby=とうせいは)] | |
<colcolor=white><colbgcolor=#9e9e9e,#2d2f34> 활동기간 | 1920년대 경 ~ 1940년/1945년() |
이념 | 전체주의 보수주의 국수주의 팽창주의 내부 계파 : 혁신관료[1] |
스펙트럼 | 극우[2] |
반대 세력 | 황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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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제파(일본어: [ruby(統制派, ruby=とうせいは)])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중반까지 황도파와 파벌 싸움을 벌였던 일본 제국 육군의 파벌이다. 초기 영수로는 육군성 군무국장[3] 나가타 테츠잔[4]이었고 그의 죽음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본 측 핵심 전범이자 총책임자인 도조 히데키가 파벌 영수가 된다.천황제 파시즘 및 반재벌, 대중주의적 성격을 띠었으며[5] 외교적으로는 친서방, 반소련을 주장했던 황도파와 다르게 통제파는 소련과는 평화를 유지하고자 했으며 귀축영미로 대표되는 서방세력과 중국을 매우 적대했고 이들에 대한 더욱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주장했다. 또한 황도파와 달리 친기득권, 귀족주의적, 보수적 성격이 더 강했고 천황의 정치 개입을 반대하였으며, 민간인의 문민통제를 겉으로는 존중하지만 군부가 문민통제에서 한 축의 중심이 되어 정치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2. 역사
황도파가 중앙에서의 신임을 잃자 5.15 사건과 아이자와 사건[6], 2.26 사건 등의 쿠데타 시도로 자멸하면서 자연스레 일본 제국 육군을 완전히 장악하고, 고도국방국가 건설이라는 슬로건 하에 쇼와 천황의 묵인 속에 총력전 체제라는 명분으로 군국주의 체제를 수립한다. 통제파는 일본군의 지배적인 세력이 되었고, 견제 세력이 없어지자 1940년 정도에 파벌로서는 사라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다만 일본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940년을 전후해 황도파가 어느 정도 세력을 회복했고, 1944년에는 고노에 후미마로가 통제파를 쳐내고 황도파를 등용할 것을 주장한 일도 있기에 꼭 그렇다고 볼수는 없다.이후 일본 제국은 통제파의 구상대로 무모한 대외침략을 개시하여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끝에 파멸하게 된다.
[1] 천황제 파시즘과 관련이 있다.[2] 극우 전체주의 성향이었지만 황도파와 달리 서구식 파시즘과는 거리가 멀었다.[3] 당시 육군성 군무국장은 모든 정부 부처 관료 직위중 가장 실세였던 요직으로 평가받았다.[4] 수재출신 군무 관료로서의 길을 걸어 장래의 일본 육군 대신 재목으로 거론되는 인물이었고 육군에서 군정 재능으로는 나가타 위에 아무도 없다라고 평가 받고 있었다.[5] 정도와 방향성의 차이는 있지만 이는 황도파와 교집합인 부분이다.[6] 1935년 8월 12일, 당시 육군 교육총감이자 황도파 거물인 마사키 진자부로 대장을 경질 요청한 통제파의 초대 영수이자 육군성 군무국장이었던 나가타 테츠잔이 황도파 청년 장교들의 큰 형님격이었던 아이자와 사부로 중좌에 의해 대낮에 자신의 집무실에서 군도로 참살당하는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