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19:28:26

무위지화

1. 개요2. 고종의 황후 책봉3. 무주혁명4. 3차례의 정변5. 선천정변과 개원의 치

1. 개요

武韋之禍

당나라 중기에 벌어진 정치적 혼란으로 683년부터 713년까지 30년 동안 이어졌다. 무위(武韋)란 측천무후위황후의 성을 따온 것이다.

2. 고종의 황후 책봉

649년, 제2대 황제인 태종이 붕어하고 제3대 황제인 고종이 즉위한다. 즉위 이후 고종은 태자비였던 왕씨를 황후로 올렸으나 자식이 없어서 총애가 식어갔고 숙비 소씨를 총애했다. 황후 왕씨와 숙비 소씨의 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고종은 감업사(感業寺)에서 비구니로 있던 무미랑을 총애하여 입궁시켰다.

황후 왕씨는 숙비 소씨에 대한 고종의 총애는 멀어졌다고 생각했지만 곧 무미랑의 도전을 받았다. 655년, 제3대 황제인 고종이 황후 왕씨를 폐위시키고 소의 무씨를 황후로 세우니 이가 측천무후였다. 측천무후는 정치공작을 통해 조정의 원로였던 저수량장손무기를 죽이거나 귀양시키는 등 정치력을 발휘했다.

3. 무주혁명

683년, 고종이 죽고 태자인 이현이 즉위하니, 이가 제4대 황제인 중종이었다. 측천무후는 황제의 모후 자격으로 수렴청정을 했는데, 다음해 중종이 자신의 장인인 위현정을 시중으로 내정하려다 조정 대신들과 갈등을 빚자, 중종을 폐위시키고 동생인 이단을 제위에 앉혔으니 이가 제5대 황제인 예종이었다.

예종의 즉위 이후 측천무후의 수렴청정이 이어지는 가운데 684년 이경업의 반란과 688년 월왕 이정의 거병이 일어났지만 모두 진압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무씨 일족이 조정의 요직에 진출하고 이씨 황족들이 조정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후 690년, 측천무후는 예종으로부터 제위를 넘겨받아 국호를 주(周)로 고쳤다.

측천무후는 혹리들을 바탕으로 공포정치를 펼쳤는데, 혹리들로 인해 백성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르자 혹리들을 내치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한편으로 무승사, 무삼사를 비롯한 무씨 일족이 측천무후의 재위기에 세도를 누리기도 했다.

4. 3차례의 정변

그러나 장역지, 장창종 등 측근 관리에 실패하여 폐단이 발생했고, 705년 장간지, 환언범, 경휘, 원서기, 최의현 등의 신료들이 신룡정변을 일으켜 중종을 복위시켰다. 당시 병상에 누워있던 측천무후는 대신들로부터 물러나라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중종의 복위 이후 공신들의 집권을 두려워한 무삼사가 위황후와 합작하여 공신들을 몰아내고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당나라의 정치는 다시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이런 가운데 중종의 아들인 태자 이중준은 안락공주, 위황후, 무삼사의 모함으로 이들에게 불만을 품었다. 결국 이중준은 경룡정변를 일으켜 무삼사, 무숭훈 부자를 처형했으나 중종의 명령을 받은 관군에게 패배하여 죽고 말았다.

이중준이 죽은 뒤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권력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710년 중종을 독살한 뒤 이중무를 제위에 올렸다.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중종의 동생인 예종을 제거하려고 했으나, 이 계획을 사전에 눈치챈 예종의 아들 임치왕 이융기가 태평공주와 함께 당륭정변을 일으켜 위황후와 안락공주를 제거하고 예종을 제위에 올렸다.

5. 선천정변과 개원의 치

예종이 즉위한 이후 임치왕 이융기가 큰형인 이성기의 양보로 태자가 되었다. 그러나 태자가 된 이융기는 태평공주와 극심한 갈등을 빚었고, 예종은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이융기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으로 물러났다. 제위에 오른 이융기는 다음해 선천정변을 일으켜 태평공주 일파를 숙청하고 개원의 치를 열면서 오랜 정치적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개원의 치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