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1 20:11:54

당-남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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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틀:역대 남조 군주
행정구역 태화성양저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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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남조 전쟁(唐朝與南詔的戰爭)
날짜
750년-785년;829년-830년;859년-870년
장소
검남도(劍南道) 남부
교전국1 교전국2
교전국 당 제국 남조
지휘관 선우중통
이복
이성
곡환
고병
두원영
각라봉
왕차전
권풍우
세륭
병력 제1차 전쟁 : 20만
제2차 전쟁 : 불명
제3차 전쟁 : 30만
제1차 전쟁 : 불명
제2차 전쟁 : 불명
제3차 전쟁 : 불명
피해 규모 제1차 전쟁 : 20만
제2차 전쟁 : 불명
제3차 전쟁 : 15만
제1차 전쟁 : 불명
제2차 전쟁 : 불명
제3차 전쟁 : 불명
결과
제1차 전쟁 : 남조가 당 제국에 신속
제2차 전쟁 : 남조 승리
제3차 전쟁 : 양측 모두 손실이 큼
기타
당나라 멸망(907년), 남조 멸망(902년)

1. 개요2. 제1차 전쟁3. 제2차 전쟁4. 제3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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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8세기 ~ 9세기 당나라남조의 대전쟁

2. 제1차 전쟁[1]

처음부터 당과 남조의 사이가 나쁘진 않았다. 대몽국을 건국한 기가왕 세노라(細奴邏)는 당고종 때 입조하여 당과 친교를 맺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몽국은 소규모 왕국이었다. 대몽국의 이웃국가들은 대부분 토번에 신속되어 있었는데 유일하게 대몽국만이 당을 따랐다. 그런데 748년, 당 제국이 얼하이 호에 안녕성을 세워 만족들을 관장하자 남조와 당 제국의 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각라봉이 즉위해 영토를 늘렸으나, 하리광이 이를 다시 빼앗았다. 749년, 운남태수 장건타(張虔陀)가 신무왕 각라봉에게 공물을 요구했으나 듣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안가 각라봉은 다시 반성하고 당에 사죄하는 듯 했다... 그런데 749년, 각라봉은 군사를 이끌고 당의 변경을 침입해 장건타를 죽였다.[2] 소식을 들은 검남절도사 선우중통은 이듬해 융주(戎州), 수주(雟州) 두 갈래의 길로 나누어 각각 군대를 진군시켰다. 아직 힘이 크지 않았던 각라봉은 사자를 보내 자신의 죄를 물고 용서를 구했다. 선우중통은 무시하고 백예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백애성에서 당군은 크게 패했고, 남조는 구원을 청하기 위해 토번에 신속하였다. 당 조정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선우중통을 강등시키고[3] 양국충(楊國忠)이 검남절도사를 겸하도록 했다. 양국충은 군사 10만을 편성해 시어사 이복(李宓)으로 하여금 지난 일을 복수하고 남조를 굴복시키도록 했다. 그런데 급하게 편성된 군대였는지 그 군대는 정상적인 군대가 아니었는듯 하다.[4][5] 무려 10만의 당군이 태화성을 공격했지만, 퇴각 도중 이복이 각라봉에게 사로잡혀 남조 정벌군은 초전박살 났다. 이에 대하여 시인 백거이는 신풍절비옹(新豐折臂翁)이라는 장시(長詩)를 썼는데 양국충과 같은 경세가들이 단지 공을 세우기 위하여 전쟁이 일어났고, 뒤따르는 고통은 백성이 짊어지게 되었다면서 백성의 비참함을 시로 토로했다. 어쨌든, 완벽한 대승을 거둔 남조는 755년, 하북에서 변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기회로 수주의 회동군을 점령하고 청계관을 거점으로 월석을 격파하고 우증(于贈)을 효수했다. 또한, 심전(尋傳)[6]과 쀼(표 驃)족을 복속하여[7]미얀마 일대까지 세력을 뻗혔다.

779년, 신무왕 각라봉이 붕어했다. 그런데 그 전에 아들 봉가이가 죽었기 때문에 손자 이모심(異牟尋)이 효항왕으로 즉위했다. 이해 10월, 토번의 첸포 치송데첸은 이모심에게 당을 공격하자는 모의를 전달해 도합 약 20만의 군사를 일으켰다. 군사는 세 갈래로 나누어 침공했다. 제1군은 무주(茂州)로 나와 문천(文川)을 거쳐 관구(灌口)를 노략질 하였고, 제2군은 부주(扶州), 문주(文州)로 나와 방유(方維)와 백파(白垻)를 노략질했다. 제3군은 여주(黎州), 아주(牙州)에 침입하여 공래관(邛郲關)을 공격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때 당 제국은 대종의 사망으로 장례를 치르고 있었다. 장례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토번과 남조가 당의 변경을 침공한 것이었으니 당 제국으로서는 상황이 매우 급박했다. 당덕종은 금군의 4000명과 유주군의 5000명을 동천에 보내 산남 병사와 합류하도록 했다. 이 군사는 이모심의 남조군과 대치했는데 군사가 강성하여 끝내 남조군은 이기지 못하고 당에 패배했다.[8] 이 사건을 빌미로 이모심은 도읍을 태화성에서 양저미성으로 천도했다.[9] 토번 제국은 남조의 이모심을 일동왕(日東王)으로 책봉하였지마는 이는 형제지간에서 군신관계로 요구하는 것이다.

이모심은 해마다 남조의 병력을 차출하고, 부세를 거둬들이는 토번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결국 이모심은 당에 충성할 것을 맹세해 남조는 당에 속국이 되었다. 과정만 보면 남조가 당에 상당한 손실을 끼쳤지만, 결과론적으로 토번 영향 아래 있던 남조가 다시 당에 귀부함으로써 제1차 전쟁은 당의 승리로 볼 수 있다. 진린의 부장으로 정유재란에 참전하는 등자룡이 훗날 <제하관만인총>이라는 칠언절구시로 당군의 비참한 패배를 노래하였다.

3. 제2차 전쟁

823년, 권리성이 죽고 아들 권풍우(勸豐祐)가 소성왕으로 즉위했다. 한편, 당시 서천절도사 두원영(杜元潁)이 서천지역을 진수하고 있었는데, 그는 오로지 진귀한 재물에 탐닉하고 가혹한 수탈로 민심을 저버렸다. 그의 휘하 병졸들도 제대로된 지원을 받지못했다. 이들은 부족한 물자를 보급받기 위해 군사상의 기밀을 남조에게 흘렸는데, 남조는 촉군의 기강이 헤이해졌음을 간파하였다. 829년, 능동절도사 왕차전(王嵯巓)이 군사를 일으켜 공주(邛州), 융주(戎州), 수주(雟州)등을 기습하여 함락시켰다. 또한, 성도성까지 진격해 성도의 외성을 함락시켰다. 내성에서는 두원영의 저항으로 끝내 점령하지는 못했다. 왕차전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포로로 끌고갔으며, 그 중에는 공인과 기인들도 있었다.[10] 추격군이 남조군을 뒤쫓았으나 별 성과 없었고 이렇게 제2차 전쟁도 막을 내린다.

우선 이 전쟁은 당에 대한 도발보다는 두원영의 과실을 벌하는 점으로 비추어보아야 한다. 실제로 왕차전은 당 제국에 표문을 올려 두원영을 주벌하고 군사들을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이에 당 조정에서는 이미 강등된 두원영을 다시 강등시켰다. 한편, 남조는 신임 서천절도사 곽소(郭釗)와 함께 앞으로 양국은 국경을 침범하지 않기로 맹약을 맺었다.

4. 제3차 전쟁

남조는 비록 당의 신하였지만, 하국으로써 이득은 적절하게 가져갔다. 반대로 당은 상국으로써 남조의 사신이 오면 그에 상응하는 하례품을 주어야만 했다. 이를 이용해 남조가 입공할 때 하례품을 받기 위해서 들어가는 시중이 점점 늘어났다. 그러던 859년, 남조에서 권풍우가 붕어하고 경장제 세륭(世隆)이 즉위했다. 세륭은 남조의 마지막 불꽃이라고 할 수 있는 성군이었다. 그런데, 당 조정에서 이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문상을 치르지 않았다. 이때부터 남조와 당은 적대관계로 틀어졌다. 세륭은 남조가 더이상 당의 속국이 아님을 표하기 위해 국호를 대예국(大禮國), 연호를 건극(建極)으로 참칭했다. 당 조정에서도 남조에 대해 불만을 표하기 위해 당의종당현종의 휘가 추룡과 비슷하다고 하여 조공관계를 끊어버렸다. 그 와중에 남조는 파주(播州)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그런데 860년, 안남도호 이호(李鄠)가 군사를 이끌고 파주를 수복했다. 하지만, 이호는 파주를 관할하는 인물이 아니었고, 따로 안남도호부와 연락을 주고 받지도 않은 상태에서 독단적으로 파주를 수복했다. 안남도호부는 이 사실을 전혀 몰랐고, 이때문에 안남도호부는 860년, 남조, 토만 연합군 3만 병력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호는 무주로 도주했고, 861년, 옹관경략사 이홍원 역시 만주(巒州)로 도주했다. 이처럼 남조의 위세는 점차 강성해졌다. 당 조정은 남조를 정벌할 군대가 적절치 못해 다시 남조와 관계를 개선하려고 했으나, 이 해에 남조는 수주를 공격해 함락시킴으로써 이행되지 못했다. 당 조정에서 파견한 왕관(王寬) 역시 제대로 만이족을 통제하지 못하자, 862년, 당 조정은 호남관찰사 채습(蔡襲)을 안남경략사로 이전시키고, 병력 2만을 증강시켰다. 이에 남조도 더이상 쳐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영남의 일을 맡고 있던 채경(蔡京)이 채습을 시기했다. 채습은 방비를 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채경은 무인들이 공을 세우기 위한 짓이라며 무시했고, 채습은 군사 5천이라도 남기자고 재차 표문을 올렸으나 또 무시당했다. 채습은 상서를 올려 식량과 병력이 부족하여 교지를 지키기 어려우니 식량보급과 병력충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당 황제는 의종이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당 조정은 당시 환관이 정사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채습보다는 더 높은 직함을 맡고 있는 채경의 말을 믿었다.[11] 채경은 고문같은 법을 만들어 민심을 이반시켰고, 이 해에 옹주(邕州)를 공격했으나 궤멸되었다. 이 일로 채경은 강등당했다. 당 조정에서는 새로이 계관관찰사 정우(鄭愚)로 하여금 절도사를 대신하게 했다. 이 틈을 타 남조는 재차 안남을 공격했다. 채습이 즉각 금군 3천명을 이끌고 안남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영남의 위주가 남조의 군대는 옹주로 침범할 것이니 방비하라는 상주가 떨어지자, 채습은 조를 내려 해문(海門)을 막게 하였다.[12] 채습이 필사적으로 적을 막아서자 남조는 추가로 6천의 군사를 증강시켜 공격하니 결국 863년, 안남도호부는 함락되었다.[13] 채습은 퇴각하는 배를 타려고 했으나 시간이 여유있지 않아 바다에 빠져 죽었고, 형남(荊南)의 군사들도 역시 배를 타지 못했다. 형남의 군사는 물속에 들어가느니 차라리 항전하자고 했다. 그들은 남조 군사 2천여 급을 베었다. 그러나, 밤에 양사참(楊思僭) 군사를 이끌고 토만군을 구원하여 형남의 군사를 궤멸시켰다. 863년, 당 조정은 진주경략사 고병(高騈)을 안남도호로 임명하였다.

한편, 남조가 계속 옹관을 압박하자 정우는 문관출신이므로 자신은 장수의 능력이 없다고 표를 올렸다. 이에 강승훈(康承訓)이 영남서도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강승훈은 각도의 군사 5만의 지원을 받아 총 6만의 군사를 편성했다. 즉각 안남으로 진격해 당은 안남도호부를 재수복하였고 안남도호부를 2년동안 면세해주었다. 864년, 남조가 군대를 돌려 다시 수주를 노략질했다. 이에 서천절도사 이복(李福)이 양림만(兩林蠻)과 당군을 지휘해 남조군을 격퇴시켰다. 그런데 자사 유사진(喩士珍)이 양림만을 약탈하고 구타하자 양림만이 남조에 투항하였다. 안남도호부가 다시 무방비에 노출되자 재상 양수(楊收)가 홍주(洪州)에서 군사 3만을 징발해 진남군(鎭南軍)으로 개편한 뒤 안남도호부를 구원하도록 하였다.[14]

865년, 하후자(夏侯孜)가 고병에게 전권을 모두 위임하고 퇴임하자 고병은 즉각 군대를 일으켜 도강해 봉주의 만족 5만을 습격했다. 이들은 벼를 수확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당군에 습격을 받은 것이었다. 덕분에 당군은 수확하고 있던 벼를 군량으로 사용했다. 866년, 남조는 당의 진격을 멈추기 위해 범녜사(范胒些), 조략미(趙諾眉)등을 교지로 보내 단추천을 구원하도록 했다. 고병은 교주에서 연전연승을 하며 남조군의 기세를 꺾었고 남조의 장수 장전(張詮)을 죽였다. 그러나, 평소 고병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환관 이유주(李維周)는 승전보를 조정에 올리지 않았다. 당 조정에서는 우무위장군 왕안권(王晏權)이 대신하도록 조서를 내렸으나, 그때 고병은 남조군을 대파하고 교주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고병이 거의 함락시킬 뻔 했으나, 왕안권이 직무를 대행하려 오자 고병은 병권을 넘기고 해문으로 갔다. 그런데, 그의 부관인 증곤(曾袞)이 보낸 승전보가 이유주의 감사를 거치지 않고 올라가자 고병은 다시 해문에서 교주로 달려갔다.

그런데, 왕안권은 포위를 느슨하게 하여 많은 남조군이 그 틈을 타 도주했다. 고병은 다시 군사를 독려해 사기를 진전시킨 후 만의 두곳을 격파해 1만 7천의 만이족을 귀부시켰다. 그리고 866년, 고병은 교주성를 총공격해 수급 3만을 베고 성을 함락시켜 안남은 마침내 평정되었다. 867년, 당 조정은 남조군이 재차 쳐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봉상소윤 이사망(李師望)이 건의한 것을 채택했다.[15] 그런데, 이사망은 자신의 안위에만 골몰하였고, 정변군을 제대로 통솔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수주를 통솔하기 위해 정변군을 설치했지만, 이후에도 수주를 효율적으로 통솔하기가 어려웠다.[16] 농민들이 분노에 차 이사망을 죽이려 했으나, 때마침 당 조정의 관리가 와서 이사망을 보내고 두방(竇滂)으로 교체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두방은 더욱 막장이었던 것이다... 두방은 사사건건 간섭하고 법대로 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짖꾸는 것이 이사망보다 심했다. 남조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869년, 남조는 5만의 군사를 일으켜 수주를 재차 침공했다.

이어서 청계관을 공격했고, 두방의 부장 두재영(杜再榮)과 남조군은 98일간 대도하(大度河) 사이를 끼고 화살을 쏘며 대치했다. 갑작스런 당군의 저항에 부딪치자 남조는 군사를 돌려 능주와 영주 일대를 약탈하였고, 가주를 공격해 충무장 안경사를 죽였다. 이듬해에 다시 남조가 두재영을 공격하자 두방이 군사를 독려해 같이 싸웠다. 그런데 갑자기 남조가 강화를 청하였는데 함정이었다. 두방은 자살을 시도했으나, 무령장 묘전서(苗全緖)가 위로했다. 묘전서와 2명의 장수가 군사를 독려하며 남조군과 싸웠으나, 두방은 이 틈을 타 도망갔다. 묘전서 등이 계속 항전했으나 결국 퇴각하였고, 여주와 아주(雅州)가 함락되었다.두방의 뒷통수에 심히 분노했는지 퇴각한 당군은 공주에 있던 군수물자를 모두 가져갔고, 이어 남조군이 성에 입성할 때 성안은 텅 비어 있었다. 남조군이 여세를 몰아 성도까지 진격하자 서천절도사 노탐(盧耽)은 남조에게 화의를 청하였다. 그러나, 남조는 사신을 억류하고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다. 한편, 서천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은 남조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며 성도성으로 도망갔다. 당시 성도성의 내부가 얼마나 고통 속이었는지 사료가 말해준다.
"그런 까닭에 촉(蜀) 지역의 노약자들이 서로 잡아끌고 부축하며 모두 성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성도는 성곽 안의 거리와 거주지가 꽉 차서, 한 호(戶)가 차지하는 땅이 자리 하나의 크기를 넘지 못했다. 비라도 내리면 키와 동이를 뒤집어쓰고 스스로 비를 가렸다. 성 안의 우물이 고갈되자, 마하지(摩訶池)의 물을 공동으로 마셨는데, 머리채를 잡고 싸우다가 물에 빠져 죽는 일이 일어나는 데까지 이르렀다. 어떤사람은 모래를 광주리에 담아 여기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아 마시기도 하였다. 사람이 죽어도 관을 갖추지 못하니, 구덩이를 파서 공동으로 묻었다."
-『신당서 남만전』

노주자사 양경복(楊慶復)이 일전을 불사하기 위해 공성기와 투석용 돌을 만들고 성의 병장비를 재정비하였다. 또한, 화살을 막기위한 울타리도 만들었다. 남조군이 드디어 외성에 이르자 유혁사 왕주(王晝)가 군사 3천을 가지고 성도 길목에 주둔했으나, 남조군의 공격을 받아 퇴각했다. 성도의 제장들은 과연 원군이 오지 않고 성도를 막을 수 있을지 걱정했다. 그러는 한편, 뒷통수의 대가 두방은 하루빨리 성도가 무너지기를 바랬으며, 이는 정변군에서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원군이 성도의 북쪽에 당도하자 두방은 거짓으로 남조군은 관군의 수십 배나 되고 관군은 멀리서 와서 피로하니 섣불리 대적할 수 없다고 속여 원군이 성도성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남조군은 사방에서 맹공을 가했는데, 운제를 이용해 성을 올라가려고 했으며, 충차를 이용해 성문을 부수려 하였다.

그러나, 노탐이 그때마다 기름과 횃불을 붓고, 양경복이 성 아래에서 해가 저물 때까지 싸워 남조군 2천을 대파시키고 공성기를 모조리 불태웠다. 남조군은 후방에서 공성용 무기를 계속 제작했으나 그때마다 당군의 반격으로 불에 탔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싸웠으나 성도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870년, 지상(支詳)이 남조와 강화를 청했으나, 남조군이 성도를 계속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렬되었다. 그런 와중에도 남조는 성도의 허점을 파서 공격을 시도했으나 끝내 좌절되었다. 이해에 동천절도사 안경복이 원군을 이끌고와 남조군을 공격했다. 부장 증원유가 2천의 군사를 깨뜨렸고, 대장 송위가 군사를 이끌고 남조군과 싸워 5천여급을 베었다. 당군은 기세를 타서 남조군을 계속 압박하였고, 봉상(鳳翔)과 산남(山南)의 군사에게 패배해 퇴각했고, 송위의 군사가 남조군을 추격했다. 세륭은 더이상 성도를 포위하는 것은 무리라 판단하고 전군 퇴각을 명령했다. 이때, 송위가 계속 남조군을 쫓아 공을 세우고 안경복은 마땅히 공을 세우지 못하자 안경복은 노하여 후퇴하는 남조군을 놓아주었다. 덕분에 남조군은 사흘의 시간을 얻어 다리를 만들고 여유롭게 퇴각했다.

[1] 당시 현종의 연호를 따서 천보전쟁(天寶戰爭)이라 부르기도 한다.[2] 중국 측 기록에는 장건타의 수탈로 인해 우발적으로 벌어진 것이라고 하나 남조 측 기록에서는 정반대이다. 이는 개원 연간 이융기가 흑수말갈을 이용해 발해에 대한 와해공작을 펴려고 했으나, 732년 장문휴가 군대를 이끌고 등주를 공격해 자사 위준을 살해한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3] 선우중통이 이를 승전으로 허위보고하나, 나중에 이 사실이 드러나 실각했다.[4] 신당서 남만전에 따르면 군량을 끌어모으는 자가 없었다. 전지(滇池)에 이르는 도중에 병에 걸려 죽는 자가 길에 줄줄이 이어졌고... 라고 기록돼있는데 이 대목에서 당시 당군이 정상적인 군대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5] 그런데 구당서 현종기에 따르면 군량이 다하는 바람에 군대를 되돌렸다. 그런데 그 와중에 이복이 탄 말이 다리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각라봉에 의해 붙잡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군량이 다하는 바람에"라는 구절에서 정말로 군량을 가져갔는데 예상외로 군량이 빨리 떨어졌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군량 없이 출발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6] 누강 상류일대를 말하는데 이 지역에 심전만이라는 부락이 거주했다. 755년 남조에 복속되었다.[7] 현재 미얀마에 있던 부락이다.[8] 신당서에서는 전사한 남조군이 약 10만이라고 전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론 불가능하다. 따라서 1만도 채 안되는 당의 군사 즉, 금군과 유주군은 평범한 군사가 아닌 노련한 군사라고 해석하는게 타당하다.[9] 각라봉이 반당 제스처를 취했다면 이모심은 친당 제스처를 취했다. 따라서 그는 이번 전투에서도 그동안 토번이 남조에 행사한 영향력으로 불가피하게 참가한 것이었다. 이모심이 도읍을 천도한 것고 남조가 과거와는 다르다는 것을 주변국에 인지시키기 위함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10] 이때문에 이후 남조는 화려한 모직물을 제작하게 된다.[11] 채경은 좌서자(左庶子)로 영남의 일을 보고 있었는데 당육전에 따르면 좌서자는 정4품이다.또한, 영남서도절도사(嶺南西道節度使)를 겸하고 있었다.[12] 그런데 자치통감에서는 당시 채습은 교지성에서 포위되어 있었던 상태였으므로 이같은 조서를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13] 이미 신당서 남조전에서 860년에 안남도호부가 함락되었다고 나오는데 당이 다시 수복했다가 다시 빼앗긴 것으로 보인다.[14] 강서군(江西軍)에서 군대를 모집해 안남도호부로 이동시킨 것이 아니라 군대를 모집해 안남도호부의 전쟁을 대비하도록 한 것이다.[15] 이사망은 수주(雟州)가 남조군을 방어할 요충지인데 성도와는 거리가 상당하니 공(邛), 촉(蜀), 가(嘉), 미(眉), 여(黎), 아(雅), 수(雟)를 통솔하고 공주에 치소를 두어 정변군(定邊軍)을 설치하자고 한 것이 그것이다.[16] 수주와 성도의 거리는 1천 1백, 수주와 공주의 거리는 1천 거리로 차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