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14:54:16

하북도


당나라의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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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하위 행정구역
2.1. 회주(懷州)2.2. 위주(衛州)2.3. 상주(相州)2.4. 위주(魏州)2.5. 박주(博州)2.6. 패주(貝州)2.7. 명주(洺州)2.8. 자주(磁州)2.9. 형주(邢州)2.10. 조주(趙州)2.11. 진주(鎭州)2.12. 기주(冀州)2.13. 심주(深州)2.14. 창주(滄州)2.15. 경주(景州)2.16. 덕주(德州)2.17. 정주(定州)2.18. 기주(祁州)2.19. 역주(易州)2.20. 영주(瀛州)2.21. 막주(莫州)2.22. 유주(幽州)2.23. 탁주(涿州)2.24. 계주(薊州)2.25. 단주(檀州)2.26. 규주(媯州)2.27. 평주(平州)2.28. 순주(順州)2.29. 귀순주(歸順州)2.30. 영주(營州)2.31.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1. 개요

하북도(河北道)는 당나라의 최상위 행정구역인 (道) 중 하나이다. 여기 적힌 정보들은 《구당서》 39권 지리지2과 《신당서》 39권 지리지3의 정보를 기준으로 한다.

2. 하위 행정구역

2.1. 회주(懷州)

2.2. 위주(衛州)

2.3. 상주(相州)

2.4. 위주(魏州)

2.5. 박주(博州)

무덕(武德) 4년(621년) 두건덕을 평정한 뒤 무양군(武陽郡) 요성현(聊城縣)에 박주를 설치했다. 당시 박주는 요성현(聊城縣), 무수현(武水縣), 당읍현(堂邑縣), 치평현(茌平縣)을 관할했으며, 화정현(莘亭縣), 영천현(靈泉縣), 청평현(淸平縣), 박평현(博平縣), 고당현(高唐縣)을 추가로 설치했다. 무덕(武德) 5년(622년) 화정현과 영천현을 폐지했다. 정관(貞觀) 원년(627년) 치평현을 폐지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박평군(博平郡)으로 개편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박주가 되었다.
    • 요성현(聊城縣)[1], 박평현(博平縣)[2], 무수현(武水縣)[3], 청평현(淸平縣)[4], 당읍현(堂邑縣)[5], 고당현(高唐縣)[6]

2.6. 패주(貝州)

남북조시대까지 청하군(淸河郡)으로 불린 곳으로 북주 대에 패주가 설치되었으며, 수나라 대에 양제가 즉위한 뒤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다시 청하군이 되었다.

패주는 수나라 말 두건덕에 의해 점령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가 두건덕을 평정한 뒤 다시 설치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청하군이 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다시 패주가 되었다.
    • 청양현(淸陽縣)[7], 청하현(淸河縣), 무성현(武城縣)[8], 종성현(宗城縣)[9], 임청현(臨淸縣)[10], 경성현(經城縣), 장남현(漳南縣)[11], 역정현(曆亭縣)[12], 하진현(夏津縣)[13]

2.7. 명주(洺州)

2.8. 자주(磁州)

무덕(武德) 원년(618년) 위군(魏郡) 감양현(淦陽縣)에 자주를 설치했다가 정관(貞觀) 원년(627년) 폐지했다. 이후 영태(永泰) 원년(765년) 소의절도사(昭義節度使) 설숭의 주청에 따라 감양현에 다시 자주를 설치했다.
    • 감양현(滏陽縣), 한단현(邯鄲縣)[14], 무안현(武安縣), 소의현(昭義縣)[15]

2.9. 형주(邢州)

2.10. 조주(趙州)

2.11. 진주(鎭州)

2.12. 기주(冀州)

2.13. 심주(深州)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가 두건덕을 평정한 뒤 하간군(河間郡) 요양현(饒陽縣)에 심주를 설치했다가 정관(貞觀) 17년(643년) 폐지되었다. 선천(先天) 2년(713년) 심주를 다시 설치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요양군(饒陽郡)으로 개편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심주가 되었다.
    • 육택현(陸澤縣)[16], 요양현(饒陽縣)[17], 속록현(束鹿縣)[18], 하박현(下博縣)[19], 안평현(安平縣)[20], 무강현(武强縣)[21], 박야현(博野縣), 낙수현(樂壽縣)

2.14. 창주(滄州)

2.15. 경주(景州)

2.16. 덕주(德州)

남북조시대까지 평원군(平原郡)으로 불린 곳으로 수나라 때 덕주(德州)로 개편되었으며 양제가 즉위한 뒤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평원군이 되었다.

덕주는 수나라 말 두건덕에게 점령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두건덕을 평정한 뒤 다시 설치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다시 평원군이 되었고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덕주가 되었다.
    • 안덕현(安德縣), 평원현(平原縣), 장하현(長河縣)[22], 장릉현(將陵縣)[23], 평창현(平昌縣)[24]

2.17. 정주(定州)

전신은 중산군(中山郡)으로 북위 때인 황시(皇始) 2년(397년) 안주(安州)가 설치되었고 천흥(天興) 3년(400년) 정주로 개칭했다. 중산군은 이후 수나라 대에 선우군(鮮虞郡)으로 개칭되었다가 주현제를 실시하면서 폐지되었다. 정주는 양제가 즉위한 뒤 대업(大業) 3년(607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박릉군(博陵郡)으로 개편되었고 뒤에 고양군(高陽郡)으로 개칭되었다.

수나라 말 정주는 두건덕에게 점령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당나라군이 두건덕을 평정한 뒤 다시 설치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다시 박릉군으로 개편되었다가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정주가 되었다.
    • 안희현(安喜縣)[25], 의풍현(義豊縣)[26], 북평현(北平縣)[27], 망도현(望都縣)[28], 안험현(安險縣), 곡양현(曲陽縣)[29], 경읍현(陘邑縣)[30], 당현(唐縣), 신락현(新樂縣)[31]

2.18. 기주(祁州)

경복(景福) 2년(893년) 정주절도사(定州節度使) 왕처존의 주청에 따라 무극현(無極縣)에 기주를 설치한 것이 시초였다.
    • 무극현(無極縣)[32], 심택현(深澤縣)[33]

2.19. 역주(易州)

2.20. 영주(瀛州)

2.21. 막주(莫州)

경운(景雲) 2년(711년) 영주(瀛州) 막현(鄚縣)에 막주(鄚州)를 신설했다. 개원(開元) 13년(725년) 막(鄚)이 정(鄭)과 비슷해서 우부방을 삭제하고 막(莫)으로 개칭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문안군(文安郡)으로 개편되었고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막주가 되었다.
    • 막현(莫縣)[34], 청원현(淸苑縣)[35], 문안현(文安縣), 임구현(任丘縣)[36], 장풍현(長豊)[37], 당흥현(唐興縣)[38]

2.22. 유주(幽州)

2.23. 탁주(涿州)

대력(大曆) 4년(769년)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주희채의 건의에 따라 유주 범양현(范陽縣), 귀의현(歸義縣), 고안현(固安縣)을 분할하여 탁주를 설치했다.
    • 범양현(范陽縣)[39], 신창현(新昌縣)[40], 귀의현(歸義縣)[41], 고안현(固安縣)[42], 신성현(新城縣)[43]

2.24. 계주(薊州)

개원(開元) 18년(730년) 유주(幽州)의 3개 현을 분할하여 설치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어양군(漁陽郡)으로 개편되었고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계주가 되었다.
    • 어양현(漁陽縣)[44], 삼하현(三河縣)[45], 옥전현(玉田縣)[46]

2.25. 단주(檀州)

2.26. 규주(媯州)

무덕(武德) 7년(624년) 당나라에서 고개도를 토벌한 뒤 회융현(懷戎縣)에 북연주(北燕州)를 설치했다. 정관(貞觀) 8년(634년) 규주로 개칭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규천군(媯川郡)으로 개편되었고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규주가 되었다.
    • 회융현(懷戎縣)[47], 규천현(媯川縣)[48]

2.27. 평주(平州)

2.28. 순주(順州)

정관(貞觀) 6년(632년)에 신설되었으며 영주(營州) 남쪽의 오류성(五柳城)에 치소를 두었다. 천보(天寶) 원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순의군(順義郡)이 되었고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순주가 되었다.
    • 빈의현(賓義縣)

2.29. 귀순주(歸順州)

전신은 거란의 송막부(松漠府) 탄한주(彈汗州)로, 정관(貞觀) 22년(648년) 설치되었다. 개원(開元) 4년(716년) 귀순주로 개칭되었다. 천보(天寶) 원년(742년) 군현제를 실시하면서 귀화군(歸化郡)이 되었고 건원(乾元) 원년(758년) 주현제로 회귀하면서 다시 귀순주가 되었다.
    • 회유현(懷柔縣)

2.30. 영주(營州)

2.31.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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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덕(武德) 4년(621년) 요성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치평현(茌平縣)을 설치했다가 정관(貞觀) 원년(627년) 요성현으로 통폐합했다.[2] 무덕(武德) 4년(621년) 박평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영현(靈縣)을 설치했다가 이듬해 다시 통폐합했다. 정관(貞觀) 17년(643년) 요성현으로 통폐합되었다가 천수(天授) 2년 요성현의 일부가 분할되며 다시 설치되었다.[3] 수나라 때 청읍현(淸邑縣)의 일부가 분할되어 설치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년) 신주(莘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정관(貞觀) 원년(627년) 박주의 속현이 되었다.[4] 한나라 대에 패구현(貝丘縣)이 존재했다가 북제 때 폐지되었다. 수나라 개황(開皇) 6년(586년) 패구현이 다시 설치되고 개황(開皇) 16년(596년) 청평현으로 개칭되었다.[5] 북위 때 폐지되었다가 수나라 때 청양현(淸陽縣)의 일부가 분할되어 다시 설치되었다. 처음에 모주(毛州)의 속현이었으나 모주가 폐지되면서 박주의 속현이 되었다.[6] 무덕(武德) 4년(621년) 설치되었다. 장수(長壽) 2년(693년) 숭무현(崇武縣)으로 개칭되었다가 신룡(神龍) 원년(705년) 고당현으로 다시 개칭되었다.[7] 무덕(武德) 4년(621년) 일부를 분할하여 하진현을 설치했다가 무덕(武德) 9년(626년) 다시 폐지했다.[8] 한나라 대에는 동무성현(東武城縣)이라는 이름이었다.[9] 무덕(武德) 4년(621년) 종주(宗州)가 설치되어 종성현, 경성현, 부성현(府城縣), 남궁현(南宮縣), 빈강현(斌強縣)을 속현으로 두었다. 무덕(武德) 9년(626년) 종주와 부성현, 빈강현을 폐지하면서 경성현과 종성현은 패주, 남궁현은 기주의 속현이 되었다.[10] 한나라 대에 청천현(淸泉縣)이라는 명칭이었으며 북위 때 임청현으로 개칭되었다.무덕(武德) 4년(621년) 모주(毛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모주를 폐지하면서 다시 패주의 속현이 되었다.[11] 한나라 대에 동양현(東陽縣)이라는 현이었으며 북위 때 폐지되었다. 수나라 때 다시 설치되었고 뒤에 장남현으로 개칭되었다.[12] 수나라 때 유현(鄃縣)의 일부가 분할되어 설치되었다.[13] 옛 명칭은 유현(鄃縣)으로, 천보(天寶) 원년(742년) 하진현으로 개칭되었다[14] 무덕(武德) 4년(621년) 명주에서 자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자주가 폐지되면서 다시 명주의 속현이 되었다. 이후 영태(永泰) 원년(765년) 자주가 다시 설치되면서 자주의 속현이 되었다.[15] 영태(永泰) 원년(765년) 설숭의 주청에 따라 설치되었다.[16] 선천(先天) 2년(713년) 요양현과 녹성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17] 무덕(武德) 4년(621년) 일부를 분할하여 무루현(蕪蔞縣)을 설치했다가 정관(貞觀) 원년(627년) 통폐합했다. 정관(貞觀) 17년(643년) 심주가 폐지되면서 영주(瀛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선천(先天) 2년(713년) 심주를 다시 설치하면서 심주의 속현이 되었다.[18] 수나라 때 명칭은 녹성현(鹿城縣)으로 지덕(至德) 원년(756년) 속록현으로 개칭되었다.[19] 무덕(武德) 4년(621년) 기주(冀州)의 속현이 되었으며 정관(貞觀) 원년(627년) 심주의 속현이 되었다. 정관(貞觀) 17년(643년) 심주가 폐지되면서 기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선천(先天) 2년(713년) 심주를 다시 설치하면서 심주의 속현이 되었다.[20] 무덕(武德) 4년(621년) 기주(冀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정관(貞觀) 17년(643년) 심주가 폐지되면서 정주(定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선천(先天) 2년(713년) 심주를 다시 설치하면서 심주의 속현이 되었다.[21] 본래 명칭은 무수현(武隧縣)으로 진나라 때 무강현으로 개칭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년) 기주(冀州)의 속현이 되었다.[22] 옛 이름은 광천현(廣川縣)으로 북제 때 폐지되었다가 수나라 대인 개황(開皇) 6년(586년)에 다시 설치되었고 뒤에 장하현으로 개칭되었다.[23] 수나라 대인 개황(開皇) 16년(596년) 설치되었다.[24] 정관(貞觀) 17년(643년) 반현(般縣)을 평창현에 통폐합했다. 태화(太和) 2년(828년) 제주(齊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다시 덕주의 속현이 되었다.[25] 옛 명칭은 노노현(盧奴縣)으로 오호십육국시대 떼 불연현(不連縣)으로, 북제 때 안희현으로, 수나라 때 선우현(鮮虞縣)으로 개칭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년) 원래의 명칭인 안희현으로 다시 개칭되었다.[26] 옛 명칭은 안국현(安國縣)으로 수나라 때 의풍현으로 개칭되었다. 만세통천(萬歲通天) 2년 입절현(立節縣)으로 개칭되었다가 신룡(神龍) 원년(705년) 원래의 명칭으로 돌아왔다.[27] 만세통천(萬歲通天) 2년 순충현(徇忠縣)으로 개칭되었다가 신룡(神龍) 원년(705년) 원래의 명칭으로 돌아왔다.[28] 무덕(武德) 4년(621년) 안희현과 북평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29] 옛 명칭은 상곡양현(上曲陽縣)으로, 수나라 때 항양현(恆陽)으로 개칭되었다. 대력(大曆) 3년(768년) 원주(洹州)에 소속되었다가 대력(大曆) 9년(774년) 다시 정주의 속현이 되었다. 원화(元和) 15년(820년) 곡양현으로 개칭되었다.[30] 옛 명칭은 고경현(苦陘縣)으로 이후 한창현(漢昌縣), 조위 때 위창현(魏昌縣), 수나라 때 수창현(隋昌縣)으로 개칭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년) 당창현(唐昌縣)으로 개칭되었다가 천보(天寶) 원년(742년) 경읍현으로 개칭되었다.[31] 옛 명칭은 신시현(新市縣)으로 수나라 때 신락현으로 개칭되었다.[32] 원래 명칭은 무극현(毋極縣)으로 무덕(武德) 4년(621년) 염주(廉州)에 속했다가 정관(貞觀) 원년(627년) 염주를 폐지하면서 정주에 속하게 되었다. 만세통천(萬歲通天) 2년(697년) 무(毋)를 무(無)로 고쳤다.[33] 수나라 말 두건덕에게 함락되었다가 무덕(武德) 4년(621년) 다시 현이 설치되었다.[34] 무덕(武德) 4년(621년) 포주(蒲州)의 속현이 되었으며, 정관(貞觀) 원년(627년) 영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경운(景雲) 2년(711년) 막주의 속현이 되었다.[35] 옛 이름은 낙향현(樂鄕縣)으로 수나라 때 청원현으로 개칭되었다. 무덕(武德) 4년(621년) 포주(蒲州)의 속현이 되었으며, 정관(貞觀) 원년(627년) 영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경운(景雲) 2년(711년) 막주의 속현이 되었다.[36] 무덕(武德) 5년(622년) 막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37] 개원(開元) 19년(731년) 문안현과 임구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38] 여의(如意) 원년(692년) 하간현(河間縣)의 일부를 분할하여 무창현(武昌縣)을 설치했다. 장안(長安) 4년(704년) 역주(易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다시 영주의 속현이 되었다. 신룡(神龍) 원년(705년) 당흥현으로 개칭되었다. 경운(景雲) 2년(711년) 막주의 속현이 되었다.[39] 원래 명칭은 탁현(涿縣)으로 무덕(武德) 7년(624년) 범양현으로 개칭되었다. 대력(大曆) 4년(769년) 탁주의 속현이 되었다.[40] 대력(大曆) 4년(769년) 고안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41] 무덕(武德) 5년(622년) 북의주(北義州)가 신설될 당시 설치된 현이었다. 정관(貞觀) 원년(627년) 북의주가 폐지되면서 같이 폐지되었으나 정관(貞觀) 8년(634년) 다시 설치되어 유주(幽州)의 속현이 되었다. 대력(大曆) 4년(769년) 탁주의 속현이 되었다.[42] 무덕(武德) 5년(622년) 북의주(北義州)의 속현이 되었고 치소를 장신성(章信城)으로 옮겼다. 정관(貞觀) 원년(627년) 북의주가 폐지되면서 유주의 속현이 되었다. 대력(大曆) 4년(769년) 탁주의 속현이 되었다.[43] 대력(大曆) 4년(769년)에 설치했다.[44] 당나라가 들어선 당시 유주의 속현이었다가 이듬해에 현주(玄州)의 속현이 되었고 일부가 분할되어 무종현(無終縣)이 되었다. 정관(貞觀) 원년(627년) 현주가 폐지된 뒤 다시 유주의 속현이 되었고 무종현이 어양현에 통폐합되었다. 신룡(神龍) 원년(705년) 영주(營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개원(開元) 4년(716년) 다시 유주의 속현이 되었고 개원(開元) 18년(730년) 계주를 설치하면서 계주의 속현이 되었다.[45] 개원(開元) 4년(716년) 노현(潞縣)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 개원(開元) 18년(730년) 계주의 속현이 되었다.[46] 건봉(乾封) 2년(667년) 무종현(無終縣)이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다. 만세통천(萬歲通天) 2년(697년) 옥전현으로 개칭되었다. 신룡(神龍) 원년(705년) 영주(營州)의 속현이 되었다가 개원(開元) 4년(716년) 다시 유주의 속현이 되었고 다시 개원(開元) 8년(720년) 영주를 속현이 되었다. 개원(開元) 18년(730년) 계주의 속현이 되었다.[47] 원래 명칭은 반현(潘縣)으로 북제 때 회융현으로 개칭되었다.[48] 천보(天寶) 연간 이후 회융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