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2 03:49:14

겸익

謙益 ?~?

겸익은 백제승려로 율종의 시조이다.

526년(백제 성왕 4년)에 혼란스러운 정국의 인도[1]에 다녀와서 율종을 개창하였다. 그는 인도 중부의 상가나대율사(常伽那大律寺)[2]에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율부(律部)를 전공하여 인도 승려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과 함께 백제로 돌아왔다. 성왕이 예를 갖추고 마중을 나가 환영했다. 겸익과 배달다삼장은 흥륜사(興輪寺)에 머물면서 인도에서 가지고온 율문을 백제의 고승 28인과 함께 율부 72권으로 번역했다.

당시 백제의 고승들은 겸익을 도와 윤문(潤文-글을 윤색함)과 증의(證義 링크)를 했으며, 그 후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이 이 율에 대한 소(疏-주석) 36권을 지어 성왕에게 바쳤다.

이때 번역한 율은 《범본아담장오부율문(梵本阿曇藏五部律文)》 또는 《비담신율(毘曇新律)》이라고 한다. 아담이나 비담은 아비달마(阿毘達磨)의 준말이지만, 아비달마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모른다. 성왕이 이 신역율본을 태요전(台耀殿)에 보관하여 널리 보급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붕어했다.

사실 당시 중국에 이미 《오분율(五分律)》 등 율장이 몇 가지 번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겸익은 굳이 인도로부터 직접 원전을 가져와 번역한 것이다. 겸익의 율학 때문에 백제 불교는 계율 중심이 되었고, 그 후 일본 율종의 근거가 되었다고 한다.

겸익이 인도에 갈 때 바닷길을 탔는지 실크로드를 탔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3] 백제의 교류 범위가 꽤나 넓었음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1] 인도 유학승으로 비슷한 인물로 통일신라의 혜초가 있다.[2] 인도의 유명한 수도원인 날란다 대승원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3] 고병익 교수의「韓國과 西域: 近世以前의 歷史的 關係」에서 서술된 바와 같이, 20세기에는 해로로 갔으리라 유추한 원로 사학자도 많았다. 그러나 비단길을 따랐을지, 향신료길을 따랐을지는 여러 역사 속 논제들과 마찬가지로 정확히 비정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