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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남(河南), 즉 '황하(黃河)의 남부'에 위치한 평야를 의미한다.북쪽으로는 황하, 남쪽으로는 회수에 둘러싸여 있다.
회수를 분기점으로하여 장강 평야와는 인접해 있다.
수나라 시절 대운하 공사 이전의 회수.
수나라 시절 대운하 공사 이후[1]의 회수.
604년(인수 4년)에 수나라의 양제가 수도를 관중 분지의 장안에서 하남 평야의 낙양으로 옮겼으며, 605년에 대운하를 파기 시작하였다.
계획의 핵심은 통제거(通濟渠)와 영제거(永濟渠)였는데, 통제거는 605년 개착되었으며 동쪽과 서쪽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은 지금의 낙양 서쪽에서 낙하(洛河)와 곡수(穀水)로 황허와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은 형양(滎陽)의 사수(汜水)에서 출발하여 황하의 물줄기를 따라 변하(汴河)에 이어지며 회수(淮水)와 합류한다. 통제거로 인해 황하와 회수를 연결한 그 해에 다시 운하를 개착하여 회수와 장강을 연결하였다.
3년 뒤인 608년에 다시 대공사를 일으켜 영제거(永濟渠)를 준설되었으며 심하(沁河)와 기수(淇水), 위하(衛河)를 연결하여 탁군[2]까지 연결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영정하(永定河)를 따라 지금의 북경까지 닿을 수 있었다.
2년 뒤, 강남 운하(江南 運河)를 개통하여 여항(余杭, 지금의 항주)까지 연결하였고 공사 기긴은 모두 8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대운하의 전체 길이는 2,700km정도였다. 양주(揚州)와 진강(鎮江)에서부터 항주(杭州)에 이르는 구간으로 모두 400km정도이다. 수도 낙양에서부터 항주에 이르는 구간을 모두 합하면 1,700km 정도였다.
현대의 회수.
2. 고대 도시
2.1. 낙(洛)
북쪽으로는 황하가 흐르며, 남쪽으로는 황하의 지류인 낙수(洛水)가 흐르고 있는 곳이며, 낙수와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낙(洛)'이라고 불렸다. 이 곳의 동쪽에 사수관이 있고, 남쪽에 이궐관이 있으며, 서쪽에 있는 관중 분지와는 함곡관을 사이에 두고 있다.영제가 184년에 낙양 주변의 함곡관·광성관·이궐관·대곡관·환원관·선문관·소평진·맹진 8곳에 도위를 두었는데, 이를 통칭해 '낙양 8관'이라 부른다. 예로부터 구주지복지(九州之腹地, 중화 9주 중에서도 배에 해당하는 지역)이라고 불렸다.
이후 주나라(서주) 때 수도인 호경(鎬京)의 별칭인 '종주(宗周)'에 버금가는 도시가 되어 '성주(成周)'로 불렸다. 그러다가, 주나라가 건융의 침략으로 관중 분지에서 밀려난 이후 동주 때 수도로 천도하면서 낙읍(洛邑)으로 개명되었다.
반면에 초한전쟁부터 유방의 세력은 함곡관을 두고 관중 분지와 인접해 있기 때문에 배후를 걱정할 것 없이 요충지로 활용하였다. 이 곳은 나중에 낙양(洛陽:뤄양)으로 개명되었다. 한수와 마초의 내분으로 조조가 관중 분지를 평정하고나서 나중에 조비가 칭제를 하고 본거지를 업성에서 이 곳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현대에는 행정상 뤄양시로 편성되었다.
2.2. 계봉(啓封)
위나라가 진(秦)나라를 침략하고나서, 진나라의 반격으로 위나라는 기존의 수도였던 안읍을 잃어버린 이후, 기원전 364년부터 이 곳이 위나라의 수도로 지정되고난 당시에는 대량(大梁)으로 불렸다.이후에 북송의 수도로 선정되었다.
나중에 개봉(開封:카이펑)으로 개명되었으며, 현대에는 행정상 카이펑시로 편성되었다.
2.3. 허(許)
주나라 시대에 '허(許)나라'가 있던 곳이다.[3] 때문에 원래는 그냥 '허(許)'라고만 불렸는데, 군현제에서 연천군 소속의 '허현'으로 편성되었다.조조가 기주 및 하북 평야를 점령하기 전까지 주요 지점이었으며, 조조는 헌제를 이곳으로 모셔와 새로운 도읍으로 삼은 때에 도(都)를 추가로 붙여서 허도(許都)로 개명되하다. 그 이후에 조조는 '조나라가 수도를 진양에서 한단으로 천도'한 것처럼, 하남인 이 곳 허창에서 하북인 업성으로 본거지를 이전하였다. 조위의 조비가 허창(許昌:쉬창)으로 개명하였다. 또한 왕조를 창업하여 낙양으로 천도해서 옮겨갔다.
이 곳은 현대에는 행정상 쉬창시로 편성되었다.
2.4. 팽성
계중이 일대에 비나라를 건국한 것에서 지명이 유래했고, 팽나라를 거처서 팽성이 건설되었다. 이후 팽나라는 서나라 령이 되었다. 서나라는 전성기에 인근 다이좡진에 수도를 두었다.이후 오나라가 침공해서 점령하였는데, 이후에 오나라는 월나라왕 구천에게 정복당했고, 이후에 오나라는 초나라에게 정복당했다. 주나라와 초나라의 공격으로 약해진 서나라는 기원전 506년 오나라에게 멸망했다.
나중에 서나라 영토는 고대 9주에 해당하는 서주(徐州:쉬저우[4])로 편성되었다.
팽성대전으로도 유명하며, 서초의 항우가 수도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현대에는 행정상 피저우시로 편성되었다.
2.5. 하비
팽성의 서쪽에 위치하였던 지역이다. 장강 평야에 위치한 합비와는 다른 곳이다.군웅할거기 초반에 서주 일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때에 격전지였던 곳이다. 한때 손견이 이곳의 승(承)으로 있었으며[5], 이후 서주 자사로 임명된 도겸의 영토가 되었다가 도겸으로부터 서주를 물려받은 유비의 세력하에 귀속되었다. 그 뒤 유비를 배신하고 서주를 강탈한 여포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가 여포가 조조에게 쫓기다 영토를 빼앗기고 마지막으로 이곳에 머무르며 전투를 벌인 끝에 처형된 뒤에는 조조의 관리하에 들어갔다. 이후 원술을 정벌한다는 명분으로 조조의 밑에서 빠져나온 유비가 일시적으로 서주를 수복해 다시 유비의 영토가 되었고, 조조가 유비를 공격할 당시에는 관우가 이곳을 지키며 계속 항전하다 결국 조조에게 투항했다. 그 뒤에는 계속 조조와 그를 이은 위,진의 영토로 있게 되었다.
오늘날의 중국 장쑤성의 쉬저우시 산하 현급시인 피저우시에 해당하는 곳[6]이다. 피저우가 한국 한자음으로는 비주이고 비는 당연히 같은 邳자를 쓴다.
2.6. 신정(新鄭)
정나라의 수도였던 곳이며, 나중에 한나라가 빼았아서 자국의 수도로 삼았다.관도 대전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한데, 당시 원소의 본거지인 기주 업에서 조조의 본거지인 연주 진류로 직행하기 용이한 경로였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행정상 정저우시로 편성되었다.
2.7. 회음
한신의 고향으로도 유명한 곳이다.송나라 때에 정비된 회남동로(淮南東路)의 교통 요충지였다.
현대에는 행정상 화이안시로 편성되었다.
2.8. 기타
- 임치(临淄) : 제나라의 수도였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