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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라이프니츠 Leibniz | |
본명 | 고트프리트 빌헬름 폰 라이프니츠 Gottfried Wilhelm von Leibniz |
출생 | 1646년 7월 1일 |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선제후국 라이프치히 (現 독일 작센 주 라이프치히) | |
사망 | 1716년 11월 14일 (향년 70세) |
신성 로마 제국 하노버 선제후국 하노버 (現 독일 니더작센 주 하노버) | |
직업 | 학자, 사서, 외교관, 법률가, 발명가 |
분야 | 수학, 물리학, 지질학, 의학, 생물학, 수의학, 고생물학, 심리학, 공학, 언어학, 사회학, 형이상학, 윤리학, 경제학, 문헌정보학, 논리학, 역사학, 정치학, 신학, 철학, 미래학 |
학력 | 알테 니콜라이슐레 (졸업, 1655–61) 라이프치히 대학교 (철학 / B.Sc., 1661–62) 라이프치히 대학교 대학원 (철학 / M.Sc., 1662–64) 라이프치히 대학교 대학원 (법학 / M.Sc., 1664–65) 라이프치히 대학교 대학원 (철학 / Ph.D., 1665–66) 알트도르프 대학교 대학원 (법학 / Ph.D., 1666) |
종교 | 개신교(이신론)[1]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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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성 로마 제국의 수학자, 물리학자, 공학자, 철학자, 판사, 외교관, 사서이다.라이프니츠는 수학, 물리학, 철학, 공학, 의학, 정치학, 지질학, 심리학, 도서관학 등 자신이 흥미를 가진 거의 모든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일반적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업적을 세운 인물들은 특정한 한 분야를 중점적으로 뛰어난 것이 대부분이지만 라이프니츠는 모든 분야에서 뛰어났던 인물로[2] 레오나르도 다 빈치, 존 폰 노이만 등과 함께 다중천재(Polymath)의 전형으로 꼽힌다.[3]
아이작 뉴턴과 별개로 미적분을 창시했다. 현대 디지털 컴퓨터의 필수요소인 2진법을 개발하였다. 디지털 컴퓨터 탄생으로부터 300여년 전에 컴퓨터 개발을 시도한 선지자 중 하나였다. 물리학에서 동역학을 고안했다. 지질학과 관련해 지구 안에는 액체상태의 내핵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신비주의적인 중세의학이 철저한 실험과 교차검증을 사용하는 방향으로 변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사서 생활 중 도서 분류 시스템을 개발했다. 프로펠러, 물 펌프, 채광기계, 증기기관, 바닷물 담수화 이론 등을 개발하는 등 공학에서도 다양한 발명을 해냈다.
라이프니츠는 또한 국민보험과 세금개혁을 제안했고 유럽연합의 탄생을 300년 전에 예견했으며 인터넷의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또한 초기 게임 이론과 유사한 이론을 발명하기도 했다. 그가 해낸 발견들 중 다수는 시대 및 언어적 문제로 인해 당시 살아있던 대부분의 인류에게 알려지지 못했고 매우 긴 시간이 흐른 후에야 기록이 발견되었다.[4]
한 편으로 그의 관심사는 주로 형이상학, 신학, 그리고 교회일치운동[5][6]에 집중되어 있었다. 여기에 더해 하술할 족보 연구와 각종 사회 현안에 대한 해결 등으로 인해 절대적으로 시간(그리고 돈)이 부족했음에도 쉬지 않는 연구로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업적을 남긴 것이다.[7]
2. 생애
작센 선제후국의 라이프치히에서 법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릴 적부터 학문적 성취가 독보적이었다. 현대의 한국으로 치면 불과 초등학생 나이에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통달[8]하다시피 했고, 모든 과목에서 완성형의 능력을 보였다. 이미 어릴때부터 천재로서 유명해서, 살던 지역 전체에 소문이 자자했을 정도. 고작 15살이었던 1661년에 라이프치히 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으며, 1663년에는 예나 프리드리히 실러 대학교에서 수학 강의를 들었다.1666년에 라이프치히 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학위를 신청했으나 나이가 어려 거절당하고 뉘른베르크의 알트도르프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대학 측에서 그를 위해 마련한 교수직을 사양하고, 뉘른베르크의 연금술 사회의 비서직으로 일했다. 이것이 그의 첫 직업이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마인츠의 정치인 보이네부르크를 만나 법률고문이 되었다. 이후 항소법원의 배석판사로 승진하여 외교활동을 하였다.
1676년, 브라운슈바이크 공 요한 프리드리히에게 초청되어, 하노버의 궁중고문, 도서관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브라운슈바이크의 벨프 가문 곧 하노버 공가를 쭉 섬겼다. 족보연구를 통해 하노버공이 선제후가 될 수 있게 해주었고 그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하노버공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영국 국왕 조지 1세가 되면서 라이프니츠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뉴턴과 싸운 라이프니츠를 조지 1세가 영국에 데려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3. 업적
3.1. 수학
3.1.1. 위상수학
Der Briefwechsel von Gottfried Wilhelm Leibniz mit Mathematikern. Erster Band. Hrsg. von C. I. Gerhardt. Mit Unterstützung der Königl. Preuss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p. 569-578 참고.3.1.2. 미적분학
가장 유명한 업적은 아이작 뉴턴과 동시대에 미적분 이론을 발명한 것. 라이프니츠가 미적분을 개발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가장 유명한 설은 포도주를 숙성하는 오크통의 부피를 측정하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그런데 단순히 오크통 부피 측정을 위해 만든 것 치고는 완성도가 높았던 탓인지 라이프니츠가 독자적으로 미적분을 발명했다는 것에 대해 의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었다. 결국 누가 미적분을 먼저 발명했는가에 대해 싸움이 벌어졌다. 시기적으로 뉴턴이 1666년쯤 미적분을 발명했고, 라이프니츠의 발명 시점은 1675년이다. 1675년 라이프니츠는 미분의 기호 [math(d)]와 적분의 기호 [math(\int)]를 고안하여 미적분학 문제들을 풀어내었고 이들을 자신의 노트에 기록해 두었다.
라이프니츠는 1676년 10월 런던을 방문하여 수학자 존 콜린스(John Collins)와 서로의 연구를 공유하며 여러 수학적 논의를 나눈다. 그때 라이프니츠는 콜린스로부터 뉴턴이 1669년 작성한 논문, '무한급수의 방정식에 의한 해석'[9]을 받아보게 된다. 이 논문은 유율법을 담고 있으며 출판되지 않은 채로 영국의 수학자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던 논문이었다. 표절의혹을 제기하는 이들은 이 사건을 문제삼기도 하지만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논문을 봤던 시점에는 이미 라이프니츠가 자체적으로 미적분학을 완성시킨 상태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뉴턴의 논문이 큰 참고가 되지 않았을 거라고 추측된다. 시간이 흐르고 뉴턴이 발표를 미루고 있을 때 적극적인 성격의 라이프니츠는 미적분을 정리하여 1684년 독일 학회에 발표한다. 그 후 뉴턴은 1687년에 프린키피아를 출간하며 미적분을 발표하게 된다.
당시 세계 과학을 주름잡는다고 생각했던 영국 학회는 이에 이의를 제기하며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이론을 베꼈다고 독일 학회에 항의하였다. 라이프니츠가 뉴턴의 출판전 논문과 편지를 읽어보았다는 사실을 문제삼은 것이다. 영국 학회의 맹렬한 항의 배경에 대해서 두 가지 설이 있는데, 뉴턴이 자신이 회장으로 있던 영국 왕립학회의 과학자들에게 라이프니츠의 표절 여부를 조사(?)하라고 직접 지시했다는 설과, 뉴턴 밑의 제자들이 영국 학회가 독일 학회에 이의를 제기하라고 자진하여 촉구했다는 설이다. 다만 평소 뉴턴의 권위적이고 괴팍한 성격 때문인지 통설로 받아들여지는 쪽은 전자이다. 결국 나중에 국제 분쟁에서는 영국과 독일의 과학자들 사이의 힘겨루기처럼 커졌는데, 이것이 단순히 누가 이론을 발명했는지 진실을 가리는 것이 아닌 어느 국가가 과학의 선두 주자인가에 초점을 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립학회를 중심으로 뭉쳐 있던 영국 학계와 달리 당시 신성 로마 제국에 소속된 여러 군소 영방국가들로 나눠져 있던 독일 측의 파워는 미진한 편이었다.
오늘날 학자들은 미적분학은 뉴턴이 먼저 생각해냈지만 둘 다 독자적으로 발견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수학적 완성도는 라이프니츠의 미적분이 더 우수하다고 평가된다. 뉴턴은 수학자이기 이전에 물리학자라서 고전 역학을 정리하는데 편리하도록 미적분을 정리했기 때문이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평균변화율의 극한으로 순간변화율, 즉 미분계수를 정의하는 등 뉴턴보다 엄밀한 방식으로 미적분을 고안하고 정리했다. 현재 전 세계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미적분의 기호나 이론은 모두 수학적으로 더 엄밀한 라이프니츠의 체계다.
그리고 교육적 편의성에서도 뉴턴은 라이프니츠에게 뒤쳐졌다. 당시 뉴턴이 만든 미적분의 기호는 오직 뉴턴만 알 수 있는 복잡한 식이었다. 반면 라이프니츠의 논문은 '하나의 변수를 다른 변수에 대해 미분한 값'을 어떤 기호로 어떻게 표현할 것이냐, '변수에 대한 함수란 건 어떻게 표현할 것이냐', '적분기호를 실제 쓸 때 편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등 사람들이 논리적 흐름을 쉽게 따라갈 수 있도록 기술되었다. dy/dx라는 적합한 기호의 틀들을 만들어 내는 데 관심을 두면서 연구를 진행하여 다른 학자들에게 쉽게 이해를 시키기도 하고 인정을 받았으나, 뉴턴은 그냥 미분을 ẏ처럼 위에 점 하나 달랑 찍어서 표현하는 등 미적분을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는 기호와 틀의 보편성, 천재 아닌 사람도 쉽게 이해할 만하게 만드는 것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다. 또한 뉴턴의 성격 자체가 너무 내성적이라[10] 일일이 학자들이 미적분에 대해 궁금해하는 편지를 보내도 아무런 답장이나 대꾸를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뉴턴식 미분 표기는 별로 쓰이지 않고, 뉴턴 본인이 만든 고전역학에서 시간에 대한 미분을 표현할 때나 쓰인다.[11]
3.1.3. 2진법 고안
미적분학에 묻혀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또 한 가지 중요한 업적으로 라이프니츠는 2진법을 고안하였고, 이를 토대로 최초로 사칙연산이 모두 가능한 기계식 계산기[12]를 발명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전산학의 시초가 되는 인물이기도 한 셈.3.2. 논리학
또한 라이프니츠는 현대논리학의 창시자가 될 뻔했다. 그는 수학에서 기호들을 통해 명제들을 나타내고 증명을 하듯이 애매성과 모호성이 제거되고 인간의 사유 구조를 그대로 반영해 모든 학문에서 쓸 수 있는 보편언어(인공언어)의 구성을 계획했고 심지어 200여년 뒤에야 나온 논리학에 대한 아이디어들을 이미 제기했다.[13] 사실상 미적분과 더불어 라이프니츠의 가장 큰 업적. 하지만 그의 작업들은 출판되지 않고 책상 서랍 속에 처박혀 수백 년이 지나서야 발견된다. 만약 그의 논리학에 대한 작업들이 온전히 출판되어 학계에 알려졌다면 논리학의 혁명은 200년쯤 앞당겨졌을지 모른다. 어찌 보면 현대 컴퓨터 이론의 시초인 셈이다.[14]양상논리에서 가능세계의 개념을 최초로 철학에 도입한 철학자이기도 하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신은 이 세계를 가능한 최선의 형태로 창조했으며, 이에 대한 논의에서 가능세계의 개념이 생겨났다.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모든 진리를 수학 법칙처럼 무조건 참이 되는 필연적 진리와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우연적 진리로 나누었는데, 그에 따르면 이 세상은 신에 의해 모두 최상의 완전함이 실현되었으며 따라서 우연적 진리로 보이는 것들도 사실 필연적 진리라고 주장했다.[15] (이를 완전성 원리라 부른다)
3.3. 물리학
뉴턴이 주장한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해 비합리적이며 비현실적이라며 비판하였다. 라이프니츠의 절대공간에 대한 비판은 훗날 에른스트 마흐의 주장과 비슷한 면이 있다. 뉴턴과 달리 시간과 공간을 상대적인 개념으로 봤다는 점에서 상대성이론에 대한 예측을 남들보다 더 빨리 한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상대성이론은 시간이 흐르는 속력에 대한 것이고 라이프니츠가 한 주장은 시간이란 개념 자체에 대한 것으로 다르다.라이프니츠는 힘을 근원력과 파생력으로 나누었는데, 근원력은 단자의 목적이고, 파생력은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16] 이 파생력이 우리가 흔히 느끼는 힘이며, 코나투스라고 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3.4. 철학
라이프니츠는 르네 데카르트와 바뤼흐 스피노자와 함께 대표적인 근대 합리론(합리주의, rationalism) 철학자로 꼽힌다. 그의 중요한 업적은 최소 단위 입자인 모나드를 기초로 한 단자론(monadologie)을 제시한 것이다. 단자론의 주요 내용은 먼저 우주의 근본이 되는 실체인 단자(모나드)가 무엇이며 어떤 특징을 지니는지를 설명하고, 이 단자들 중에 이성을 가진 단자인 정신이 가지고 있는 진리와 인식의 원리를 규명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였다.단자론에 따르면 모든 물체는 부분이 없는 극도로 단순한 실체인 모나드들의 결합체이다. 마치 원자와 비슷한 개념처럼 보이지만, 원자와는 다르게 개별 모나드들은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무관한 완전히 자발적으로 스스로의 고유한 상태, 즉 지각과 욕구를 가진다. 지각은 모나드의 일시적인 상태고, 욕구는 한 지각에서 다른 지각으로 이행하는 내부적인 힘이다. 이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모나드는 물질적 실체가 아닌 정신적 실체다. 우리가 보는 물질적 세계는 모나드들이 보는 현상일 뿐이다.
각 모나드들의 자발적인 활동은 신의 전능한 힘에 의해 조화된다. 경험적으로 보이는 인과관계가 작용하는 물질세계는 사실 관념이지만, 모나드들의 관념은 모두 조화되어 있기에 그렇게 생각해도 별 상관없다. 즉, 모나드들은 자발적이라 인과관계나 상호작용 같은 건 없지만, 신에 의해 서로서로 맞아 떨어지게 조정되어 있으므로 일상적인 생각에 부합하는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충족이유율(충분근거율)의 개념을 정립하기도 했으며, 이는 훗날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에게 영향을 끼친다.
3.5. 신학
신학자로서의 주요 업적은 변신론에 관한 부분인데, 이는 악이 존재하기 때문에 신이 완벽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신이 왜 인간을 완벽하게 만들지 않고 악한 존재로 만들었냐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결국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고 그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고 욕망대로 선택하게 되었고 결국 이러한 인간의 선택에 악은 부가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것이며 악이 단순히 나쁜 것만이 아니라 뒤에 따라오는 행복과 선을 조금 더 극대화시켜주는 역할까지 하며 세계를 최선의 형태로 만든다. 이를테면 악은 음악에 있어서 순간의 불협화음적 요소로써 오히려 음악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존재다.유한한 존재에게는 아무리 선을 행하려 한다 해도 그 선 때문에 누군가 피해 보거나 고통 받는 악이 뒤따르게 되며 인간은 악을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의지가 있는 세상이 오히려 의지가 없는 세상보다 최선의 세상이며, 결과적으로 악도 하나의 선을 실행할 수 있는 방편이며 결국 선이 존재하기에 악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악은 결국 신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주장 때문에 볼테르가 라이프니츠를 싫어했다고 한다. 이 사람의 낙관주의를 디스하기 위해서 쓴 소설이 다름 아닌 캉디드다.
3.6. 인터넷에 대한 아이디어 제시
또한 학문의 발전을 위한 방법으로서 전 유럽이 공유하는 경험적 자료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제시했으며, 이에 따른 부차적 효과로 유럽의 정치적, 종교적 단결 또한 기대하였다. 이를 위한 구체적 도구로써 라이프니츠는 세계 최초로 인공어와 컴퓨터의 개념을 떠올렸다. 단순히 말만 한 게 아니라 그는 실제로 'Stepped Reckoner'라는 계산기를 발명했다. 20세기에 인공어, 컴퓨터가 실제로 등장했음은 물론이요 인터넷의 발명으로 전세계가 공유하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가 형성되었고 이로 인해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어 가고 있으니, 라이프니츠의 사상은 무려 300년이나 앞서갔다고 할 수 있겠다.4. 평가
논리학을 형이상학을 여는 열쇠로 사용한 철학자의 가장 좋은 예.
버트런드 러셀
버트런드 러셀
5. 여담
- 2019년에 메가스터디의 0원 메가패스 광고에 출연(?)했다. 엄마가 수학공부를 하면서 미적분을 풀 때 "이런 미친 미적분! 도대체 어떤 놈이 만든 거야!"라고 짜증을 내는데, 그때 선도부 학생 2명이 진짜로 라이프니츠[18]를 끌고 오자 분노한 엄마[19]를 비롯한 다른 학생들한테 다굴을 당한다. #[20][21]
6. 외부 링크
- 한국어
[1] 라이프니츠는 신이 최초에 무로부터 모나드적 세계 질료를 창조한 다음, 그 모나드들이 일종의 "예정된 조화"를 형성하게끔 질서를 부여했다고 주장한다. 즉, 신은 우주 사건의 진행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단 한 번의 직접적인 개입만으로 그쳤다는 것이다.[2] 심지어 라이프니츠는 음악에도 재능이 있어 수학과 음악을 접목한 '음악이론'을 발표하였다.[3] 그러나 그는 다빈치처럼 자신 주변의 모든 분야에서 경험적으로 접근하는 인물은 아니었고, 폰 노이만처럼 비전공 분야에서도 전공자를 웃도는 놀라운 지식량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수학에 대해 관심 있던 그는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다소 아마추어적이었고, 그의 교육을 받아 비로소 미적분에 관한 그의 유명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다만 그는 평생에 걸쳐 구할 수 있는 모든 최신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했으며, 유럽의 명사들과 끊임없이 교류하는 부지런하고 정열적인 모습을 보였다.[4] 그는 살아있었을 때는 아이작 뉴턴만큼 유명한 인물이었으나, 말년부터는 거의 잊혀지고 무덤조차 50년 여동안 방치되었으나, 19세기경부터 재평가를 받아 다시 뉴턴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천재로 평가받고 있다.[5] 그는 왕과 귀족들로부터 금전적 보상을 댓가로 여러차례 가톨릭으로 개종을 권유받지만 끝까지 거부하며 개신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켰다.[6] 한 편으로 자신이 가톨릭으로 태어났다면 가톨릭 입장에서 교회일치운동을 벌였을 것이라고 밝히는 등 교회 통합에 대한 그의 태도는 상당히 중립적인 면이 있다[7] 라이프니츠는 항상 자기 자신에게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꼈으나 그렇다고 포기하는 법은 없었다[8] 그가 성인이 되어 밝힌 바로는 어릴때부터 매우 무시무시한 방식으로 공부를 했는데, 기초문법이나 어휘 공부를 한 뒤에, 그 두꺼운 라틴어나 그리스어 고전을 읽기 시작하면 중간에 모르는 문법이나 어휘변화가 나와도 억지로 끝까지 다 읽은 뒤, 아예 아직 안 배워서 모르는 문법이나 어휘 부분에 대해 간단히 일부만 공부하고, 바로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고 한다. 이걸 최소 10회를 반복해서 머릿속에 책 내용이 대략 다 들어올 정도가 되면 눈감고 통으로 책 내용을 다 외워보았다고 한다. 그래서 잘 안되는 부분만 다시 읽었다. 이를 반복하다보니 결국 책의 모든 내용을 암기했는데, 한번 이것에 자신을 붙이니 이렇게 자신이 접한 라틴어와 그리스어 책들을 죄다 통째로 외워버렸다고 한다. 이 미친 암기 방식을 한국나이 9–10살때 이미 완성한 것이니 가히 신급 천재였다. 문제는 이 취미가 성인이 된 뒤에도 이어져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등의 유럽어들도 이렇게 공부했던 것인데, 결국 거의 10개 국어를 완벽하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여러 학문연구에서 참고자료로 독일계 자료가 아니면 항상 독일어 번역서를 안 보고, 그게 영국 것이든 프랑스 것이든 원서로만 읽었는데 거의 원어민 속도로 읽었다고 한다. 그가 뉴턴과 편지로 대화할때도 영어로만 썼다.[9] De analysi per aequationes numero terminorum infinitas[10] 오죽하면 뉴턴을 아스퍼거 증후군으로 모는 낭설도 꽤 널리 퍼졌을 정도로.[11]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이것이 뉴턴의 미적분이 완성도가 낮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라그랑주 역학, 해밀턴 역학에서는 운동량, 속도도의 시간 미분을 d/dt 형태로 풀어서 쓰면 식이 너무 지저분해져서 이쪽은 점을 찍는 표현이 관례이다.[12] 최초의 계산기는 블레즈 파스칼이 만들었지만 이 초기형은 덧뺄셈만 할 수 있었다.[13] 박병철, 『쉽게 읽는 언어철학』, 서광사, 2009, 61쪽.[14] 심지어 라이프니츠는 컴퓨터와 인터넷의 기초 개념을 제시하고 스스로 계산기를 발명하기까지 했다.[15] 출처: 박병철, 『쉽게 읽는 언어철학』, 서광사, 2009, 134쪽.[16] 출처: 홍성욱 외 17인, 『과학철학』, 창비, 2011, 1부[17] 실제로 라이프니츠는 먹고 살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귀족 족보학 연구에 쏟아야만 했다. 그가 이룬 각종 수학, 물리학, 공학적 업적들은 대부분 여가시간 중 취미로 발명한 것이다.[18] 자막으로 미적분을 최초로 발표한 사람으로 소개된다. 깨알같이 고증을 지켜 독일어로 "Es tut mir leid."(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는 게 개그 포인트.[19] "이딴 미적분을 왜 만들어서 우릴 괴롭히는 거야! 왜! 왜!!!"[20] 물론 우스갯소리를 광고 요소로 채용한 수준이고, 오히려 라이프니츠가 미적분학을 정리해냈기 때문에 현대의 수많은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고 대다수의 시민들이 농업 등의 생산 활동이 아닌 공부에 집중할 기회가 생긴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이런 업적이 없었다면 애초에 귀족이 아닌 일반인들은 공부에 발을 들일 기회조차 없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21] 참고로 이 광고의 스토리를 설명하자면, 딸이 시험 성적이 제대로 안 나오자(이상한 모양의 조각상을 들고 오자) 엄마가 "성적이 왜 이 모양이니? 내가 지금 당장 공부해도, 너보단 잘하겠다!"라고 야단치는데, 엄마가 교실로 순간이동해서 학생들 사이에 앉아있는 장면이 연출되며 딸이 엄마에게 "앞으로 수능까지 1년 남았으니까 어디 한 번 잘해보자고."라며 역관광하고, 그렇게 엄마가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수능 공부를 하며 고군분투 한다는 설정이다. 이 광고는 두 번째 에피소드.광고 전편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