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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에티엔 플랑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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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74대 총리
피에르에티엔 플랑댕
Pierre-Étienne Flandin
파일:Pierre-Étienne Flandin.jpg
<colbgcolor=#fff,#000092><colcolor=#000092,#fff> 출생 1889년 4월 12일
프랑스 파리
사망 1958년 6월 13일 (향년 69세)
프랑스 생장카프페라
재임기간 제74대 총리
1934년 11월 8일 ~ 1935년 6월 1일
직업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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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000092><colcolor=#000092,#fff> 부모 父: 에티엔 플랑댕
母: 마리레오니폴린 리비에르
정당 민주동맹
배우자 마르그리트 바르비에
학력 파리 대학교 (법학 / 박사) }}}}}}}}}

1. 개요2. 생애

1. 개요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치인. 프랑스의 제74대 총리를 역임하였으며, 비시 프랑스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2. 생애

1889년 욘의 상원의원을 지낸 에티엔 플랑댕과 마리레오니폴린 리비에르(Marie-Léonie-Pauline Ribière) 사이에서 태어났다.

파리 17구에 있는 리세 카르노를 졸업한 뒤 정치학 자유학교와 파리 대학교를 거쳤으며 1914년 파리 대학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고 변호사가 되었다. 이후 알렉상드르 밀랑의 보좌관으로 정계에 입문했으며 욘에서 대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시 25세의 나이로 당선되었다.

1912년 항공기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한 플랑댕은 1914년 비행단에 복무했다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육군부 산하 항공국장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항공행정 전문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1919년과 1924년에 재선에 성공했다. 플랑댕은 여성의 참정권을 의회에 상정하기도 했지만 당시 상원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또한 1928년 대의원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앙드레 타르디외에 의해 내각에 입성했으며 1930년 타르디외 2기 내각의 상공부 장관, 1932년 라발 내각의 재무장관, 타르디외 3기 내각의 재무장관을 역임했다. 재무장관으로 재임했을 때 금의 유출을 막으며 금 보유고를 관리했다.

1914년 민주동맹에 입당했던 플랑댕은 1933년 당수로 선출되었으며 당시 우파의 결집을 주장했던 폴 레노, 앙드레 타르디외와 달리 급진당과의 연정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후 스타비스키 사건과 1934년 프랑스 폭동의 여파로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물러난 뒤 가스통 두메르그가 정계에 복귀하자 2기 내각에서 공공사업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두메르그 자신이 야심차게 제안했던 1875년 헌법의 개정안이 의회에서 좌절되고 외무장관이었던 루이 바르투와 알렉산다르 1세의 암살 사건으로 인해 두메르그는 건강이 쇠약해져서 11월 8일 사임했고 플랑댕은 두메르그의 후임 총리가 되어 1935년 6월 1일까지 재임했다.

총리에서 물러난 뒤 라발의 4기 내각에서 국무차관으로 재임했으며 1936년 1월 24일 사로 2기 내각에서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같은 해 3월 7일 나치 독일아돌프 히틀러가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전격적으로 독일 국방군을 주둔시켜 재무장(라인란트 재무장)을 선포하자 플랑댕은 외교적 위기에 직면했다. 플랑댕은 알베르 사로 총리와 함께 라인란트 재무장에 대해 강력하게 규탄했지만 당시 모리스 가믈랭의 미온적인 반응으로 인해 결국 라인란트 재무장을 용인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36년 프랑스 대의원 선거에서 인민전선이 집권하자 플랑댕은 내각을 떠나 야당의 수장이 되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돔시쉬르퀴르에 정착했다가 1940년 프랑스 침공 이후 비시의 상하원 의원들의 회의를 중재했다. 같은 해 11월 필리프 페탱에 의해 비시로 소환된 플랑댕은 12월 피에르 라발의 뒤를 이어 비시 정부의 수반이 되었고 다음해 2월 9일에 사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인 1948년 정계에 복귀했고 1952년과 1955년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며 1958년 6월 13일에 사망했다.